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직후인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일자리를 앗아가는 방직기계를 파괴하자는 러다이트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정보혁명과 더불어 디지털시대가 도래하자 지구촌에서는 네오러다이트운동(neo-luddite movement)이 들불처럼, 그러나 낮은 목소리로 번져갔다. 네오러다이트 운동가들은 첨단기계를 파괴하진 않았지만, 컴퓨터로 대표되는 과학기술혁명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연과 어우러져 인간답게 사는 걸 목표로 삼았다. ‘빨리빨리’라는 말이 표징하는 속도의 시대에 맞서 ‘반기술·인간성 회복’을 기치로 ‘느리고 단순하게 살기’를 추구한 것이다. ‘속도가 빨라지면 생각은 짧아진다’는 경구를 가슴 깊이 새기면서. 물리현상에서 작용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따르듯, 사회현상도 예외가 아님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이런 네오러다이트 생활운동의 중심에는 미국의 스코트 니어링·헬렌 니어링 부부가 있었다. 스코트는 경제학 교수였고 헬렌은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운동인 신지학(神智學·Theosophy)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년의 나이에 거대도시 뉴욕의 문명을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버몬트 주의 숲 속으로 들어갔다. 니어링 부부의 ‘단순하면서도 충만한 삶’에 대한 실험은 전 세계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문명을 떠나 사는 동안 그들 부부는 문명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높이 떠올랐다. 네오러다이트 운동이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가장 활성화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버몬트 주 숲 속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체험한 삶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기록한 ‘조화로운 삶’(도서출판 보리·원제 Living the Good Life)은 검박한 자연주의 삶을 추구하는 세계인들에겐 ‘교범’이자 ‘지침서’가 됐다. 버몬트는 ‘가지 않은 길’로 널리 알려진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만년에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니어링 부부의 자연주의 삶의 철학은 랠프 왈도 에머슨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닮았다. 하지만 아직 도시화가 덜 진행되고 문명의 이기가 발달하지 않았던 에머슨·소로의 19세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니어링 부부는 둘 다 농사라곤 아무 것도 모르던 도시내기였다.


 니어링 부부가 버몬트 시골로 들어간 것은 네오러다이트 운동이 싹트기 전인 1932년, 대공황이 최악으로 치닫던 시절의 일이다. 한국인 대다수가 아직 농경사회에서 엄혹한 일제 강점기를 보내던 사실을 반추해 보면 니어링 부부의 결단은 선구자적 모험이다. ‘조화로운 삶’이 첫 출간된 1954년으로 따져 봐도 한반도의 사람들은 삶의 여유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던 6·25전쟁 직후였다.


 니어링 부부는 버몬트에서 돌집을 지어 살면서 ‘단풍나무 시럽 만드는 법’을 글로 썼다. 출판은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 여사의 남편이 경영하는 ‘존 데일리 출판사’에서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를 계기로 펄 벅 부부가 니어링 부부의 거처로 찾아왔다. 그곳 풍광을 보고 감탄한 펄 벅 부부는 버몬트 농장에 관한 이야기를 써 보라고 권면해서 나온 책이 ‘조화로운 삶’이다. 이들의 경험담 속에는 전원생활의 기술, 경제, 사회, 심리적인 면이 두루 담겼다. 땀과 영혼으로 쓴 전원일기라고 해도 좋을 법하다.


 스코트와 헬렌이 도회를 떠날 때는 세 가지 목표를 품고 있었다. 독립된 경제 꾸리기, 건강, 사회를 생각하며 바르게 사는 것이었다. 이들이 추구한 네 가지 기본 가치는 단순한 생활, 긴장과 불안에서 벗어남, 무엇이든 쓸모 있는 일을 할 기회, 조화롭게 살아갈 기회였다. 좀 더 철학적으로 얘기하면 평화주의, 채식주의, 환경주의다.


 구체적인 원칙도 세웠다. 채식주의를 지킨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절반쯤은 자급자족한다. 하루를 오전 오후로 나눠 빵을 벌기 위한 노동은 반나절만 한다. 나머지 시간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위해 쓴다. 한해의 양식이 마련되면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 은행에서는 절대로 돈을 빌리지 않는다. 집짐승을 기르지 않는다. 자연에 있는 돌과 바위로 집을 짓는다. 방문객이 찾아와도 밭에 나가 일을 하면서 얘기를 나눈다. 누구든 자기가 먹은 그릇은 설거지하게 한다. 기계에 의존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손일을 한다. 최저 생계비가 마련되면, 먹고 남는 채소나 과일은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준다. 하루에 한 번씩은 철학, 삶과 죽음, 명상에 관심을 갖는다. 이들은 “우리 집이라는 작은 조직체의 헌법과 같은 것이었다”고 표현한다.


