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1년 만에 다시 열린 남북 정상 회담의 최대 수혜자는 평양냉면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 회담 만찬 식탁에 오를 ‘옥류관 평양냉면’을 모두 발언에서 언급하면서 큰 화제가 되었고, 바로 그날부터 점심과 저녁에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의 유명 냉면 가게 앞이 장사진을 이뤘기 때문이다. 한 카드회사가 통계 자료를 통해 회담 직후 사흘 동안 서울 시내 평양냉면 가게 매출이 전 주보다 80% 이상 늘어났다고 밝혔을 정도였다.


 평양냉면의 폭발적 인기 속에서 주목받는 곳이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수석 요리사를 동반하고 온, 바로 그 옥류관에서 평양냉면 비법을 배운 탈북민 요리사 윤종철 씨가 경영하는 동무밥상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 이 집은 이번 신드롬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맛집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평양의 옥류관 냉면 맛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평일 점심시간에는 1시간 넘게 순서를 기다려야 할 만큼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상 회담을 계기로 더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더욱 바빠진 윤종철 씨를 서울 합정역 부근에 있는 동무밥상에서 만났다. 점심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식당은 아직 붐비고 있었다. “가게 규모에 비해 원래 손님이 많았지만, 남북 정상 회담 덕분에 갑자기 더 늘어났습니다. 국내 언론은 물론 일본, 필리핀 같은 외국 방송사까지 우리 식당을 취재하고 싶다고 합니다.”


 함경북도 온성이 고향인 윤종철 씨는 1998년 탈북해 2000년 한국에 왔다. 평양 옥류관에서 음식을 배운 이력이 있는 그는 2015년 서울 합정동에 ‘동무밥상’이란 음식점을 열어 북한 음식을 내고 있다.

                                                                              

 

 남북한 평양냉면의 차이

 

 동무밥상에서 평양냉면만 팔지는 않는다. 메뉴판에는 오리 불고기, 명태 식해, 찹쌀 순대, 감자 만두, 옥수수 국수 같은 다양한 북한 향토 음식이 적혀 있다. 하지만 역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평양냉면이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 음식 하면 자연스럽게 평양냉면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이다.

 평양에서는 옥류관, 청류관, 고려호텔, 민족식당이 4대 냉면집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옥류관 냉면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윤 씨는“고급 인력이 있어서”라고 대답했다.

 “북한에서는 뭐든 잘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은 전부 평양에 보내져요. 요리 좀 한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이들이 모인 곳이 1961년 김일성 교시로 만들어진 옥류관입니다.”

 윤 씨는 자신이 만드는 모든 음식에서 평양 최고의 식당인 옥류관의 맛을 재현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냉면을 만들 때도 남한의 평양냉면집들과 달리 옥류관 식으로 소 잡뼈와 양지, 꿩고기, 닭고기를 우려낸 냉면 육수를 돌과 숯, 모래가 담긴 여과기에서 한 번 걸러 낸다. 간장은 양파, 대파, 사과, 배를 넣고 달여 낸다. 그런데 윤 씨는 “옥류관 평양냉면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고 싶지만,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해 아쉽다”고 털어놓았다.


 첫 번째 이유는 육수와 간장을 만드는 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 대동강과 남한 한강의 물맛이 다르다고 강조하는 그는 “옥류관이 금강산에도, 중국에도 생겼지만 물이 달라서 냉면 맛이 다 조금씩 다르다”고 전했다. 동무밥상의 냉면은 반죽의 재료 배합 비율에서도 차이가 난다. 메밀 함량이 60~70%에 이르는 서울의 유명 냉면집들과 다르게 메밀 비율은 40%로 낮고 대신 고구마 전분이 40%, 밀가루가 20% 들어간다. 그래서 면발을 씹어 보면 연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옥류관 냉면의 국수는 메밀 40%에 감자 녹말이 60%”라면서 자신도 개업 초기에는 옥류관과 동일한 비율로 면을 뽑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면발이 질기다면서 가위로 잘라 먹는 손님들 때문에 할 수 없이 녹말 비율을 줄이고 밀가루를 섞게 되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냉면을 포함한 국수 종류를 ‘명(命)길이 국수’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일에도 냉면을 먹고, 잔칫집에 가도 냉면을 줍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지요. 그런데 남한에 와서 보니 냉면을 가위로 잘라 먹어 깜짝 놀랐어요. 처음에는 면이 쫄깃쫄깃한 이유를 자세히 말씀드렸는데, 제 얘기를 불쾌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어서 설명을 안 하기로 한 대신 반죽에 밀가루를 섞었지요.”

                                                                                

 

 그는 또 옥류관에서는 소화를 돕는 식소다를 반죽에 넣지만 자신은 넣지 않는다면서 그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는 남한 사람들은 식소다를 넣으면 안 먹어요.”


 식소다로 인해 옥류관 냉면이 칡냉면에 가까운 검은 색이 나는 것과 달리 동무밥상의 냉면이 연회색으로 바뀐 것은 바로 그 차이 때문이다.


 남측예술공연단 일원으로 평양에 갔다가 옥류관 평양냉면을 처음 맛본 가수 윤도현(尹度玹)은 “옥류관에서는 종업원이 직접 면을 젓가락으로 들어 식초를 뿌려 준다. 우리처럼 육수에 직접 식초를 넣지 않는 게 특이하게 느껴졌다”고 소개한 바 있다. 윤종철 씨는 남북 음식 문화의 차이를 받아들여 식초와 겨자는 손님들의 취향대로 넣도록 하고 있다. 동무밥상에서는 냉면 상차림에 평양 백김치, 함경도 콩나물김치, 양강도 양배추김치가 함께 나오는데 이 또한 윤 씨의 배려다. 손님들이 북한의 명물로 소문난 김치를 골고루 맛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다.

 
   남한 평양냉면 맛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동무밥상 냉면에 처음에는 “심심하다”거나 “밍밍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럼에도 손님들이 이 집의 냉면 맛에 한번 빠지면 단골이 된다고 하는데, 그 비결은 아무 양념도 치지 않고 수저로 홀짝거리며 계속 떠먹게 되는 육수 맛 때문이란다.

                                                                  

소중한 북한 음식의 원형

 

 함경북도 온성이 고향인 윤 씨가 평양의 옥류관에서 요리를 배운 데는 당 간부였던 아버지의 덕이 컸다. 할아버지가 일제 강점기에 일식 요리사로 일했던 경력이 자칫 흠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당 간부를 지낼 만큼 출신 성분은 괜찮았다. 그 덕분에 윤 씨는 군에 입대한 뒤 당의 배려로 전문 취사병 교육을 받게 됐고, 교육을 받으러 간 곳이 바로 옥류관이었다.

 그곳에서 4개월 정도 요리를 배운 뒤, 군 간부 전용 식당의 요리사로 배치됐다. 10년 넘게 북한군 장성급 전용 식당에서 고향이 각기 다른 장성들이 제각각 주문하는 요리들을 만들다 보니 여러 지역의 음식을 두루 익힐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머릿속에 북한 음식 레시피가 수백 가지는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렇게 다양한 레시피를 익힌 그는 제대 후에는 회령경공업전문학교에서 발효 공부를 해 된장, 간장 같은 발효 식품이나 사이다를 만드는 방법을 익혔고, 강의도 했다. 평양에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이따금 불려가 요리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던 1998년 탈북한 그는 중국을 거쳐 2000년 한국으로 왔다. 정착 초기에는 건설 현장 일용직부터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남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2013년 한 음식 문화 행사에 참석한 윤 씨는 북한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이 체험한 옥류관 요리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요리 스튜디오 ‘호야쿡스’ 이호경 사장의 도움으로 3일짜리 ‘팝업 스토어’를 차릴 수 있었고, 고객들 호응이 좋아 2015년부터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은 윤종철 씨는 남쪽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굳이 가위로 자르지 않아도 먹기 편하게 전분과 밀가루의 조합을 만들어 냈고, 지나치게 많은 양념을 써서 먹은 후에 계속 갈증을 일으키지 않도록 레시피도 개발했다. 그의 진심과 솜씨가 소문이 나자, 손님들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자 옥류관 냉면의 비법을 전수받으려는 사람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고, 프랜차이즈를 하자는 제의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잘라 버린다고 한다. 만약 돈을 더 벌기 위해 그런 방식을 택하게 되면, 옥류관 식 평양냉면을 비롯한 북한 음식의 원형을 고수하기 위한 자신의 철칙이 변질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음식이 맛있다는 표현을 ‘딱 소리 난다’고 합니다. 동무밥상 냉면이 옥류관 냉면 못지않게 맛있다는 걸 통일이 되면 북녘 동포들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도 그런 유혹을 이겨 내고 싶습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행하는 계간 KOREANA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Pyongyang Cold Noodles
A Taste of Unity


Kim Hak-soon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 great beneficiary of the inter-Korean summit on April 27, despite all its fanfare, turned out to be Pyongyang naengmyeon. The meeting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11 years. But with no major breakthrough in North Korea’s denuclearization reported, South Koreans’ interest turned to what was eaten rather than what was said. 

  After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an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un dined on the cold noodles, long lines immediately formed at the most well-known South Korean restaurants featuring the dish, which became the top searched keyword online. In the three days after the summit, sales at Seoul restaurants specializing in Pyongyang naengmyeon exceeded that of the previous week by more than 80 percent, according to one credit card company.

  Kim said a chef from Okryu-gwan, the best restaurant in the North Korean capital, prepared the naengmyeon. That turned the spotlight to Dongmu Bapsang owned by Yun Jong-cheol, a former trainee at the North Korean restaurant who defected to the South in 2000.


 Food critics and a TV show about gourmet dining had already noted the small, unassuming restaurant run by Yun and his wife. Yet it was the summit that turned the restaurant into an overnight sensation, with media and word of mouth assuring diners that Dongmu Bapsang duplicates Okryu-gwan’s Pyongyang-style naengmyeon. Customers stood in line for more than an hour at lunchtime.
 

  I met Yun at his restaurant, which stands on a side street near Hapjeong subway station, in Mapo District, Seoul, just north of the Han River. The restaurant was still bustling long after the lunch crush. “My restaurant was busy with customers before. But their number soared after the summit. Even Japanese and Philippine TV crews, as well as TV crews here, want to make reports on my restaurant,” Yun said.

 

The Menu, Common to Royal

 

 Yun tries to recreate the taste of Okryu-gwan in his menu, but he is mindful of South Koreans’ palate and makes adjustments accordingly. Little seasoning is required in recipes that he has developed. 

  His array of dishes offered includes everyday fare such as duck bulgogi, fermented pollack, glutinous rice sundae (Korean blood sausage), potato dumplings and corn noodles. But the menu also has elaborate dishes that appeared on the table of royals. Such delicacies must be ordered in advance. There is also a variety of North Korean-style kimchi to be relished, including Pyongyang-style white kimchi, Hamgyong Province-style bean sprout kimchi, and Ryanggang Province-style cabbage kimchi. But Pyongyang naengmyeon is undoubtedly the most popular dish at the restaurant. This should come as no surprise at all. Whenever South Koreans think about North Korean dishes, it is Pyongyang naengmyeon that instantly comes to mind. 


 Besides Okryu-gwan, there are three other well-known naengmyeon restaurants in Pyongyang - Chongryu-gwan, Koryo Hotel and Minjok Sikdang - but Yun matter-of-factly said Okryu-gwan has the best naengmyeon chefs. “In North Korea, all talented people are sent to Pyongyang. Okryu-gwan, a restaurant built at the regime founder Kim Il-sung’s instruction in 1961, is where the best chefs are working.”

 

Broth & Noodles

 

 The broth for Yun’s naengmyeon is made with cattle bones, beef brisket, pheasant meat and chicken. And unlike other Pyongyang naengmyeon restaurants in South Korea, Yun applies a finishing touch by straining the broth through a filter made up of stones, charcoal and sand - just as Okryu-gwan does. He also boils soy sauce with onions, scallions, apples and pears. Still, Yun won’t claim that his naengmyeon is exactly the same as that served at the top Pyongyang restaurant. “It’s a pity that I can’t perfectly recreate the Okryu-gwan naengmyeon here,” Yun said. The main reason is that South Korean water used for the broth and soy sauce taste different from North Korea’s.

 “Okryu-gwan has branches at Mt. Kumgang (North Korea) and in China. But their naengmyeon tastes slightly different from each other,” he said.

 The composition of the noodles at Dongmu Bapsang also differs from other restaurants. At other well-known naengmyeon restaurants in Seoul, some 60 to 70 percent of the noodle is buckwheat. Yun uses a 40:40:20 ratio of buckwheat to sweet potato starch to flour. That makes his noodles less sticky. 


 Okryu-gwan’s buckwheat to potato starch ratio is 40:60, according to Yun. He used that ratio when he opened his restaurant toward the end of 2015. But he began to use less starch and more flour after he saw his customers cutting his noodles because of their stickiness.

 “People in North Korea call all kinds of noodles ‘long-life noodles,’ because long noodles refer to a healthy long life. That’s why guests are served with naengmyeon at birthday parties or wedding receptions. I was stunned to see South Koreans eat their naengmyeon after cutting the noodles with scissors.” Yun said.

 “At first, I tried to explain to customers why my noodles were sticky. But unfortunately, I found some of them feeling displeased with my explanation. So, I stopped trying to persuade them. I decided instead to add more flour to the dough.”

 Another departure from Okryu-gwan is the use of baking soda. Its chef adds it to dough, believing that it is good for digestion. South Koreans are health-conscious, but they don’t like noodles cooked with baking soda, Yun observed. Baking soda makes Okryu-gwan’s naengmyeon blackish brown just like kudzu starch noodles, but Dongmu Bapsang’s naengmyeon is pale gray. 
 

 Besides differences in the texture and appearance of the two restaurants’ naengmyeon, how customers enjoy the cold noodles differs. Rock singer Yoon Do-hyun had Okryu-gwan’s naengmyeon when he was in Pyongyang in early April to perform concerts. He said, “I saw waitresses pick up customers’ noodles with chopsticks themselves and sprinkle vinegar on them. This is different from the way we do it. We put vinegar directly into the broth.”

 Yun isn’t fussy about how his customers wield vinegar and mustard bottles; they attack their bowls of cold noodles any way they want. He has accepted the difference between the dietary cultures of the two Koreas.

  Some customers, familiar with the taste of South Korean-style Pyongyang naengmyeon, initially use words like “bland” or “insipid” to describe Dongmu Bapsang’s naengmyeon. But they quickly become regular patrons once they are accustomed to the taste. They even enjoy sipping the broth without adding any seasoning. 
 

 A native of Onsong, North Ham-gyong Province, Yun trained at Okryu-gwan thanks to his father who was a senior official in the Workers’ Party. The fact that his grandfather was a chef of Japanese dishes during the last years of the colonial era could have been a black mark on his family name. But Yun’s father was promoted to a senior party position.

 

Journey Through Kitchens
 
 After Yun enlisted in the army, he trained as a culinary specialist at Okryu-gwan for four months and then was assigned to a mess hall for high-ranking army officers. There he stayed for over 10 years, absorbing the recipes of many regional dishes for the senior officers, who came from all corners of the country. “I have hundreds of recipes of North Korean dishes in my head,” Yun said.
 After his time in the army, Yun attended Hoeryong College of Light Industry, where he acquired fermentation techniques and learned how to make fermented foods like soybean paste, soy sauce and cider. Having mastered the techniques, he later delivered culinary lectures. At times he was even ordered to cook special foods at big events in Pyongyang. 

  Yun fled North Korea in 1998 during the “March of Hardship” period. He ultimately arrived in South Korea in 2000 via China. While trying to settle here, he did a myriad of odd jobs, including manual labor at construction sites. His break came in 2013 at a culinary event, where he described his experience at Okryu-gwan.

  His story captivated restaurateur Lee Ho-kyung of Hoya Cooks, a culinary studio in Seoul, and he helped Yun open a three-day “pop-up store.” It was an instant hit; he was convinced to open his own restaurant in 2015. 
 

 There is never a shortage of customers at Yun’s restaurant, as news of his sincerity and cooking techniques spreads through word of mouth. Many chefs also pay a visit to learn his naengmyeon recipe, and some restaurateurs have even proposed launching a franchise. The proposals are rejected immediately. Yun fears that his principle of upholding the original distinctiveness of North Korean dishes might be tainted if he accepts such offers.

 “In North Korea, people say ‘it’s as if a snapping sound is heard,’ when they find the food tasty. I want to overcome such temptation and prove to my compatriots in the North that Dongmu Bapsang’s naengmyeon is no less delicious than Okryu-gwan’s, when the two Koreas are finally reunified sometime in the future,” he said.


Posted by 김학순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 통계에 의하면 2017년 말 기준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 3만 1,000여 명 가운데 70% 가량이 여성이다. 이들 탈북 여성들이 겪는 인권 침해 중 가장 심각한 것이 성차별과 성폭력이다. 사단법인 ‘여성 인권을 지원하는 사람들’(이하 ‘여인지사’)은 이렇게 인권 침해로 고통 받는 탈북 여성들을 집중적으로 돕고 있다. 특히 가정 폭력, 성폭력, 성희롱, 성매매를 여성 인권을 침해하는 4대 폭력으로 규정하고 적극적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피해자들은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어디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해 고립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정착한 지 오래되지 않은 탈북 여성들은 특히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할 수 있는 공동체나 사회적 연대망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또한 피해자가 어렵게 용기를 내 문제 제기를 하고 고소를 하더라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안전과 비밀이 침해되거나 피해자가 도리어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사단법인 한국여성의전화(Korea Women’s Hot Line)에서 상담 전문가로 활동했던 김향순(金香順) 여인지사 공동 대표의 말이다. 이 단체가 성 관련 인권 침해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탈북 여성이 남한 여성보다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는 경우가 무려 10배 이상 많기 때문이다. 여인지사에서 탈북 여성들의 상담을 맡고 있는 이샘 씨는 이런 현상을 “인권에 대한 남북한의 인식 차이와 경제적 약자인 탈북 여성들의 절박한 환경이 만든 결과”라고 해석했다.

                                                                          

 

인권 침해에 대한 낮은 인식

 

  최근 국내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대한 탈북 여성들의 첫 반응은 의외다. 이들은 “어떻게 그런 걸 드러낼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북한 사회에서는 남성의 성폭력에 대해 관대한 문화가 있기 때문에 생긴 인식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익숙했던 탈북 여성들은 성폭력에 대한 대응에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은 “북한에서는 강간죄로 감옥에 갔다는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다”고 입을 모은다. 간통 사실이 발각돼도 여성은 부화방탕(浮華放蕩)했다는 비난을 받고 석 달 동안 노동단련대에 보내지지만, 남성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북한에서는 남성들이 체제 불만을 성적인 농담으로 푸는 일이 잦다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탈북 여성들은 법과 제도, 그리고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성희롱과 성폭력의 개념 차이를 이해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또한 대체적으로 남한 정착 과정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가정 폭력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 게다가 북한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정 폭력이 심각한 인권 침해라는 인식을 하지 못했었고, 남한에 와서도 관련법과 제도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성매매에 노출되는 탈북 여성들

 

 “성폭력을 비롯한 인권 침해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싶어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죠. 가해자들도 탈북 여성들의 취약점을 악용해 범행을 은폐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남북하나재단에서 발간하는 잡지 『동포사랑』의 기자이기도 한 이샘 씨는 그 자신도 탈북 후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10년 동안 가사 도우미 생활을 하다가 2011년 서울로 온 탈북 여성이다. 이샘 상담원은 자신이 담당했던 상담 사례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한 40대 탈북 여성은 모 기업 회장의 자택에서 오후 8시부터 오전 8시까지 12시간 동안 간병 일을 해 오고 있다고 한다. 다리가 불편하고 당뇨병을 앓고 있는 이 기업인은 야한 농담으로 성희롱을 하거나 몸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하는 사례가 잦았다. 참다못해 항의하면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그런 일이 지속됐다. 그럼에도 이 여성은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북한에 두고 온 딸을 남한으로 데려오기 위해 저축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다른 곳보다 보수가 높은 일자리를 차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탈북 여성의 성폭력 피해는 취업이나 결혼을 알선하는 과정에서 주로 발생한다. 일자리를 구해 주겠다거나 배우자를 소개해 주겠다면서 접근해 강제 추행을 저지르는 남성들이 적지 않다. 또 외롭게 살아가다 온라인에서 만난 남성과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과정에서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기만 하고 막상 결혼에는 실패하는 사례도 다수 접수되고 있다.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돈이라도 벌어야 하는 탈북 여성의 특수한 상황을 악용해 성매매로 유인하는 업주들도 있다. 당장 생활이 곤란한 일부 탈북 여성의 경우 “한국에서 성매매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란 그릇된 인식 때문에 성매매에 나서기도 한다.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성매매가 자본주의의 일반적 현상”이라고 가르치는 북한의 교육 탓이다.


 여성가족부 조사에 의하면 “남한에 정착하고 나서 성매매를 권유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탈북 여성이 전체의 30%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 권유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며, 취업 교육으로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인권 향상을 위한 프로그램들

 

  여인지사는 2016년부터 여성가족부 위탁 사업으로 북한 이탈 여성 상담 치유 전담 프로그램인‘찾아가는 상담’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전문 상담원이 참여하는 통합 지원 서비스도 시행하고 있다. 탈북 여성들의 심리적 안정을 돕기 위해 시작한 ‘찾아가는 상담’은 각기 다른 대상을 위한‘자조(自助) 그룹’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자녀 교육과 부부 관계 상담을 하는 주부 그룹, 직장 문화 애로 사항·후속 학업·과로 문제 등을 상담하는 직장 여성 그룹, 20~30대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대학공부 상담 그룹 등 3개 자조 모임이 있다. 이 가운데 ‘찾아가는 상담’ 프로그램에 곁들여지는 국내 여행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자유로운 여행에 갈증을 느껴온 탓이다.

 여인지사는 이밖에도 『알아 두면 좋은 여성 인권 지침서』, 『탈북 여성 지원 실무자를 위한 여성 폭력 예방 교육 매뉴얼』 등의 책자도 발간해 탈북 여성들과 탈북민 지원 기관에 배포하고 있다. 이들 책자는 여성 폭력 문제의 실상과 남북한 인식 차이, 대처 방법 등을 사례를 들어 꼼꼼하게 알려 준다. 이밖에 여성 폭력 예방 교육 영상물을 제작해 전국의 하나센터 등 탈북민 지원 기관의 현장 교육에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 이탈 여성의 일·가정 양립 지원을 위한 상담원 양성 과정 프로그램을 새롭게 운영하기 시작했다. 홍영희(洪英姬) 공동 대표는 “탈북 여성들이 현실적으로 겪는 일·가정 양립의 문제점과 직장 내에서 겪는 여러 갈등 형태를 상담할 수 있는 전문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게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남북한 여성 연대의 새로운 패러다임

 

 그런가 하면 여인지사는 탈북 여성 인권 지원 못지않게 남북 여성 연대의 새로운 틀을 만드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남북 여성 합창단 ‘여울림’을 2011년 창단했다. 여울림은 해마다 전국 합창제에 출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 이름에는 ‘여성들의 어울림’, ‘소리의 어울림’이라는 중의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합창단은 격주 토요일마다 노래 연습을 하는데, 현재 전체 단원이 35명이며 연습 때는 평균 25명이 참석한다. 60대 탈북 여성 합창 단원 김명화 씨는 “음악 문화와 발성법이 달라 처음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지만, 연습하면서 맞춰 나가고 있다”면서 “연습 후 회식을 통해 남측 여성들과 더욱 가까워져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합창단 지휘를 맡고 있는 최영실(崔永實) 전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는 “음악적 이질감을 가진 남북 여성들이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노래하는 과정은 거리감과 편견을 넘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최영애(崔永愛) 이사장은 “2012년부터 해마다 개최되고 있는 남북여성문화제가 주변화, 대상화된 탈북 여성들이 남한 사회에서 적극적 삶의 주체로 거듭나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면서 “남한 사회에서 탈북 여성들은 도와줘야 할 약자로만 인식되어 왔지만, 이제부터는 이들에 대한 취업 지원 같은 복지적 차원을 넘어 인권적 관점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여인지사는 2010년 대표적 여성 인권 운동가인 최영애 이사장의 주도 아래 설립됐다. 그는 ‘성폭력’이란 단어가 통용되기도 전인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를 만들어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다. 특히 여인지사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진보와 보수 인사들을 두루 아우르는 단체라는 점이 특징이다. 남한의 여성 인권 운동 단체 대표, 북한 여성 연구자, 탈북 여성들이 이 단체의 주역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8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 Human Rights, a New Perspective for Female Defectors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Ha Ji-kwon Photographer

 

 Women’s Human Rights Defenders provides legal assistance to female North Korean defectors, who often suffer human rights violations as they settle down in South Korea. The civic group also educates the women about sexual offenses, a subject with little public awareness in North Korean society, and helps them build mutual understanding and solidarity with South Korean women through various activities including seminars and choir performances.

