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0-05-21 17:32:55ㅣ수정 : 2010-05-21 17:32:55
ㆍ한국 교육사의 원전 60년만에 재탄생
ㆍ민족·계급 관점 결합한 교육사관 눈길
다시 읽는 조선교육사…이만규 | 살림터
항일 민족주의 교육자이자 국어학자 이만규(李萬珪·1888~1978)는 남한에서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불온한 위험인물로 취급받았다. 월북학자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육계 인사가 아니라면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드문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연배가 높은 이들 가운데는 교육자이자 서예가였던 이철경의 아버지가 이만규라면 ‘아! 그랬던가’할 수도 있을 게다. 이철경이 중진가수 서유석의 어머니이니 이만규가 서유석에겐 외할아버지다.
이만규는 일제시대에는 중등학교 교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교육실천가이자 교육행정가였다. 해방 직전과 직후엔 식민교육학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교육사체계를 다시 세운 자주적 교육사가이자 통일운동가였다. 북한에서는 초·중등교육정책을 집행했던 교육혁명가였다.
그는 일제 말기 민족주의 실력양성운동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과 한글보호운동인 조선어학회사건에 각각 연루돼 총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기간에 <조선교육사> 집필 구상을 한다. 출옥 후 2년7개월간 해직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책을 완성해 펴냈다. <조선교육사>는 한국 교육사학사의 고전이자 원전인 셈이다. 그만큼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원시시대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의 교육사를 망라한 이 책은 지은이가 월북학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재출간되지 못했다. 1980년대 말 재출간했지만 곧 절판돼 시중에서는 품절상태였다.
이처럼 뜻 깊은 책이 심성보 부산교육대 교수의 주도 아래 옛 글투인 초판의 상당부분을 읽기 쉬운 현대어로 고쳐 <다시 읽는 조선교육사>(살림터)로 재탄생했다. 이 책은 우리 교육사를 문화의 한 분야로 보고 시대마다 교육제도와 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일종의 한국교육통사(韓國敎育通史)다. 무엇보다 관점이 뚜렷하다. 민족주의, 민주주의, 계급주의, 문화주의적 관점을 결합한 교육사관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만규는 이 책에서 통일신라가 당나라에서 유교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중국 역사를 주로 가르친 것을 사대주의라고 혹평한다. 특히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지은 최치원의 <계원필경>을 사대와 아첨에 사상이 절었다고 매도한다. 반면에 그는 신라의 화랑도 교육을 세계사에 견줄 만한 우리 민족 고유의 교육방식으로 드높이고 있다. 화랑도의 국토 순례가 불교나 예수의 성지순례와 같으며, 무예·용기·예절·충의·체면·여성 존중을 중세 유럽의 기사도 교육에 비길 수 있다고 호평한다.
인재등용의 관문인 과거(科擧)의 교육 사상적 폐해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고려 광종 때부터 조선 고종 때까지 936년간 시행된 과거로 말미암아 지식은 겉치레만 화려할 뿐 천박해지고, 학문은 모리와 투기의 도구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재등용도 공평성을 잃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고려·조선 시대의 교육이 ‘계급 편파교육’ ‘지방 편파교육’ ‘성 편파교육’이어서 진정한 ‘국민교육’이 아니었다고 깎아내린다.
조선시대 교육을 마냥 폄훼하는 것만은 아니다. 질의문답식 교수법, 시험점수와 평소의 근태, 품행·인물됨됨이를 종합한 성적평가법, 학생자치권, 권당(捲堂) 같은 스트라이크 행사까지 허용한 사기배양법 등은 지금의 서양에서도 더 나아가지 못할 만큼 우리 교육사의 문화적 유산으로 자랑할 만하다고 상찬한다. 이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봉건제도 아래서 유생들에게 정당한 학원의 자유를 보장한 것을 꼽는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옳은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세 가지 스트라이크 수단을 동원할 수 있었다. 권당(식당에 들어가지 않기), 공재(空齋·기숙사에서 나오기), 공관(空館·성균관에서 퇴거하기)이 그것이다. 공관은 동맹휴학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는 매우 흥미롭다. 세종 때 집현전 학생들이 ‘왕이 학생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공관을 단행했다. 세종이 영의정 황희에게 “집현전 학생들이 나를 버리고 갔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하고 물었다. 황희는 자신이 타이르겠다고 나서 학생들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간청했다. 그때 한 학생이 황희에게 “공은 정승이나 되어 임금의 잘못을 고치지 못하느냐”고 따졌다. 하지만 황희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기쁜 얼굴로 대했다고 한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을 인용하며 조선시대 중기에 ‘서당교육’이 시작되었다는 일반론도 뒤집고, 이미 고려시대에 우리 고유의 교육형식으로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교육사상은 늘 정치사상과 병행한다고 여긴 그가 일제시대 교육을 ‘민족교육 파멸기’로 규정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일제시대의 민족교육운동사에서 제외하다시피 한 신사상연구회, 학생운동, 노동쟁의, 민족운동 등 민족주의 좌파 진영의 교육활동을 적게나마 복원한 것도 의미가 크다. 전반적으로 문학사학, 민족사학, 사회경제사학이라는 3차원성이 어우러진 그의 교육사학관이 책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요즘 입장에서 보면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우선 교육사 시대구분론에 대한 서술이 없다.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조선시대의 교육, 조선시대 말 27년간의 교육, 일제 강점기 36년간의 교육으로만 나누고 있다. 교육사상가를 언급하면서 신라의 원효, 실학의 정약용, 홍대용, 일제시대의 안창호, 조소앙을 소개하지 않은 것도 취약점에 속한다.
