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내 언론팀은 항상 말리지만 더 질문하세요. 나는 기자회견을 좋아하고 매일 여러분과 얘기하기를 원합니다.” 지난 6월30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러고 나서 오바마 대통령은 조시 어니스트 대변인을 흘끗 쳐다보며 “미안해, 조시” 하고 특유의 장난기어린 말투와 표정을 드러냈다.
<장면 2> “저는 국민과의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지난 2년 동안도 민생 현장이라든가 정책 현장이라든가 이런 데 직접 가서 정말 터놓고 이야기도 듣고 제 생각도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올 1월12일 청와대에서 1년 만에 처음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소통이 부족하다’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취임 이후 일관된 자세다. 박 대통령은 그 후 국내 언론과 기자회견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두 장면은 오바마 대통령과 박 대통령이 언론과 기자회견에 대한 인식에서 얼마나 대조적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오바마 대통령과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 횟수만 보더라도 엄청난 차이가 난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1월 취임 후 2015년 6월20일까지 6년5개월 동안 211차례(외국 정상과의 공동회견 130차례 포함) 기자회견을 했다.
일문일답이 있는 기자회견을 한 달에 1.7회, 연 평균 20.3회 꼴로 연 셈이다. 오바마는 그동안 무려 600회에 이르는 개별언론 인터뷰도 가졌다. 그는 개별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심층적인 대화 기회로 삼아 정부정책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국민과 공유하는 걸 즐긴다.
이와 달리 박 대통령은 취임 후 2년 반 동안 단 두 차례 기자회견을 했다. 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국내 개별 언론사와도 인터뷰를 전혀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임 대통령들은 신문사 창간기념일이나 방송사 창립기념일 등에 단독회견을 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잘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들은 ‘보여주기식 이벤트’를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이다.
미국 대통령들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오바마와 비슷한 횟수의 기자회견 자리를 만들어왔다. ‘노변정담’을 등록상표처럼 애용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933~1945년 재임)은 12년간 무려 881회의 기자회견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월평균 6.5회, 연평균 72.66회다. 오바마를 포함해 미국 대통령들은 헬기를 타러 가다가도 기자들이 질문을 하면 뭐든지 자신 있게 답변해 준다. 대통령 휴가지에서도 필요하면 그곳에 가 있는 기자들과 회견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난스러울 정도로 기자회견을 기피하지만, 다른 한국 대통령들도 미국에 비하면 훨씬 더 기자회견을 꺼리는 편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꺼리거나, 하더라도 질의·응답을 생략하기 일쑤였다. 어떤 해는 신년 국정연설로 대신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임기 중 기자회견 횟수는 개별언론사 회견을 포함해 20차례였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개별언론사 인터뷰가 많았다. 두 대통령은 이를 포함해 150회에 걸쳐 기자회견이나 인터뷰를 했다.
<2015년 1월 박근혜 대통령 신년기자회견>
기자회견의 형식과 내용도 한국과 미국은 매우 다르다. 미국에서는 사전에 짠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일이 결코 있을 수 없다. 백악관 대변인과 기자단이 미리 질문 내용이나 수위를 정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질문 기자도 사전 각본에 정해져 있지 않다. 회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꼭 필요한 경우 질문할 기자명단을 대통령에게 미리 귀띔하는 정도다. 만약 백악관이 기자단에게 사전에 귀띔이라도 요구하면 당장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만다.
이런 전통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당시에 이미 세워졌다. 그는 사전 질문지를 ‘죽은 종이’에 비유하며 투명하고 공개적인 기자회견을 선호했다. 그는 대공황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도 기자회견을 마다하지 않고 미국의 번영을 이끈 소통의 리더십을 보인 대통령으로 손꼽힌다.
한국에서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늘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있고 나면 뒷말이 무성한 편이다. 올해 청와대는 지난해와 달리 기자단과 사전에 협의하지 않아 작년과는 다를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탐사보도 전문매체인 ‘뉴스타파’의 한 기자가 회견이 시작되기도 전에 기자들의 질의내용뿐만 아니라 질문순서까지 정확히 예측했다.