 

  According to data from the Institute for Unification Education of the Ministry of Unification, women accounted for a whopping 70 percent of some 31,000 North Korean defectors who have arrived in South Korea as of late 2017. Not a few of the women fall victim to human rights violations. Women’s Human Rights Defenders (WHRD) specializes in helping them. The civic group pays particular attention to domestic violence, sexual assault, sexual harassment and human trafficking for the purpose of sexual exploitation, the most egregious crimes against women.

 “Victims feel frustrated because they don’t know where to turn to for help,” said Kim Hyang-soon, co-president of WHRD who used to be a counselor at the Korea Women’s HotLine. “Many female defectors, especially those who recently settled down here, have no community or social network in which they can confide. In many cases, victims fear if they take pains to raise problems or file charges, the subsequent investigations or trials will endanger their safety, jeopardize their privacy, or force them to quit their jobs.”

 WHRD’s focus on sex-related offenses against female defectors is driven by the fact that they are 10 times more likely to be victimized than South Korean women. Lee Saem, a WHRD counselor, blames the contrast on “a gap in understanding human right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n people and the desperate situation these women, an economically disadvantaged group, face here in the South.”

 

Low Awareness of Human Rights Abuses

 

 Differences in laws, systems and cultures between the two Koreas have formed dissimilar concepts of what constitutes sexual harassment and assault. Thus, the initial reaction of most women from North Korea to the #MeToo movement in South Korea and abroad is to ask, “How can one speak about such things in public?”

 The reason for such cautious attitude can be found in North Korean society, which tends to be lenient toward sexual assaults by men. After becoming acclimated to such social mores, North Korean women often react passively to acts of sexual violence. They say in unison, “I never heard of anybody jailed for rapes.” In adultery cases, women are normally sentenced to three months’ hard labor, but the male offenders are not punished. In addition, it is said that North Korean men frequently make sexual jokes and innuendos with impunity.

 Domestic violence is not recognized as a serious human rights violation in North Korea. After their arrival in South Korea, North Korean women’s prioritized needs are to survive and adapt, rendering it difficult for them to react to domestic violence. Furthermore, many lack sufficient access to information on related laws and support services.

At Risk of Sexual Exploitation

 

 “Even if they want to raise the issue of human rights violations, including sexual assaults, it remains difficult for them to do so. It’s a shame that offenders are able to cover up their crimes by taking advantage of female defectors’ vulnerability,” said Lee, who is also a reporter at Dongpo Sarang (Love of Compatriots), a magazine published by the Korea Hana Foundation. 
 

  Lee herself is a refugee who arrived in Seoul in 2011. After fleeing North Korea, she worked as a housemaid in Beijing and Shanghai for 10 years. She recounted the experience of a female defector whom she met as a counselor.

  The woman, in her 40s, worked as a caregiver at the home of a company chairman who suffered from leg pain and diabetes. She worked from 8 p.m. to 8 a.m. every day. The businessman sexually harassed her frequently by telling lewd jokes or touching her. He sometimes apologized for his actions when she protested but continued to harass her. Nonetheless, she could not afford to quit her job since her salary was high enough to save money to bring her daughter over from North Korea. 

 Sexual harassment and assaults predominantly occur when North Korean women pursue job or marriage opportunities. More often than not, men harass or rape them after approaching them under the pretext of finding them a job or a future husband. Some women meet men on dating websites, hoping to have a serious relationship. But the men they meet through those sites often assault them or renege on their marriage commitment.

 Some proprietors of illegal establishments lure female defectors into prostitution by taking advantage of their dire need for money to survive. Some of the women engage in prostitution with the mistaken belief that “it is not shameful to sell sex here in South Korea,” because they were taught back in the North that “prostitution is a common phenomenon of capitalism.”

 In a 2012 survey of 140 female North Korean defectors, commissioned by the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 every second woman said that “they have been asked to sell sex in South Korea.” The main reason they were approached was economic hardship due to a lack of opportunities for vocational training and self-help measures.

 

 Programs to Improve Human Rights
 
 Since 2016, WHRD has operated a counseling and healing program for female North Korean settlers at the request of the 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 which provides comprehensive support services coordinated by counselors. The program is designed to help the women become emotionally stable. It supports three self-help cohort groups: a group for housewives providing counsel on children’s education and marriage relationships; a group for office workers providing counsel on work culture, continuing education and fatigue from overwork; and a group for young women in their 20s and 30s providing counsel on college education. An affiliated program, dubbed “Travel Korea Project,” is particularly popular as most of the women have a deep desire to travel freely.

 WHRD also publishes pamphlets and creates educational videos for distribution to female North Korean settlers and support agencies such as regional centers across the country. The pamphlets include “Useful Guidelines on Women’s Basic Rights” and “Manual on Education for the Prevention of Violence against Women for Working-Level Officials Supporting Female Defectors.”

 They provide detailed information about violence against women and about differences of percep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nd how to cope with them. The educational videos explain how women can protect themselves from violence. 

  A new WHRD program aims at training counselors to help female settlers to achieve a better work-life balance. Hong Young-hee, co-president of WHRD, said, “The purpose is to systematically train experts who can give counsel on the work-life balance and conflicts at work - the issues these women experience on a daily basis.” WHRD also tries to build a framework of solidarity for South and North Korean women. To that end, in 2011, it launched a joint choir, “Yeoullim,” which has since participated in the annual national choir festival. The name carries a double connotation - “women in harmony” and “harmony of sounds.” The choir practices every other Saturday. On average, about 25 of its 35 members attend the practice sessions.

 

New Paradigm of Solidarity

 

 “We had difficulties at first because of differences in musical culture and methods of vocalization. But we’re narrowing the differences by practicing together,” Kim Myeong-hwa, in her 60s, said. “I’m happy because we’ve got more acquainted with South Korean women at the dinner table after practicing.”

 Choi Young-sil, a former professor of theology at Sungkonghoe University who serves as conductor, said, “The process of South and North Korean women listening to one another’s voices and singing together, despite their musical differences, is a good opportunity to increase mutual understanding by overcoming psychological distance and prejudices.”

 “A cultural festival of South and North Korean women, which has been held every year since 2012, has been a stepping-stone to help transform the marginalized North Korean women into masters of their own lives and active members of our society,” said Choi Young-ae, founder and chairwoman of the civic group. “In our society, they are merely regarded as a group of disadvantaged people in need of assistance. But from now on, we’d like to open up a new horizon from a human rights perspective rather than from the standpoint of subsistence and welfare, like helping them find jobs.”

 Choi Young-ae founded WHRD in 2010. She also established the Korea Sexual Violence Relief Center in 1991 and led the movement to improve women’s rights long before the term “sexual violence” became widely used. Remarkably, WHRD transcends ideologies and comprises progressive and conservative members and supporters. Its leading members include a representative from a South Korean women’s rights organization and a researcher in North Korean women’s affairs, as well as North Korean women.

 


Posted by 김학순

 

 골목마다 러시아어 간판이 즐비하다. 행인들의 대화에서도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더 많이 들린다. 중앙아시아에서 살다가 조국으로 이주한 동포들이 모여 사는 ‘고려인 마을’이 자리 잡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의 풍경이다. ‘고려인’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러시아로 이주한 한국인들의 자손들을 가리킨다.


 독립국가연합(구 소련)에 살고 있는 한국계 교포들을 통틀어 ‘고려인’이라 부른다. 이들은 100년 전 러시아로 이주한 한국인의 후예인데, 3~5세대를 거치면서 최소한 세 번 이상 디아스포라의 비애를 경험했다. 20세기 초반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1세대는 스탈린 시절 일본 스파이로 의심된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당해야 했다.


 2개월 만에 총 17만 1,781명의 한국인(3만 6,442 가구)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강제로 이주했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질병과 영양 실조 등으로 4만 명이 사망했다. 낯선 황무지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이들의 후손은 1991년 소련 해체 후 중앙아시아에서 또 다시 차별을 겪어야 했고, 견디다 못해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한국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현재 한국에 거주 중인 고려인은 4만여 명에 달하고 그중 4,000여 명에 이르는 고려인들이 광주 월곡동에 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원룸 같은 협소한 곳에 살면서 제조업체 직공이나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문학대학과 의과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쳤던 시인 김블라디미르 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김 씨는 부인과 딸, 아들, 손자 등 일가족 10여 명과 함께 2011년 무작정 한국행을 선택했다. 광주에 고려인 마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다.


 김 씨처럼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온 고려인들은 대개 광주 내 산업단지와 인근 농공단지에서 일용직으로 일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일터와 가깝고 집값이 싼 원룸 촌에 거주지를 마련하게 되었고, 월곡동은 그렇게 고려인 마을이 되었다.

                                                                                      

 

 마을의 터전을 닦다
 
 이곳의 고려인들은 낯선 환경과 곤궁한 경제적 여건에 처해 있지만, 끈끈한 공동체 정신으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일궈나가고 있다. 협동조합을 만들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가 하면 주민지원센터, 지역아동센터, 상담소, 쉼터, 마을 방송국 같은 각종 지원 공간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활기차게 삶의 터전을 다져가고 있다.

 유입 인구가 늘면서 자영업 성공 사례도 늘고 있다. 러시아어로 가족을 뜻하는 ‘시먀’란 이름의 카페에서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주식인 누룩빵과 꼬치구이를 만들어 판다. 전발레리 씨가 2015년 1호점을 낸 이래 큰딸과 아들 부부가 4호점까지 낸 이 가족 카페는 고려인 마을에 생겨난 최초의 맛집이란 평가를 얻었다. 그런가 하면 허아나스타시야 씨가 2017년 10월 개업한 유럽 스타일의 카페 ‘코레아나’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 성공한 자영업자들이 늘면서 음식점, 여행사, 환전소, 기념품 가게 등 30여 개 점포가 들어선 ‘고려인 마을 특화거리’까지 생겨났다.

 이곳에 고려인들이 터전을 잡기 시작한 것은 마을의 산파역을 맡은 고려인 3세 신조야 씨가 한국 땅을 밟은 2001년 무렵부터다. 공장에서 일하던 신 씨가 월급이 체불되자 새날교회 이천영(李天永) 목사에게 도움을 청한 게 계기였다. 이후 신 씨는 이 목사의 도움으로 2005년 월곡동에 ‘사단법인 고려인 마을’을 설립하고,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고려인센터를 열었다. 2007년부터 중국 동포와 고려인 동포에게 합법적 체류의 길을 열어 준 방문취업비자가 발급되자, 이로 인해 광주를 찾는 고려인의 수도 급증했다. 고려인들이 유독 이곳에 몰려드는 까닭은 간단하다.

 고국이 낯선 이들에게 쉼터는 물론 숙식과 통역 등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입소문이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고충을 자기 일처럼 처리해 주는 해결사 신조야 씨 덕분이다. 그래서 신 씨의 별명은 ‘고려인의 대모’다. 이곳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은 “조야 엄마가 없으면 우린 못 살아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신 씨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고려인들의 전화번호만 2,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또 신 대표와 2008년 결혼한 남편도 이주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탈북민이어서 고려인들의 든든한 동지가 돼 주고 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맞춤형 한국어 교육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고려인이 아무리 똑똑해도 낮은 대접밖에 받지 못해요. 대학교를 두 곳이나 졸업해도 취직을 못합니다.” 신조야 씨의 말이다. 그녀는 고향에서는 생계를 이어가기가 너무 힘들어 할아버지의 조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고려인 3세 정스베틀라나 씨도 신 씨와 같은 이유로 이곳에 왔다. “여기 와서 세탁기 조립 공장에 들어갔어요. 일요일에는 식당에서 그릇을 닦고, 그렇게 돈을 모아 원룸 보증금 50만 원을 만들었죠.”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자국어 쓰기와 자국민 우선 정책을 펴는 바람에 러시아어만 할 줄 아는 고려인들은 점차 사회적 약자로 밀려났다. 그런데 언어로 인한 차별 때문에 고향을 떠난 고려인들이 조국에 와서도 부딪히는 가장 큰 걸림돌은 언어다. 비자 문제 등으로 관공서를 찾아가서 공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물론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소소한 일상도 한국어가 서툰 이들에게는 넘어서기 어려운 장벽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고려인 마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업이 바로 교육이다.

 조선족 같은 중국 동포나 동남아 노동자들은 대개 혼자서 돈을 벌러 오지만, 고려인들은 가족 단위로 3대가 함께 들어오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에 자녀 교육 문제에 더욱 정성을 들인다. 이곳에서 고려인 교육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 한국 최초의 다문화 대안학교인 새날학교다. 2007년 개교한 이 학교는 2011년 학력인정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무상 교육기관이자 초·중·고 통합형 대안학교로 인성교육을 중시하여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하다고 한다. 이 학교는 고려인 마을을 탄생하게 한 또 다른 주역인 이천영 목사가 이끌고 있다. 신조야 씨가 고려인 마을의 ‘대모’라면 이 목사는 ‘대부’인 셈이다.

 고려인 마을의 한국어 강좌는 여러 기관에서 수준별, 시간대별로 나눠 진행한다. 수강생이 늘어나 현재 성인을 위한 기초반, 중급반, 고급반 등 3개 반과 최근 이주한 청소년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도 운영되고 있다. 주말 근무와 야근으로 시간을 낼 수 없는 동포를 위한 고려FM 방송 강좌는 일을 하면서도 들을 수 있어 반응이 좋다고 한다.

 또한 2013년 문을 연 아동센터에서는 초·중·고생들을 위해 방과 후에 한국어, 영어, 수학, 러시아어 쓰기, 예능 학습을 지도하며 축구와 기타도 가르친다. 2012년 개관한 어린이집은 맞벌이 부부 가정의 어린이들을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맡아 한글 학습, 문예 활동, 운동을 지도하고 급식과 간식도 제공한다. 2017년 7월부터는 초등학교 과정의 주말 러시아학교가 운영되고 있는데, 고려인 자녀들은 한국어와 러시아 두 개의 언어를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출생지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지만, 한국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러시아어를 잊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미디어, 공동체를 지탱하는 중심축

 

 고려인 종합지원센터는 이 마을의 심장이다. 이곳은 당장 거처가 없이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딱한 처지의 고려인들이 잠시 머물러 가는 쉼터이자 취업, 산업재해, 체불 임금, 비자 문제 등 온갖 애로사항을 상담하고 해결해 주는 공간이며 교육장이다. 2017년 6월 문을 연 고려인역사박물관도 눈길을 끈다. 종합지원센터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은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1860년대 연해주에 자리를 잡은 한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의 불모지로 강제 이주되기 전까지 얼마나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벌였는지, 그 후손들이 온갖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견디며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2017년엔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기념 사업’도 자체적으로 벌였다. 광주 고려인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지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바로 미디어다. 중병에 걸리거나 수술비가 부족한 경우처럼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고려FM방송과 나눔방송 뉴스를 통해 서로 돕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주민 역사상 첫 자체 라디오 방송으로 개국한 고려FM방송은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편한 고려인들을 위해 80%의 프로그램이 러시아어로 진행된다. 24시간 프로그램을 송출하는 고려FM방송은 중앙아시아에 살고 있는 친인척과 지인들이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청취하고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한편 나눔방송 뉴스는 페이스북이나 이메일로 11만여 명에게 전파되면서 고려인 마을의 시시콜콜한 소식까지 실어 나른다.

                                                                     

외국인으로 분류되는 4세들

 

 광주 지역 고려인들은 투철한 공동체 정신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다져나가고 있다. 이들은 서로 도우면서 관혼상제를 치르는 것은 물론 ‘깔끔이 봉사단’을 창설해 거리 청소 자원봉사와 자율방범 활동도 벌이고 있다. 또한 매달 ‘고려인 마을 방문의 날’을 정해 운영하면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기도 하다. 2017년 11월에는 신아그리피나 바실리예프 우즈베키스탄 교육부 장관이 방문하기도 했다.

 다양한 지원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삶이 그저 평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이곳 고려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병이 났을 때다. 체류 기간 90일을 채워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더라도 매달 10만 원 가량인 보험료를 부담하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 닥친 또 다른 어려움은 체류 비자 문제다. 현 재외동포법은 고려인 3세까지는 ‘재외동포’로 분류해 장기 체류를 인정하지만, 4세부터는 ‘외국인’으로 분류하고 있다. 따라서 고려인 동포 4세부터는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도 방문동거비자 자격이 만료되는 만 19세가 되면 한국을 떠나거나 3개월짜리 방문비자를 계속 갱신하면서 재입국을 거듭해야 한다. 출생지가 한국인데도 말이다. 이런 법 적용으로 불편을 겪고 있는 고려인 4세 자녀들이 광주 고려인 마을에만 4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왕래가 자유로운 재외동포비자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다. 2018년은 고려인이 조국인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지 30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우리는 국권 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조들의 유지를 받들어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조국인 이 땅에서 증명해 내겠습니다.” 신조야 씨의 당찬 다짐은 고려인들의 도저한 생명력을 보여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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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블라디미르 시인의 ‘반전의 삶’
 
 김블라디미르 시인은 광주 고려인 마을에서 조금 각별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학 교수를 지낸 지식인이 이곳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려인 3세인 그는 마을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주고 있다. 고려FM 방송에서는 ‘행복문학’이란 문학 프로그램을 러시아어로 진행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광주와 전국 단위 행사에 고려인 대표로 참석할 때가 많다.
 “저는 펜 말고는 평생 손에 뭔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국에 와서 난생처음 육체노동을 하고 있지요. 한국 말을 잘 못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죠. 그나마 몇 해 전 소장암 수술을 받은 뒤로는 힘쓰는 일을 거의 못합니다. 과수원과 농장에서 사과, 배, 블루베리, 딸기 같은 작물을 가꾸고 수확하는 게 주된 일입니다.”
 처음 공장에서 일할 때는 무척 힘들었다고 한다. 한국에 온 뒤 2~3년간은 후회가 밀려와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한국에 온 게 잘한 일 같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아버지께서는 1990년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한국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는 꼭 조국 땅을 밟아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그에게는 틈틈이 시를 쓰는 게 큰 즐거움이다. 한국에 와서 쓴 시를 모아 2017년 2월 첫 시집 『광주에 내린 첫눈』을 냈다. 눈 내린 광주의 풍경에 반해 시를 쓰고, 그 시의 제목을 시집에도 붙였다. 이 시집에는 한국 땅을 밟은 후 김 시인이 쓴 35편의 시가 한국어로 번역돼 러시아어와 함께 실렸다. 계명대 러시아문학과 정막래(鄭莫來) 교수가 시집 출판을 권유하는 바람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러시아어로 쓴 시의 한국어 번역도 정 교수가 맡았는데, 그녀는 고려인 동포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다가 김 시인과 인연을 맺었다.

                                                                    


 그의 시에는 조국과 자연에 대한 사랑, 스탈린의 강제 추방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가게 된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애환 같은 것들이 진솔한 표현으로 오롯이 담겨 있다. 그가 쓴 많은 시 가운데 유난히 폐부를 찌르는 대목이 있다.
 ‘대한민국이여! 우리 조국이여 이해해 주소서 / 우리가 멀리서 살았던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님을’(「힘들게 기다려 온 80년 세월」)
 그는 2017년 여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주관한 ‘회상열차-극동 시베리아 실크로드 오디세이’에 고려인 마을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와 알마티까지 13박 14일 일정으로 고려인 선조들이 겪은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었다. 회상열차 체험은 그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었다. 앞으로 펴낼 두 번째 시집에는 고려인 강제 이주에 관한 시가 많이 담길 것이라고 한다.
 시인인 그는 언어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언어가 모국어여야 하지만, 한국어로 시를 쓸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여기서 몇 년 살면서 조금은 늘었지만, 한국어를 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30여 년 동안 타슈켄트 외국어대학과 타슈켄트 의과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는 대학 교수였던 김 시인은 55세 정년 퇴직 규정에 따라 이른 나이에 강단을 떠나야 했다. 퇴직 후 한국행을 결심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게 2011년 3월이었다. 곧이어 아내와 자녀들도 한국으로 왔다. 이제 손주들까지 포함하면 고려인 마을에서 10명이 넘는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이곳이 내 조국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을 꿈꾸고 있다. 그의 시에도 그런 심경이 듬뿍 묻어난다.
 “내 벗들이여, 역사적인 조국의 땅에서 / (……) 나는 외국인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원하지 않습니다 / 나는 고려인, 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정신적으로도 양심적으로도 혈통적으로도 그렇습니다.”(「추석」)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8년 봄 호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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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Seeking Hope in Grandparents’ Homeland

 

 Many signs of the backstreet stores are written in the Cyrillic alphabet and passers-by are more likely speaking Russian than Korean. That is typical here in the Wolgok-dong neighborhood of Gwangju’s Gwangsan District, where a community of Goryeo-in, or ethnic Koreans from Central Asia, has developed. Goryeo-in, or Goryeo-saram as they call themselves, means “Goryeo people,” descendants of Koreans who migrated to Russia in the late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The word Goryeo comes from the ancient Korean kingdom of Goryeo, which ruled the Korean peninsula from 918 to 1392. 

 Ethnic Koreans living in 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are commonly called “Goryeo-in.” They are descendants of Koreans who migrated to Russia over 100 years ago. Their grandparents and parents experienced at least three diaspora over three to five generations. The first major waves of Koreans migrated to Primorsky Krai, or Maritime Province, in the Russian Far Eas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 of Korea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1937, however, the Stalin government deemed immigrants and ethnic groups inherently disloyal to the Soviet state and deported them to barren areas of Central Asia. Included among these groups were ethnic Koreans, who at the time were subjects of the Empire of Japan, which was hostile to the Soviet Union. In just over two months, a total of 171,781 ethnic Koreans (36,442 families) were forcibly relocated to Kazakhstan and Uzbekistan. Upon arrival, they were faced with harsh living conditions which led to tens of thousands of deaths from disease and malnutrition.

 

Building Their Own Village

 

 After the Soviet Union dissolved in 1991, their descendants continued to suffer discrimination in the now independent Central Asian countries, which prompted many of them to move to the land of their ancestors. As many as 40,000 ethnic Koreans from Central Asia currently live in Korea, and about one-tenth of them reside in Gwangju’s Wolgok-dong neighborhood. Most of them found work in an industrial complex in the city or a nearby agro-industrial park, so they naturally looked for cheap studio apartments near their workplaces. Hence, part of Wolgok-dong has turned into their enclave.
 Despite their unfamiliar environment and difficult economic conditions, the Goryeo-in are creating their new nest with a strong community spirit. They are rebuilding their lives strenuously, after independently establishing support facilities, including a cooperative association, community shelter, local radio stations and centers for daycare as well as for children and community activities.

 Amid the growing influx, an increasing number of the new settlers have become successful small business owners. A cafe named “Cемья,” Russian for “family,” sells leavened flatbread and grilled meat on skewers, both staple foods of Central Asia. It is considered the first gourmet destination in this community. Jun Valery started it in 2015 and the cafй now has four branches, including those managed by his eldest daughter and son and their spouses. “Koreana,” a European-style cafй opened by Huh Anastasia in October 2017, is also gaining popularity. These types of success stories have multiplied, giving rise to a business district of their own clustered with restaurants, travel agencies, currency vendors and souvenir shops, among other stores.
Ethnic Koreans from Central Asia began to settle in Korea around 2001 when Shin Joya arrived.