 니어링 부부에게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척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었다. 니어링 부부는 자신들의 삶의 중요성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버몬트 계획을 실천하며 산 스무 해 동안에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캘리포니아대를 스무 해 다니면서 알게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더 많이 배웠다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니어링 부부는 속편인 ‘조화로운 삶의 지속’(원제 Continuing the Good Life)에서 자신들을 따라하는 사람들에게 주의사항을 전한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일은 어느 순간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거듭되는 고민 속에서 내린 결정이고, 그 결정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앞날을 내다보고 만족스러운 결과에 이르는 결정이어야 한다. 처음 3년을 보내기가 가장 힘들고 어렵다. 적어도 그만큼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한다.” 니어링 부부는 버몬트에 스키장이 생기고 관광객과 방문객이 늘어나자, 공들여 지은 돌집과 멋진 밭들을 뒤로 하고 또 다른 시골로 이사했다. 메인 주의 한적한 바닷가에 뿌리를 내리고 26년간 살면서 ‘조화로운 삶의 지속’을 썼다.

                                                           


 사람들은 니어링 부부에게 자주 이렇게 묻곤 했다. “이렇게 외진 시골로 도망 온 까닭이 무엇입니까? 왜 복잡한 대도시 한복판에 살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불행과 고뇌를 나누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한결 같았다. “도시 공동체의 붕괴로 도시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자기 행동의 기준이 되는 이론들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니어링 부부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가장 조화로운 삶은 이론과 실천이, 생각과 행동이 하나가 되는 삶이다.’ 니어링 부부는 버몬트에 사는 20년 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을 만큼 건강하게 살았다. 뿐만 아니라 스코트는 100살까지 장수했고, 헬렌도 91세를 누렸다. 이 모두가 단순하고 조화로운 삶을 실천해 얻은 축복이다.


 ‘조화로운 삶’은 1954년 처음 출간될 때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소로의 ‘월든’과 비교되곤 했다. 대안적 삶의 방식으로 진정한 자유를 전하는 이야기여서 20세기 판 ‘월든’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월든’이 나온 지 꼭 100년 만에 출판된 데다 니어링 부부가 소로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출간 초기보다 1970년대 이후 폭발적인 시선을 받았다. 1974년에는 개정판이 나왔다. 무엇보다 1960년대 말 세계를 휩쓴 ‘68혁명’을 겪은 젊은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70년 초 이 책이 20만부 넘게 팔리고 ‘땅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교과서처럼 새롭게 조명되었다. 자연히 니어링 부부는 삶에 불만을 가진 중산층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해마다 삶에 지친 수천 명의 부르주아 젊은이들이 메인 주 농장을 방문하면서 니어링은 대항문화의 영웅이 된 것이다. 이 젊은이들은 1960년대 정치사회운동에서 자신을 불태웠다가 사회변화를 위한 정치대안에 희망을 잃으면서 내면으로 정향을 돌렸다.


 베스트셀러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저자이자 ‘느림의 철학자’인 피에르 상소 같은 이도 니어링 부부의 삶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999년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슬로시티 운동 역시 니어링 부부가 영향을 미쳤다. 슬로푸드 운동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책이 한국에서 번역·출판돼 각광받은 것은 새 천년이 시작되면서부터다. ‘무소유’의 철학을 실천한 수행자 법정 스님도 니어링 부부를 무척이나 존경하고 그들의 삶에 공감했다. ‘조화로운 삶’은 동아일보가 2000년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했을 정도다. 한국에서도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을 동경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많은 추종자들이 스코트 니어링에게 매력을 느꼈으나 그의 인생 역정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지 못했다. 그는 1930년 사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좌파 성향의 공적인 관계를 모두 단절했다. 젊은 시절 톨스토이를 숭배했던 스코트의 사상은 사회 구원, 초월주의, 실용주의, 자연주의, 유토피아주의, 19세기 사회주의, 20세기 공산주의 따위가 버무려진 혼합체였다. 경제학자에서 톨스토이주의자로, 사회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그 후 자작농으로 마감한 게 스코트의 일생이었다. 스코트 니어링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스코트 니어링 평전’을 쓴 존 살트마쉬는 “소로와 마찬가지로 니어링의 의도는 절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른 새벽 수탉처럼 이웃을 깨우기 위해 힘차게 홰를 치는 것’이었다”고 자리매김한다. 니어링 부부의 이야기는 조화로운 삶을 살며 개인적 정체성과 사회경제성이 조화를 이루면 의미 있는 사회 변화를 꾀할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문명이란 사실 불필요한 생활필수품을 끝없이 늘려 가는 것”이라는 마크 트웨인의 명구를 떠올리게 하면서 말이다. 스코트 니어링에 대한 평가는 그의 백 번째 생일날 이웃 사람들이 선물한 글귀가 웅변해 준다. “당신 덕분에 세상이 조금 더 나아졌습니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 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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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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