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눈을 뜨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소크라테스처럼, 볼테르처럼, 갈릴레오처럼, 칸트처럼...” 100살을 맞을 때까지 명석한 두뇌를 잃지 않았던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프레촐리니는 그의 저서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생애’를 이렇게 시작한다.
500여 년 전의 마키아벨리를 서슴없이 ‘나의 친구’라고 부르는 베스트셀러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여기에다 한마디 덧붙인다. “그러나 그 당시 눈을 뜨고 태어난 것은 마키아벨리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후세는 그 시대 유럽의 다른 나라들을 중세라고 부르는 것과 구별해 같은 시대의 이탈리아를 르네상스라고 부르게 된다.” 걸출한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1469~1527)가 정치를 윤리와 도덕에서 분리한 혁명적 사색은 르네상스가 신에서 인간을 독립시킨 일과 무관하지 않음을 적확하게 꿰뚫은 통찰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오랜 세월동안 정치는 윤리나 도덕과 같은 것이었다. 최선의 정치형태는 철학자가 다스리는 ‘철인정치’라고 설파한 플라톤의 말이 신봉대상인 시대였다. 중세에 접어들어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철학자들이 기독교의 생각까지 덧붙이자 정치사상은 점점 더 하늘에 떠 있는 이상주의로 변해갔다. 마키아벨리와 동시대인인 토머스 모어조차 “정치란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은 ‘비르투스(덕)’의 문제”라고 갈파했을 정도다.
공자와 맹자 이래의 동양사회도 정치를 도덕 아래에 두긴 마찬가지였다. 보다 더 도덕적인 사회로 만드는 것이 정치의 요체이자 사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군주의 최고 미덕은 덕치였다. 누구나 너그럽고 어진 왕을 이상적으로 묘사했다.
그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정치 행위가 윤리적 가치나 종교적 규율로부터 결별해야 한다’며 반기를 들고 나온 이가 마키아벨리다. 그의 대표작 ‘군주론’(원제 Il Principe)은 냉혹한 현실에 바탕을 둔 정치를 역설하며 근대 정치학의 문을 연 저작으로 꼽힌다. 마키아벨리가 현실주의 정치사상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도 바로 ‘군주론’때문이다. 이상적인 군주는 착하고 어진 군주가 아니라 때로는 냉혹하고, 필요하다면 군주 스스로 약속을 어기기도 해야 한다는 점을 마키아벨리는 부각시켰다. 이 때문에 그는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달갑잖은 별명을 얻었다. 동양에서는 ‘서양의 한비자’란 별칭도 따라다닌다.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군주는 여우의 지혜와 사자의 힘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비유일 게다. 널리 알려진 18장의 핵심은 이 대목이다. “나는 야수 중에도 여우와 사자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자만으로는 덫으로부터 몸을 지킬 수 없고, 여우만으로는 이리로부터 몸을 지킬 수 없으나, 여우임으로써 덫을 피할 수 있고, 사자임으로써 이리를 쫓아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우적인 성질은 교묘히 사용되어야 한다. 아주 교묘히 속에 감추어놓은 채 시치미를 뚝 떼고 의뭉스럽게 행사할 필요가 있다.”
마키아벨리는 국민으로부터 사랑 받는 것보다 무섭게 여겨지는 편이 군주로서 안전한 선택이라고 권면한다. 인간은 무서운 사람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정없이 해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란다. 두려운 지도자는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고, 사랑받는 지도자는 국민정서에 부합해 인기를 얻고자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엄중하게 경계해야 할 일은 경멸당하거나 얕잡아 보이는 것이라고 상기시킨다.
<마키아벨리 초상화>
기억해 둘만한 부분을 몇 가지만 더 간추려 보면 이런 것들이 있다. 군주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좋은 성질을 다 아울러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런 여러 가지 덕목을 가진 것처럼 보일 필요는 있다. 온정이 넘치고, 신의를 존중하고, 인간성이 풍부하고, 공명정대하고, 신앙심이 두터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버려야 할 때는 완전히 정반대의 것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도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어야 대중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신의에 어긋나는 행위도 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자비심을 버려야할 때도 있다. 인간성을 한쪽에 밀쳐놓고, 깊은 신앙심도 부득이 잊어야 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좋은 일을 하면 사람들의 질투심도 자연히 사라지겠지 하고 바라서는 안 된다. 사악한 마음은 아무리 많은 선물을 해도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측근들이 유능하고 성실하면 그 군주도 총명하다고 할 수 있다. 신중하기보다는 과감한 편이 낫다. 운명의 신은 여신이라 그녀에 대해 주도권을 쥐려면 난폭하게 다룰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민중의 기분은 매우 동요하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그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나, 그 지지를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특권층의 지지는 서민층의 지지보다 약하다. 오로지 선의만 가지고서는 결코 백성들을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힘이 없는 선은 악보다 못하다.