 A third-generation Goryeo-in, Shin asked Lee Chun-young, the pastor of the Saenal (“New Day”) Church in Gwangju, for help when she could not receive her back pay from a factory where she had worked. In 2005, Shin founded Goryeo-in Village with Reverend Lee’s help and opened a community center in an old shopping mall. After 2007, when the government began issuing visitor work visas for ethnic Koreans from China and Central Asia, the number of Goryeo-in arriving in Gwangju rose sharply. 

 The reason they are rushing to Gwangju is simple. News spread far and wide by word of mouth throughout Central Asia that the community center helps new arrivals find room and board and provides translation services. This was made possible thanks to Shin’s attitude to help newcomers resolve their problems as if they were her own relatives and friends. The transplants from Central Asia often say, “We could hardly survive were it not for Joya.” Shin has more than 2,000 phone numbers of her fellow resettlers stored in her cellphone. Her husband, a defector from North Korea whom she married in 2008, is also a strong supporter of the community. “No matter how highly educated they are, ethnic Koreans are treated with low regard in Uzbekistan.


 In most cases, they can’t find jobs even if they have more than two college degrees,” Shin said. She decided to leave for her grandparents’ land, because it was too hard to scrape out a living.
 Jung Svetlana, another third-generation descendant, migrated here for the same reason. “After I arrived, I began working at a washing machine assembly line,” she said. “As a side job, I washed dishes at a restaurant on Sundays. That way, I saved 500,000 won to pay the deposit for a one-bedroom studio apartment.”

Education of Future Generations

 

 Ethnic Koreans, who could speak only Russian, were gradually reduced to an underprivileged class, as Central Asian nations, which gained independence after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passed new language laws and constitutions that favored the dominant national or ethnic groups. Ironically, here in Korea, it is once again their language ability that remains the biggest barrier facing the very people who left their hometowns because of language discrimination. From filling in visa application forms to sending children to school or simply going shopping, routine tasks can present stumbling blocks if they have inadequate Korean language skills. 

 The linguistic difficulties make the residents of this village consider it their most important task to educate future generations. Most ethnic Koreans from China or migrant workers from Southeast Asia come here alone and mainly focus on earning money. But most Goryeo-in arrive as three-generation families and thus pay keen attention to the education of their children. 

 The institution responsible for educating children in this community is Saenal School, the country’s first multicultural alternative school. It opened in 2007 and was accredited by the Education Ministry in 2011. This tuition-free school is well-known, even among ethnic Koreans in Central Asia, because it provides both primary and secondary education, attaching importance to all-round personality development. The school is run by Reverend Lee, who was instrumental in developing the community alongside Shin Joya. In a sense, Shin and Lee are the “godmother” and “godfather” of the village.
 Several village institutions offer Korean language classes at different levels and different hours. With enrollment rising, there are currently three levels of classes for adults - beginner, intermediate and advanced - and special classes for children who have recently arrived. Language programs on Goryeo FM Radio are highly popular with those who miss classes because of their work schedule.

 The community’s children center that opened in 2013 teaches primary and secondary students Korean, English, Russian, math and art, as well as playing soccer and guitar, after school. The daycare center that opened in 2012 helps young children from dual-income families with Korean reading and writing and physical education from morning till evening, providing them with meals and snacks. Since July 2017, the village also has been offering Russian classes for primary schoolchildren on weekends, because most parents here want their children to learn both Korean and Russian.

 Goryeo-in Village celebrates the third Sunday in October as “Day of Goryeo-in.” Children of the village pose after performing a traditional Korean fan dance on the fifth annual “Day of Goryeo-in” in 2017.

 

Community Networks and Media

 

 The community support center is the heart of the village. It serves as a temporary shelter for those who have no other place to stay and have to find a job, and as a counseling center that helps resolve all kinds of problems, including finding a job, dealing with work-related accidents, retrieving back pay and assisting with visa problems. 

  Another important facility is the community history museum that opened in June 2017, adjacent to the community support center. Inside the small museum, visitors can learn about the fight against Japanese imperialism and support for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by Koreans who had settled down in the Russian Maritime Province starting from the 1860s. The museum also recalls the ubiquity of the discrimination and unfair treatments that their descendants endured. In 2017, the village organized an event to commemorate the 80th anniversary of ethnic Koreans’ deportation to Central Asia. 

 The community’s media form one of the pillars of the village. Its residents operate a help network through the local radio stations, Goryeo FM and Nanum (“Sharing”). They offer support to anyone facing difficulties, such as suffering from a serious illness or having trouble paying medical expenses. Goryeo FM is the first-ever radio station run by ethnic Koreans who have found a new home in the country of their ancestors. Eighty percent of its programs are in Russian for the convenience of community members who are more comfortable listening to Russian than Korean. This 24/7 radio station is so popular that even their relatives and friends in Central Asia listen to its programs with a smartphone app. Meanwhile, Nanum Radio supplies detailed news about the village to some 110,000 listeners every day via Facebook and email.

 

Fourth-Generation Descendants

 

 The community spirit of the Goryeo-in in the Gwangju area is strong. Residents help each other organize weddings and funerals and gather volunteers who clean the streets and help prevent crimes. They also established a monthly “Visit Goryeo-in Village Day” to attract attention from the general public, and in November 2017, the village welcomed Uzbekistan’s Minister of Preschool Education Agrippina Shin. 

 There are a variety of support programs underway for the village residents. Nevertheless, life here is not always easy. Residents feel particularly helpless when they fall ill. Even if they become eligible for health insurance coverage after staying 90 days, it is still a considerable burden for most of them to pay 100,000 won for their health insurance every month. 

 Another chronic difficulty is obtaining visas. The current law regards only first- through third-generation Goryeo-in as “overseas ethnic Koreans” and grants them long-term stay permits, but classifies fourth and younger generations as “foreigners.” Accordingly, the latter must leave Korea when they turn 19, even if they were born in Korea, or have to leave and re-enter the country repeatedly to renew their three-month visitor visas. There are currently some 400 fourth-generation descendants in the village who are inconvenienced by these visa constraints. 

 This year marks the 30th anniversary of the first arrival of Goryeo-in. “We’ll prove here in our homeland that we’re proud descendants of the Korean nation by upholding the wishes of our ancestors who dedicated themselves to seeing their country’s sovereignty restored,” said Shin J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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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wist in Life’

 

The Story of Kim Vladimir

 

 Kim Vladimir, a poet and third-generation ethnic Korean from Uzbekistan, stands out among residents of Goryeo-in Village. It is not because he was once a university professor who is now working as a day laborer, but because he is such a spirited supporter of other resettlers in the village. He is the Russian-language host of “Happy Literature” on local radio station Goryeo FM. He often attends national or municipal events as the community’s representative.

 “I’d held nothing in my hand besides pens,” he said. “But manual labor is the only thing I can do here because I’m not good at Korean. However, since I underwent small intestine cancer surgery a few years ago, there’s hardly anything I can do that requires physical strength. I now grow and harvest apples, pears, blueberries and strawberries at orchards and farms.”

 Kim struggled to adjust to working in a factory for the first time. During his initial three years in Korea, he regretted relocating and seriously considered returning to Uzbekistan. But on the other hand, it was good for him to have come to Korea out of respect for his father’s last wishes. “My father told me about Korea right before he died in 1990. He told me to ‘go back to our homeland under any circumstances,” he recalled. 

 During his spare time, Kim revels in writing poems. In February 2017, “First Snow in Gwangju,” his first collection of poems written in Korea, was published. The title borrows from one of the 35 poems in the collection, which Kim wrote in Russian. Jeong Mak-lae, a former professor of Russian literature at Keimyung University in Daegu, encouraged Kim to have the poems published. They became acquainted when Jeong was preparing a thesis on ethnic Koreans in Central Asia. She translated the poems and in the book the collection appears in both Russian and Korean. 

  Kim’s poems vividly convey his love for his ancestors’ homeland and its nature as well as the joys and sorrows of the lives of his grandfather and parents. A verse in one of his many poems stands out and stings us to the quick.


“Republic of Korea! O our homeland, please understand / that we lived far away, not because of our fault.” (from “80 Excruciating Years of Wait”)

 In the summer of 2017, Kim represented his community in “A Nostalgia Train Ride: Trans-Siberian Silk Road Odyssey,” a 14-day trip jointly sponsored by the Commemorative Committee for the 80th Anniversary of Stalin’s Deportation of Koreans to Central Asia and the Korean Global Foundation. The journey on the Trans-Siberian Railway went from Vladivostok in Russia to Ushtobe and Almaty in Kazakhstan, retracing the arduous steps of the displaced Korean ancestors. Kim plans to devote his second collection of poems to their forcible relocation.

 Kim taught Russian literature at the Tashkent State University of Foreign Languages and the Tashkent Medical College in Uzbekistan for about 30 years. But he had to retire at an early age of 55 in accordance with retirement regulations. He then decided to relocate to Korea and boarded a plane bound for his ancestral homeland in March 2011. His wife and children followed soon after. But he still longs for the day when he can say proudly, “This is my homeland.” One of his poems clearly reveals his feelings. 

 “My friends, in my historic homeland / (…) I don’t want to hear such a pejorative term as foreigner / because I’m a Goryeo-in, I’m a Korean / spiritually, conscientiously, and genealogically.” (from “Chuseok” [Korean Thanksgiving Day])


Posted by 김학순

 남북한과 북미 관계가 아무리 얼어붙어도 스티븐 린튼 유진벨재단 회장과 대표단은 해마다 두 차례씩 어김없이 북한에 다녀온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5월에 이어 11월에도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가지고 의료진을 포함한 외국인 대표단들과 함께 방북했다. 심각한 상태인 북한 주민들의 결핵 치료가 어떤 정치적, 외교적 현안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적 지원은 남북 관계가 좋든 나쁘든 초정치적, 탈이념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미국인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한국인이어서 ‘인세반’이란 한국 이름을 쓰는 린튼 회장은 올해로 20년째 북한 결핵 퇴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 보건성(保健省)이 “보건 문제 1위도 결핵, 2위도 결핵, 3위도 결핵”이라고 말했을 만큼 북한에 결핵 환자가 많기 때문이다.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한 뒤 대북 식량 지원 활동을 벌이던 린튼 회장이 결핵 퇴치에 전념하기로 방향을 튼 것은 북한 당국의 공식 요청을 받은 후부터다. 1997년 북한 보건성 최창식(Choe Chang-sik 崔昌植) 부부장이 “식량 대신 결핵 치료 지원을 해 달라”고 린튼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던 북한이 먼저 결핵 치료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동안 80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한 린튼 회장은 결핵 퇴치 작업만을 위해 50차례 이상 방북했으며,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비롯해 20년간 대북 의료 지원에 사용한 금액은 약 5,100만 달러(578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는 이동 X선 검진 차량, X선 진단 기계, 현미경, 수술실 패키지 같은 것들이 망라됐다. 그런 적극적 의료 지원 사업으로 1997부터 2007년까지 25만 명 이상의 일반 결핵 환자가 치료됐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

 

  린튼 회장과 유진벨재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결핵 환자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 겨울철 날씨가 남쪽보다 추워서 그렇기도 하고, 가족들이 좁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환경이 결핵 노출과 전염을 빠르게 하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뿐만 아니라 갓 출산한 젊은 여성들이 결핵에 걸리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아이를 출산하면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핵에 잘 걸리고, 그러면 아기를 돌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죠.”

 

 더욱이 일반 의약품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점점 많이 생겨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결핵약에 내성이 생겨 재발한 환자를 뜻한다. 북한은 해마다 새로운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4,000~5,000명 규모로 발생한다. 다제내성 결핵균은 여러 종류의 치료 약제에 내성을 갖고 있어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 결핵 환자는 6∼8개월간 일반적 결핵약을 먹으면 완치율이 90%에 달하지만,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일반 결핵약보다 많게는 100배 이상 비싼 약을, 그것도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 장기 복용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완치율도 낮은 편이다. “일반 결핵 환자 1명을 치료하는 데 약 20달러가 소요되는 반면, 다제내성 결핵 환자 1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값을 포함한 치료비가 5,000달러 정도 듭니다.”

                                                                                      


 더욱 난감한 것은 고가의 약을 장기간 투약해야 되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치료 시기를 놓치면 치명적이란 데 있다. 다제내성 결핵이 흔히 ‘슈퍼결핵’으로 일컬어지는 광범위 약제내성 결핵으로 이어지면 치료가 더욱 어렵고 사망률도 높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에 대한 치료가 중단되면 짧은 기간 안에 광범위 약제내성 결핵 환자로 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 지원은 최소한 6개월에 한 번씩 이어져야 한다. 한번 이런 환자로 등록되면 약 2년간 책임을 지고 치료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 때문에 유진벨재단은 2007년부터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해 왔다. 그러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다제내성 결핵 치료 프로그램 하나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백 명의 북한 결핵 환자와 의료진들이 다제내성 결핵 환자를 치료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2008년 북한에서 다제내성 결핵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 환자들 19명의 가래 샘플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뒤 양성 반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다제내성 결핵 약제를 가지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 1,500명 이상의 환자가 언제든지 치료받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요. 우리는 이제 현장에서 바로 검사를 실시하고 즉시 치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6개월마다 린튼 회장을 포함한 방북단 10여 명이 보통 3주간 북한에 머물며 결핵 퇴치 활동을 하지만 “충분한 활동을 위해선 기간이 짧다”고 한다. “21일간 12개 요양소를 다 찾아다니지요. 새 환자를 검사해 입원시키고, 기존 환자가 얼마나 호전됐는지 확인하고 약을 직접 전달합니다.”
                                                                       

 

 이런 살뜰한 관리 덕분에 “다제내성 환자 완치율이 76%에 달한다”고 린튼 회장은 설명했다. 세계 평균 완치율이 45%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그래서 북한 주민 사이에선 “다제내성 결핵에 걸려도 유진벨 요양소에 가면 희망이 있다”는 말이 돌 정도다.

 의약품 및 의료 장비 지원과는 별개로 린튼 회장과 유진벨재단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결핵 환자와 의료진에 대한 교육이다. 유진벨재단의 결핵 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수천 명의 북한 주민들이 감염된 경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자세히 알게 됐다. 또한 북한 주민 치료를 돕다 보니 린튼 회장 스스로도 결핵에 관한 지식이 웬만한 전문가 수준에 이른 듯하다.

 

 우리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린튼 회장 자신도 어린 시절 결핵을 두 번 앓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결핵 환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 듣다 보니 린튼 가문은 결핵과 인연이 매우 깊다. 린튼 회장의 어머니 로이스 린튼(Lois Linton)은 1960년 전남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난 뒤 결핵이 만연하자, 순천기독결핵재활원을 설립해 30여 년간 결핵 퇴치 운동을 벌였다. 린튼 모자가 남북한에서 결핵 치료 활동을 전개한 특이한 이력과 인연을 만든 셈이다.

 린튼 회장은 의약품과 의료 장비에 대한 사용 결과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분배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유진벨재단은 한국 내 후원자와 재미 교포, 한국과 미국 정부 등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현재 후원자의 85%가 한국인이고, 후원받는 북한 주민들은 남한 사람들이 지원해 준 것임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유진벨재단은 모든 지원 대상 의료 기관을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사소한 물품이라도 반드시 후원자 이름을 밝힌다. 후원자들이 마련해 재단이 전달하는 결핵약 상자에는 ‘유진벨재단’이라는 글자가 없다. 그 대신 큼지막하게 후원자 이름이 적혀 있다. 린튼 회장은 “유진벨은 심부름하는 단체이고, 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며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영웅시되는 것을 경계했다.
“우리는 택배 기사나 당나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운송하고 관리할 뿐이지 의료 활동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고, 직접 의료 활동을 하며, 혜택을 받는 것은 모두 한민족입니다. 한국인의 사랑이 좀처럼 북한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유진벨재단과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평양, 서울, 워싱턴에서 동시에 필요한 모든 협력을 얻어 내는 것”이라고 했다.


 “남북 간의 긴장 관계는 항상 대북 지원에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 일에 관심을 갖는 많은 후원자가 있어 걱정하지 않습니다. 남북한 간의 긴장감이 없었던 때를 기억하기 어려우니까요.”

 지난해에는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한 정세 변화로 방북 일정에 차질이 있었다. 한국 정부의 약품 반출 승인과 일정 혼란으로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 지원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올해는 계획한 일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린튼 회장은 전했다.

 한 번 방북할 때마다 가져가는 치료약은 6개월 분량이다. 그런데 다음 방북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린튼 회장은 한국 정부에게 대북 인도적 지원 단체에 대한 면허 제도 같은 것을 도입해 주길 희망한다. 건수별로 물자 반출을 승인하지 말고, 정기적으로 방북하는 검증된 민간 단체는 일정 기간 동안 별도의 승인 없이 물품 반출 승인이나 방북 일정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하면 좋겠다고 한다. 
                                                                        

 “우리는 택배 기사나 당나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운송하고 관리할 뿐이지 의료 활동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고, 직접 의료 활동을 하며, 혜택을 받는 것은 모두 한민족입니다. 한국인의 사랑이 좀처럼 북한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유진벨재단과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린튼 가문의 대를 잇는 한국 사랑

 

  린튼 회장이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였다. 그 뒤 1992~1994년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의 통역 겸 고문으로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였던 그는 외증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식량 지원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대북 지원 활동에 나섰다.

 유진 벨은 구한말인 1895년 한국 땅을 밟아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시작한 미국 선교사였다. 린튼 회장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은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럿 벨(Charlotte Bell Linton)과 결혼한 뒤 역시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윌리엄 린튼은 일제 강점기 전주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와 함께 추방당했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을 찾아 지금의 한남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 시위 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3·1운동을 미국 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린튼 회장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50년에 태어났지만, 선교사인 아버지 휴 린튼(Hugh Linton)을 따라 한국에 와 전남 순천에서 자랐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컬럼비아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남북한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컬럼비아대 교수 겸 동아시아연구소 한국연구센터 부소장을 지냈다. 그는 학자에서 대북 지원 활동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개인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지 않습니다. 관건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1995년 북한 식량난이 본격화하면서 북한 당국이 국제 사회에 공식적으로 지원 요청을 했을 때야말로 ‘이웃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의 동생 존 린튼(John Linton)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으로 활동하며 초창기에 형의 대북 의료 지원 사업을 도왔다. 린튼 회장은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 유진 벨 목사 이후 4대에 걸친 한국 사랑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대학 교수라면 은퇴할 나이겠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북한 결핵 환자 돕기 활동을 지속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또한 “후원자들과 북한 의료진의 희생 정신이 없으면 이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7년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Eugene Bell Foundation’s Love of Neighbors across the DMZ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Inter-Korean relations interspersed with tension and confrontation have moved to another precarious level in the wake of North Korea’s recent nuclear weapons and missile tests. Despite these circumstances, a civic group has consistently delivered humanitarian aid to the North. It is the Eugene Bell Foundation, established in 1995 by Stephen Linton, a great-grandson of American missionary Eugene Bell, to mark the centennial of his arrival in Korea.

 

  Stephen Linton and his team visit North Korea twice each year no matter how tense the inter-Korean relations or Pyongyang-Washington ties are. This year is no exception. They visited the North in May and November, along with foreign donors and medical staff, carrying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his is because treating the severe forms of tuberculosis (TB) that many North Koreans are suffering from is more urgent than any political or diplomatic issue. Regardless of whether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re good or bad, the foundation never wavers in its belief that humanitarian aid should be “apolitical and non-ideological.”

 Linton, a Korean at heart who likes using his Korean name “In Se-ban,” has taken the lead in the efforts to beat TB in the North for 20 years. After launching the Eugene Bell Foundation in 1995, Linton first delivered food aid to the North, but then turned his attention to fighting TB there after receiving an official request by the Pyongyang authorities. In 1997, North Korea’s then vice minister of public health, Choe Chang-sik, sent a letter to Linton, asking for “assistance for TB treatment instead of food aid,” although the country was experiencing severe food shortages at the time.

  Linton has visited the North more than 80 times, and over 50 times for TB treatment alone. His foundation has so far delivered some US$51 million (roughly 57.8 billion won) worth of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o the North. The medical equipment included mobile X-ray vans, diagnostic X-ray machines, microscopes and surgical instruments. More than 250,000 patients were treated from 1997 to 2007, thanks to the foundation’s active medical support.

 

Treating MDR-TB Patients

 

  The situation is still not good despite the consistent efforts by Linton and the Eugene Bell Foundation, because Korean winters are cold, particularly in the North, and it is easy for its residents to contract TB as North Korean families often live together in small spaces. Young women who have just given birth and elderly people are especially prone to the disease.
 “Women’s immune system weakens after childbirth and so they get susceptible to TB, and it becomes more difficult for them to take care of their babies,” Linton says.

  Moreover, the situation is increasingly worsening due to the growing number of patients with multidrug-resistant tuberculosis (MDR-TB) that cannot be cured with ordinary medication because its germs are resistant to various types of drugs. Some 4,000 to 5,000 fresh cases of MDR-TB occur in the North each year. The treatment success rate for ordinary forms of TB reaches 90 percent, if patients take medicines regularly for six to eight months. Medicines for MDR-TB are up to 100 times more expensive than drugs for ordinary TB, and the patients have to take such expensive medicines for a year and a half to two years. Besides, the treatment success rate is lower.


“It needs some 5,000 dollars, including medicine expenses, to treat an MDR-TB patient, while a mere 20 dollars is needed to treat an ordinary TB patient,” Linton says.

  What is more embarrassing is that any lapse in the timing of taking the medication can be critical for MDR-TB patients. It will grow even more difficult to treat the patients and their fatality rate will rise if MDR-TB develops into the so-called “super extensively drug-resistant TB.” MDR-TB patients can develop this more dangerous type of TB in a short period of time if their treatment stops. Therefore, aid materials for the treatment of MDR-TB patients should be delivered at least once every six months.
 

 For this reason, the Eugene Bell Foundation has focused on treating MDR-TB patients in the North since 2007. In this process, it has run one of the world’s largest MDR-TB treatment programs and given hundreds of North Korean doctors and TB patients a chance to learn how to treat the illness.

 “In 2008, we began collecting phlegm samples of 19 patients with a potential risk of MDR-TB in North Korea. Six months later, we went back to the North to treat those who had tested positive, carrying the necessary medicines,” Linton says. “This program has developed to the extent that it’s possible to treat more than 1,500 patients at any time. We now can immediately conduct tests and begin treatment on the spot.”

 A team of about 10 people, including Linton, stays in the North for about three weeks on every visit. But Linton says three weeks is not long enough to carry out substantial activities. “We visit all of the 12 sanatoriums during those 21 days. We test and accept new patients to the facilities. And we check to see if patients show improvement and give them medicines.”

 Thanks to careful management, Linton says, the treatment success rate for MDR-TB patients has increased to 76 percent. It is a remarkable achievement, compared with the world’s average treatment success rate of the disease still hovering at 45 percent. These days, there is a saying among North Koreans that “there is hope even for MDR-TB patients if they just go to a Eugene Bell sanatorium.”

  Aside from the delivery of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he greatest achievement Linton and his foundation have accomplished in the North is the education of TB patients and medical personnel. Through the foundation’s TB treatment program, thousands of North Korean residents have learned 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when they are infected with TB bacteria. Linton himself seems to have become a TB expert in the course of helping treat North Korean patients.

 

‘We’re Mere Errand Runners’

 

 Linton fell ill with TB twice himself when he was a child, so he knows well how much pain the patients experience. Come to think of it, the Linton family had something to do with TB treatment all along. Stephen Linton’s mother, Lois Linton, founded the Soonchun Christian Tuberculosis Rehabilitation Center in 1960 when the Suncheon area in South Jeolla Province was hit by a flood and TB was running rampant. She fought the disease there for about 30 years.

  Linton meticulously checks to see how the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delivered to the North are used and spares no effort to enhance transparency in the distribution of aid supplies. The Eugene Bell Foundation is run with donations from South Korean and American donors as well as assistance from the South Korean and U.S. governments. Currently, 85 percent of donors are South Koreans, and North Korean beneficiaries are reportedly well aware that most donations come from them.
 

