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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 민주주의 퇴보 막아라, 저항하라

입력 : 2007-08-24 15:50:40

▲직접 행동…에이프릴 카터|교양인

‘복잡한 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잘 모르면서 나서면 일을 망치는 법이야. 하긴 직접 할 시간도 없지. 그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다 모일 수도 없으며, 그래 봐야 논란이 길어져 뭘 하나 결정하기도 어렵고….’ 대의민주주의가 등장한 배경의 하나다. 하지만 국민의 대변인으로 뽑아준 정치적 대리인이나 공복(公僕)이라는 사람들이 주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기 십상이다. 자신들의 뜻을 잘 받들 걸로 믿은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일이 다반사다. 게다가 뇌물을 받아먹고 불필요한 외유나 즐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부도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지 숨기기에 급급할 때가 많고, 옆길로 새는 일도 잦다. 대의민주주의의 위기가 운위되는 까닭이다.

사실 대의민주주의의 결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모든 나라, 전 지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갖가지 새로운 민주주의 이론들이 등장한다. 참여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 신직접민주주의, 전자민주주의, 신공화주의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직접행동 민주주의도 그 중 하나다.

에이프릴 카터가 쓴 ‘직접행동(원제 Direct Action and Democracy Today)’은 직접행동 민주주의의 특장을 역사적이고 분석적이며 종합적으로 풀어낸 민주주의 이론서다. 민주주의와 현대 정치이론의 세계적 권위자인 카터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에 민주주의의 퇴보를 막을 수 있는 마지막 대안으로 직접행동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수많은 ‘작은 사람들’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민주적 안전장치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직접행동이 대의민주주의에서 표출할 수 있는 저항의 필수요소가 됐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옥스퍼드대 등에서 정치학 교수를 지낸 그는 민주주의의 미래가 직접행동에 달렸다고 단언할 정도다.

저자의 견해를 따라가면 때론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느낌이 와 닿을 수 있다. 기득권층이나 일부 엘리트 계층 입장에서는 법과 질서보다 사회정의에 방점을 찍는 그의 진보적 시각에 동의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는 비폭력 사회운동을 지지하면서도 직접행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본질적이고 사소한 폭력행위는 문제삼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언론이 시위 도중 사용된 폭력의 규모와 심각성을 자주 과장해서 보도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원유시추시설 투기에 반대하며 보트시위를 벌이고 있는 그린피스 대원들.


그러고 보면 직접행동이 도리어 민주주의를 위협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저자는 대답을 내놓는다. 다른 아이디어들이 그렇듯이 직접행동이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하는 혁명적 방안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빈 곳을 메워주는 보완재(補完財)라는 점을 명백히 전제해 둔다.

직접행동이 급증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뿐만 아니라 평등주의와 같은 민주적 신념과 가치가 확산됐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행동의 장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정치적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자신감을 심어준다. 직접행동을 통해 의사결정에 필요한 정치기술을 익히고, 집회에서 연설을 하며, 언론을 다루고, 의사결정자에게 로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저자는 자유민주주의가 일부 특권적 사회집단에 유리하게 작용하며, 여기서 소외된 빈곤계층, 여성, 소수민족, 원주민, 노약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난민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직접행동에 호소하고 있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 책에서는 권위주의 정권이나 독재자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주로 활용돼온 직접행동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지구화(세계화) 시대에 어떻게 정당화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는 1차적으로 사회정의를 향한 절규라고 규정하고, 초국적 운동이 신자유주의 정책 전반에 광범위하게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초기의 사회운동을 대변하던 각종 운동 조직들이 현재의 전 지구적 경제체제에 도전하기 위해 단결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가장 중요한 경향성으로 주목한다.

핵미사일배치 반대시위를 하고 있는 여성운동가들.


책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대안이 과연 어느 정도나 적실한가를 핵심적인 질문으로 던진다. 자본주의 경제를 완전히 대체하려는 급진 사회주의 전략은 현실성이 떨어지고, 20세기 국민국가형 사회민주주의 역시 21세기의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많은 사회운동가들과 사회분석가들이 전 지구적 관점을 크게 강조하는 수정 사회민주주의에 희망을 걸고 있는 듯하다. 수정 사회민주주의는 지배적인 국제경제기구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를 추진하고, 새롭게 개혁된 국제기구에 상당한 규제 권한을 부여하는 다국적기업 통제장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책은 자유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사회주의, 세계주의, 직접민주주의 등 여러 이론들과 직접행동과의 상관관계도 전문학자들의 견해와 비교해 가며 세밀하게 분석한다. 또 직접행동에 관한 역사와 전 세계적인 사례가 망라돼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예화가 풍부하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 가운데 하나다.

직접행동 민주주의 이론서로는 사실상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6·10 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87년 체제’ 극복에 대한 논의가 일부에서나마 진행되는 시기에 유용한 지침서의 하나가 될 것 같다. 이 책의 뼈대에 공감하는 독자는 물론 급진적인 행태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 모두가 읽어 볼 만하다. 오직 ‘경제 살리기’만 시대정신으로 떠받드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조효제 옮김. 2만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