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너무 느리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겐 너무 빠르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겐 너무 길고, 기뻐하는 사람들에겐 너무 짧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영원하다.” 미국 성직자이자 교육철학자 헨리 반 다이크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얘기한 ‘시간의 상대성원리’를 빌려 이처럼 절묘하게 말했습니다. 또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떠오릅니다.
이채 시인의 ‘새해엔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란 시가 새해맞이 인사로 안성맞춤일 듯합니다.
당신이 아무리 큰 나무라 해도
한그루의 나무로는 산을 이룰 수 없으며
당신이 아무리 찬란한 별이라 해도
별 하나로는 하늘을 채울 수 없습니다
홀로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
하루하루 참으로 어려운 이때
있어야 나눌 수 있는 게 물질이라면
없어도 나눌 수 있는 것은 마음이겠지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나눌 것이 더 많음을 깨달아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축복의 한해 희망의 한해를 열어갑시다
마음마다 화평이 깃들고
집집마다 웃음이 가득하여
사람마다 만복이 오는 소리
새해엔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책의 종결자는 저자가 아니라 독자라고들 합니다. 어떤 책이든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는 뜻이지요. 새해에 읽어봄직한 책 몇 권을 골라보았습니다. 영국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는 “사색 없는 독서는 소화되지 않는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저 책을 읽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경구이지요.
새해를 맞아 누군가가 띄운 재미있는 구절의 마지막 부분만 바꿔 봅니다. 나이는 뺄셈, 복은 덧셈, 돈은 곱셈, 웃음은 나눗셈, 건강은 지키셈. 새해 책 많이 읽으세요!!!
■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다우베 드라이스마(에코리브르)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한 해의 끝자락이나 새해 벽두에 서면 누구나 “시간은 인간이 소비하는 것 중에 가장 비싼 것”이라고 했던 소요학파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의 말을 절감할 것이다.
해서 사람들은 쏜살같은 시간에 관해 한마디씩 남겼다. “시간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다”(에센 바흐), “시간을 최악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부족하다고 늘 불평하는 데 일인자다.”(장 드 라 브뤼에르)
시간을 낭비 없이 가장 효율적으로 썼다고 알려진 러시아 곤충분류학자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류비셰프라면 시간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듯하다. 주어진 모든 시간을 단 1분도 빠뜨리지 않고 시간통계를 기록한 노트를 남겼다니 징그러울 정도다. 그에게 문제는 시간의 양이 아니라 질이었다. 나쁜 시간, 빈 시간, 필요 없는 시간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게 류비셰프의 지론이었다. ‘시간을 정복한 남자’란 별명이 아깝지 않은 그다.
흔히 20대에는 시간이 시속 20㎞로 달리고, 40대에는 40㎞로 흐르며, 60대가 되면 60㎞로 달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폴 자네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 어떤 시간의 길이에 대한 느낌은 그 사람의 삶의 길이와 밀접하게 연관된다. 열 살짜리 아이는 1년을 인생의 10분의 1로 느끼고, 쉰 살의 남자는 50분의 1로 느낀다고 한다.”
네덜란드 심리학자 다우베 드라이스마는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에코리브르)에서 이 의문의 수수께끼를 풀어준다.
‘기억은 마음 내키는 곳에 드러눕는 개와 같다’는 멋진 표현으로 책을 여는 드라이스마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을 세 가지 현상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망원경 효과’다. 망원경으로 물체를 볼 때 실제 물체와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지는 것처럼 과거를 기억할 때 일어났던 사건의 시기보다 더 나중의 일로 여겨지는 현상이다. 현재와 가까운 일처럼 인식하는 효과로 인해 ‘시간 축약’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회상 효과’다. 노인들의 기억을 테스트할 때 정상적인 망각곡선에서 20대 전후 부분이 돌출되는 효과다. ‘내가 처음 ○○했을 때’처럼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기억의 표지’가 많은 부분이 기억에 오래 남으며 중년 이후에는 이런 표지들이 점차 감소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느려지는 ‘생리시계’다. 미국 신경학자 피터 맹건은 나이에 따라 시간에 대한 감지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9~24세, 45~50세, 60~70세 연령대별로 3분을 마음속으로 헤아리게 했다. 20세 전후의 젊은이들은 3분을 3초 이내에서 정확히 알아맞혔지만 중년층은 3분16초, 60세 이상은 3분40초를 3분이라고 말했다. 나이가 들수록 도파민 분비가 줄어 중뇌에 자리한 인체시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노벨의학상을 받은 알렉시스 카렐은 시간을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는 강물에 비유해 설명한다. “시계에 표시되는 시간은 계곡을 흐르는 강물처럼 일정한 속도로 흐른다. 인생의 초입에 서 있는 사람은 강물보다 빠른 속도로 강둑을 달릴 수 있다. 중년에 이르면 속도가 조금 느려지기는 하지만, 아직 강물과 보조를 맞출 수 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몸이 지쳐버리면 강물의 속도보다 뒤처지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강둑에 드러누워 버리지만 강물은 한결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을 조금이라도 길게 하는 방법은 없는 걸까. 지은이는 프랑스 철학자 장 마리 귀요의 말을 빌려 제언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로 시간을 채워라. 신나게 여행을 다녀오거나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 한층 젊게 살아라.” 너무 쉽고 평범한가.