 The foundation makes it a rule to identify donors on all items it delivers on every visit to all target hospitals and facilities. There is no indication of the “Eugene Bell Foundation” but instead, the donors’ names are emblazoned on every medicine box the foundation delivers. Linton warns against the foundation and himself being made heroes. He keeps saying that the Eugene Bell Foundation is an “errand agency” and he is “nothing but an errand runner.”
 

 “We’re just playing the role of a delivery man or a donkey,” he says. “We’re only delivering and managing medicines and equipment. It is the Korean people who donate money for medical activities, give medical services, and benefit from these activities. My foundation and I have come forward, just because of the situation where it’s not easy for South Koreans to deliver their love to their compatriots across the border.”

 Then he adds, “The most difficult part of this job is to get all the necessary cooperation from Pyongyang, Seoul and Washington at the same time. Tense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lways affect our efforts. But we aren’t worried because there are many donors who care about what we are doing. And it’s hard to remember when there wasn’t any tension.”

  In 2016, his travel schedule was interrupted once after a nuclear test by the North, causing a setback in the treatment of MDR-TB patients, due to the suspension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s approval. But Linton says that in 2017 everything has proceeded smoothly according to schedule.
 

 He delivers just six months’ worth of medication each time.
 Therefore, an interruption in his travel schedule means that MDR-TB patients in the North fail to receive timely treatment. This is why Linton hopes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ill introduce a license system for aid groups and simplify the approval process for all aid groups regularly visiting the North.
 “The most difficult part of this job is to get all the necessary cooperation from Pyongyang, Seoul and Washington at the same time. Tense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lways affect our efforts.”

Love of Korea over Generations

 

Linton first visited North Korea in 1979 when the World Table Tennis Championships were held in Pyongyang. From 1992 to 1994, he met then North Korean president Kim Il-sung three times as an interpreter and advisor for American pastor Billy Graham. In 1995, while a professor at Columbia University, Linton established the Eugene Bell Foundation to commemorate the centennial of the start of Eugene Bell’s missionary activities in Korea and immediately began delivering food aid for North Korean residents.

 Eugene Bell, his great-grandfather on his mother’s side, arrived in Korea in 1895 toward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He began missionary activities and volunteer work in the Jeolla area. William Linton, his grandfather, also did missionary work in Jeolla after marrying Charlotte Bell, a daughter of Eugene Bell. In 1919,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illiam Linton, who was principal of the Jeonju Shinheung High School, supporte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Gunsan, North Jeolla Province, and informed Americans of it. He eventually saw his school closed and was deported from Korea for having refused to pay respects at a Shinto shrine. After Korea was liberated, he returned and founded a college that has since grown into Hannam University in Daejeon.

  Born in Philadelphia, Pennsylvania, in the U.S. in 1950, Stephen Linton came to Korea with his missionary father, Hugh Linton, and grew up in Suncheon. He obtained a bachelor’s degree in philosophy from Yonsei University and a Ph.D. for a comparative study of North and South Korea from Columbia University. Later, he served as a professor and deputy director of the East Asian Institute’s Center for Korean Research at Columbia University.

 Asked why he turned from a scholar into a civic activist, Linton says, “As a Christian, I don’t believe that individual persons can change the world. I believe that the key is to put the love of neighbors into practice.”

 He keenly felt the need for the “love of neighbors” in 1995 when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made a formal request for assistance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s its food shortage came to a head. At the initial stage, his younger brother, John Linton, who is currently director of the International Health Care Center at Yonsei University’s Severance Hospital, helped give medical assistance to the North.

  Regarding his family’s love of Korea over four generations, Linton simply notes, “We’ve done what we should have done as believers of God.”

  But he seems firmly resolved when he says, “I would have retired by now if I had been a university professor. But I will continue to help treat TB patients in North Korea as long as I see the necessity.” Then he goes on to express his gratitude to all donors, as well as the medical staff in the North, saying, “Without their admirable spirit of sacrifice, this job would have been impossible.”

 


Posted by 김학순

 

 사람들은 탈북민이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는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환경에 정착하느라고 여념이 없을 것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어려운 사람일수록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사실을 간과한 선입견일 뿐이다.


 그런 편견의 틀을 깨는 단체가 있다. 남한 청년 6명을 포함해 50여 명의 탈북민 대학생들이 활동하는 ‘유니시드(Uniseed) 통일봉사단’이 그곳이다. 유니시드는 ‘통일의 씨앗’이란 뜻을 가진 이름으로, 이 봉사단은 매달 한 번씩 직접 만든 도시락을 서울역 노숙인들에게 나눠 준다.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힘든 과정을 겪는 자신들보다 노숙인들의 처지가 더 딱하다고 판단해서다.


 그들의 활동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북한 음식 문화 교류, 아동 복지시설 선물 전달, 그리고 쪽방촌에 김치와 연탄을 배달하는 활동도 연중행사로 벌인다. 또한 이들은 중국 등지에서 숨어 지내는 탈북민에게 거의 매달 생필품과 의류를 모아 보내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활동을 통해 “남북한 청년들이 함께 모여 나눔으로 소통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자”는 슬로건을 실천하고 있다.

                                                                        

 ‘미리 온 통일’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오후 1시, 서울역 부근 만리현 감리교회 주방에 유니시드 통일봉사단 청년 10여 명이 어김없이 모여든다. 이들은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밥을 짓고 국을 끓인다. 또 돼지 불고기, 멸치 볶음, 오징어 오이 무침, 김치 같은 반찬도 능숙하게 만든다. 국과 반찬은 철따라 종류가 조금씩 달라진다. 겨울에는 따끈한 어묵국이나 된장국, 봄에는 싱싱한 봄나물, 여름엔 시원한 오이냉국처럼 계절을 감안해 메뉴를 구성한다.
                                                                       

 봉사단 청년들은 이렇게 정성껏 만든 도시락을 오후 5시 서울역 광장으로 가져가 노숙인 200여 명에게 이른 저녁 삼아 나눠 준다. 200인분의 도시락을 만드는 데 필요한 비용 60만 원은 봉사단원들이 형편껏 갹출하거나 팬시 용품을 제작해 팔아서 보탠다. 때로는 각종 공모전에 참가하여 받은 상금으로 경비를 마련하기도 한다. 조리하는 과정이나 비용 마련 모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식사를 마친 노숙인들이 전하는 감사 인사가 그간의 노고를 잊게 한다.

 유니시드 통일봉사단을 창단한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 4학년 엄에스더(嚴Esther) 대표가 도시락 나눔 봉사에 나선 것은 2014년 7월부터다. 자신이 받은 장학금 250만 원을 종잣돈 삼아, 뜻을 같이 한 탈북민 대학생 친구 네 명과 함께 시작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뒤따랐다. 남북이 하나가 되게 하자는 생각으로 북한 음식인 두부밥 700개를 만들어 나누어 주었는데, 예상과 달리 반응이 좋지 않았다. 낯선 음식이 노숙인들의 입에 잘 맞지 않은 탓이었다. 그 일로 봉사단원들은 “도움은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걸 주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노숙인들에게는 어떤 별미보다 따뜻한 밥과 익숙한 된장국이 최상의 메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이후 반찬도 일반 가정집 식단으로 짜게 되었다.

 

 순수한 열정을 인정받다
 
 도시락 봉사 활동을 하면서 상처를 받는 일도 있었다. “물은 왜 갖다 주지 않느냐”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빨갱이들이 주는 음식은 안 먹겠다”고 말해 가슴을 아프게 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눔의 시간이 지속되면서 봉사단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일화도 생겨났다. 2014년 가을쯤이었다. 도시락 나눔 봉사를 마치고 떠나려는 순간, 노숙인 한 분이 엄 대표에게 다가와 봉지 하나를 건넸다. 봉지 안에는 찹쌀떡 세 개와 귤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엄 대표는 ‘누군가에게 받아 나중에 드시려고 챙겨둔 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먹먹했다고 한다.

 2015년 여름에는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뜨거운 음식을 해 나르느라 진땀을 흘리는 봉사단원에게 노숙인 한 분이 종이 박스를 뜯어 부채질을 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봉사단원들과 노숙인들 사이에는 상대를 존중하는 진심이 오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도시락을 나눠 주느라 분주한 봉사단원에게 비오는 날이면 우산을 받쳐 주는 분, 배식이 끝난 뒤 쓰레기를 함께 치워 주는 분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간혹 도시락을 받아 갔다가 탈북 청년들이 어렵사리 마련한 음식이란 얘기를 듣고서는 “도무지 마음이 아파 먹을 수 없다”면서 돌려주러 오는 분들도 생길 정도가 되었다.

 창단 이후 3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노숙인들이 먼저 봉사단을 반긴다. 엄 대표는 한 노숙인으로부터 “다른 단체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일을 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유니시드 청년들에게서는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때로는 힘들어 그만두고 싶다가도 그런 말이 생각나면 주저앉을 수 없게 된다”고 덧붙였다.

 탈북민 봉사단원인 조은희 씨는 “처음엔 노숙인들이 무서워 선뜻 다가갈 용기를 못 냈는데 이제는 먼저 안부도 묻게 되었고, 봉사하는 날이 기다려진다”고 말했다. 유니시드 통일봉사단이 하필 노숙인들에게 손을 내밀게 된 것은 그들이 장애인이나 고령의 노인들 못지않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봉사단원 김미정 씨는 “남한 사람들은 우리가 노숙인 돕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며, “아마도 일부 노숙인들이 잦은 음주나 거친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도움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의견을 밝혔다. 
 

 이들과 함께 도시락 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30대 후반의 한 남한 청년은 “탈북 친구들이 노숙인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전했다.

                                                                        

탈북민의 자존감을 높이다

 

 엄 대표는 두 번의 탈북 끝에야 겨우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2004년 3월 탈북에 성공했지만, 그해 10월 중국에서 붙잡혀 북송되었다. 하지만 2006년 중국으로 재탈북해 2008년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중국 옌지(延吉)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이 자신의 눈앞에서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가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홀로 남아 도움을 청할 곳조차 없었던 당시, 엄 대표는 삶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때 거리에서 사지가 없는 노인이 입에 붓을 물고 글씨를 써서 생계를 잇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가슴이 뭉클해져 다시 살아갈 용기를 낸 그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생겼고, 그 길로 무작정 장애인 시설에 찾아갔다. 하지만 “봉사 활동을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 “신분증부터 보여 달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그때 “숨어 사는 사람은 좋은 일도 못 하는구나” 싶어 무척 서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엄 대표는 남한에 도착하자마자 지인에게 소개받은 장애인 사회복지 법인 ‘엔젤스헤이븐(Angel’s Haven)’을 찾아갔다. 그것이 봉사 활동의 시작이었다. 그는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새벽부터 일어나 장애인들을 씻기고 시설 곳곳을 쓸고 닦았다. 학교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고된 일상 속에서도 토요일 봉사는 빼먹는 법이 없었다. 힘에 부쳐 코피가 터질 때도 있었지만, 봉사 활동은 남한 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다.

 “봉사를 통해서 나도 어딘가에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죠.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존감도 부쩍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봉사 활동에 엄 대표가 더욱 빠져들게 된 것은 이후 개인적 아픔이 더해지면서부터다. 북한에 있던 남동생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1000만 원이나 들여 어렵게 탈북시킨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는 등 불운이 한꺼번에 찾아오자 엄 대표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그로 인해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을 때 가족보다 먼저 떠오른 것이 자신을 응원하고 걱정해 주던 동료 봉사자들의 얼굴이었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 엄 대표는 “봉사야말로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탈북자들의 극단적 선택을 막는 해법임을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탈북자의 자살률이 남한 사람의 세 배에 이른다고 하니, 새겨들을 만한 얘기다.

 개인적 상처로 아파하던 엄 대표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탈북민이 자존감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2014년 자원봉사단을 창단했다. 지인들을 설득해 조리를 위한 장소를 비롯해 도시락, 젓가락 등 물품을 후원받았던 엄 대표는 좀 더 안정적인 봉사단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북한 음식을 개발·판매하는 사회적 기업 ‘오순도순’을 창업했다.

 이 기업은 2015년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Korea Social Enterprise Promotion Agency)이 주최한 전국소셜벤처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탈북민 경제 자립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그리고 2016년 11월부터는 서울 성동구 심(SEAM; Social Entrepreneurship and Mission) 센터에서 푸드트럭 영업을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심센터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업을 키우는 곳으로, 엄 대표는 이곳에서 진행하는 푸드트럭 운영을 기반 삼아 ‘유니시드 컴퍼니’를 차려 봉사 활동의 폭을 넓힐 계획이다.

 엄 대표의 꿈은 대학교마다 유니시드 컴퍼니의 지부가 생겨 남북한 청년들이 함께 통일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탈북민의 남한 정착이 ‘남한 사람화’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 시대의 가교’가 되게끔 하려고 한다. 그것이 진정한 탈북민의 정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탈북민 자원봉사단들의 다양한 활동

 

 자발적 봉사 활동을 전개하는 탈북민 자원봉사단은 비단 유니시드 통일봉사단 하나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통일부 산하 남북하나재단이 선정한 10여 개의 봉사 단체로 구성된 ‘착한(着韓)봉사단’이 대표적 사례에 속한다. 2015년 11월에 구성돼 1년에 두세 차례 합동 봉사 활동을 펼치는 착한봉사단은 탈북민 회원이 50% 이상인 봉사 단체를 선정 기준으로 삼는다.

 남북하나재단(Korea Hana Foundation) 관계자는 “착한봉사단은 탈북민들이 자원봉사 활동을 통해 수혜자가 아닌 기여자라는 인식을 제고하고, 대한민국에서 받은 사랑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정착 의지를 높임과 동시에 사회 통합을 이루기 위해 시작된 사업”이라고 설명했다.

 착한봉사단은 2017년 4월 수도권매립지관리공사(Sudokwon Landfill Site Management Corporation) 안에 조성된 숲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통일 나무’를 심는 행사에 참여했다. 기아자동차 가족 봉사단과 함께 진행한 이 행사는 남북한 주민들이 직접 통일을 염원하는 나무를 심고 이후 이 나무를 북한에 보내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이날 착한봉사단의 일원이 되어 통일 나무 심기에 참가한 탈북민 자원봉사단은 광명하나향우회, 하나봉사회, 새터민햇빛사랑회 등이다.

 대한적십자사 산하의 하나봉사회 곽수진 대표는 “봉사라는 단어를 남한에 와서 처음 들어 봤다”면서 “우리는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돕고 탈북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봉사 활동을 시작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함경북도 무산이 고향인 안영애 씨는 “북한의 산들은 대개 민둥산인데 통일이 되는 날 고향 땅에다 옮겨 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무를 심었다”고 말했다.

 착한봉사단 합동 봉사 활동은 2016년 5월 14일 첫발을 내디뎠다. 경기도 연천군 나룻배 마을이 첫 무대였다. 나룻배 마을은 휴전선과 연접한 최북단 마을 가운데 하나다. ‘평화생태마을’로 지정된 이곳에 위치한 하천은 2009년 북한이 황강댐을 방류하는 바람에 6명의 사망자를 냈다.

 봉사 활동은 마을 어른들에게 북한 음식 대접하기, 통일을 염원하는 벽화 그리기, 마을 가꾸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착한봉사단이 준비한 북한 음식은 두릅냉면, 북한식 만두, 두부밥, 인조고기 등 현재 북한에서 인기 있는 먹거리였다.

 이밖에도 착한봉사단은 2016년 5월 국립현충원의 무명용사 묘를 찾아 벌초를 비롯한 환경미화 봉사 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11월에는 서울역 인근 쪽방촌에 있는 독거 노인들을 방문해 직접 담근 김치를 전달하기도 했다. 착한봉사단 이외에도 2015년 이후 크고 작은 탈북민 봉사 단체 50여 곳이 전국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7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Volunteerism Laying the Groundwork for Unification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The notion that North Korean defectors are content with merely receiving help is a stereotype as wrongful and unhelpful as the view that they are simply preoccupied with the hardships of adapting to their new environment. Those are sheer prejudices. That generosity and altruism are innate human qualities is well established by biological and behavioral sciences, including the tendency of people in need to help others in a worse situation.

 A small group of people has broken the hard shell of such prejudices. They formed a volunteer group called UniSeed, consisting of some 50 undergraduate students who are North Korean defectors and six young South Koreans. Members of UniSeed, short for Seed of Unification, raise funds for meals they themselves prepare and distribute once a month to people who live rough near Seoul Station. These students from North Korea believe that homeless people are in worse situations than they themselves who are going through tough times surviving in a new society.

  The group works on a variety of charity activities year-round, reaching out to share what comforts they can offer to people in need: They pool money to give gifts to child welfare facilities and make kimchi that they deliver, along with coal briquettes for heating, to residents of poor neighborhoods. Almost every month, they also gather donations for daily necessities and clothing to send to defectors who are hiding in China and other countries. Through such activities, they are putting into action their group’s slogan: “Young people of the two Koreas should get together to communicate with each other through sharing and become one by loving each other.”

 

A Taste of Unification

 

 About 10 UniSeed volunteers arrive at the kitchen of the Mallihyeon Methodist Church near Seoul Station at 1 p.m. on the third Saturday of every month. They are assigned different tasks and work quickly and efficiently, mindful of a self-imposed deadline. They cook rice, soup and pork bulgogi; they stir-fry dried anchovies, make a salad of squid with cucumbers, or pickle kimchi. They prepare different kinds of soups and side dishes each season. They make hot fish-cake soup or soybean paste soup in winter, fresh wild greens salad in spring, and chilled cucumber soup in summer.

  At 5 p.m., the young volunteers deliver the boxed meals they prepared as an early dinner to about 200 homeless people at Seoul Station Plaza. It costs them 600,000 won to make boxed dinners for about 200 people; they chip in their own pocket money and raise the rest of the amount by selling small handicraft items they produce. Sometimes, they join contests to raise money, and the cash prizes they win help fund the meals they prepare. It is not easy to raise money and cook so many meals but they feel rewarded when they hear words of thanks from the people they serve.

  Esther Um, the founder and head of UniSeed, is a senior majoring in Chinese language at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She began delivering boxed dinners to homeless people in Seoul in July 2014. She launched the effort with the help of four other students from North Korea with 2.5 million won she had received as scholarship.

 Like any fledgling effort, they learned by trial and error how to do such outreach right; even with the best intentions, gestures of caring can fall short. They once made 700 boxes of tofu rice (fried bean curd chunks stuffed with rice), a North Korean dish, to distribute among homeless people, wanting to help alleviate their hunger and at the same time to offer a taste of North Korean food. But contrary to their expectations, the recipients of the boxed meals did not seem to like it. The unfamiliar food did not suit their taste. This taught the volunteers a lesson: Helping is not one-sided giving; it must be a response to what people in need want. They realized that more than anything else, people who live rough just want a warm bowl of rice and delicious soybean paste soup. This prompted them to prepare homestyle meals.

 

Touching Hearts

 

 Hurt feelings come with the territory, and volunteers learn to take them in stride. Some of the homeless men would snap at them in a fit of temper, “Why didn’t you bring us water?” Others simply rejected their lunch boxes, saying, “I’ll not eat what pinkos are giving us.” But as time went by, heartwarming gestures came, too, moving the volunteers’ hearts. On an autumn day in 2014, Um was about to leave after serving boxed meals when one of the men approached and handed her a bag of three small glutinous rice cakes and an orange. She was deeply moved by this small gift, thinking aloud, “He must have received them from someone and stashed them away to eat later…”

 On a sweltering summer day in 2015, another man made a fan out of cardboard and fanned perspiring volunteers who were delivering warm food to them. A growing sense of appreciation for the volunteers arose from the people they served, manifested in different gestures. When it rained, some of them would hold umbrellas over the busy volunteers, and after the boxed meals were delivered, more and more of them joined the volunteers in cleaning up the area. Some even came back to return their meals, having found it hard to eat them after hearing that they had been prepared by young defectors who were struggling for survival themselves.

 Three years after the launch of UniSeed, the volunteers are now being received with open arms. Um said she once heard a man say, “I sometimes sense that people from other volunteer groups work mechanically. But I can feel sincerity in what the UniSeed people are doing.” This made her decide to hang in there despite difficulties, she added.

  Cho Eun-hee, a UniSeed volunteer from North Korea, said, “At first, I didn’t have the courage to approach homeless people because I was scared. But now, I can ask them how they’re doing. I can’t wait for our days of service to them.”

 UniSeed decided to reach out to people who live rough on the streets in the first place because its members believed that their lives were no less tough than that of people with disabilities or elderly people living in poverty. Kim Mi-jeong, another volunteer, observed, “South Koreans don’t seem to like seeing us help homeless people. They seem to consider them undeserving of help because they drink too much or behave in an unruly manner.”

 

 Sense of Self-worth
 
 Um barely reached South Korea on her second attempt. In March 2004, she fled North Korea but was captured in China and repatriated in October that year. In 2006, she fled to China again, and in 2008, she finally reached South Korea. In the process, she had to helplessly watch her mother and younger sister get caught by Chinese police in Yanji, northeast China.

 Hopeless and desperate, she considered ending her own life. But then she happened to see an old man on a street who had no limbs and held a brush between his lips, writing calligraphy to make a living. Deeply touched by the scene, she regained her courage to live on. She suddenly felt compelled to help other people and visited an institution for people with disabilities. But when she said she wanted to do volunteer work there, a staffer told her to show them her ID card first. It made her feel very sad. “For a defector, even doing a good deed is neither simple nor easy,” she thought.

  She then went to Angels’ Haven, a welfare center for people with disabilities that an acquaintance had told her about right after she arrived in South Korea. Thus began her volunteer activities. Every Saturday, she rose early in the morning, helped people wash themselves, and cleaned every corner of the center. She never skipped a single Saturday despite her busy schedule as a student and part-time worker. Sometimes she had a nosebleed. But the volunteer service was the only pleasure she found in South Korea.
 

 She said, “I’ve strongly felt through doing volunteer service that I’m also needed somewhere. I found my pride buoyed significantly when I realized that I could do something for somebody else, not simply letting myself be helped by others.”

 She dedicated herself more to doing volunteer service after tragedy struck her family once again. She became deeply depressed when she received news about her younger brother’s death in the North and when her mother, whom she had managed to spirit out of the country by spending as much as 10 million won in bribes, was diagnosed with cancer. Once again, she was on the verge of suicide when the faces of volunteers, who had cheered her up and showed sympathy for her, flashed across her mind. This second close call made her realize, she said, that “doing volunteer work is also a solution preventing defectors from making extreme choices.” She has a point: Statistics show that the suicide rate among North Korean defectors is three times as high as that of South Koreans.
 

 Rising above the devastation caused by her own family’s tragedy, Um launched UniSeed in 2014 to help other defectors regain their sense of self-worth. She persuaded people she knew to allow volunteers to use a kitchen and supply them with chopsticks and lunchboxes for the meals they would prepare. She also founded Osundosun, meaning “amiably and harmoniously,” a social enterprise that produces and sells North Korean foods to raise funds for a more stable operation of UniSeed.
 

 In 2015, Osundosun won a top prize in a national social venture competition sponsored by the Korea Social Enterprise Promotion Agency. Its staff underwent a refresher self-reliance course run by the Korea Racing Authority. Since November 2016, Osundosun has been running a food truck business with the help of the SEAM (Social Entrepreneurship and Mission) Center, a faith-based community project in Seongdong District, Seoul, that supports social enterprises. Um now plans to expand her services by launching UniSeed Company based on the food truck business.

  She envisions branches of UniSeed Company sprouting at each college and university campus for young people from both Koreas to join hands and create an environment for unification. Through this effort, she wants to see defectors become a bridge for the era of unification, instead of simply being South Korean residents. This will open a genuine way for defectors to settle down here, she believes.

 

Returning Love Received

 

 Besides UniSeed, there are other volunteer groups operated by defectors. One of them is the Chakhan Volunteer Group. (The word “chakhan” here refers to defectors who have arrived in South Korea; its pronunciation implies “good” or “good-hearted.”) Chakhan is made up of 10 small volunteer clubs selected by the Korea Hana Foundation, an agency under the Unification Ministry helping defectors to settle down here. Since its launch in November 2015, Chakhan has been organizing joint volunteer work by its member clubs, each with more than 50 percent of North Korean defectors as their members, two or three times a year.

