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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두만강엔 푸른 물이 없다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은 푸르지 않고, 이미륵의 압록강은 오늘도 말없이 한恨)을 껴안고 흐른다. 한반도에서 가장 긴 압록강 2000리, 두 번째로 긴 두만강 1500리를 지난 일주일동안 답사한 소회의 편린이다.


 “나는 죄인처럼 숙으리고/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그러나/나는 안다/다른 한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 내리고 있음을.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오늘밤도/너의 가슴을 밟는 듯 슬픔이 목마르고/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기리 마음의 눈을 덮어줄/검은 날개는 없나냐/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조 앉은/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함경북도 경성 출신의 민족시인 이용악이 읊은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의 옛 정서는 남아 있으되 기대했던 푸른 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두만강 상류의 이름난 무산 철광산에서 나오는 검은 폐수를 거르지 않고 끝없이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무산(茂山)은 이름 그대로 무성한 나무들이 있는 산이었지만, 오늘의 무산은 헐벗은 민둥산인 무산(無山)에 불과하다. 탈북자를 주제로 한 영화 ‘무산 일기’는 슬프게도 옳았다. 125번으로 시작하는 주민등록번호를 받고 남한사람으로 살아가는 탈북자 승철의 고향 무산(茂山)은 무산(無山)이 되고 말았다. 영화에선 남한사람이 된 승철의 삶도 무산(無産)으로 무산되며 스러져가는 탈북자의 현실을 투영한다.

                                                            

                                             <회색빛을 띤 두만강물>


 두만강은 중류의 회령군에서 하류의 아오지에 걸쳐 갈탄산지까지 있어 북한과 중국, 러시아 3국의 변경지대인 중국 방천의 하류에서조차 동해바다로 흘러드는 푸른 물은 볼 수 없었다. 두만강 물은 이제 최상류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공업용수로도 쓰기 어려운 5급수라고 한다. 오염된 두만강물을 농업용수로 오래 쓰면 땅이 굳어져 곡식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고도 한다. 주변의 야생 동·식물도 줄어드는 추세라는 얘기도 들린다. 국경조약상 두만강과 압록강을 공동관리하는 중국 측도 어쩔 수 없이 묵인하는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백두산이 기침하면 두만강은 감기에 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성질이 급한 강으로 꼽히는 게 두만강이다. 백두산에서 큰 비가 내리면 금방 두만강이 넘쳐 난다. 두만강변에서 재배하던 옥수수, 콩 같은 곡식이 홍수 때문에 둥둥 떠내려가 콩 두, 넘칠 만자를 써 두만강이 되었다는 설이 전해온다.

 중국 측이 설치한 철조망 옆에 한국어와 중국어로 함께 쓴 ‘국경법규를 준수하면 영광스럽다’는 간판이 탈북자에 대한 은근한 경고로 보인다. 중국은 최근 몇 년 사이에 탈북자를 막기 위해 두만강·압록강 전역에 걸쳐 철조망을 설치했다. 두만강 최하류 방천지역에서는 탈북자를 수감하는 3층짜리 건물 도문수용소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압록강 건너 보이는 북한 뙈기밭>

 

 길디긴 압록강 바로 넘어 보이는 뙈기밭은 북한의 식량난을 웅변하는 상징물이다. 깎아지른 듯한 산비탈에도 어김없이 뙈기밭은 일궈 놓았다. 밭작물을 심어놓은 산비탈은 집중호우가 내리면 금방이라도 산사태로 무너져 내릴 것처럼 아찔하다. 보기엔 경이롭지만, 북한 주민들의 궁벽한 삶을 짐작하고 남게 한다. 뙈기밭에는 봄엔 보리를 주로 심고 여름엔 배추를 심어 가을에 수확한다고 한다. 옥수수는 익기도 전에 따서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그나마 옥수수도 중국 것에 비해 작다. 거름을 주지 못하고 연작을 해서 땅기운이 다한 탓이다. 하나같이 북한에 인도적인 식량지원이 절실함을 방증하는 풍경이다.

 가슴 아픈 현실은 국경 마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산촌마을이 강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지금도 석유 같은 걸로 호롱불을 밝히고 산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불현듯 ‘밤은 두만강보다 길다’는 북한 속담이 떠올랐다. 밤을 지새우기가 얼마나 지루하고 어려울까. 민가의 상당부분은 너와집을 떠올릴 만큼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이곳에 북한의 외부 민간인들이 오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국가에서 손을 놓아버린 곳이다. 국가 보급물자가 거의 없어 군인들도 사실상 민간인들과 함께 먹을거리를 구해 생활하는 곳이란다. 북한쪽의 황량한 산마을과 문명의 혜택을 잔뜩 누리기 시작한 중국 땅은 너무나 대조를 이뤘다. 일행 가운데 압록강을 넘어 탈북한 이의 생생하고 가감 없는 설명이 모두의 눈시울을 붉게 했다. 이 슬픈 행운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백두산에서 가까운 두만강 상류의 양강도 대홍단군에는 국영농장이 고원지대에 펼쳐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개마고원과 같은 형태의 지형이다. 바람이 너무 세 방풍림까지 조성해 놓고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감자는 곧 쌀이다’라고 언명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생산하는 감자가 더욱 유명해졌다고 동행했던 탈북자가 설명해 주었다. 북한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곳 가운데 하나인 여기에 1999년 제대군인 1000명이 강제로 정착하게 됐다는 뉴스가 문득 떠올랐다.

 대홍단군은 북한의 전통명주 들쭉술의 원료인 천연 들쭉의 주생산지로 유명하다. 블루베리과에 속하는 들쭉 수확기엔 초등학교 고학년생들도 이곳에 파견돼 한 달반 정도 일손을 돕는다고 한다.

 백두산 밀림 속 두만강 발원지 부근에는 ‘김일성 낚시터’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김일성 주석이 1939년 항일운동 당시 이따금 이곳에서 산천어 낚시를 즐겼다는 개울가의 조그마한 바위가 그것이다. ‘무포 낚시터’로도 불리는 이곳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1972년 낚시질을 하면서 주체사상 이론을 구상했다고 북한매체들이 선전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수비대가 3m 정도 떨어진 채 경계를 서고 있다.

 단둥과 가까운 압록강 하류의 북한 땅인 어적도와 구리도 사이를 유람선으로 돌아보는 감회는 각별하다. 강은 북한과 중국이 공동관리하지만 강 속에 있는 섬은 북한 영토여서, 허가를 받지 않은 채 북한 속으로 들어가 보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압록강 하류에 이를 무렵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버스 안에서 김광석의 ‘광야에서’를 선창하자 모든 이들이 가슴 뭉클하게 따라 불렀다. ‘찢기는 가슴안고 사라졌던 이 땅의 피울음 있다/부둥킨 두 팔에 솟아나는 하얀 옷의 핏줄기 있다/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우리 어찌 가난하리오/우리 어찌 주저하리오/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움켜쥔 뜨거운 흙이여’

 백두산 ‘천지’나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만주벌판에서 노래와 만세를 부르거나 펼침막(플래카드)을 앞에 놓고 기념촬영하는 일은 중국 공안이 철저하게 감시하는 금지행위다. 중국의 과잉반응도 문제이지만, 지난날 한국의 한건주의 정치인들과 맹목적인 애국자들이 자충수를 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 모두가 동북공정과 맞물려 있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칼럼에 분량을 늘려 보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