■ 줌: 행복한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방식 /메리 제인 라이언(다우)
과부의 두 렙돈과 빈자일등(貧者一燈). 신분을 밝히길 거부한 60대 할머니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연세대에 찾아와 1억 원을 장학금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단상의 편린이다.
예수가 부자들의 많은 돈보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더 귀하게 여겼다는 마가복음의 ‘말씀’과 부자의 만 등보다 가난한 사람의 한 등이 낫다는 현우경(賢愚經)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의 ‘법언’은 맥을 같이 한다. 두 일화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해석도 있긴 하지만 가난한 이들의 작은 정성이 한결 값지다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엄밀하게 말하면 60대 할머니가 기부한 돈은 ‘과부의 두 렙돈’이나 ‘빈자일등’에 비유할 수 없을 만큼 거액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뜻 깊은 기부자들은 대개 불우한 이웃에 속하는 부류임을 재확인해 주는 일임에 틀림없다. 10년 동안 수입의 대부분인 40여억 원을 쾌척하고 정작 자신은 월세 방에 사는 가수 김장훈의 이야기도 차원이 약간은 다르지만 큰 뜻은 마찬가지다. 끝내 익명을 고집한 할머니의 기부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마태복음 구절을 실천한 것이기도 하다.
‘베풂의 마법사’란 별명을 얻은 메리 제인 라이언의 저서 ‘줌: 행복한 사람들의 또 다른 삶의 방식’(다우)은 ‘주는 행복론’을 자늑자늑하게 설파한다. 베푸는 것이 ‘단순한 적선’이 아니라 ‘행복을 위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깨우친다. 행복해지는 가장 빠른 길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복음이다.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주었다면 그 대부분이 준 사람들에게 돌아오게 마련이라며 ‘행복한 부메랑론’을 편 시인 월트 휘트먼의 선견(善見)을 연상케 한다.
세상에서 가장 값어치 있는 미덕인 기부가 결코 자기희생만은 아니다. 기부는 ‘창의적 이기주의’라고 라이언은 정의한다.
그는 기부가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85가지의 일상적 예화로 오바사바하게 설명한다. 지하철의 거지조차도 기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더없이 역설적인 풍경이다. 어느 날 한 여성 사회복지사가 지하철역에서 주머니를 뒤지다 차비가 없음을 확인한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없이 자신이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거지에게 25센트만 달라고 청한다. 거지는 흔쾌히 주었다. 사실 사회복지사인 그가 평소에 각별한 애정을 쏟아야 할 사람이 거지가 아닌가. 라이언은 기부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감동마케팅을 펼친다.
라이언은 기부에 관해 몇 가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기부란 도덕적 억압이라기보다 자유로우면서도 살가운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요한 단서를 붙인다. ‘기부를 억지로 하지 말 것. 마음이 허락하는 만큼만 할 것.’
그가 자선과 관대함에도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자선은 내가 누군가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관념이지만, 관대함은 그 결과를 보지 않고도 마음이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베풀게 되는 것이다.
‘줌…’에서는 미시간대 사회과학연구소가 5년간 423쌍의 노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1년에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도운 적이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수명이 40~60% 정도 긴 것으로 입증됐음을 좋은 실례로 든다.
