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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문명이 파라다이스인가

입력 : 2008-11-28 17:34:48수정 : 2008-11-28 17:34:56


“슬픈 열대는 우리의 문명을 돌이켜 비춰주는 슬픈 자화상과 같다. 탐욕의 세상, 물질적 풍요의 세상이 결국 인류를 불행으로 몰아가는 비극적 파라다이스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슬픈 열대’란 이름의 국내 사진모임이 낸 두 번째 작품집 <슬픈 열대 회상 그리고>에 나오는 구절이다. 열명으로 이루어진 ‘슬픈 열대’ 모임은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의 명저 제목이자 세상 읽기의 방식을 빌려온 것이다. ‘모든 사진은 해석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바라본 세상은 카메라 너머의 슬픈 운명적 자화상과 교감한다. ‘슬픈 열대’는 존재와 삶의 뒷면을 통찰하고 물질문명의 세계에서 만인이 잃어버리고 사는 슬픈 모습을 사진 이미지와 글로 표현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보다 앞서 열대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사랑했던 ‘고귀한 야만인이자 서구 문명의 이단아’ 폴 고갱(1848~1903)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화가 고갱의 생애와 미술세계를 원색의 작품 사진과 함께 보여주는 <폴 고갱: 슬픈 열대>는 레비-스트로스와 동류의식을 느끼게 한다. 남태평양 타히티 원주민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들이 특히 그렇다. 문명세계를 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그 자연을 그림에 쏟아 붓고 싶었던 그의 삶을 들춰보면 그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는 인류학 여행기다. 남아메리카 아마존 열대우림지역의 원시부족 카두베오족, 보로로족, 남비콰라족, 투피 카와이브족의 삶과 문화가 오롯이 드러난다.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고갱이는 ‘이 세상에는 더 우월한 사회가 없다’ ‘서구의 시선으로 열대를 보지 마라’는 쓴소리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추장의 정치학’이다. 남비콰라족의 말로 추장은 ‘우일리칸테’다. ‘결속시키는 사람’ ‘통일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렇듯 ‘우일리칸테’는 자신의 후계자 선정을 비롯한 모든 사안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동족의 동의를 반드시 이끌어내야 한다. 동의 없는 일방적인 권력과 지배는 집단 해체의 위험을 초래하고 궁극에는 자신과 가족의 고립을 자초하기 때문이다.

추장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관대함과 솔선수범이다.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에게 베풂으로써 지위를 인정받는다. 그에게는 강제력을 수반한 권력은커녕 공식적으로 인정된 권한도 없다. 이를테면 탐험가 같은 외부인이 추장에게 준 선물은 며칠 안에 모두 동족 구성원들의 손에 넘어간다. 심하면 추장에게 할당된 물건조차 구성원들이 갖게 된다. 혼자 부를 축적하는 것은 능력 없는 사람이란 방증이다.

심지어 가축에게도 인간과 동등한 관심과 애정을 베푼다. 사람의 식량이 부족하더라도 가축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게 이들의 문화다. 남비콰라족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에게는 관대함이 권력의 본질적 속성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독화살을 만드는 것 같은 위험한 일도 솔선해서 도맡아야 하고, 노래와 춤으로 동족의 단조로운 일상이 지루하지 않게 해줄 능력과 의무도 지닌다. 대개 가장 가난한 사람 중에서 추장이 되고 존경받는 전통이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슬픈 열대>는 원시적인 것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거나 구조주의적 방법론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받지만 고유문명의 파괴에 대한 경종 같은 고전인 것만은 분명하다. 레비-스트로스가 건강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지만 어제(28일) 100세 생일을 맞았다는 소식에 그의 명저를 추억 속에서 불러내 봤다. “문명이 숲을 거둬갈 때 비극은 시작된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라는 절규에 가까운 그의 경구를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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