  An official of the Korea Hana Foundation said, “The Chakhan project was launched to help defectors strengthen their resolve to settle down smoothly here and achieve social unity by raising their awareness as contributors, not simply as beneficiaries. Through volunteer service, they can return love, which they have received here, to neighbors in need.”

 In April this year, Chakhan volunteers planted trees in a forest developed on a landfill in Incheon, thinking of their own hometowns back in the North, together with volunteers from Kia Motors. The event was doubly significant in that South and North Koreans joined hands planting trees that will be sent to the North after they have grown, affirming their shared dream for national unification. The defectors who planted trees that day were volunteers from Chakhan member clubs, such as Gwangmyeong Hana Hyanguhoe (Gwangmyeong Hana Residents Group), Hana Bongsahoe (Hana Volunteers Group) and Saeteomin Haetbit Saranghoe (Defectors Who Love Sunshine).

 “I heard of ‘volunteer service’ for the first time in my life after I arrived in South Korea,” said Kwak Su-jin, the head of Hana Bongsahoe, which is affiliated with the Korean Red Cross. “We started volunteer service to help neighbors in need and change people’s perception of defectors.”

 Ahn Yeong-ae, who hails from Musan in the North Korean province of North Hamgyong, said, “Most mountains in the North are bald. I planted trees in hopes of transplanting them to my hometown after unification.”

 Chakhan volunteers’ joint service activities started on May 14, 2016. They did their first volunteer service in a ferry port village in Yeoncheon County, Gyeonggi Province. It is one of South Korea’s northernmost villages, close to the Demilitarized Zone. They served North Korean dishes to the elderly, painted the walls of houses, cleaned roads and beautified the streetscape. The dishes the volunteers prepared included popular North Korean foods, such as cold noodles garnished with shoots of wild fatsia greens, North Korean-style dumplings, tofu rice and soy-meat. In May 2016, Chakhan volunteers mowed and trimmed greenery around the tombs of the unknown soldiers at the National Cemetery.
 

 Besides Chakhan, about 50 other groups of North Korean defectors have also been doing volunteer service across the country since 2015.


Posted by 김학순

 최근 ‘북한의 솔제니친’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반디’라는 필명을 가진 북한작가의 소설집 <고발>이 프랑스와 영어권 국가에서 호평을 이어간다. 그이 말고도 탈북한 시인 장진성, 소설가 김유경의 작품집이 그들만의 비극적인 체제의 실상과 체험에서 비롯된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해외에 소개되어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해외의 뜨거운 반응과 달리 정작 남한에서는 이들 작품에 주목하는 이가 별로 없다. 무엇이 우리의 시선을 한쪽으로 돌려놓은 것일까.

 서방세계가 알고 있는 북한 문학은 대부분 3대를 이어온 김일성 일가의 독재체제를 찬양하고 우상화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실제로 북한 문학은 여전히 최고지도자의 통치이념에 따라 창작의 큰 그림이 그려지곤 한다. 새해 첫날 발표되는 지도자의 신년사가 해마다 문학의 방향과 작품 내용의 바탕이 된다.

 

찬양과 사회비판 사이 

 

 그렇다고 찬양 문학작품 일색이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북한의 공인 문인 조직인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 분과에 소속돼 문예 활동을 하다가 1998년 탈북한 최진이 시인(58)의 다음 증언은 통념과 조금 다르다. “남한에서는 북한 작가들이 찬양 문학만 한다고 여기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북한이 독재 사회여서 겉으로는 체제 찬양적인 문학이 많아 보이지만 체제를 찬양하는 작가를 극단적인 아첨주의자이며 문학에 대한 기본개념이 없다고 여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들도 친한 사람끼리만 모여 있을 땐 이따금 체제에 대한 완곡한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있다고 최진이 시인은 말한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 찬양시를 지나치게 많이 쓴 한 작가가 동료들로부터 지청구를 들었다. “너는 짬만 나면 김일성 부자 욕을 해대더니 찬양시는 어찌 그리 많이 쓰느냐.” 그러자 그 작가는 “난 김일성 부자가 아니라 내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 어쩔래” 하고 둘러댔다고 한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한번은 작가동맹의 찬양시를 보고 나서 “닭살이 돋는 것 같다”며 물리친 적이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북한 작가들은 문학 본연의 내적 자율성과 사회주의 체제유지를 전제로 한 사회비판이 조심스럽게 허용되면서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애정, 직업선택, 이혼, 도시와 농촌의 격차, 세대 이질성과 같은 다양한 문제에도 관심을 쏟게 됐다고 한다.


 남대현의 <청춘송가>(1987), 백남룡(白南龍)의 <벗>(1988)은 1990년대 후반 남한에도 소개됐을 정도로 탈이념적 소설이다. <청춘송가>는 청년 지식인, 과학자, 기술자들이 보여주는 젊은 시절의 가치 있는 삶을 형상화하면서 남녀 간 애정 윤리를 다룬 작품이다. 이혼 문제를 다뤄 북한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소설 <벗>은 2011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돼 해외 독자의 눈길을 끌었다. 북한 문학 작품이 유럽에서 출판되기는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2004년 남한에서 출간됐던 또 다른 북한 소설인 홍석중(洪錫中)의 <황진이>는 2002년 당시 평양의 독서계를 석권한 인기 역사물이었다. 홍석중은 남북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았고 널리 읽힌 역사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洪命熹 1888~1968)의 손자이기도 하다.

 

세계가 반디의 <고발>에 주목한 까닭

 

  이와는 달리 북한에서 반체제 문학 작품을 내놓는 건 금기다.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작품이라면 북한 특유의 정치범 수용소 행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얼굴 없는 작가의 문제작이 최근 들어 남한과 서방세계에서 부쩍 주목 받기 시작했다. ‘반디’라는 필명을 쓰는 북한 작가의 단편소설집 <고발>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보다 프랑스와 영어권 국가들에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처음 붙여진 ‘북한의 솔제니친’이라는 별명 덕분에 유명세가 한층 더해졌다. 반디는 ‘어둠 속에서만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북한의 현실을 비추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가 자신이 붙인 필명이다.

  반디의 처지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이 처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자국의 정치체제에 반대하고, 국내 출간이 불가능해 외국으로 원고를 내보낸 입장이 똑같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소비에트 연방의 문학이 외부 세계에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솔제니친이 스탈린 독재체제의 만행을 고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등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북한의 반체제 문학이 해외에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도 반디의 소설집 <고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발>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실린 일곱 편의 단편에는 북한 체제 아래 생활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핍진하게 묘사돼 있다. 각기 다른 소재와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만, ‘김일성 시대에 대한 비판’이라는 큰 주제에 하나로 묶여 있다.


  첫머리에 놓인 ‘탈북기’는 몰래 피임약을 먹는 아내를 의심했던 한 남자가 대물림되는 출신성분제에 절망해 끝내 북한을 탈출할 결심을 하고 그 과정을 친구에게 알리는 편지 형식의 단편소설이다. ‘유령의 도시’는 거리의 김일성 초상화만 보면 경기(驚氣)를 일으키는 세 살배기 아이 때문에 창문에 커튼을 쳐놓았다가 ‘수령님 모독죄’로 평양에서 지방으로 쫓겨난 가족 이야기와 함께 병영국가의 실상이 담겼다. ‘지척만리’는 여행증 없이는 이동이 금지된 북한에서 몰래 기차를 타고 고향 초입까지 갔다가 검문소에서 막혀 노모의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한 아들의 애달픈 사연을 그렸다.


  마지막에 수록된 ‘빨간 버섯’은 공산당의 당사를 ‘독이 든 빨간 버섯’으로 규정하고 “저 독버섯을 뽑아버려라. 이 땅에서 아니, 지구 위에서 영원히”라고 절규하는 북한 기자를 등장시켜 김씨 정권 타도를 촉구한다. 일곱 편의 작품 순서는 탈북이라는 소극적 저항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산실인 공산당사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단계까지 작가의 면밀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솔제니친’

 

 이 소설집의 원고가 2013년 남한으로 전달되는 과정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또 하나의 드라마였다. 반디의 친척 여동생이 탈북에 성공해 서울로 들어왔다. 몇 달 뒤 그가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에게 원고 얘기를 꺼냈다. 도 대표는 북한을 방문하는 중국인 친구를 통해 ‘원고를 건네 달라’는 편지를 반디에게 전했다. 편지를 읽은 반디는 비밀장소에 감춰두었던 원고 뭉치를 꺼내 체제 선전용으로 제작, 배포된 <김일성 선집>, <김정일 노작> 같은 북한선전용 책자와 함께 싸 보냈다.


 원고지는 1960-1970년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질이 좋지 않았다. 오래전 쓰인 것을 보여주듯 갈색으로 바랜 원고지 위에 볼펜이 아닌 연필로 꾹꾹 눌러쓴 흔적이 역력했다고 한다. 작가는 원고의 제목을 ‘고발’이라고 스스로 정해서 써 놓았으며, 반디라는 가명도 본인이 정했다. 반디는 현재 북한에 거주하는 1950년생 남성이고,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라고 도희윤 대표는 증언한다. 그렇지만 이 증언에는 작가를 보호하려는 의향이 섞여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도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2014년 5월 이 희귀한 작품집을 세상에 내놨다.


  사실 남한에서는 이 작품에 주목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 작가가 탈북민이 아니라 북한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원고 반출 과정만 무성한 화제를 낳았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반디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와 문학성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이처럼 냉담했던 한국 내 반응과 달리 2016년 프랑스어 번역판이 나오면서 해외 반응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어판 발문을 쓴 북한인권운동가 피에르 리굴로 프랑스사회역사연구소장이 작가 반디를 ‘북한의 솔제니친’이라고 표현하자, 외국 언론들이 한결같이 이를 인용하기에 이르렀다. 리굴로는 ‘작은 반딧불이지만 희망은 크다’는 의미의 제목을 붙인 발문을 썼다. 일간지 르피가로, 리베라시옹, 라디오방송 앵테르, 앵포, RFI, 잡지 마리안느 같은 매체들이 이 책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번역자 임영희(57) 씨는 “한국 소설을 오랫동안 번역했지만 <고발>만큼 지적인 희열을 느낀 적이 없었다”면서 “소설의 구성이 아주 훌륭하다”고 상찬했다.

 반디는 ‘어둠 속에서만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북한의 현실을 비추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가 자신이 붙인 필명이다. 반디의 처지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처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자국의 정치체제에 반대하고, 국내 출간이 불가능해 외국으로 원고를 내보낸 입장이 똑같다.


 <고발>은 2017년 3월을 전후해 미국과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독일, 스웨덴, 포르투갈 등 21개국에서 19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옮겨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영국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30)가 영어판 번역을 맡았다. 이 영어 번역본 은 영국 펜(PEN)이 선정하는 2016년 하반기 번역상 수상작으로 뽑혔다. 미국 뉴욕에서는 반디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만들기 위한 재미동포 모임이 결성되기도 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북한에 살고 있는 익명의 작가 반디가 쓴 반체제 이야기들은 베일에 싸인 독재 정권에서 나타난 매우 보기 드문 작품이다. 전 세계적인 문학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평을 내놓았다. 문학전문지 더밀리언즈는 <고발>을 ‘2017년 가장 기대되는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미국 서평지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불가해한 북한의 삶을 다룬 매우 드문 작품”으로,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은 “폐쇄된 일당 독재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한 매우 감동적이고 놀라운 픽션으로 휴머니즘에 대한 희망을 시험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영국판 출판사 서펜츠 테일 발행인 한나 웨스트랜드는 “권력 앞에서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솔제니친을 떠올리게 하고, 통렬한 풍자는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 미하일 불가코프를 연상하게 한다”고 평가한다. 김종회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기교적 측면에서는 한국 현대작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북한에서 문학의 공식적 목표가 김일성 가계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교만으로 수준을 판단할 수는 없다.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저항정신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방세계의 뜨거운 반응과 동시에 한국에서는 발간 3년 만에 출판사를 옮겨 재출간되었다. 새로운 표지와 더불어 작가의 최초 원고를 충실하게 살려 작품이 지닌 문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췄다. 개정판을 출간한 다산북스는 “3년 전 출간됐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이다. 시장성도 충분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북한 문학작품은 저항정신에 비중을 두어야”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다른 탈북 문학인들의 작품도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 주목 받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탈북시인 장진성은 북한 주민의 실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시집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로 2012년 영국 옥스퍼드대 렉스 워너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2014년 출간한 수필집 <경애하는 지도자에게>는 영국 도서판매 순위 10위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로 평양에서 활동하다 2000년 탈북한 김유경이 2016년 출간한 장편소설 <인간모독소>는 프랑스 출판사 필립 피키에와 판권 계약을 맺었다. 탈북 문학인의 작품이 해외에서 조명 받는 것은 실제 경험에서 나오는 생생한 리얼리즘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 문학작품에 대해 남한에서 상대적으로 호응이 낮은 것은 호기심과 절박감의 정도 차이에서도 오는 듯하다. 한국인들은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데다 언론을 통해 북한의 비극적인 실상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루는 문학작품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기 어렵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이 북한의 핵무기 위협이나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높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도 남한 주민들은 ‘위기의 만성화’로 말미암아 체감온도가 다르게 느껴지는 현상과 유사하다. 일부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북한 문학을 이념론, 나아가 ‘색깔론’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7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N. Korean Dissident Literature Sparks Global Interest

 

 Unlike defectors’ memoirs exposing the cruel reality in North Korea,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written by an author still living in the North is drawing attention for its vivid literary depiction of the little-known everyday circumstances of the lives of its population. Translated and published in many foreign languages, “The Accusation” by Bandi offers a rare glimpse of North Korean creative writing.
 In the eyes of the West, North Korean literature is not much more than a tool to praise and idolize the three generations of the Kim dynasty’s dictatorship. In fact, official North Korean literature is indeed based on the governing ideology of the supreme leader who sets out guidelines for the country’s writers in his annual New Year’s address.

 

Praise of the Regime and Criticism of Society

 

 However, it is wrong to think that North Korean literature is singularly about saccharine flattery of the regime. The poet Choi Jinyi, who defected to South Korea in 1998, wants to disabuse people of this common misconception; there certainly is more than meets the eye. She used to engage in literary activities as a member of the Poetry Subcommittee in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North] Korean Writers’ Union. She said, “Many people in the South tend to believe that North Korean authors only write works praising the regime. On the surface, there seem to be many literary works glorifying the regime; that’s because the North is an authoritarian society. But in fact, those who write such works are regarded as extreme sycophants, ignorant of the most basic concepts of literature.”

 

 When they are with trusted writer friends, at times even members of the union complain about the regime in a roundabout way, Choi said. One day, a writer who had written many poems eulogizing the regime’s founder, Kim Il-sung, and his son, Kim Jong-il, was criticized disapprovingly by his writer friends. They said, “Why are you writing so many poems in praise of the Kims, while often speaking ill of them in private?” He replied evasively, “I thought of my God, not the Kims, when I wrote the poems. So what?” It is said that the late leader Kim Jong-il once turned down a poem presented by the writers’ union after reading it, saying, “This gives me goosebumps.”


  North Korean writers pay attention to various issues such as love in everyday life, choice of careers, divorce, the gap between urban and rural areas, or generational diversity. They are cautiously allowed to make critical comments on society, provided they maintain the intrinsic autonomy of literature and the socialist system.

 

  Nam Dae-hyon’s “An Ode to Youth” (1987) and Paek Namryong’s “Friend” (1988) had no ideological undertones, so they were published in South Korea in the late 1990s. “An Ode to Youth” deals with the prevailing ethos of love, focusing on the worthy lives of young intellectuals, scientists, and engineers. “Friend,” a novel on divorce that had become a bestseller in the North, drew overseas readers’ attention after it was translated and published in French in 2011. The book was the first North Korean literary work ever to be published in Europe. “Hwang Jin-yi” by Hong Sok-jung, a historical North Korean novel published in the South in 2004, made a sensation in Pyongyang in 2002. Hong is a grandson of Hong Myong-hui (1888~1968; pen name Byokcho), the author of “Im Kkokjong,” a historical saga highly acclaimed and widely read in both Koreas.

 

The Pseudonymous Author Bandi

 

  Dissident literature is taboo in the North. Anyone who writes a literary work explicitly criticizing the regime faces the certainty of incarceration in a political prison camp.


  Under these circumstances, a work by a pseudonymous author who is known to be living in the North has recently attracted wide attention in many countries, including South Korea. “The Accusation: Forbidden Stories from Inside North Korea” is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by a North Korean author who uses the name Bandi (Firefly) as his pseudonym. His fame grew after he was dubbed “the North Korean Solzhenitsyn” by a French author. Bandi is a pseudonym the author gave himself, vowing to shed light on the reality in his destitute country, “just as a firefly shines only in a world of darkness.”


 Bandi is in a situation very similar to the fate faced by 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 the 1970 Nobel laureate in literature, in the former Soviet Union. Just as Solzhenitsyn did, Bandi opposes the political system of his own country and smuggled out his manuscripts to the outside world because it is impossible for him to publish his works in his home country. It was only after two of Solzhenitsyn’s novels “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 and “The Gulag Archipelago” exposed atrocities of the Stalinist dictatorship that the literature of the Soviet Union began attracting widespread international attention. In the same vein, it was only after Bandi’s “The Accusation” was published that dissident literature in North Korea began entering the spotlight in the outside world.

  The seven short stories in this collection truthfully depict the harsh lives of people from various

walks of life, groaning under the North Korean political system. Each story has a different theme and plot, but all are written under a single umbrella theme: the indictment of the rule of Kim Il-sung.

  The first story, “Record of a Defection,” is an epistolary-style story about a man who grows suspicious of his wife who secretly takes birth control pills. He writes letters to his friend telling him of his frustration about the hereditary “caste system” and his decision to flee the country. “City of Specters” is a story about a family that was expelled from Pyongyang to a distant province “on blasphemy charges.” They had drawn the curtains shut at the window of their apartment because their three-year-old child had a seizure whenever he saw the portraits of Karl Marx and Kim Il-sung outside the window across the street. “So Close, Yet So Far” is a heartrending story about a son who fails to see his old mother at her deathbed. Although he manages to sneak into a train without a ticket, he is soon caught in a security check. In North Korea, nobody can travel anywhere without a travel pass.


 The last story is “The Red Mushroom.” Calling the Workers’ Party headquarters a “poisonous red mushroom,” a journalist calls for the overthrow of the Kim regime, crying out, “Pluck up that poisonous mushroom from this land ? no, from the Earth forever!” In a thematic sequence from the first story to the last, all seven stories in the collection reflect the tortuous progression of the author’s rebellion against the brutal regime ? from passive resistance by defection to calling for the overthrow of the Workers’ Party, the cradle of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North Korea’s Solzhenitsyn’

 

 The manuscripts of these stories were smuggled into South Korea in 2013, in painstaking secrecy worthy of an espionage operation. A female relative of Bandi’s fled the North and arrived in Seoul. Several months later, she told Do Hee-yoon, secretary general of the Citizens’ Coalition for Human Rights of Abductees and North Korean Refugees, about the manuscripts. By sending a letter to Bandi through a Chinese friend visiting the North, Do asked him to deliver his manuscripts. After reading the letter, Bandi took out the manuscripts from a secret hiding place where he had stored them. To dodge luggage inspections, he hid them among the regime’s propaganda materials such as “The Selected Works of Kim Il-sung” and other such literature.


   The coarse manuscript paper was in such a poor state that it looked as if it was from the 1960s or 70s. The yellowed paper showed the author must have pressed hard with a pencil when writing the stories a long time ago. The author himself had named the collection “The Accusation.” He had also created the pseudonym Bandi for himself. According to Do Hee-yoon, Bandi is a man born in 1950, who still lives in the North and is a member of the Korean Writers’ Union. There is speculation, though, that Do is hiding Bandi’s real identity to protect him. After many twists and turns, the stories were published in Seoul in May 2014.


  In South Korea, few people paid attention to Bandi’s work. They merely took interest in the fact that the author was not a defector but still lived in the North and in how the manuscripts were smuggled out. Some people even suspected that the author was a fictitious person. Hence, the genuine worth and literary value of the work remained unappreciated.


   In contrast to such a cold response in South Korea, foreign readers and critics began showing keen interest in the work when its French edition was published in 2016. Pierre Rigoulot, a French historian and North Korea human rights activist and the director of the Institute of Social History in Paris, called Bandi the “North Korean Solzhenitsyn.” In his foreword for the French edition of “The Accusation,” Rigoulot wrote, “It’s a small firefly, but its hope is big.” The book received substantial mass media coverage in France, by dailies like Le Figaro and Liberation, radio stations France Inter, France Info and RFI, and magazines like Marianne. “I’ve translated many Korean novels into French. But I’ve never felt more intellectually ecstatic than while translating the stories by Bandi. The plots are splendid,” said Lim Yeong-hee, translator of the French version.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written under a pseudonym and smuggled out of North Korea is on its way to becoming an international literary sensation,” Britain’s The Guardian has reported. “Dissident tales from pseudonymous author Bandi, still living in the country, are very rare fiction to emerge from the secretive dictatorship.”


  Publishers and human rights activists from various countries participate in a reading event of “The Accusation” at the Bridge of Freedom near Imjingak Pavilion south of the demilitarized zone in Paju, Gyeonggi Province on March 30, 2017.


  “The Accusation” has been translated into 19 languages and was published almost simultaneously in 21 countries, including Britain, Canada, Italy, Japan, Germany, Sweden, and the United States, in March of this year, as well as, most recently, in Portugal. Its English translation was done by Deborah Smith, a British translator who shared the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for Fiction in 2016 with Korean author Han Kang for her translation of Han’s novel “The Vegetarian.” Smith’s translation of “The Accusation” was among the 10 PEN Translates Autumn 2016 winners chosen by the English PEN. In New York, Korean-Americans organized a campaign to nominate Bandi for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written under a pseudonym and smuggled out of North Korea is on its way to becoming an international literary sensation,” Britain’s The Guardian has reported with effusive praise. “Dissident tales from pseudonymous author Bandi, still living in the country, are very rare fiction to emerge from the secretive dictatorship.”


 The Millions, an online literary magazine, picked “The Accusation” as one of the most anticipated books of 2017. Publishers Weekly, an American book review magazine, commented, “Bandi gives a rare glimpse of life in the ‘truly fathomless darkness’ of North Korea.” American online bookstore Amazon said, “‘The Accusation’ is a vivid depiction of life in a closed-off one-party state, and also a hopeful testament to the humanity and rich internal life that persists even in such inhumane conditions.”


 “[This] isn’t just a book with a good story behind it: it’s a collection of perfectly crafted novellas that, like Aleksandr Solzhenitsyn’s work [from the former Soviet Union], speak with authority and truthto- power directness,” Hannah Westland, of Serpent’s Tail, the British publisher of “The Accusation,” said to The Guardian. “Bandi’s absurdist approach to satire is reminiscent of Ionesco’s ‘Rhinoceros,’ and his biting wit . . . reminds you of that other great Russian literary dissident, Mikhail Bulgakov.”


  “Bandi is much different from contemporary South Korean writers from a technical point of view. We can’t simply determine his skill level, given that the official goal of North Korean literature is to show the greatness of the Kim family. But we should focus on his spirit of barehanded resistance to the regime,” said Kim Jong-hoi, a professor of Korean literature at Kyung Hee University in Seoul.
 Amid the high acclaim abroad, the Korean version of “The Accusation” has been republished by another publishing house three years after its debut in South Korea. With its new cover, the new edition focuses on the literary value of the book by remaining as faithful to the original manuscripts as possible. Dasan Books, the publisher of the new edition, said, “Readers will find the new edition very different from its previous edition of three years ago. We believe this one has good marketability.”