독일의 정치경제 전문기자 토마스 람게가 ‘행복한 기부’에서 제시한 2-1=3이라는 독특한 수식이 떠오른다. 람게는 이 수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누면 더 많아진다. 왜냐하면 준다는 것은 잘 조직되고 올바르게 이해되기만 한다면, 사회자본과 인간자본에 투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고 나누는 것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돈 없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無財七施)’를 생각해 보면 안성맞춤이겠다.
■ 증여론 /마르셀 모스(한길사)
선물의 유래가 그리 낭만적인 것만은 아니다. 부족 간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귀한 소금을 둘러싸고 부족 간의 약탈과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물물교환이 이뤄졌던 것이 선물의 시초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남아도는 가죽과 소금의 물물 교환이 인심과 실리를 동시에 얻는, 세련된 방식인 선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선물의 기원이 원시시대에 남자가 식량으로 여자의 환심을 사려했던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도 있다. 호감을 사기 위해 주는 선물은 특정집단에서 자연스레 문화적 관습이 됐다고 한다.
선물 문화는 아프리카 갈로 족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전해온다. 갈로족은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 농사를 지었지만 빈부격차를 막을 수 없어 3년에 한 번씩 명절 때 곡식을 나눴다. 토질, 날씨, 농부의 정성에 따라 개인의 수확량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한해 농사가 끝나면 가족 식량을 제외한 나머지 곡식을 자루에 담아 마을 공동창고로 가져간다. 3년이 지나 창고에 곡식이 가득 쌓이면 추장은 타로이(선물)를 선포하며 창고 문을 활짝 연다. 곡식이 부족한 주민들은 이때 필요한 양만큼 가져간다. 부자라도 곡식을 남기지 않으므로 이듬해에도 당연히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은 흉작이 게으름에 대한 신의 경고라고 여긴다.
이와 비슷한 문화는 북미 태평양 연안 인디언들과 남태평양의 일부 원주민들에게서도 엿보인다. ‘포틀래치’와 ‘쿨라’가 그것이다.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는 대표작 <증여론>(한길사)에서 선물 교환의 가장 단순한 형식을 북미 원주민의 ‘포틀래치’에서 찾아낸다. 치누크 인디언 용어인 포틀래치는 원래 ‘식사를 제공하다’ ‘소비하다’는 뜻이다. 모스는 인류의 원초적 거래방식이 사회적 통념인 ‘물물교환’이 아니라 ‘선물주기’라고 주장한다. 이때 선물은 ‘공짜’가 아니다.
모든 선물에는 언제나 세 가지 의무가 존재한다. 선물을 줘야 할 의무, 주는 선물을 받아야 할 의무, 받은 선물에 답례할 의무가 그것이다. 주는 것을 거부하거나, 초대를 소홀히 하는 것은 전쟁 선언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결연이나 교제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진다. 집단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포틀래치에는 보편적 특징이 있다. 손님 초대와 연설할 때 선물을 받을 사람들의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었다. 선물의 크기는 주는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를 반영한다.
포틀래치는 생산력이 불균등한 종족 사이의 부의 생산과 분배를 재조정해주는 메커니즘인 셈이다. 모스는 선물이 주는 사람의 우월성을 증명한다고 설명한다. 포틀래치를 열지 못하고 선물을 받기만 하는 것은 예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스레 위계가 형성된다.
멜라네시아 남동부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주민들이 행하는 선물교환제도인 ‘쿨라’는 ‘갑’에게서 선물을 받으면 그에게 답례하는 게 아니라 다른 이웃인 ‘을’에게 선물을 하고, ‘을’은 ‘병’에게 선물을 주는 방식이다. 결국 ‘갑’에게도 선물이 돌아간다. 이 같은 선물 체계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의무적인 호혜성을 지닌 선물 교류는 평화로운 관계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선물과 교환이 인류의 보편적인 관습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관찰한 모스의 <증여론>은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회학의 아버지’ 에밀 뒤르켐이 외삼촌인 모스는 구조주의의 선구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가슴을 울리게 만든 존재이기도 하다.
명절을 앞두고 선물들이 오가는 것을 보면 <증여론>에 담긴 모스의 혜안이 드러난다.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선물은 신도 설득할 수 있다”고 했지만 “거저 받은 선물만큼 비싼 것은 없다”고 한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의 말을 더 명심하는 게 지혜롭지 않을까 싶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 /레이첼 킹(샨티)
“내 아들을 죽인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요? 이해하라고요?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세요. 그건 가장 사치스러운 충고이니까.” 전도연이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밀양>에 나오는 신애의 절규는 감정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아픔을 대신 짊어지긴 어렵다는 걸 실감나게 보여준다. 기독교의 회개와 용서를 다루고 있는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나 이를 각색한 <밀양>은 모두 우리가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귀감이다.
