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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월드컵과 축구의 정치학

축구소설이 아니면서도 이처럼 풍성하고 격조 높은 축구지식을 담은 소설이 있는지 들어본 적이 없다. 박현욱의 논쟁적 장편소설 <아내가 결혼했다> 말이다.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가 소설의 주제지만 축구로 시작해 축구로 끝난다. 제목부터 발칙한 <아내가 결혼했다>는 축구라면 질색하는 사람들조차 축구의 마력에 푹 빠지게 하지 않을까 싶다.
축구와 연애, 결혼, 인생의 공통점을 고비마다 절묘하게 연결고리 짓는 작가의 전개방식이 놀랍다. 책의 들머리를 장식하는, ‘인생 그 자체가 축구장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영국 시인 월터 스콧의 말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작가는 축구의 정치·사회학을 종종 유명인사들의 말로 대변한다. 작가 조지 오웰이 축구를 일컬어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했다면, 토털 사커의 창시자이자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리누스 미헬스는 아예 “축구는 전쟁”이라고 한술 더 뜬다.
하긴 혁명의 풍운아 체 게바라도 “축구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혁명의 무기”라고 선언했다. 반대로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축구경기가 열리는 일요일에 혁명을 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연례 경기, '엘 클라시코'는
마드리드와 카탈루냐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축구의 정치·사회학에 관해서는 미국 저널리스트 프랭클린 포어가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말글빛냄)에서 흥미롭게 파고든다. 포어는 축구야말로 어느 경제기구보다 앞서서 세계화를 이끈 주역이었다고 단정한다.

지은이는 명문 프로축구단 FC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의 민족주의를 천착하고 있다. 그는 바르샤(FC 바르셀로나의 애칭·현지 발음은 바르까)의 모자와 유니폼을 입고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할 정도로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결혼했다>의 폴리아모리스트 여주인공도 바르샤의 ‘광팬’이다.

고상한 문화와 민주적 운영을 자랑하는 바르샤 구단의 정책을 보면 좋아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 ‘클럽 그 이상이 되자’는 모토를 가진 바르샤는 세상의 모든 프로축구단 가운데 유일하게 유니폼 앞쪽에 광고로 장식하지 않고 있는 전통을 자긍심의 하나로 삼는다. 바르샤의 서포터스도 낭만을 우승보다 훨씬 소중하게 여긴다.

저자는 이탈리아 최고 명문 구단인 유벤투스와 라이벌 AC 밀란에 얽힌 정치역학을 파헤친다. “이탈리아 총리의 임무는 아넬리 가계(유벤투스 구단주)의 문고리를 닦는 일”이라는 풍자가 냉소적인 상징성을 띤다.
유벤투스는 경이적인 우승횟수를 기록했지만 결승전 가운데 상당수가 심판의 의심스러운 판정에 힘입어 승리를 따낸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새로운 경쟁자 AC 밀란이 과두재벌이자 총리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정치적 배경이라는 건 비밀이 아니다. 좌파 지식인들이 인터 밀란 팬이 되는 이유를 자연스레 알 것 같다.

세계 최강인 브라질이 세계적 스타들을 자국 리그에 잡아두지 못하는 건 상류층인 ‘카르톨라스’가 만든 정치 부패가 브라질 축구를 위축시켰기 때문이라고 꼬집는다.
중동 축구의 맹주 이란에서는 축구가 자유화의 동력이다. 남장을 하고 축구경기를 보는 여성 팬들 가운데는 성직자의 딸도 있다고 한다. 축구 혁명은 하나의 사건 이상이며, 중동의 미래를 여는 열쇠를 쥐고 있다고 저자는 내다본다.

기성용 선수의 소속 구단인 스코틀랜드의 셀틱과 글래스고 레인저스의 경기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끝나지 않은 싸움이자, 적(敵) 이상의 적이다. 상대팀을 응원했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상대팀 티셔츠를 입었다가 이웃에게 살해당한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누군가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축구도 거칠어진다고 했다. 지구촌의 가장 매혹적인 스포츠 축제인 월드컵 축구대회도 그 이데올로기와 정치학을 알고 보면 격이 다른 관전자가 될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