 It is worth noting that many literary works by North Korean defectors have also received more attention overseas than in South Korea. In 2012, poet Jang Jin-sung won the Rex Warner Literary Prize from Oxford University for his poetry collection “I Am Selling My Daughter for 100 Won,” which truthfully reveals the miserable lives of the North Korean people. “Dear Leader,” his collection of essays published in 2014, ranked 10th among the top selling books in Britain that year. Kim Yu-gyong signed a publishing contract with French publisher Editions Philippe Picquier for her novel, “Ingan Modokso” (Camp for Defiling Human Beings), whose original edition came out in 2016. She used to write stories in Pyongyang as a member of the Korean Writers’ Union. She escaped from the country in 2000.

 

Response by South Koreans

 

  By comparison, South Korean readers are less responsive to North Korean literature than foreign readers, probably because they are less curious about society and life in the North. Many South Koreans hardly feel freshly informed and touched by North Korean literature that depicts the tragic reality of everyday life in the North, because they live in a standoff within spitting distance of North Korea across the demilitarized zone. On the radio, on TV, and in newspapers, they listen to, watch, and read about the lives of their erstwhile compatriots every day.


 While Americans and Europeans take nuclear threats from the North or the possibility of war on the Korean peninsula very seriously, South Koreans have become somewhat jaded and benumbed by continual threats and crises. Consequently, many South Koreans tend to look at North Korean literature primarily from an ideological point of view, rather than appreciate the authors’ literary depiction of their real-life experiences.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Posted by 김학순

 인터넷 신조어와 괴상한 줄임말이 범람해 그렇지 않아도 분단 이후 이질적으로 변화해 온 남북한 일상용어는 한 통계에 의하면 이미 40% 가깝게 그 차이가 벌어졌다. 남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외래어만 해도 탈북민들에게는 낯선 정도를 넘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통일부가 2014년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0%가 넘는 응답자가 외래어로 인한 의사소통 문제를 남한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의 하나로 꼽았다. 남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탈북민이 컴퓨터를 고치기 위해 ‘컴퓨터 클리닝’이라고 쓰인 세탁소를 찾아갔다는 웃지 못할 사연도 있다.

 

  독특한 운영 방식

 

 탈북민들에게는 여기에 ‘영어 격차’라는 엄청난 고민이 더해진다. 영어를 배워 한 단계 도약하고 싶지만, 대부분 생계를 꾸려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형편이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타난 게 서울 마포구 독막로 180-8에 자리한 ‘북한이탈주민 글로벌교육센터’(TNKR Global Education Center)이다.

 

  약칭으로 쓰는 ‘TNKR’은 ‘Teach North Korean Refugees’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탈북민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곳은 미국인 케이시 라티그(Casey Lartigue) 씨와 한국인 이은구(Lee Eun-koo) 씨가 의기투합해 2013년 3월 만든 비영리 민간단체다.

                                                                                            


 이들의 프로그램 운영 방식은 독특하다. 직접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배우려는 탈북민과 영어를 가르치고 싶은 원어민 자원봉사자를 연결해준다. 여러 수강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가르치는 영어 학원과 달리 학생이 강사에게 1대 1 맞춤형으로 배운다. 교육 장소, 시간, 수업방식, 교재 결정은 학생 희망에 맞춰준다. 인연 맺은 강사가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바꿔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같은 시기에 여러 명의 강사에게 동시에 배우는 열혈 학생들도 적지 않다. 라티그 씨는 “강사들이 말하기를 잘 가르치는 사람, 문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 탈북민들에게 영감을 주는 데 뛰어난 사람 등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강사들에게 배우는 게 유리한 면이 많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현장 면담(matching session)을 통해 강사를 고를 수 있다. 이런 만남의 날을 두는 것은 서로 신뢰를 쌓고 학습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2016년 말까지 50여 차례 열렸다. 강사와 연결되기 전 대기자들은 TNKR 사무실에서 과도기적으로 배울 기회(in-house tutoring)를 갖는다.


 지금까지 이곳을 통해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고 있는 탈북인은 250여 명으로, 그 55% 가량이 학교에서 영어를 따라잡기 힘들거나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어서 이곳을 찾은 대학·또는 대학원생이며, 30%는 직장인, 나머지는 주부, 구직자 등이라고 한다

 

열의에 찬 학생들

 

  지금까지 이곳을 통해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고 있는 탈북민은 250여 명으로, 그 55% 가량이 학교에서 영어를 따라잡기 힘들거나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어서 이곳을 찾은 대학 또는 대학원생이며, 30%는 직장인, 나머지는 주부, 구직자 등이라고 한다. 라티그 씨는 “영어를 배워 더 나은 직업을 구하고, 자연스레 남한 생활에 더욱 잘 적응하고 싶어 하는 탈북민들이 TNKR의 문을 두드린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가르쳤거나 가르치고 있는 자원봉사자는 470여 명에 이른다. 취재하던 날 현재 현장 만남 대기자가 8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이들 가운데 고아, 인신매매 피해 경험자, 25살 이하 지원자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고 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는 탈북민들은 구직과 남한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수요자 중심 교육이어서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탈북민 학생들의 사후 의견을 꼼꼼하게 챙기는 이은구 공동대표의 얘기다.

                                                                                   


 라티그 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으로 박연미(Park Yeon-mi) 씨를 꼽는다. “TNKR를 열기 전 2012년 12월 박연미 씨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엔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2013년 말께 공식적으로 우리 프로그램에 참여했지요, 박연미 씨는 2014년 1월 리매칭 학생으로 참여해 8개월 동안 무려 18명의 선생님들과 1대 1로 만나 일주일에 40시간 가까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는 영어를 배우려는 열의가 엄청나게 강했고, 우리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TNKR 홍보대사로도 활동한 박연미 씨는 지금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재학 중이다.


 30대 늦깎이 대학생인 양세리(Yang Che-rie) 씨는 “학교 수업시간에 영어로 제 의견을 말하는 데 큰 용기가 생겼다. 우리 탈북민들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배우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 기회를 제공해 남한 사회 적응을 도와주는 TNKR이 정말 고맙다”고 말한다.


  호주,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출신 강사들과 영어 공부를 한 30대 출판 편집인 엄영남(Eom Yeong-nam) 씨는 “영어실력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생긴 것 같다. 더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이 TNKR에서 삶의 자신감을 얻으면 좋겠다”고 추천한다.


  자원봉사자들의 국적과 직업은 다양하다. 미국인이 가장 많고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영어권의 다른 나라 출신도 많다. 이들의 직업도 교수, 교사, 학원 영어 강사, 대학원생, 프리랜서 작가 등 각계에 걸쳐 있다.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의무가 주어진다. 한번 참여하면 적어도 3개월 동안, 한 달에 두 번 이상, 한번에 90분 이상 가르쳐야 한다.


  자원봉사자들이 TNKR에 참여하는 까닭도 갖가지다. 크게 보면 세 부류로 나뉜다. 우선 북한과 북한사람을 알고 싶어서다. 두 번째는 이미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탈북민들을 가르치는 일도 해보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탈북민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지는 않지만 가르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밖에 단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거나, 영어 교사로서 어린아이들만을 가르치는 것이 따분해 성인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20대 미국인 매튜 맥가윈(Matthew McGawin) 씨는 “발음과 문법을 바로 잡아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음 번 수업 때는 꼭 고쳐옵니다. 수업 때마다 실력이 느는 모습을 보면 더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요.”라며 뿌듯해 한다.


  6명의 탈북민에게 영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영국인 라이언 가드너(Ryan Gardener) 씨는 이렇게 말한다. “TNKR의 가장 큰 장점은 탈북민들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러 원어민 강사들을 스스로 선택해 영어와 더불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게다가 배우는 장소를 그때마다 달리 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TNKR 프로그램에서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두 부문으로 나눠진다. ‘트랙 1’로 불리는 첫 단계는 영어와 친숙해지면서 기초영어, 문법, 어휘, 발음 등을 배우고, 스스로 공부하는 길을 찾는 단계다. 이 때 원어민 자원봉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외국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노하우도 자연스레 덤으로 얻도록 한다. 현재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단계를 거치고 있다.

 

  ‘트랙 2’는 공석에서 말하기(public speaking) 등 발표 능력을 익히고 키우는 단계다. 비즈니스에 활용하거나, 공공연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특별프로그램이다. 이 단계에서는 글쓰기, 연설, 프리젠테이션 등을 배운다. 탈북민들이 무대와 영어에 대한 공포를 한꺼번에 해소할 수 있도록 영어 웅변대회도 정기적으로 연다. 한 해 두 차례, 2월과 8월에 대회를 열려고 노력하고 있다. TNKR은 필요에 따라 영어 외 언어도 가르친다. 이를테면 변호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법률용어로 많이 쓰이는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다.

 

개인 후원금에 의존

 

 하버드대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90년대 연세대, 한양대 등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한 라티그 씨는 2010년 다시 찾은 한국에서 북한의 실상을 알고부터 탈북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2012년 3월, 30여 명의 탈북민들이 중국에서 강제 북송된 사건은 라티그 씨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강제 북송 반대 집회 현장에서 단식농성을 했던 박선영 자유선진당 국회의원이 탈북 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물망초학교를 세우려는 계획을 말씀하셔서 저도 국제협력이사로 참여했습니다. 저의 주요 역할은 물망초 학교에 영어 자원봉사 선생님들을 모집하는 것이었죠.”


 라티그 씨는 ‘물망초학교’에서 이은구 씨를 알게 되자 자신의 외국인 인맥과 이은구 씨의 탈북민 네트워크를 합해 뜻을 펴기로 했다. 그 동안 자신이 만났던 탈북민들이 하나같이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했고, 영어 실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한국 실정을 알기에, 이들에게 디딤돌을 놓아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은구 씨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석사, 영국 셰필드대학교(University of Sheffield)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북한인권정보센터,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에서 연구원으로 10여 년간 일하다가 현재 한국자원봉사협의회에서 근무하면서 TNKR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처음에 사무실도 홈페이지도 없이 몇 명의 학생과 자원봉사자만으로 시작했던 이 프로그램은 이제 탈북민들 사이에 제법 널리 알려졌다.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TeachNorthKoreanRefugees), 트위터(TNKR@TeachNKRefugees), 홈페이지(www.teachnorthkoreanrefugees.org) 등 SNS를 통해 배우고 싶은 사람,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이 활발하게 소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재정문제다. 4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 변변한 단독 사무실을 마련하기 어려워 이태원을 비롯해 서울의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현재의 사무공간도 예산에 걸맞은 곳을 찾다가 골목 안의 허름한 단독주택에 세 들어 마련한 것이다. 정식으로 TNKR 프로그램 운영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얻은, 사실상 첫 단독 사무실인 셈이다.

 TNKR 운영비는 오로지 개인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강사들 중에 자기 학생을 위한 교재를 스스로 구입하거나 개인 후원금을 내는 이도 많다. 학생들도 선생님들의 무료 자원봉사에 감동받아 적은 액수지만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라티그 씨와 이은구 씨의 자비도 들어간다. 두 사람은 “탈북민들의 열망이 눈에 밟혀 힘들어도 이 일을 도저히 그만 둘 수 없을 것 같다”며 강한 열의를 드러냈다.


  TALES OF TWO KOREAS

 

 Volunteers Help Bridge the Language Gap for Defectors 


  The TNKR Global Education Center is a private, nonprofit facility committed to helping North Korean defectors learn English. One-on-one lessons by native English-speaking volunteers help defectors gain a competitive edge and equal opportunities in South Korean society with its emphasis on English proficiency.

 

  Statistical data show that the language gap between the two Koreas has grown by nearly 40 percent since the national division in the mid-1940s. It has been widened further by a deluge in South Korea of online slang words and odd abbreviations. Many foreign words South Koreans use without a thought are very unfamiliar and bewildering to the defectors. In a 2014 survey by the Unification Ministry, 40 percent of respondents indicated that the plethora of unfamiliar foreign words in everyday use was one of the biggest difficulties defectors who settled in South Korea were experiencing. For example, a defector living in Seoul went to a laundry store displaying a sign, “Computer Cleaning” (meaning “computeraided cleaning”), to have his computer fixed.

 

Unique Operating System

 

 “English competency,” a hefty burden, has been added to the defectors’ list of difficulties. They want to advance in their studies and jobs by learning English. But most of them do not dare to even think of it because just surviving in their new home is a challenge. The TNKR Global Education Center helps them get over those hurdles through a highly personalized teaching system that many South Korean families would willingly pay premium fees for if they could. TNKR is the abbreviation of “Teach North Korean Refugees”; it’s a private, nonprofit organization that runs a facility (located at 180-8 Dokmak-ro, Mapo District, Seoul) that teaches North Korean defectors English for free. It was founded in March 2013 and is directed jointly by Casey Lartigue, an American, and Lee Eun-koo, a South Korean.

  TNKR has a unique program and system of operating as a language teaching organization. They do not teach students themselves, but connect defectors who want to learn English with native English-speaking volunteers who want to teach English. Unlike private cram schools that teach students in classrooms under a preset curriculum, TNKR arranges for students to learn English with teachers one-on-one. Where, when, how, and what to teach depend on the students’ wishes. If they want other teaching styles, students can ask for a change of teachers.

  Many students are so enthusiastic that they sign up with several teachers at once. It is very helpful for students to learn from multiple teachers because some are good at teaching spoken English, others at teaching grammar, and still others at giving inspiration to defectors, Lartigue said.
 Students can choose teachers at regular matching sessions that are aimed at building mutual trust and increasing efficiency in studying. About 50 such sessions had been held until late 2016. Those on a waiting list come for in-house tutoring sessions at the TNKR office before they are connected to teachers.

 Some 250 defectors have learned or are currently learning English at TNKR. About 55 percent of them are undergraduate or graduate students who want to catch up in school or study abroad.
 Some 30 percent are office workers, housewives, and job seekers. According to Lartigue, those defectors who want to learn English to find better jobs and adapt to a new life in South Korea more easily are knocking on the TNKR office’s door. Some 470 volunteers have taught or are teaching here.
 The day I visited the TNKR office, I heard that as many as 80 defectors were on the waiting list for matching sessions. Priority is given to orphans, formerly trafficked persons, and those under 25 years old. Those who have learned or are learning English at the center agree that the English education they have undergone here is very helpful to them in finding jobs and adapting to South Korean society.

  “It seems that students are satisfied with the English education here because it’s a customer-focused program that gives students a choice,” said Lee. She keeps a journal of feedback received from students.


   Though still early in its history, the track record of TNKR’s allvolunteer teaching program can be expected to be studded with many inspirational stories of students as well as teachers. The name Park Yeon-mi comes up as Lartigue speaks of their most unforgettable student. Park did not speak English well when he first met her in December 2012 before TNKR opened. Park then joined the TNKR program in late 2013. Beginning as a student of a re-matching program in January 2014, she studied hard for nearly 40 hours a week, learning from as many as 18 teachers, one-on-one for eight months. She had great enthusiasm for learning English and TNKR gave her a chance, Lartigue said.
 Once a promotional ambassador for TNKR, Park is now studying at Columbia University in the United States.


  Yang Che-rie, a student in her 30s, said, “Thank God, I now have the courage to express myself in English during classes at school. I’m really grateful to the TNKR for helping us defectors adapt to South Korean society by undergoing substantive English education in a new environment and having a chance to build a human network.”


 Some 250 defectors have learned or are currently learning English at the TNKR Global Education Center. About 55 percent of them are undergraduate or graduate students who want to catch up in school or study abroad. And 30 percent are office workers, housewives, and job seekers.

Students’ Enthusiasm

 

  Eom Yeong-nam, an editor and publisher in his 30s who learned English from teachers from Australia, Canada, the United States, and New Zealand, said, “I think I now have a useful tool: English proficiency. I hope more defectors will gain self-confidence at TNKR.”
Volunteers come from several countries and are working in various kinds of jobs. Americans top the list, followed by those from other English-speaking countries like Britain, Canada, Australia, and New Zealand. Their jobs in Korea range from university professor, schoolteacher, and cram school lecturer to graduate student and freelance writer. As TNKR volunteers they commit to perform the following duties as a minimum: they should teach for at least three months, more than twice a month, and more than 90 minutes per class.

 Students learn English in one-on-one sessions with native English-speaking volunteer teachers under the TNKR (Teach North Korean Refugees) program, a teaching approach that would be the envy of most families keen on English education of their children.

 Volunteers have various reasons why they are taking part in the TNKR program. The teachers fall into roughly three categories: those who want to understand North Korea and North Koreans; those who want to add their experience of teaching defectors to their resume of volunteer work; and those who simply enjoy teaching. Others are teaching English here to experience something new and still others want to teach adults for a change, as a break from teaching English to children.

  Matthew McGawin, an American teacher in his 20s, proudly said that most students spoke accurately after their pronunciation and grammar were corrected. He pledged to teach better whenever he saw his students’ English improve.


   Ryan Gardener is a British teacher who has taught English to six defectors. He notes that the strongest point of the TNKR program is its system that allows defectors to choose native English speakers from various countries to learn many things as well as the language. Furthermore, he said one of the important things is to let students learn English in different settings each time.
 The TNKR program consists of two parts to help students improve their English. Track 1, the first step, helps students become familiar with the English language through actual use while learning basic English skills, grammar, vocabulary, and pronunciation, and finding ways to study by themselves. In the process of communicating with native speakers, students will naturally learn how to overcome their fear of speaking English with foreigners. Currently, most students have reached this stage.


 Track 2 is the step at which students cultivate their ability to express themselves formally in English, including public speaking. It is a special program designed to improve their ability to do busi ness or give public speeches in English. At this stage, they learn how to write and give a speech or a presentation. English speech contests are also held regularly to help defectors overcome both stage fright and the fear of speaking in English in front of other people. The center tries to hold such contests twice a year, in February and August, if possible.


  Other languages are also taught at the center. For example, it teaches Latin, which is often used in legal terms, to those students who want to become lawyers.

 

  Private Donations

 

 After earning an MA in pedagogy from Harvard University, Lartigue taught English at Yonsei and Hanyang universities in the 1990s. When he revisited Korea in 2010, he learned about the dire reality in North Korea and began taking a deep interest in North Korean defectors. He was greatly shocked by the news about China’s repatriation of about 30 defectors to North Korea in March 2012. He helped recruit volunteers to join protests in front of the Chinese Embassy in Seoul. There, he met the legislator Park Sunyoung of the minor opposition Liberty Forward Party who had staged a hunger strike in front of the Chinese Embassy. He told her he wanted to get involved in helping North Korean refugees.


  At the time, Rep. Park brought up the idea of establishing Mulmangcho (Forget-Me-Not) School, an alternative school for young defectors. Lartigue joined her program as a volunteer board member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to help recruit English-speaking volunteer teachers for the school.


   It was at Mulmangcho School that Casey Lartigue and Lee Eun-koo found each other in search of a practical way to help North Korean defectors. They readily agreed to work together towards their shared goal by using Lartigue’s network of English teachers and Lee’s network of defectors. The idea that took shape was to lay a stepping stone path for defectors by helping them acquire English language skills, an essential asset in South Korea’s job market as well as in society as a whole. For Lartigue, it was the natural thing to do: Each and every defector he had met asked him to teach them English and he knew that it would be difficult for them to find jobs in Korea unless they had a certain level of English proficiency.


  Lee obtained an MA in North Korean studies from the 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and another MA in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the University of Sheffield in England. She had worked as a researcher for about 10 years at the Database Center for North Korean Human Rights and at the Education Support Center for Young North Korean Defectors of the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a government- funded education think tank. Concurrently working for Volunteering Korea, a civic group, she is a co-director of the TNKR program.


  The program started only with a handful of students and volunteers, without even an office or a website. It is now widely known among defectors. These days, students who want to learn English can have lively communications with aspirant volunteer teachers via Facebook (https://www. facebook.com/TeachNorthKoreanRefugees), Twitter (@ TeachNKRefugees), or through the TNKR website (www. teachnorthkoreanrefugees.org).


   The biggest difficulty is the effort’s limited finances. Over the past four years, TNKR has had to move to various places around Seoul, including Itaewon, because it was financially strapped. It has now rented a shabby house in a back alley which fits within the budget. This is, in fact, its first independent office since the TNKR program started.


   Office expenses are borne by donations alone. Many teachers buy books for their students on their own or give donations. Impressed by such dedicated outpouring of free volunteer services, some students, too, donate what little money they have. Lartigue and Lee are also contributing their own money. Their eyes sparkling, they both said that they can never give up, no matter how hard their job may be, because they know how eager the defectors are to keep learning.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Posted by 김학순

 새터민 청소년 그룹 홈 ‘가족’은 의지할 가족구성원이 없는 탈북 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대안가정이다. 나이 마흔에 결혼도 잊은 채 10년째 이 가정의 엄마 노릇을 하고 있는 김태훈(金泰勳) 씨를 주위에서는 ‘총각엄마’라고 부른다. ‘미리 온 통일세대’ 아이들 열 명이 그와 함께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김태훈씨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 늦잠 자는 아이들을 깨워 먹이고 학교에 보내느라 눈코 뜰 사이가 없다. 아이들의 등교준비를 돕는 부산한 아침시간이 지나면 그는 날마다 집안 곳곳을 속속들이 청소하고, 빨래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남자 11명이 한집에 모여 살기 때문에 ‘남자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세탁기 두 대를 날마다 돌립니다. 남자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빨래의 양도 유난스레 많습니다.” 그는 화장실 청소에 무엇보다 신경을 곤두세운다. 암모니아 냄새를 지우기 위해 변기를 치약으로 닦는 노하우까지 생각해 냈다.


  아이들은 그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아이들 중에 남한사회 부적응자가 많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우리 집 아이들 자랑을 좀 하고 싶습니다. 화가, 작가, 뮤지컬 배우, 전교 학생회장, 전국 봉사왕도 있지요. 대단하죠?” 그는 “학생회장 ‘엄마’가 된 덕분에 학부모회장으로 치맛바람도 일으켜 봤다”고 너스레를 떤다. 탈북 청소년이 일반학교에서 다른 후보들과 치열하게 겨뤄 전교회장에 선출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 주인공 한진범은 회장이 된 뒤 더 책임감이 강한 아이가 되었고, 진범이의 이런 성과는 그를 새롭게 일깨웠다.

                                                                                           

 

 어쩌다 들어선 운명의 길

 

 그는 이렇게 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출판사에 다니던 그가 우연히 만난 탈북 소년과 며칠을 함께 지낸 게 운명의 길로 들어서는 시작이었다. 2006 년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기관인 하나원에 봉사하러 갔다가 만난 한 퇴소예정자가 전해준 주소지인 서울시 양천구의 한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다. 어두컴컴한 집에 초등학교 4학년 남자 아이가 TV를 켜놓고 혼자 자고 있었다. 하나원에서 마련해준 이 임대아파트에 아이만 남겨 두고,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지방에 내려간 터였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먹을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가슴이 찡했다. 요리를 잘 하는 그는 장을 봐와서 밥을 지어 소년과 함께 먹었다. 소년은 묻지도 않은 자신의 고향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나서 하룻밤 함께 자고 가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는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그 집을 떠나지 못했다. 얼마 뒤 소년의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해 지방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는 소년과 함께 살기로 했다. 그 뒤 하나원을 통해 아이들을 하나 둘씩 더 받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뒷바라지하는 탈북 청소년 10명의 보금자리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 현재 서울시 성북구 북악산 자락 단독주택에 마련됐다.

 새 아이가 오면 그는 우선 땟국부터 벗긴다. 입고 온 옷과 소지품은 본인의 동의를 구하고 대부분 버린다. 그러고는 미용실에 데려가 머리손질을 해주고, 동대문시장에 가서 개성에 맞는 옷을 골라 사 입힌다. 학교에서 무난히 적응하려면 탈북자 티를 내지 않아야 하기에 아이들은 옷차림에 매우 민감하다.

                                                                                     
 아이들은 남한에 혈육이 아예 없거나, 북에서 함께 온 부모가 먹고 살기조차 바빠 손수 아이를 양육하기 힘들 때 이곳으로 보내진다. 대개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함경북도, 함경남도, 양강도 출신 아이들이다. 초등학교 3학년인 정주영은 할머니와 살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여섯 살 때 탈북했다. 이 집 막내인 그는 부모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이곳에 와서야 난생 처음 교복을 입고, 바다를 보았으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성년이 다 되어가는 아이들이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기도 한단다. 생일상도 처음 받아본다. 가족이 된 뒤 첫 생일엔 깜짝 파티를 열어준다. 새 식구가 늘어나기 직전엔 반드시 가족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일 때까지 설득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김태훈 씨는 그림에 소질을 보이는 아이들은 직접 지도하고 2년마다 가족 미술전시회를 연다. 2014년에는 “우리 이야기 들어보실래요?”라는 제목의 유화전을 열어 아이들이 글과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게 해주었다.