2006년 10월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 니켈마인스라는 작은 시골마을의 아미쉬 원룸 스쿨에 우유배달원이 침입해 수업 중이던 여학생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5명이 목숨을 잃고 5명은 중상을 입은 이 충격적인 사건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놨다. ‘신이 자신을 버렸다’는 환상에 빠진 한 감리교도가 저지른 이 사건에서 진정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피붙이를 잃은 유족과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보여준 의연한 대처였다. 이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도 현장에서 자살한 범인의 가족을 찾아 위로하며 용서의 뜻을 전했다. 범인의 장례식 조문객 가운데 절반이 아미쉬여서 미국 사회가 더욱 놀랐다. 더구나 당시 9·11 테러사건을 보복으로 응답한 부시 행정부의 대처와 사뭇 비교되는 바람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형폐지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미국 변호사 레이첼 킹이 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샨티)에서는 영화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나 미국 실화와 흡사한 전율을 받게 된다. 살인자를 용서하고 사형제 폐지에 앞장선 피해 유가족 10인의 감동적인 실화를 담고 있어서다. 보복과 증오 대신 용서와 사랑을 택한 이들의 진솔하고 절절한 고백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외경스럽다.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했다. 하나같이 살인범과 화해를 시도했고, 어떤 이는 살인범이 사형을 선고받지 않도록 변호까지 자청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성자 아니면 정신병자로 여기지만 실제론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저 엄청난 용기와 신념을 지닌 보통사람들일 뿐이다.
이들은 “사형제도 역시 복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유엔인권협약에 조인했지만 비준하지 않았고, 서방사회에서 사형제도를 존속시키고 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비판과 함께.
지능지수 68의 제인스 버나드 캠벨에게 사랑하는 딸 수잔을 잃은 목사 아버지는 “생사 결정은 인간의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역설한다.
피자 배달원인 아들을 불량 청소년들의 총격으로 잃은 무슬림 아버지 아짐 카미사는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들 이름의 재단을 설립해 청소년범죄 예방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가해 청소년들을 교화해 이 활동에 참여시키는 장면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가해자를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들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파고든다.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게다. 인간의 능력 가운데 가장 취약한 부분이 용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형으로는 폭력을 이길 수 없다. 정신의학자 토머스 사스도 이렇게 갈파했다. “멍청한 사람은 용서하지도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순진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어버린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그러고 보면 용서는 가장 숭고한 복수가 될 수 있다.
■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요한 갈퉁(들녘)
평화는 무조건 다 좋은 것인가? 이 물음이 한없이 절절할 때가 있다. 힘 센 ‘갑’은 총칼을 휘둘러 목숨을 앗아가는 일이 다반사인데도 약한 ‘을’은 언제나 말로만 억울함을 호소해야 하는 경우엔 심리적 유혹이 다가오곤 한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나 미국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이는 죽는 순간까지 유혹을 뿌리쳤지만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하긴 고대 로마의 정치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정의로운 전쟁보다 나쁜 평화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키케로의 명언은 오늘날 평화주의자들이 가장 즐기는 말의 하나가 됐다.
노르웨이의 평화학 창시자 요한 갈퉁도 평화를 위해 무력과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강대국들의 논리에 나쁜 평화론으로 맞선다. 평화는 어떤 경우에도 목적뿐 아니라 수단 역시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갈퉁의 이 같은 생각을 집약한 책이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들녘)이다.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저질러지는 전쟁과 폭력은 결코 평화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릴 수 없다. 이라크 전쟁을 치른 미국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초강대국 미국은 국제적인 반전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계 평화라는 목적’을 위해 ‘전쟁이라는 수단’을 선택했다고 강변한다.
어떤 경우든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여야 한다는 갈퉁의 생각은 ‘과정의 평화학’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칸트의 윤리학과도 상통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라고 갈파한 손자(孫子)를 사실상 평화학의 창시자로 떠받드는 갈퉁이기에 당연한지도 모른다.