이 때문에 청와대의 사전작업이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1년 만에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연 2014년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사전에 질문내용을 취합해 홍보수석실에 전달한 사실이 폭로됐다. 그 질문지가 외부에 공개돼 한국언론 전체가 조롱의 도마 위에 올랐다.
<2015년 1월 박근혜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에 대한 국민평가>
이명박 대통령이 2009년 9월 1년 3개월 만에 마련한 ‘G20 정상회의 유치보고 특별기자회견’은 구시대적 언론 통제 논란에 시달렸다. 청와대가 당시 정국의 최대현안이던 세종시 관련 질문을 빼달라고 기자단에 요청했고, 기자단은 별다른 항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런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일부 언론은 사설을 통해 사과하고 청와대를 비판했다. 대한민국 언론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뒤였다.
미국은 대통령과 기자가 추가 질문을 주고받으며 토론식으로 회견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질문자도 기자가 손을 들면 대통령이 임의로 지명한다. 이 때문에 주요 언론사 기자에게 질문권이 많이 주어진다. 한국 대통령의 회견은 기자 한 명이 질문권을 받아 한 차례 질문하면 대통령이 이에 답변하는 방식이다. 청와대 기자실은 질문 기자를 추첨으로 정한다. 종합지, 방송사, 경제지, 인터넷 신문, 지방신문 등으로 나눠 추첨하는 형식이다. 이 때문에 대통령의 답변이 미진해도 추가 질문을 할 수 없다.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에는 대부분 배석자가 없다. 백악관 대변인이 서서 지켜보는 정도다. 한국의 경우 박근혜 대통령이 올 1월 신년회견에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내각의 장관 전원, 김기춘 비서실장 등 청와대 수석비서관급 이상 참모 전원을 좌우에 포진시킨 것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배석자 없는 회견’은 대통령의 정치적 자신감을 드러낸다.
홀로 답변하는 모습 자체만으로 대통령이 국정 주요현안을 장악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정권의 중심은 역시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인상을 주는 데도 효과적이다. 박 대통령의 경우 회견에서 답변을 대신토록 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도 배석자를 둬 마치 잘 모르는 질문에 대비하는 듯한 불필요한 인상을 줬다.
미국 대통령 회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진지한 회견 중간중간에 유머와 이에 따른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유머를 중시하는 미국의 정치·사회적 문화와 관련된 것이지만, 효율적 회견을 위한 중요 요소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19일 백악관에서 열린 송년 기자회견의 경우 오바마 대통령은 “(며칠 앞둔) 크리스마스 선물로 여러분의 질문을 받겠다”는 말로 웃음을 자아내면서 시작했다. 회견은 아니지만 대통령의 웃음이 가장 큰 요소를 차지하는 대언론 접촉은 해마다 한 차례 열리는 백악관 출입기자단 연례 만찬장이다. 여기선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역대 어느 대통령도 웃음과 심지어 조롱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 대통령들은 대부분의 회견시간을 근엄한 표정으로 일관한다.