그럼에도 작고한 교육사학자 정순목 영남대 교수는 한국교육사에서 이를 능가할 만한 저술이 나오지 않았다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60여년 전에 처음 나온 책을 다시 펴낸 것도 이 때문이다. 3만3000원
ㆍ민족·계급 관점 결합한 교육사관 눈길
다시 읽는 조선교육사…이만규 | 살림터
항일 민족주의 교육자이자 국어학자 이만규(李萬珪·1888~1978)는 남한에서 오랫동안 잊혀진 인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불온한 위험인물로 취급받았다. 월북학자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교육계 인사가 아니라면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드문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연배가 높은 이들 가운데는 교육자이자 서예가였던 이철경의 아버지가 이만규라면 ‘아! 그랬던가’할 수도 있을 게다. 이철경이 중진가수 서유석의 어머니이니 이만규가 서유석에겐 외할아버지다.
이만규는 고려·조선시대 교육을 ‘계급 편파교육’ ‘지방 편파교육’ ‘성 편파교육’으로 깎아내리면서도 질의문답식 교수법, 시험점수와 평소의 근태, 품행· 인물됨됨이를 종합한 성적평가법 등을 문화적 유산으로 높이 평가한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을 인용하며 고려시대에 ‘서당교육’이 고유의 교육 형식으로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림은 김홍도의 <서당도>.
그는 일제 말기 민족주의 실력양성운동단체인 흥업구락부 사건과 한글보호운동인 조선어학회사건에 각각 연루돼 총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기간에 <조선교육사> 집필 구상을 한다. 출옥 후 2년7개월간 해직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책을 완성해 펴냈다. <조선교육사>는 한국 교육사학사의 고전이자 원전인 셈이다. 그만큼 기념비적인 저술이다. 원시시대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의 교육사를 망라한 이 책은 지은이가 월북학자였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재출간되지 못했다. 1980년대 말 재출간했지만 곧 절판돼 시중에서는 품절상태였다.
이처럼 뜻 깊은 책이 심성보 부산교육대 교수의 주도 아래 옛 글투인 초판의 상당부분을 읽기 쉬운 현대어로 고쳐 <다시 읽는 조선교육사>(살림터)로 재탄생했다. 이 책은 우리 교육사를 문화의 한 분야로 보고 시대마다 교육제도와 사상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일종의 한국교육통사(韓國敎育通史)다. 무엇보다 관점이 뚜렷하다. 민족주의, 민주주의, 계급주의, 문화주의적 관점을 결합한 교육사관이 확연히 드러난다.
인재등용의 관문인 과거(科擧)의 교육 사상적 폐해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고려 광종 때부터 조선 고종 때까지 936년간 시행된 과거로 말미암아 지식은 겉치레만 화려할 뿐 천박해지고, 학문은 모리와 투기의 도구로 변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재등용도 공평성을 잃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고려·조선 시대의 교육이 ‘계급 편파교육’ ‘지방 편파교육’ ‘성 편파교육’이어서 진정한 ‘국민교육’이 아니었다고 깎아내린다.
조선시대 교육을 마냥 폄훼하는 것만은 아니다. 질의문답식 교수법, 시험점수와 평소의 근태, 품행·인물됨됨이를 종합한 성적평가법, 학생자치권, 권당(捲堂) 같은 스트라이크 행사까지 허용한 사기배양법 등은 지금의 서양에서도 더 나아가지 못할 만큼 우리 교육사의 문화적 유산으로 자랑할 만하다고 상찬한다. 이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봉건제도 아래서 유생들에게 정당한 학원의 자유를 보장한 것을 꼽는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옳은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세 가지 스트라이크 수단을 동원할 수 있었다. 권당(식당에 들어가지 않기), 공재(空齋·기숙사에서 나오기), 공관(空館·성균관에서 퇴거하기)이 그것이다. 공관은 동맹휴학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는 매우 흥미롭다. 세종 때 집현전 학생들이 ‘왕이 학생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공관을 단행했다. 세종이 영의정 황희에게 “집현전 학생들이 나를 버리고 갔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하고 물었다. 황희는 자신이 타이르겠다고 나서 학생들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간청했다. 그때 한 학생이 황희에게 “공은 정승이나 되어 임금의 잘못을 고치지 못하느냐”고 따졌다. 하지만 황희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기쁜 얼굴로 대했다고 한다.
송나라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을 인용하며 조선시대 중기에 ‘서당교육’이 시작되었다는 일반론도 뒤집고, 이미 고려시대에 우리 고유의 교육형식으로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교육사상은 늘 정치사상과 병행한다고 여긴 그가 일제시대 교육을 ‘민족교육 파멸기’로 규정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일제시대의 민족교육운동사에서 제외하다시피 한 신사상연구회, 학생운동, 노동쟁의, 민족운동 등 민족주의 좌파 진영의 교육활동을 적게나마 복원한 것도 의미가 크다. 전반적으로 문학사학, 민족사학, 사회경제사학이라는 3차원성이 어우러진 그의 교육사학관이 책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요즘 입장에서 보면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우선 교육사 시대구분론에 대한 서술이 없다. 조선시대 이전의 교육, 조선시대의 교육, 조선시대 말 27년간의 교육, 일제 강점기 36년간의 교육으로만 나누고 있다. 교육사상가를 언급하면서 신라의 원효, 실학의 정약용, 홍대용, 일제시대의 안창호, 조소앙을 소개하지 않은 것도 취약점에 속한다.
그럼에도 작고한 교육사학자 정순목 영남대 교수는 한국교육사에서 이를 능가할 만한 저술이 나오지 않았다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60여년 전에 처음 나온 책을 다시 펴낸 것도 이 때문이다. 3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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