갈퉁은 평화를 총소리가 나지 않는 ‘소극적 평화’와 모든 국민의 인권과 복지를 지켜내는 ‘적극적 평화’로 나눈다. 소극적인 평화를 ‘국가 안보 개념의 평화’, 적극적인 평화를 ‘인간 안보 개념의 평화’로 흔히 일컫는다.
갈퉁의 등록상표인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는 강자에 대한 약자의 비폭력 저항이 현실성이 있기는 한가라는 회의론을 자주 불러일으킨다. 개인의 확고한 평화 철학이 어느 정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낳는다. 실제로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가 펼치는 평화적 비폭력 운동에 대한 대가로는 중국의 비평화적 무력 진압만 기다리고 있다. 언제까지나 평화적 수단을 지켜야 하는지 고뇌하는 티베트인들이 적지 않다. 갈퉁은 인도 독립을 이끌었던 간디의 비폭력 민중저항과 20세기 역사적 사건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의 용기 있는 개혁 같은 것에서 해답을 찾으려 한다.
갈퉁이 학생들에게 자주 던진 질문에 이런 게 있다. “세 사람 앞에 두 개의 오렌지가 있다. 세 사람 모두 배가 많이 고파 오렌지를 먹고 싶다. 여기서 갈등이 발생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 힘 센 두 사람이 오렌지를 차지할 수는 없다. 이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답변이 쏟아진다. “공평하게 오렌지 2개를 각각 3등분한다. 제비뽑기를 해서 두 사람이 오렌지 하나씩 갖는다. 즙이나 주스로 만들면 공평하고 쉽게 나눠 먹을 수 있다. 오렌지 2개를 크기가 작은 오렌지나 다른 과일 3개로 바꾸어 하나씩 가진다. 훗날 무수한 오렌지를 가질 수 있도록 오렌지 씨앗을 심는다. 오렌지를 팔아 돈으로 나누어 갖거나 나누기 쉬운 다른 물건을 산다.”
갈퉁은 어떤 갈등이라도 이처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는 1970년대부터 남북한을 수없이 오가며 한반도 평화를 모색해 온 평화운동가이기도 하다. 휴전선으로 막힌 철길과 도로를 다시 이으라는 것도 갈퉁의 획기적인 제안 가운데 하나였다. 부산과 일본의 규슈를 수중익선으로 연결하라는 제안도 곁들였다. 자신의 조국 노르웨이에서 아내의 고국 일본까지 기차를 타고 달려보는 게 소원이어서다. 그런 갈퉁의 평화학이 한반도에서 잠시나마 숨을 고르고 있는 모습이다.
■ 어떤 민주주의인가 /최장집·박상훈·박찬표(후마니타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민주주의를 대놓고 빈정거리면서 비판한 것으로 이름 높다. ‘인간의 타락한 형식’이라거나 ‘동등한 권리와 요구를 주장하는 난장이짐승’ ‘겉으로만 보면 평화적이고 일을 열심히 하는 민주주의자들과 혁명주의자들’ 따위로 매도할 정도다. 특히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권력에의 의지>에서는 자유민주주의자들의 평등의식을 비판하며 노골적으로 민주주의를 때린다.
그런 니체는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들도 민주주의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면 뭐라고 할까. 영국 옥스퍼드대 동물학자인 도라 비로 박사팀은 한 무리의 비둘기들에 위성항법장치(GPS)를 부착하고 15㎞ 정도 날아가는 모습을 관찰한 결과 완벽하지는 않지만 순간순간 반드시 민주적 위계질서에 따른 집단의사결정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서 밝혔다.
수많은 비둘기 떼가 비행 방향을 바꿀 때마다 순간적인 의견수렴 ‘투표행위’가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리더와 여론 주도층이 어린 새끼의 투표권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새들이 진화 과정에서 이 같은 행동 결정 양식을 선택하고 발전시켰다면 다른 동물 집단은 물론 인간도 이 같은 메커니즘을 일반화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연구진은 유추한다. 민주주의가 공동체 내에서 공적인 결정을 만드는 틀이라고 본다면 이 같은 현상은 놀랄만한 일임에 틀림없다.