세심하게 따져보면 마키아벨리가 군주에게 요구하는 건 냉혹함과 잔인함이 아니라 확실한 권력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의 3가지 덕목으로 ‘역량’(비르투), ‘행운’(포르투나), ‘시대적 요구’(네체시타)를 꼽았다. 인간의 심성, 군중심리의 본질, 조직의 성격, 리더십, 통치기술 등에 걸쳐 핵심을 꿰뚫는 마키아벨리의 통찰력은 비범하다. 중요한 사실은 이 같은 지혜가 추상적인 사유가 아니라 현실 체험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사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에 잘 보여 관직에 다시 진출하기 위한 개인적 욕구 때문에 썼다.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 전하께 올리는 글’이라는 헌정사가 붙어 있다. 불행하게도 로렌초 데 메디치는 ‘군주론’을 들춰보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군주론’의 모델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자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전제군주인 체사레 보르자였다. 로렌초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교양이 낮고 자기 야망을 실현하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체사레 보르자>
마키아벨리에 관한 가장 큰 아이러니는 그의 처세를 보면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점이다. 물론 마키아벨리에게 공직추방이라는 불행이 덮치지 않았던들 ‘군주론’은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단테에게 추방이 없었더라면 ‘신곡’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사마천이 궁형을 받지 않았으면 ‘사기’가 쓰이지 못했을 것이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하지 않았으면 ‘목민심서’ 같은 대작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가정과 맥을 같이한다. 마키아벨리는 관직으로선 ‘피렌체 서기관’에 불과했지만, 스스로 역사가, 희극작가, 비극작가라고 했을 만큼 문재(文才)가 탁월했다. 그가 쓴 희곡 ‘만드라골라’는 당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작품보다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군주론’만큼 이해보다 오해를 더 많이 받은 책도 드물다. 500여 년 동안 마키아벨리파와 반 마키아벨리파 사이에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책은 추앙받는 한편, 수없이 해석되고, 반박을 받으면서 역사를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수난도 숱하게 많았다. 교황 바오로(파울루스) 5세는 1559년 ‘군주론’을 포함해 마키아벨리의 모든 저작을 금서로 지정한다. 선량한 기독교도에게 해로운 요설(饒舌)이라는 이유에서다. 바티칸이 이 책을 금지한 진짜 이유는 치밀하게 서술된 지배자의 어두운 이면과 실체가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정신적 지배계층인 교황과 성직자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혁명적인 사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금서가 그러하듯 금서조치는 도리어 ‘군주론’과 마키아벨리의 성가를 드높여주었다.
계몽군주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마키아벨리는 틀렸다. 국가보다는 국민의 행복이 중요하다”며 스스로 ‘반(反)마키아벨리론’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즉위 20년이 지나 경험이 쌓이자 “마키아벨리가 옳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대 영국 극장의 무대에서는 ‘마키아벨리주의자’를 그 간계를 당할 수 없는 악당의 총합으로 그렸다. 비판론자들은 ‘군주론’에 담긴 사상을 ‘권력 확대라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술’로 해석하고,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정치용어까지 만들어 붙였다. 이들은 무솔리니, 히틀러, 스탈린, 카스트로, 레닌 같은 독재자들이 광적인 애독자였으며, 나폴레옹이 이 책을 침대 옆에 놓고 잤다는 소문을 한층 부풀려 부정적인 이미지로 윤색하기도 했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피렌체>
18세기 무렵부터는 긍정적인 평가가 많은 편이다. 계몽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군주론은 공화파의 보전(寶典)”이라고 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양면의 거울로 삼아 군주를 가르치는 체하면서 인민에게 중대한 교훈을 주려했다고 본 것이다. 독일 역사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는 마키아벨리가 국가이성의 본질을 최초로 발견한 인물이라고 호평했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립멤버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무솔리니정권에 체포되어 수감 도중 ‘군주론’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가져야 할 모습을 발견하고 ‘마키아벨리에 관한 주석’을 남겼다. “성경 대신 ‘군주론’을 품고 다닌다”는 비판을 받았던 리슐리외 추기경은 마키아벨리가 강조한 국가이성을 왕국의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려 했다.
‘군주론’은 오늘날에 와서 국제정치와 기업경영에 활용되는 경향이 짙어졌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외교정책에서 ‘군주론’의 현실주의 정치노선을 철저히 추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자신의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 개념을 ‘군주론’ 가운데 사랑과 두려움의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군주론’은 선거에서 유권자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국내 정치 영역보다, 기업이나 조직의 경영에서 유행처럼 응용되곤 한다. 경제·경영 영역은 군주적 냉혹함을 미덕으로 삼아 펼치는 글로벌 무한 경쟁 시대이기 때문인 듯하다. 뿐만 아니라 긍정적·부정적 평가가 엇갈리는 논란 속에서 인간관계 처세서로도 부쩍 각광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 1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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