미국 대통령과 한국 대통령의 소통방식에는 차이가 많다. 정치 문화와 전통 차이가 주요 요인이다. 민주주의가 일찍부터 발달한 미국, 독재 정치와 권위주의 대통령을 겪어온 한국의 차이다. 미국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100여 년 전인 1913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 시절 시작됐다. 한국은 기자회견에서 자칫 본질적 내용보다는 말실수 하나가 더 크게 다뤄질 경우에 대해 걱정하는 분위기도 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천금처럼 무거워야 한다는 한국의 정치적 고정관념도 작용한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기자회견을 두려워하는 지도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것도 보수언론사 간부들로부터다. 한 논설위원은 박 대통령이 실정(失政)에 대한 언론의 추궁을 두려워하고 국정의 주요 쟁점을 설명할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기자회견을 하지 않는 이유로 또 다른 유력 보수신문 논설위원은 즉석 질문에 대처할 자신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은 모두 발언이 끝나고 질의응답이 시작되자마자 딴 사람이 된 듯 어눌해졌다. 모두 발언에서 스마트팜, 할랄시장 같은 전문 용어를 수두룩하게 나열하던 어휘력도 현격하게 떨어졌다. 역대급 재난인 세월호 사태 때도 대통령의 담화만 있었을 뿐 회견은 없었다. 국가재난인 메르스 사태 때는 아예 담화조차 없었다. 백악관 기자실을 옆방처럼 드나드는 오바마 대통령이 에볼라 사태 때는 언론으로부터 ‘훌륭한 대통령 연기’로 국민을 안심시켰다는 호평을 얻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한국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관련해서는 언론과 언론인의 자세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솔직하고 알찬 대통령 기자회견 방식과 내용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가 단순히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견해가 많다.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일부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질문은 불필요하거나 특정계층의 입장을 대변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했다. 설전에 가까운 기자회견까지는 아니더라도 비판정신과 날카로움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올 신년 회견은 모두발언조차 2014년 회견을 자기표절했다는 의혹을 샀다. 25분간 전달된 신년 정책 내용은 작년과 거의 동일했고, 경제·사회·문화적 정책 등 핵심내용은 작년과 유사하거나 반복된 문구가 사용되기도 했다. 작년 회견문 일부를 그대로 카피했다는 주장이 네티즌의 증거사진과 함께 올라오기도 했다. 실제로 소름이 끼칠 정도로 흡사한 문장이 많았다. 청와대 출입기자나 다른 정치부 기자들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이런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기자회견 기피사유에 관한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낮거나 대통령과 관련한 부정적 이슈가 증가할 때 대통령은 기자회견 횟수를 줄이는 경향을 나타냈다. 기자회견의 양식도 공동·공개 기자회견에서 단독·비공개 간담회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 준다. ‘성향적 회피’인 첫째 유형은 국정과 관련한 사안이 긍정적이라 하더라도 개인적 성향이 기자회견에 소극적인 경우다.
‘구조적 회피’인 둘째 유형은 개인적 성향이 적극적이고 대중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국정과 관련한 사안이 부정적일 때다. 세 번째 유형은 대통령 개인적인 성향이 기자회견을 싫어하고, 국정과 관련한 사안도 불리할 경우다. ‘성향적-구조적 회피’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우 성향적 차원과 구조적 차원 모두에 기인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미국 대통령들의 기자회견 횟수도 대통령의 이념성향 차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개별 성향 요인이 커 보인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기자회견을 가장 적게 한 대통령은 공화당 출신이지만 소통의 달인으로 널리 알려진 로널드 레이건이다. 8년간 46회였다.(외국정상과의 공동회견이 없었다.) 월평균 0.48회, 연평균 5.75회 꼴이다. 기자들과 가장 사이가 나빴던 리처드 닉슨도 이에 못지않다. 그는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중도 사임하기까지 5년7개월간 39회(월평균 0.59, 연평균 7.03회)의 기자회견을 열어 레이건에 이어 두 번째로 적은 기록을 남겼다.
그렇다고 보수정당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체질적으로 기피하는 것은 아니다. 조지 W. 부시의 아버지인 조지 H. W. 부시가 외국정상과의 공동회견 46회를 포함해 총 137회의 기자회견을 연 걸 보면 보수와 진보 정권의 차이만은 아닌 듯하다.<UC 샌타바버라대학의 ‘미국 대통령 프로젝트’(The American Presidency Project)에 따르면 외국정상과의 공동기자회견은 아버지 부시 때부터 관행화했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오바마 대통령의 소통 스타일이 박근혜 대통령보다 정책 수행에 플러스 요인이 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글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WE-KOREANS 2015년 8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