절차적 민주화를 이룬 뒤 20여년이 지났지만 민주주의가 질적으론 도리어 뒷걸음질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1980년대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희망의 언어였다면, 90년대에는 실험의 언어였으며 2000년대에는 절망의 언어가 되었다’는 풍자가 귓전을 울린다.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조사해 발표하는 2008년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아직 167개 국가 중 28위권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를 방증한다. 그럼에도 일부 보수층에서는 잊을만하면 ‘민주주의의 과잉’을 운위하곤 한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와 제자 박상훈·박찬표가 함께 쓴 <어떤 민주주의인가>(후마니타스)는 한국 민주주의의 질을 따져 묻는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름만 갖고 있지 않다. 직접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보호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민주주의, 법치민주주의, 숙의(심의)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풀뿌리민주주의, 직접행동민주주의, 전자민주주의….
지은이들은 민주화 이후에는 민주주의냐 아니냐를 추상적으로 따지는 것보다 ‘실제로 어떤 민주주의냐’하는 질문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무엇보다 뼈아프게 지적하는 것은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할 때 민주주의는 정치의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영역,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되면서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 노동의 정치참여 확대와 보편적 시민권의 향유와 같은 요소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는 대목이다.
저자들의 중요한 인식 가운데 몇 가지를 간추려 보면 이렇다. “우리가 가진 공통의 현실인식은 정당과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로의 발전 경로는 점차 봉쇄되고 있는 반면 ‘국가가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가 돌이키기 어려운 정도로 심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권 확대의 요구는 강화되고 있지만, 한국의 자유주의는 이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엄밀히 말해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의 기원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와 대면해야 할 민주주의의 허약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베이징의 봄’으로 불리는 1989년 6월 톈안먼 사태 당시 중국 시위대는 ‘안녕하세요, 민주주의님’(爾好 德先生 Hello Mr. Democracy)이라는 플래카드를 높이 들어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 인사말이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인가요’라는 물음 앞에 놓여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민주주의의 모든 질병은 더 많은 민주주의에 의해서 치료될 수 있다’는 앨프레드 스미스의 처방이 대답을 대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절차와 제도에 갇힌 민주주의는 죽은 민주주의나 다름없다.
■ 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대화의 역사 /스티븐 밀러(부글북스)
<인간관계론>의 저자 데일 카네기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막 돌아온 한 부자 여성을 축하하는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 부자 여성이 카네기에게 물었다.
“선생께서 뉴욕에서 가장 말을 잘하시는 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카네기가 말문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부인. 최근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곳으로 여행을 떠나신 이유가 궁금하군요.”
이 여성이 아프리카 여행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자 카네기는 곧바로 다른 질문을 연이어 던졌다. “누구와 함께 여행하셨습니까?” “언제 아프리카로 떠나셨나요?”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어디 어디를 돌아보셨는지요?” 질문이 거듭되자 이 부자 여성은 대답만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20여 분간의 대화에서 그녀가 대답한 시간은 95%인 반면 카네기가 이야기한 시간은 5%에 불과했다. 다음날 한 신문에 그 부자 여성의 촌평이 실려 있었다. “카네기는 역시 뉴욕에서 가장 대화를 잘하는 분이었다.”
이 일화를 들으면 자연스레 소크라테스가 먼저 떠오른다. 소크라테스에게 한 철학자가 찾아와 물었다. “어떻게 하면 대화를 잘할 수 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한마디로 정리한다. “대화를 잘하는 비결은 그 사람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지요.” 소크라테스가 왜 남의 말을 경청하고 반대논증을 편 상호대화의 전범(典範)인지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프리랜서 칼럼니스트이자 에세이스트 스티븐 밀러의 <소크라테스가 에미넴에게 말을 걸다-대화의 역사>(부글북스)는 대화의 기술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대화의 위기에 경종을 울리며 대화의 참 가치를 깨우쳐준다. 대화를 필생의 주제로 잡고 연구해온 밀러가 “대화는 인간 존재와 다른 동물들을,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영국 정치철학자 마이클 오크숏의 말로 책을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밀러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18세기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이다. 이 시기의 영국인들이 경제와 군사력은 물론 커피하우스와 클럽에서 대화의 기술도 갈고닦아 나라의 품격을 세계 수준으로 높였다는 게 지은이의 분석이다. 프랑스의 살롱 문화도 마찬가지다.
지은이가 대화를 멸종위기로 만든 주범으로 꼽은 것은 1960년대 이후 미국 사회를 사로잡은 ‘반체제문화’다. 분노와 적의로 가득 찬 ‘상스러운 말투의 제왕’인 미국 백인 래퍼 ‘에미넴’이 대표적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아이콘으로, 의회에서 상원의원을 향해 욕설을 퍼붓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딕 체니 전 부통령도 주범의 하나다.