 

 지속가능한 기반을 만들다

 

 10대 청소년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아놓은 사비를 털었지만 금세 한계에 부딪혔다.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니고, 돈 걱정을 하던 끝에, 가정 해체로 보금자리를 잃은 어린이들의 사회적응을 높이기 위해 보육교사가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대안가정의 일종인 ‘그룹 홈’ 제도를 찾아냈다.

 

  이 지원 프로그램으로 정부, 민간단체, 복지재단, 기업체 사회공헌팀에게 후원을 신청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하여 2009년 그는 새터민청소년 그룹홈 ‘가족’의 대표라는 공식 이름을 얻었고, 여러 기관과 기업에 지역공모사업 형태로 지원을 요청해 재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이탈주민이라면 무조건 편견과 어두운 눈으로만 바라보는 사회분위기를 아이들과 함께 이겨나가는 일은 힘든 도전이다. 노총각과 여러 남자 아이들이 모여 사는 걸 마뜩찮게 여기는 이웃의 시선이 따가운 적도 많았다. 앵벌이들이 모여 산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경찰이 찾아와 현장조사를 하고 간 적도 있다.

 ‘북한에선 헐벗고 못 먹고 산다’는 부정적인 이야기에 짜증이 나거나 따돌림에 상처 받고 귀가한 아이들 마음을 도닥거리는 것도 그의 몫이다. “제 사투리가 심하니까 남한 친구들이 ‘빨갱이’라며 놀려댄 적이 많았죠. 저는 남한에 그런 말이 있는지 조차 몰랐는데 말입니다.” 김태훈씨의 오늘이 있게 만든 염하룡의 얘기다. 이곳에서 자라 부경대 간호학과에 진학한 이억철은 지금도 “북한에서 왔다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싫다”고 말한다.

 김씨에게는 부모의 엄청난 반대도 넘어서기 힘든 장애물이었다. 장남이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노총각으로 살아가는 걸 좋아할 부모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고 남는다. 초기 2년 동안 가족들과는 소식을 끊고 지냈을 정도다. “혹시 제 어머니가 찾아와 우리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라도 할까 봐 무척 걱정했지요.”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금은 든든한 원군으로 바뀌었다. 2013 년 설 때는 아이들을 손자로 받아들여 세배도 받고 차례도 함께 지내게 허락했다. 그 뒤부터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 집을 자유롭게 왕래한다.

 무엇보다 다행은 아이들 대부분이 기죽지 않고 건실하게 성장해 가는 것이다. 첫 아이 하룡이는 전국중고생 자원봉사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한국 대표로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대회에 참가했고 이제 경북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전교학생회장 노릇을 무사히 마치고 고3이 된 진범이는 올해 수시모집으로 광운대 생활체육학과에 합격한 상태다.

 “새터민 청소년들은 일반학교에 10명 입학해서 한두 명 졸업하는 것이 현실이에요. 대부분이 중퇴하여 검정고시를 보거나,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로 옮겨가지요. 일반학교에 잘 적응하고 성장해주는 우리 아이들이 그래서 더 대견해요.”


 그의 아이들 중에 남한사회 부적응자가 많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우리 집 아이들 자랑을 좀 하고 싶습니다. 화가, 작가, 뮤지컬 배우, 전교 학생회장, 전국 봉사왕도 있지요. 대단하죠?”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그는 아이들에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마음도 길러주기 위해 태국 오지 아카 부족 마을에 함께 세 차례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재정 지원은 대부분 코스콤이 해줬다. 태국은 북한을 떠난 많은 아이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거쳐 오는 곳이기도 하다. 경북대 농업경제학과에 진학한 이진철은 “태국에 간다는 게 처음엔 두려웠다. 우리가 배를 8시간이나 타고 메콩강을 건너 그 곳을 거쳐왔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진철이는 고등학생이던2012년 지구마을살리기 국제자원봉사활동단에 참여해 아카 마을에 물탱크, 주차장, 도서관 터를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탰다. 어찌나 성심껏 일했는지 마을 어른 한 분이 자기 딸과 결혼해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2013 년 여름 다시 이 마을을 찾아가 외국인 자원봉사자 숙소인 클레이하우스를 짓는 일에 참여했다. 마을 담벼락에는 멋진 그림도 그렸다.


 “아이들을 철부지라고 생각했는데 힘든 일도 어려워하지 않고 잘 해냈어요. 게다가 단순히 봉사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도 저도 모두 그 경험을 통해 정신적으로 부쩍 성장했다는 걸 느꼈죠.”

 그런 그에 대해 아이들은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아카 마을에서 보는 삼촌은 그 동안 한국에서 보아왔던 것보다 더 커 보였어요.” 아이들은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와서는 그 동안 잘 하지 않던 집안 대청소까지 했다.

 아이들은 강원도 원통 글라렛 수도원에서 천주교 신부님의 일손을 돕기도 한다. 가을걷이, 콩 타작, 경운기 몰기 같은 봉사활동 틈틈이 자연을 벗 삼아 노는 체험도 한다. 동해에서 바닷물놀이도 생전 처음 해봤다.


  그가 미술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아이들의 미술공부 지도만큼은 소양에 따라 더욱 알차게 해주고, 미술전시회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2년마다 미술전시회도 연다. 준비 과정에서 의견 다툼도 있고 실수도 저지르지만 그 결과 얻어지는 공동 작업에 대한 자부심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한 단계씩 성장시킨다.

 이 가족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뮤지컬 <우리도 가족일까?>, 아이들의 글과 삽화를 모은 문집 <밸이난다>(짜증난다는 뜻의 북한 말) 등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우리 가족>(감독 김도현)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돼 2013년 제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초청작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김씨는 한 단계 도약을 준비 중이다. 사회적 기업 설립 계획이 그것이다. 북한 접경지역인 강원도 철원을 거점으로 북한이탈주민들의 자립을 돕는 한편, 지역경제를 살리는 내용의 사업을 설계하고 있다. 일단 5년을 준비 기간으로 잡고 차근차근 꿈을 실현해 나가려 한다. 사업에서 나온 수익의 3분의 1은 다른 그룹 홈들도 지원하는 방식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모색할 계획이다.
“우리는 언젠가 독립하겠지만, 평생 같이 살아갈 가족이라고 생각한다”고 아이들은 모두 입을 모은다. ‘총각엄마’ 김태훈은 자신이 하는 일이 통일준비의 하나라고 여긴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6년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Bachelor Mom’ and His Kids Build a Future Together

 

 “Gajok” (Family) is a group home that serves as alternative family for 10 teenage North Korean defectors now living in Seoul without parents or any relatives to look after them. Kim Tae-hoon, a 40-year-old unmarried man who heads the home, has been single?handedly raising an unusual brood over the last 10 years. Neighbors call Kim “Bachelor Mom.”

 The boys of Kim Tae-hoon’s Gajok, an alternative family for parentless teen defectors from North Korea, enjoy a quiet weekend evening of stories and books around the table in the living room of their group home.

 Kim Tae-hoon is very busy every morning, getting up at 6 o’clock to prepare breakfast, wake up the kids, feed them, and send them off to school. After the hectic morning, he then cleans every corner of the house and does the laundry to eliminate the “odor” of the home’s 11 male occupants. This is his routine day in and day out.


 “I wash clothes in two washing machines every day. We have heaps of laundry because they’re boys,” he said. Among other things, he gives careful attention to cleaning the bathroom. He has even come up with an ingenious idea of cleaning the toilet with toothpaste to get rid of ammonia smell.

  The boys call him Uncle. The assumption that many of them must be misfits who have failed to adapt to South Korean society is nothing but prejudice, Kim says. “Let me boast of my kids. There’s a painter, a writer, a musical actor, a student council president, and the winner of Korea’s Best Volunteer Award. Aren’t they amazing?”


 Thanks to one of the boys becoming a student council president, Kim even had a chance to “flex some muscle” at the boy’s school as the president of the parents’ council, he chuckled. According to Kim, it was the first time that a teenage defector has ever become a student council president by winning a hotly contested election at a regular school. The hero, Han Jin-beom, has come to have a greater sense of responsibility since he became a student leader. This has, in turn, renewed Kim’s sense of mission.

 The Gajok under Kim’s devoted care was a beehive of activity as the boys prepared for a concert this past autumn to mark their 10th anniversary as a family. They gave a successful performance at the Arirang Cine Center in Seoul on November 18?20.

 

The Road Taken

 

  Kim never thought that he would be living this way. He came to his new calling by happenstance. In 2006, while working as a volunteer in a program to help recent defectors adjust to a new life in the South, he felt compelled to babysit a young defector boy he found home alone while the mother was away looking for a job. Kim was then dividing his time between a decent job at a publishing house and doing volunteer work at Hanawon, a facility run by the Unification Ministry where defectors undergo a resettlement program. One of the defectors informed him of her new address in Seoul. When he visited her apartment in Yangcheon District in western Seoul, he found a boy, a fourth grader, sleeping alone in darkness with the TV on. His mother had gone to another province to find a job, leaving the boy alone behind in this rented apartment provided by Hanawon.

  Kim opened the refrigerator and found nothing to eat inside. His heart ached. A good cook himself, he went to a nearby grocery store to shop for food. He cooked a meal, which he ate with the boy. Suddenly, the boy began talking about his hometown back in the North. Then, he asked Kim to stay for the night with him. Kim accepted the invitation gladly.

  Unable to leave the boy alone, Kim slept at the apartment a few more nights. Sometime later, the boy’s mother found a job in a distant province and had to stay near her workplace. Kim decided to live in the apartment with the boy. Eventually, he took charge of more and more parentless children that Hanawon sent to him. After moving around several rental units, he bought a house at the foot of Mt. Bugak in Seongbuk District, northern Seoul, which became a permanent shelter for a total of 10 teenage boys from the North.

 Whenever a new boy arrived, Kim made careful efforts to help ease the youngster’s adaptation into South Korean society. For his young wards, blending in was a particular concern. With the boy’s consent, Kim discarded most of his old clothing and the odds and ends in his pockets. He then took the boy to a barbershop and bought him new clothes at the Dongdaemun shopping mall. These children are very sensitive about their clothing and physical appearance because they don’t want to stick out and be marginalized as defectors at school.

 “Kim’s boys either have no relatives in South Korea or their parents are too busy eking out a living here to properly care for their children. Most of them are from remote areas in North Korea, including the provinces of North and South Hamgyong, and Ryanggang Province. Jeong Ju-yeong, a third grader who used to live with his grandmother, fled the North when he was six years old with the help of a missionary. The youngest boy in this house, he can’t remember his parents’ faces.

  Since arriving in Seoul, the boys got to experience many firsts, like wearing their first school uniform, seeing the sea for the first time, and celebrating their first Christmas. The older boys still expect Santa Claus to come to their home with presents. They had their own birthday parties here for the first time. Kim treats each new arrival with a surprise party to celebrate his first birthday as a new member of the family. Before accepting a new boy, Kim calls a “family meeting” to seek their agreement.

 A fine arts major in college, Kim tae-hoon is also art teacher to his boys, showcasing their works in an exhibition every two years to help them communicate with the world through their paintings and writings. In 2014, their exhibition of oil paintings was titled “Would You Listen to Our Story?”

 

Unusual Family, Overcoming Obstacles

 

  It is no easy task to feed and take care of teenage boys. Kim spent all his savings, but soon faced limits. He had to move frequently and worried about how to make ends meet, as the number of boys he had to care for swelled. Then he came to hear about group homes, a kind of alternative family service, in which a caregiver lives together with parentless children to help them adapt to society. And he realized that it would be possible to ask for financial support from the government, civic organizations, and welfare foundations, or appeal to corporations with social responsibility programs. In 2009, he officially became the head of a group home for teen defectors and was thus qualified to request financial aid from concerned agencies and businesses.

  Still, it is a daunting challenge for him, as well as his boys, to overcome the public’s prejudice and bigoted views toward defectors from North Korea.

 He often felt disapproving stares of neighbors who didn’t like seeing an unmarried man living with many young boys. One day, police officers came to his house to check on a rumor that he was living with child panhandlers.

 He also has to heal the wounded hearts of the boys who come home almost every day perturbed by hearing schoolmates talk disparagingly of North Koreans ? that they go around in rags, and go to bed hungry; or by being excluded from regular student activities.

  Yeom Ha-ryong, the boy who motivated Kim to take on this task in the first place, recalls, “I speak with a strong accent. So my South Korean friends used to make fun of me, calling me a ‘pinko.’ I didn’t know that such a word even exists in the South.” For Lee Eokcheol, who grew up in the family and is now a student in the Department of Nursing at Pukyong National University, the sense of not quite belonging still rankles: “I still hate it when people look at me with pity because I’m from the North.”


  For Kim, stern disapproval from his own parents loomed large over his decision to pursue an early altruistic impulse as his lifework. It’s quite understandable that his parents never liked the idea of their eldest son taking care of total strangers and remaining unmarried. He had to keep out of touch with them for the first two years. “At first, I was worried very much that my mom might come and say hurtful words to the boys,” he said.


  As it turned out, his mother and father are now his most stalwart supporters. On Lunar New Year’s Day in 2013, his parents received respectful traditional bows from the boys and allowed them to join a memorial rite for family ancestors, thus accepting them as their adopted grandsons. Since then, Kim and the boys have been visiting his parents’ home freely.
 

 Fortunately, most of the boys are growing up in good physical health, never getting demoralized. Ha-ryong won the grand prize in a national volunteer contest for secondary school students. And he went on to represent South Korea in a world volunteer contest held in Washington, D.C. He is now a student majoring in sociology a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After serving as student council president, Jin-beom, now a high school senior, has already been admitted to the Department of Sports Leadership at Kwangwoon University under its early admissions program this year.

  “Only one or two of every 10 teen defectors complete regular high school,” Kim notes. “Most others drop out, and then take the general equivalency diploma test or transfer to alternative schools for teen defectors. That’s why I’m so proud of my boys who have adapted well to regular schools and are growing up healthily.”
 

 “We all will leave home sometime in the future. But we believe we are a family who will remain close to each other all our lives.”

 

Nurturing Altruism, Building New Dreams

 

  Together with the boys, Kim traveled to an Akha hill tribe village in a remote region of Thailand three times to have them experience and cultivate a desire to help needy people. Their travels were funded mostly by Koscom, a securities information firm. Thailand is a transit country through which many young North Korean defectors pass before they reach South Korea. Lee Jin-cheol, who is now a freshman in the Department of Agricultural Economics a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looks back: “I was afraid at first when I visited Thailand again, because we had earlier traversed the country for eight hours across the Mekong River by boat when we were fleeing.”


  In 2012, while he was still in high school, Jin-cheol helped build a water tank, a parking lot, and the foundation for a public library building at the Akha village as a participant in a Global Village volunteer program. He worked so hard that one of the village elders asked him if he would marry his daughter. He revisited this village in summer 2013 and participated in building a clay house for foreign volunteers. The participants also painted an awesome mural on the village wall.
 

Kim spends quality time with his boys in their home’s wellappointed study. “I had thought of the boys merely as young kids. But they worked real hard there. Furthermore, what they did was not simply volunteer work. I felt that they, as well as I, had grown spiritually through the experience,” Kim said.

  On occasion, the boys travel to the rugged northeast near the border with North Korea to give a hand to Catholic priests and nuns of the Claretian Missionaries, which provide services for abandoned elderly, handicapped people, and children in Wontong, a needy rural community in Gangwon Province. After harvesting crops, threshing dry beans, and tilling the fields with tractors, they get to enjoy relaxing in the area’s natural surroundings. They even had a chance to take a dip in the East Sea, another first-time experience.
 

 take a dip in the East Sea, another first-time experience. A fine arts major in college, Kim is carefully nurturing the boys’ artistic sensibility by teaching them and helping develop their aptitudes, showcasing their works by holding art exhibitions every two years. Disagreements arise and mistakes are made during the preparations for exhibitions. But their pride in each other’s gifts and the joy from working together collaboratively shines through each time.
 

 The story of Kim and his boys has been shared with the world through a musical titled “Are We a Family, Too?” and “We’re Really Pissed Off,” a collection of the boys’ articles with their own illustrations. Their story has also been made into a documentary film titled “Our Family” (directed by Kim Do-hyun), which was screened at the Fifth DMZ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 in 2013.
 

  Kim is preparing to take a big leap: to establish a social enterprise. He is planning a project to revive a regional economy, while helping defectors stand on their own, based in Cheorwon, an area adjacent to the DMZ in Gangwon Province. He plans to set aside a third of the revenue from the project to support other group homes for young defectors.


 “We all will leave home sometime in the future. But we believe we are a family who will remain close to each other all our lives,” the boys said in unison. Kim Tae-hoon, their “Bachelor Mom,” believes that what he is doing now is part of preparations for the eventual unification of the Korean nation.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Posted by 김학순

 한국 디아스포라 문학의 외연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젊은 소설가의 작품 산실은 상상보다 옹색해 보인다. 작가 금희(본명 김금희)는 중국 길림(吉林)성 장춘(長春)시 장춘역 부근 중국동포(조선족) 집거구역의 오래된 작은 아파트에서 남편, 고1 아들, 초등학교 4학년 딸과 함께 살고 있다.

 

 탈북민 다룬 단편

 

  금희 작가는 단편 ‘옥화’를 <창작과비평> 2014년 봄호에 발표하면서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알려졌다. 이 작품은 이어 아시아출판사의 ‘K 픽션’ 시리즈의 하나로 한?영 대역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한국에 와서 일하는 중국 동포나 탈북민은 이제 한국 소설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소재이지만, 탈북 여성이 남한에 정착하기 이전의 이야기를 다뤄 기존의 서사와 차별화된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동포 작가의 목소리는 그 자체가 신선한 매력이어서 독자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이 소설집은 올해 제10회 백신애문학상을 받았다.

 

 ‘옥화’는 북한을 탈출한 여성이 인신매매로 중국 오지의 불구 남자에게 팔려가 고된 노동 끝에 갓난아이까지 버리고 한국으로 건너가는 과정을 지켜본 체험적 이야기다. 같은 소설집에 실린 중편 ‘노마드’에도 한국에 와서 일하는 중국동포 남성과 탈북 여성의 얘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금희 씨는 자신이 탈북민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작가로 비치는 게 부담스럽고 마뜩찮다. 탈북민이 나오는 것은 많은 작품 가운데 이 두 편에 불과한 데다, 그가 궁극적으로 천착하려는 것은 사회적 약자보다는 심리적 약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에서 탈북민 문제는 금기에 가까운 주제이다. 중국이 탈북민들의 1차 경유지여서 중국 동포 작가들에게 친근한 소재일 법하나 탈북민소재 소설은 한국어(조선어)로 쓰더라도 사실상 발표하기 어렵다.

 

 ‘옥화’는 애당초 연변 조선어 문학잡지 <도라지>의 요청으로 쓴 소설이었다. “청탁했던 잡지사에서 읽어보고 나서는 갑자기 민감한 소재라며 못 싣겠다고 하더군요. 정치적 내용이나 이데올로기가 담긴 얘기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안타까운 생각에 한국에서라면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하기도 해 <창작과비평>에 무턱대고 투고했지요.”

  한국 문단 진출은 금희에게 의미가 남다르다. “우선 문학 분위기가 중국보다 자유롭습니다. 중국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보다 훨씬 다양하고, 투명하게 쓰고 싶은 것을 다 쓸 수 있거든요.”

 

한국인 이주민 4세대

 

 증조부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니 이주민 4세대인 금희 작가는 2000년대 초반 2년여 동안 한국 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다. 연길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잠시 교사로 일하다가 한국으로 왔다. 중국 동포들의 한국행이 한창 유행할 무렵이었다. 충남 청양, 대전, 대구 등지에서 중국어 강사, 모텔 청소, 식당 서빙 등의 일을 했다. 광적인 한일 월드컵축구 응원과 노무현 이회창의 대통령선거 대결이 인상적인 일로 강하게 남았다고 한다. 
                                                                  

 

 “같은 핏줄, 같은 민족이지만 살아온 배경이 많이 다르고, 기억도 한참 다르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써도 나는 조선족 작가구나, 한국 작가가 될 수 없구나 생각했어요.”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계인의 고민은 자연스레 작품 속에 짙게 배어 나온다. 중국 소수민족으로 체감하는 정체성 갈등, 조선족 사회의 탈북민 문제, 한국 사회로의 노동이주 체험 등이 소설에서 핍진하게 그려진다. 표제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에서 주인공은 처음으로 장만해 이사 들어갈 아파트 실내를 구체적인 개념도 없이 막연히 ‘조선식’으로 꾸미겠다고 벼르는데, 이는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이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을 찾겠다는 주인공의 뿌리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다.

 

  ‘노마드’에서는 한국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며 한국 사람은 중국동포에게, 중국동포는 탈북민에게 불신을 갖는 차별의 악순환을 목도하는 조선족 박철이의 이야기가 처연하게 다가온다. “한 종족이되 이제는 도무지 한 무리에서 어울려 살아갈 수 없는 야생 이리와 셰퍼드처럼, 같은 액체지만 한 용기에 부어놓아도 도무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이라는 표현이 강렬하다.

 

 2013년 중국에서 출간된 첫 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료녕민족출판사)>는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해체와 상실,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가족 제도의 모순, 물질주의로 인한 도덕과 윤리의 타락 등 중국의 개혁개방과 자본주의 도입 과정에서 요동치는 이야기들로 꾸려졌다. 조선족 농촌마을에서 나고 자란 금희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정치?경제적 격변기를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한국어로 소설 쓰기

 

 <슈뢰딩거의 상자>의 문법과 띄어쓰기 같은 것들은 한국에서 출간된 <세상에 없는 나의 집>과 확연히 다르다. 정치경제적으로 북한과 더 가까운 중국에서 북한 말에 가까운 조선족 언어로 교육을 받고 작품 활동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은 한국 독자를 의식하고 썼지만 그가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은 당연히 힘들었다. 어떤 것은 일부러 조선족이 쓰는 표현을 그대로 썼다. 그런 점이 외려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한국 독자들에게 낯선 표현들도 이야기 맥락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있어서 이해를 방해하기는커녕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는 한국 작품을 많이 읽고 한국식 표현도 많이 배우고 싶으나 한계가 많다고 고백한다. “서사는 중국이나 다른 나라 문학에서 배울 수 있지만 한국어 문장은 한국에서밖에 배울 수 없잖아요. 한국어로 글을 쓰는 만큼 세련되지는 못해도 한국 독자가 읽기에 거부감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좋은 한국어 문장을 많이 접하기 어렵지요. 인터넷을 뒤져서 정말 보고 싶은 작가의 작품을 대표적으로 뽑아서 볼 뿐이죠.”

 

 체험의 힘, 서사의 힘

 

  금희의 소설이 다루는 ‘디아스포라의 체험’은 최근 한국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국내의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그에 주목하는 것은 체험을 정교화함으로써 실감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겨우 30대 후반에 접어들었지만 22살의 이른 나이에 결혼해 아내와 엄마, 며느리로서 동년배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곡이 심한 삶을 체험했다. 그 녹록치 않은 인생 경험에서 길어 올린 웅숭깊은 생각이 어우러져 작품마다 깊은 맛이 난다. 작가 스스로도 그 점에 동의한다.

 “아마 아이를 일찍 낳지 않았다면 등단을 빨리 할 수 있었겠지만 글의 깊이는 지금보다 떨어질 것 같습니다.”

 

 금희는 문학평론가들로부터 현실을 뚫고 나가는 박력 있는 서사와 섬세한 심리묘사가 탁월하다고 평가 받는다. 작가는 소설에서 서사의 중요성을 이렇게 역설했다.