여기에다 저자가 ‘대화 회피장비’라고 이름 붙인 휴대폰, MP3, 비디오 게임, 컴퓨터의 범람은 대화의 문을 닫는 또 다른 주범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 능력은 대화 회피장비들의 신호음과 노래, 호출, 윙윙거림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게다가 대화의 대용품조차 문자메시지, e메일 등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밀러가 내다보는 대화의 미래는 한층 더 우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상현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잠깐씩 다른 사람과 교류할 뿐이다. 다른 사람과의 짧은 대화도 주로 무례하고 흥분된 목소리로 이뤄질 것이다.”
작금 대화의 위기는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대화의 부재로 가정이 위기에 몰리고 정치권과 사회도 대립과 갈등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남북한 간에도 어느덧 대화하는 법을 잊고 다툼에만 익숙해져 가고 있다. 한동안 <개그콘서트> 프로그램 ‘대화가 필요해’가 인기를 누렸던 것도 대화 부재의 시대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래서 새해 벽두에 더욱 걱정스러운 건 ‘잃어버린 대화의 품격’은 고사하고 ‘대화의 빈곤’ 자체가 아닌가 싶다.
■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 /윤용이(돌베개)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은 500년 전 조선 도공의 길을 배우고 찾아가는 것이다.” 20세기 최고 도예가였던 영국의 버나드 리치(1887~1979)가 세계 최고의 명문 도자학교로 불리는 미국 앨프레드 도자학교 강연에서 던진 한마디다. 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시대 ‘분청자(粉靑瓷)’가 이미 다 제시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뉴욕대 특강에선 이런 말도 했다고 전해진다.
“도자기를 아예 모르는 사람은 중국, 일본, 조선 순서로 좋다고 평한다. 조금 아는 사람은 중국, 조선, 일본 순이라고 한다. 도자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조선, 중국, 일본 순이라고 말한다.”
그는 동양 도자기의 특색을 ‘한국은 선이고 중국은 색채이며 일본은 모양’이라고 규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국으로 돌아가 <조선의 백자>라는 책을 펴낼 만큼 한국 도자기에 대해 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좋은 도자기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산을 내려오는 사람과 같이 손쉽게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했다.
흔히들 한국의 옛 도자기는 동양인의 고요한 정신자세를 상징한다고 품평한다. 선이 곱고 색은 순하며 내적인 품위를 지녔기 때문이다. 한국 도자기의 특질에 관해서는 미술사학자인 윤용이 명지대 교수가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돌베개)에서 살갑게 들려준다. 그는 리치가 그랬듯 도자기 가운데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분청자를 꼽는다. 한국인은 분청자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재발견한다는 것이다. 분청자는 역동적이면서도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선(禪)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그는 해설한다. 분청자는 쉽게 풀이하자면 화장을 한 청자다. 센 리큐를 비롯한 일본의 최고 다인(茶人)들이 가장 사랑한 것도 분청자와 백자였다.
리치가 “나는 행복을 안고 간다”고 은유했던 조선의 백자 항아리는 순박하면서도 고아한 품격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상찬을 받는다. 윤용이는 조선 후기의 백자를 청초하고 단아한 멋을 지녀 간결하고 기품 있는 그릇으로 친다. 중국이나 일본의 도자와는 달리 정돈된 맛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한다. 한국의 백자를 사람으로 치자면 자신은 전혀 뽐내지 않으나 주위를 빛나게 하는 등불 같은 존재라고 비유하는 이도 있다.
그는 청자와 백자에 비해 저평가됐던 질그릇(도기)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인 게 돋보인다. 조선시대 질그릇의 표징으로 소박함, 고요함, 단순미를 꼽는다. 전문가들은 신라 토기에는 신라 사람들의 넉넉한 미소가 담겼고, 청자에는 고려 사람들의 꿈이 담겼으며, 백자에는 조선 사람들의 마음이 담겼다고 한다. 하지만 윤용이는 여기서 ‘토기’란 용어를 매우 못마땅해 한다. 일본이 만들어낸 말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게 옳다는 견해다. 그냥 ‘도기’로 분류하면 족하단다.
도자기는 흙과 불, 사람이 삼위일체가 돼야 최상품을 만들 수 있다. 흙이 도자기의 살이라면 불은 도자기의 피이고 작가의 마음가짐은 도자기의 혼으로 불린다. 사기장들은 흔히 말한다. 도자기의 3분의 1은 사기장이, 3분의 1은 불이, 나머지는 사용하는 사람이 만든다고. 그만큼 누가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윤용이도 천편일률적인 그릇 대신 우리 도자기로 생활의 멋을 한껏 부려보라고 적극 권면한다. 일본에선 도자기가 식기로 대중 속에 파고든 지 오래다. 그 배경에는 미식가이며 도예가인 기타오지 로산진이란 인물이 있다. 그는 “그릇은 요리의 기모노이고, 요리와 그릇은 한 축의 두 바퀴”라는 명언을 남겼다.
■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 /이중톈(에버리치홀딩스)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가 신성로마제국을 두고 퍼부은 독설에 가까운 촌철살인의 풍자다.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에게 멸망하기까지 시나브로 국력이 쇠잔하고 분열이 이어지면서 17세기부터는 껍데기만 남은 제국이었다.
중국이 초강대국도 아니고 선진국도 아니며 제국은 더욱 아니라는 엄살 섞인 항변을 들고 나올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볼테르의 명언이다. 현대 중국의 설계자 덩샤오핑이 ‘도광양회’(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기른다)를 당부할 때만해도 그런 이중성은 납득할 만했다. 하지만 ‘화평굴기’(평화롭게 우뚝 선다)를 부르짖는 지금의 중국이라면 사뭇 달라진다. 중국은 동양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한 진시황 이래 2132년 동안 제국으로 호령한 화려무비한 전력이 있지 않은가.
중국의 인기 역사저술가 이중톈은 화려한 중국 역사의 겉면보다 쓰라린 실패와 아픈 기억을 <제국의 슬픔>이란 책으로 담아낸 바 있다. 이중톈이 자신의 최고 역작이라 자신 있게 말한 <이중톈 제국을 말하다>(에버리치홀딩스)에서 과거 중국제국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해부한 점은 인상적이다.
그는 중국 역사를 제국 시스템이라는 프레임으로 정치사와 문화사를 아우르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고 재구성했다. 이중톈이 진시황 이래 청 제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제국 유지의 핵심요소로 꼽은 것은 ‘중앙집권’ ‘윤리치국’ ‘관원대리’(官員代理) 세 가지로 요약되는 시스템이다. 진시황이 군현제와 그에 걸맞은 관원대리라는 하드웨어를 창조했다면, 한무제는 여기에다 윤리치국이라는 소프트웨어를 더해 완벽한 제국의 틀을 만들었다. 윤리치국이란 중국의 제자백가 사상 가운데 유가를 정치의 도구로 채택한 것을 일컫는다. 한나라 이후 모든 왕조는 이 트로이카를 앞세워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왕조의 명맥을 유지했다. 20세기 초 들어 강대한 제국이 하루아침에 자멸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결국 이 시스템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는 중국의 실정에 맞는 ‘공화’ ‘민주’ ‘헌정’만이 미래의 근본 해결책이라고 처방했다. 중국 학계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몰라도 이중톈은 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중톈이기에 그의 한마디는 무겁게 들릴 수밖에 없다.
순환론적 역사관에 따르면 제국이란 제도는 그 시스템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가 있고 한계에 도달한 제국은 무너진다. 무너진 제국은 제국을 형성했던 사회구조나 구성원의 삶의 질이 이전보다 훨씬 열악해진다. 영웅적 지도자가 나타나 다시 통합을 시도하고 제국이 재건된다.
중국이 또다시 세계 제국으로 굴기하는 걸 보면 순환론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과시한 ‘한·당(漢唐)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이미 제국의 야욕을 세계 만방에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한나라 때나 당나라 때나 한민족의 역사는 아픈 기억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러잖아도 최근 중국의 행태는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 중국 제국이 될 지 모른다는 점을 확연히 각인시켜주고 있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중국인들의 특성이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역사적 교훈은 제국이 혼자 강압적인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세계적인 중국계 미국 석학인 에이미 추아는 명저 <제국의 미래>에서 제국의 필요조건으로 ‘관용’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989년 베이징의 봄 이후 중국은 청년 정신까지 성장을 멈췄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중톈도 지적하듯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언젠가는 다시 역사의 심판을 받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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