 “서사는 소설을 끌어가는 힘이죠. 한국 소설은 중국과 달리 서사를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서정성, 분위기를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중국은 서사가 없으면 소설이 안 된다고 생각하죠. 저는 어릴 때부터 서사가 뛰어난 <삼국연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조선족 문단의 현실

 

 2007년 단편소설 ‘개불’로 <연변문학>에서 주관하는 윤동주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초기에 “어떤 소설을 쓸 것인가”가 아니라 “소설을 계속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중국 문단도, 한국 문단도 아닌 쇠락해가는 작은 ‘조선족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미래를 기약하기 힘들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중국 작가들은 원고료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참 창작해야 할 세대들이 생활고에 시달려서 문단을 떠나니까 공백이 생기고, 악순환이 이어지는 실정입니다. 자연히 중국 안에서 갖고 있던 조선족 문학의 명성도 많이 떨어진 상태죠. 몇 개 안 남은 문학잡지들도 운영이 너무 어렵습니다.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써 달라고 매달리는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소설 쓰기밖에 없다는 심경으로 쓰고 또 쓴다. “다양한 직업을 가져봤지만, 재미도 없고, 보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흔, 또는 쉰이 되었을 때도 조선족 문학이란 게 남아 있을지 걱정이에요. 제 세대가 조선족 작가로 한국어 소설을 쓰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선족 200만 명 가운데 조선족 문단에 속한 작가는 어림잡아 10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중국 사회에서 조선족 사회는 문학적으로도 특수한 소수집단이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조선족을 제외한 다른 소수민족들은 모두 중국어로 소설을 쓴다. 티베트, 위구르, 몽골족 같은 경우 자기 문자와 언어가 있고 인구도 조선족보다 훨씬 많아도 모어(母語)로 창작하는 작가들이 이제 거의 없다.

 

 금희는 중국 문단에도 벽을 느꼈다고 한다. “줄곧 조선족 학교를 다녔으니 중국 작가들보다 중국어 구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소설이 중국 문단에 알려지려면 번역을 거쳐야 가능합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요.”

 

 “조선족이라는 것도, 한국말을 한다는 것도 결국 제 껍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벗기고 나면 결국 금희라는 한 사람의 영혼만 남겠지요. 그래서 모든 걸 초월하는 보편적 정서를 다룬 소설을 써 보고 싶어요.”

 

 그가 작가가 된 데는 어린 시절의 독서량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평생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집에 책이 많아 동네도서관 역할을 했다. 500여 호에 이를 만큼 주위에서는 가장 큰 조선족 시골동네에서 책장에 전래동화가 가득한 집은 ‘금희네’뿐이었다. 금희는 친구들과 뛰어놀 초등학교 시절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소설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꼽았다.

 

 그의 작품에 여러 번 등장하는 장춘시 계림로(桂林路)는 한국인 가게가 많기로 유명한 거리로, 서울의 홍대앞처럼 젊은이들에게, 특히 밤에 인기가 높다. 이 거리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이어진 작가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소재로 글을 써 여러 나라 독자들과 공감하는 꿈”으로 맺어졌다.

 

 “조선족이라는 것도, 한국말을 한다는 것도 결국 제 껍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벗기고 나면 결국 금희라는 한 사람의 영혼만 남겠지요. 그래서 모든 걸 초월하는 보편적 정서를 다룬 소설을 써 보고 싶어요. 그게 참된 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죠.”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6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From the Periphery, Korean-Chinese Author Geum Hee Beholds Those on the Margins
 
 Geum Hee, who writes in Korean, is one of the novelists who energize the ethnic Korean literary scene in China. Late last year, her collection of short fiction “My Home Nowhere in the World,” which includes stories about the real-life conditions faced by North Korean defectors, was published in Seoul, marking her literary debut in South Korea.

 

  The writing space of a young author, who is credited with expanding “Korean diaspora literature,” is much humbler than one might imagine. Geum Hee (real name Kim Geumhee) lives in a tiny old apartment in the ethnic Korean neighborhood near Changchun Station, in Changchun, Jilin Province, northeast China, with her husband, teenage son, and young daughter.

 

 Short Stories about Defectors

 

 Geum Hee first became known to Korean readers with the publication of her short story “Ok-hwa” in the spring 2016 edition of The Quarterly Changbi [“Creation and Criticism”]. This work was also translated and published in a bilingual English-Korean edition of the Asia Publishers’ “K Fiction” series.

 

  Nowadays, it is not difficult to find in Korean literature stories about Korean-Chinese immigrants and North Korean defectors living and working in South Korea. But in telling the story of a North Korean woman before she arrives in the South, “Ok-hwa” is distinct from other narratives. The voice of a Korean-Chinese author has a fresh appeal that grabs readers’ attention, whatever the subject matter. The collection of short fiction which includes “Ok-hwa” earned the Baek Sin-ae Literature Prize earlier this year.


  “Ok-hwa” is an experiential story that describes how a woman who escapes from North Korea ends up being sold to a disabled man living in a remote area of China. After all kinds of hardship, the woman leaves behind her newborn baby and manages to make her way to South Korea. The novella “Nomad,” in the same collection, also tells the story of a North Korean woman and a Korean-Chinese man who come to the South for work.

 

  For Geum Hee, however, being known simply as an author who writes stories mainly about North Korean defectors is burdensome as well as disconcerting. This is because among the many works she has written, only the two mentioned above are about defectors, whereas what she ultimately seeks to delve into is not the situation of the socially underprivileged, but rather the plight of those who are psychologically vulnerable. Furthermore, in China, the issue of defectors from North Korea is taboo. Since China is most often the first port of call for those who flee North Korea, you would think that it might be a familiar subject for ethnic Korean authors in China, but even if they write in Korean, it is still a challenge to get a novel which deals with the subject published in China.


 “Ok-hwa” was originally written on commission by Doraji (Bellflower), a Korean-language literary magazine published in Yanbian. “At the magazine that had commissioned the work, after the editors read it they said all of a sudden that they couldn’t publish it because the story dealt with a sensitive subject,” said Geum Hee. “This was despite the fact that the story doesn’t contain any political content or ideology. I thought it was a shame that it would go unread, and I also wondered how it might be received in South Korea, so I stuck my neck out and submitted it to The Quarterly Changbi.”

 Breaking into the South Korean literary scene has quite a different meaning for Geum Hee. “First of all, the literary atmosphere is freer there than in China. There is much more diversity in the kinds of subjects you can write about, and when I want to I can write in a very candid way,” she says.

 

Fourth-Generation Korean Diaspora Migrant

 

  Geum Hee’s great-grandfather settled in China, making her a fourth-generation immigrant. After graduating from Yanji Normal School she worked as a schoolteacher for a while and then traveled to South Korea, where she stayed for two years. This was at a time when going to South Korea was all the rage among the ethnic Koreans in China. She worked various jobs, such as teaching Chinese, cleaning motel rooms, and waiting tables, in places such as Cheongyang County in South Chungcheong Province and the cities of Daejeon and Daegu. She says two things that made a deep impression on her from that time were the outpouring of fanatical energy during the 2002 FIFA World Cup jointly hosted by Korea and Japan, and the contest between Roh Moo-hyun and Lee Hoi-chang in the presidential election.


 “I felt very keenly then that although we may be descended from the same ancestors and are from the same ethnic group, the context of our lives is very different and our memories are completely different too. So I ended up thinking, however I might write I can only be a Korean-Chinese writer, I can never become a Korean writer.”

 

 Naturally, a sense of ambivalence as someone in the margins, who lives in two languages, is quite evident throughout her work. Things like identity conflicts incurred as part of an ethnic minority in China, the issue of North Korean defectors within Korean-Chinese society, and the experiences of labor migrants in South Korea, are all depicted vividly in her novels.

 

  In the title work “My Home Nowhere in the World,” the main character is preparing to move into her own apartment for the first time. She plans to decorate the interior of her new home in “Korean style,” a vague concept which has no particular form or shape. This is an expression of the main character’s desire to establish roots, not a person who is “neither this nor that,” but a true self. In “Nomad,” the story of Park Cheol-yi, a Korean-Chinese man who works as a laborer in South Korea and witnesses the intense distrust of Korean-Chinese people among Koreans, and of North Korean defectors among the Korean-Chinese, casts an extremely distressing shadow. This is summed up in a painful observation: “We may be of the same kind, the same species, but like wild wolves and German Shepherds, there is no way we can get along as one group any longer. Like oil and water, both liquids of a sort, but that cannot mix even if poured into the same container.”

 

 Geum Hee’s first collection of short fiction, “Schrodinger’s Box” was published by Liaoning National Publisher in China in 2013. Its stories chart the turbulence in the process of economic reform and introduction of capitalism to China, and examine the break-up and loss of a sense of community within the Korean-Chinese society, the failings of traditional family systems as seen from the perspective of women, and the breakdown of virtues and ethical principles brought about by materialism. As someone born and brought up in a Korean-Chinese farming village, Geum Hee herself is part of the generation that experienced firsthand the times of political and social upheaval in China, following its economic reforms.

 

 Writing Novels in Korean

 

  From grammar to word breaks, there are many noticeable differences between “Schrodinger’s Box” and “My Home Nowhere in the World,” which was published in South Korea. This is because Geum Hee was educated and writes her stories in the Korean of her Korean-Chinese hometown ? which is closer to the Korean used in North Korea ? and also because China has more in common with North Korea in political and economic terms. Although “My Home Nowhere in the World” was written with South Korean readers in mind, Geum Hee did find it difficult to smoothly manipulate the language. Some parts by design have been deliberately written employing expressions used by Korean-Chinese people. These aspects of her writing actually help it come across as fresh and textured. These expressions, unfamiliar to South Korean readers, meld naturally into the context of the stories so they do not hinder understanding; they instead inject authenticity and realism into her narratives.

 

  Although Geum Hee strives to read as many Korean books as possible in order to familiarize herself with South Korean expressions, she admits that there are limits. “I can learn the art of narrative from Chinese literature or novels from other countries, but I can learn about the construction of Korean sentences only from Korean writings,” she notes.

 

 “Because I’m writing in Korean, even if I can’t make my wording particularly artful, I think that at least I have to make sure that I write in a way that is not off-putting to Korean readers; that actually takes a lot of effort. But even so, from where I am it is difficult to immerse myself in well-written Korean sentences. All I can do is search through the Internet and pick out the most well-known works by the writers I really want to read and go through those.”

 

Strength of Experience, Power of Narrative

 

 The diaspora experience which Geum Hee’s works deal with is one of the major subjects currently being explored in Korean fiction as a whole. The reason that she is receiving so much attention from South Korean critics and readers is because of what she focuses on within this subject ? the elaboration of real-life experience, which makes her work much more vivid, and cuts close to the heart.

 

 As Geum Hee now approaches her late 30s, after getting married at the relatively young age of 22, as a wife, mother, and daughter- in-law, she has experienced life’s twists and turns far more than most of her contemporaries. The humaneness that has grown out of the experiences of that tough life imbues her works with depth and richness. Geum Hee, too, agrees on this point.

 “If I hadn’t had my children so early I probably would have been able to make my literary debut a little sooner, but I think my writing wouldn’t have been able to achieve the same depth as it has now.”

 

 Geum Hee has been lauded by literary critics for having a natural talent for creating energetic narratives that pierce through reality, and describing emotions in precise and careful detail. Geum Hee stresses the importance of narrative in fiction:

 

 “Narrative is the energy that drives a story. It seems to me that Korean novels place much less emphasis on narrative than do Chinese novels. It seems [in Korea] that lyricism and atmosphere are considered much more important. In China, if a work of fiction has no narrative structure, it is not considered a novel. From a young age I was infatuated with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hich has a wonderful narrative style.”

 

 Geum Hee began her writing career in 2007, winning the Yun Dong-ju New Writer’s Prize awarded by Yanbian Literature for her short story “Spoon Worm.” In the beginning it wasn’t the question “What kind of stories should I write?” that she had to worry about but rather, “Should I keep writing stories?” This was because of her concerns about how difficult it would be to map out a future for herself as a writer in the small and declining Korean-Chinese literary niche, which belongs neither to Chinese nor Korean literature.

 

 Shrinking Literary Landscape

 

 “Chinese writers can live on the money they make by writing. That’s impossible for us,” she says. “Right now those who should be in their most productive years of writing have to struggle with the hardships of life, and so they leave the literary sphere, and then there is a big gap in their careers and they are caught in a vicious circle. Quite naturally, the reputation that Korean-Chinese literature once had within China has also declined. Even for the few literary magazines that still remain, it is really hard to keep going.”

 

 Despite such circumstances, Geum Hee writes and keeps writing because she feels acutely that writing fiction is the only thing she can do. “I’ve had lots of different jobs but they weren’t interesting at all. I couldn’t find any satisfaction in them. But then I worry, when I turn 40, or 50, will something called Korean-Chinese literature still be in existence? I think my generation of Korean-Chinese writers will probably be the last to write their novels in Korean.”

 

 Although the Korean-Chinese population in the region numbers around two million, there are only around 100 writers in the literary community. In Chinese society, the Korean-Chinese represent a minority group in terms of literature as well. Among the 55 ethnic minority groups in China, all the others apart from the Korean- Chinese write fiction in Chinese. Even in the case of the Tibetans, Uighurs, and Mongolians in China, who have their own languages and writing systems, and far larger populations than the Korean-Chinese, there are almost no writers who create fiction in their native languages.

 

  Geum Hee describes how she came up against formidable obstacles in the Chinese literary arena. “Throughout my entire education I attended Korean schools so my writing ability in Chinese is of course inferior to that of Chinese writers. If my stories were to become known in the Chinese literary sphere they would, first of all, have to be translated into Chinese. In realistic terms, that wouldn’t be easy.”

 

 “I think being Korean-Chinese and speaking Korean are merely my outer layer. Peel them back, and all that is left would be the soul of one person ? a person called Geum Hee. That’s why I want to write novels that deal with universal sentiments that transcend everything else.”

 

 She says that it was the great range and number of books she read as a child that had the greatest influence on her becoming a writer. Her mother was an elementary school teacher throughout her working life and so their house was always full of books; to friends and neighbors it served as a local library. “Geum-hee’s Place” was the only one among 500 or so homes in the largest Korean-Chinese neighborhood in Changchun that had bookcases filled with traditional tales and story books. During her elementary school years, when all her friends were playing outside, Geum Hee would be absorbed in reading stories like “Arabian Nights.” Her favorite novel is Ernest Hemingway’s “The Old Man and the Sea.”

 

 Guilin Road in Changchun City, which features prominently in many of her works, is noted for its many Korean shops and restaurants and a bit like the Hongdae area in Seoul, it is popular with young people and particularly bustling at night. The conversation with Geum Hee over dinner at a restaurant on this road drew to a close thus: “What I dream about is writing on universal subjects and being able to connect emotionally with readers from many countries.”

 

  “I think being Korean-Chinese and speaking Korean are merely my outer layer. Peel them back, and all that is left would be the soul of one person ? a person called Geum Hee. That’s why I want to write novels that deal with universal sentiments that transcend everything else. It is also the path by which I can go in search of my own true identity.”


Posted by 김학순

 “북한개발연구는 떠나온 고향에 드리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NK개발연구소.” 서울 중구 충무로의 4층짜리 덕성빌딩 맨 꼭대기에 자리한 북한개발연구소를 방문하면 이렇게 쓴 간판을 맨 먼저 마주한다. 김병욱 소장의 집무실에 들어서면 백두산 천지 사진이 첫눈에 들어온다. 바로 옆 연구실에는 두만강을 끼고 중국과 접경한 탄광도시인 함경북도 무산군의 구글 지도가 걸려 있다. 탈북민의 애환을 그린 영화 <무산일기>의 실제 모델 전승철의 고향인 바로 그 무산이다.

 

북한학 박사 부부

 

 북한개발연구소는 탈북 지식인들이 뜻을 모아 북한 중소도시 개발을 돕기 위해 설립한 학술연구단체다. 탈북민으로서는 남한에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병욱 소장이 주도해 만들어 2014년 12월 기획재정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정식 등록됐다. 대부분의 탈북민 단체가 통일부에 등록돼 있는 것과 달리 북한개발연구소는 유일하게 기획재정부 소속이다. 연구단체여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탈북인 단체 가운데 평균 학력이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2012년 말 탈북 지식인 10명이 하나원에 모였다. 탈북민의 남한 사회 정착 지원을 위해 정부가 운영하는 이곳에 모인 날, 이들은 북한 개발 전략을 연구해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남한처럼 살기 좋은 곳으로 발전시키자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이듬해 탈북민 석-박사 학술동호회 모임을 만들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들의 꿈은 오달지다.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데 KDI(한국개발연구원)가 있었다면 ‘대동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데 NKDI가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초대 소장을 맡은 김병욱 박사(53)가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이끈 KDI를 본떠 이름을 지은 데도 이처럼 큰 포부가 담겼다. 김 소장은 “그 동안 탈북민들은 북한 연구의 자료나 도구로 활용돼온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탈북 지식인들이 주체가 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북한에 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진 우리가 머리를 맞대 NKDI를 북한 관련 최고 연구소로 키우겠다”고 웅지를 펼쳐 보인다.


 이 연구소에는 김 소장의 부인도 참여하고 있다. 부인 김영희 박사는 현재 한국산업은행 통일사업부 북한경제팀장으로 일하면서 이 연구소의 일을 병행한다. 이 부부는 2002년 8월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했다. 당 간부가 아니면 출세가 불가능한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김 소장은 평양기계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으나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데다 친척들이 중국에 있다는 이유로 1990년대 초 평양에서 추방돼 평안남도 남포, 함경북도 청진 등을 전전해야 했다. 김 소장은 “나 자신의 출세는 둘째 치고 아이들의 삶이 더 걱정돼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탈북 후 남한에 정착한 다음 함께 공부해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동국대 북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북한학 연구로 국내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첫 탈북민 부부라는 기록을 세웠다.

                                                               

                                                         

‘185 프로젝트’

 

 박사 5명, 박사과정 12명, 석사과정 3명, 해서 모두 20명의 연구원으로 구성된 이 연구소는 여성이 13명으로 더 많다. 대부분 40대인 연구원들은 별도 직업을 지녔다. 대안학교 교감, 기간제 교사, 회사원 등으로 근무하면서 주말에 모여 연구 활동을 점검하고 의견을 나눈다. 전공 분야도 경제학, 군사학, 교육학, 사회학, 정치학, 문화예술 분야 등으로 다양하다. 상근자는 김 소장을 포함해 3명이며, 일본인 1명이 대외협력이사로 참여해 도와주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이 연구소는 북한 185개 지역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데 방점을 찍어놓고 있다. 북한에는 대도시의 구(區)에 해당하는 구역급 지역이 38곳, 군(郡)급 지역이 147곳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평양시 22곳, 신의주시 5곳, 개성공업지구 3곳, 함경북도 19곳, 함경남도 22곳, 평안북도 23곳, 평안남도 15곳, 강원도 16곳, 황해북도 15곳, 황해남도 19곳, 자강도 15곳, 양강도 11곳이다. 연구소에서는 이 185곳의 ‘미시지역’을 해당 시-도별로 맡아 연구할 12개의 지역개발 연구팀 결성을 올해 안에 마무리할 계획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한 지역 격차를 줄이는 것이 긴요합니다. 이를 위해 북한의 중소도시 개발을 위한 기초 지리 정보를 쌓아갈 생각입니다. 185곳에 달하는 군 단위 이상 모든 중소도시의 공간 지리 정보를 구축하는 ‘185 프로젝트’가 1차 과제입니다. 이는 통일 전후로 북한의 개발 전략을 짜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남한의 강원도 정선 탄광지대를 관광지로 만들었듯이 북한의 폐탄광 지역도 이런 식으로 개발할 수 있는 것이죠.” 김 소장은 필수 과제로 해당 지역 군 단위에 대한 기초자료조사를 꼽고 이같이 밝혔다. 지역 연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자료가 모두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고향 연구는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에 따른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로 인해 핍박 받는 휴전선 너머 동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남쪽나라에서의 삶의 전부를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김 소장은 이 말로 자신들의 취지를 널리 알리고 싶어 한다.

 

연구 업적과 계획

 

  이 연구소는 지난해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국토연구원과 공동으로 네 차례 세미나를 열어 당면 과제에 관한 기초를 다졌다. ‘북한 중소도시 개발에 필요한 기초자료 축성,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 중소도시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 중소도시 개발, 어떻게 할 것인가?’, ‘떠나온 고향, 민생 인프라 개발의 길을 묻다’가 그 세미나의 제목들이다.


 지금까지 7개 연구 성과물을 ‘내 고향 미래연구소 총서’로 출간하기도 했다. ‘제2의 평양, 화학공업 도시: 함흥시 투자이야기’(위영금 연구원·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박사과정), ‘한반도 물류 중심: 순천시(평안남도) 투자이야기’(홍성원 연구원·북한대학원대 박사과정), ‘동북아 철의 도시: 청진시 투자이야기’(김혁 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검은 보석의 땅: 은덕군 투자 이야기’(이혜란 연구원·성균관대 박사과정), ‘백두산 관광 활성화와 혜산시 개발’(엄현숙 연구원·북한대학원대 박사과정 수료), ‘온천 관광의 중심지 경성군 개발’(윤승비 연구원·경희대 박사과정), ‘개발 잠재력을 통해 본 해주시 비전’(곽명일 연구원·북한대학원대 박사과정 수료)이 그것이다.

                                                                              


 정부 부처나 민간단체의 의뢰로 작년에 ‘북한 건설기술 조사 분석’, ‘공간정보에 기초한 무산지역 민생인프라 개발전략’, ‘북한 동향분석’, ‘공간정보에 기초한 원산시 선교거점 구축’ 같은 연구 과제를 수행했고 올해 연구 과제도 정해졌다.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가 의뢰한 ‘북한 시장화 현황과 전망’을 비롯해 ‘광복 후 천주교 본당의 지형변화’, ‘북한지역 선교거점 연구’가 그것들이다. 자체 연구과제로는 ‘공간정보에 따른 혜산시 기초자료 축성’을 설정했다.


 2015년 말 현재 탈북민 출신 박사는 19명, 석사는 60명에 이른다. 김 소장은 이들이 북한 지역 연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해 북한 인프라 구축과 관련된 연구의 구체성을 높이는 작업도 기획하고 있다. 여건이 호전되면 국제적인 북한 개발 프로그램도 적극 추진하고 싶어 한다.

 

극복해야 할 선입견들

 

  이 연구소는 올 들어 몇 가지 난관에 부딪쳤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발사에 따른 국제사회와 남한 자체의 잇단 대북 제재조치가 첫 번째다. 개성공단 폐쇄, 하산-라진 프로젝트 추진 보류를 비롯한 남북 협력 중단의 여파가 작지 않다. 북한 당국도 남북 간 모든 경제협력과 교류사업 합의가 무효라고 선언해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실정이다.

                                                                     

                                               <김병욱 북한개발연구소장>

  당장은 이러한 남북관계 냉각이 부정적인 영향을 낳을 수 있겠지만 이들은 결코 낙담하지는 않는다. 외려 이를 역량 축적의 기회로 삼겠다고 생각한다. ‘남북관계가 닫힐수록 연구소의 희소성이 큰 만큼’ 멀리 내다보고 연구 내공을 키워나갈 계획이다. 이에 따라 지난 3월 연구소의 올 1/4분기 정기 세미나로 ‘핵개발 유엔 제재 이후의 북한을 묻다’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기도 했다.


 남한 정책 당국자와 오피니언 리더들의 인식도 극복해야 할 대상의 하나다. 통일이 되면 도시 인프라를 비롯한 북한의 모든 것을 완전히 뜯어 고쳐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것이다. 탈북 연구자들이 북한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때의 기억을 살려 연구한다는 게 효용성이 있겠느냐는 편견도 그 가운데 하나다. 북한개발연구소가 실행하려는 연구자료 정도는 국가정보원에 다 있지 않겠느냐는 선입견도 마찬가지다. 거시정책을 연구하는 국토연구원과 차별화가 돼 있음에도 중복 연구를 하지 않느냐는 의구심도 산다.


  이 같은 복합적인 시각 때문에 한국연구재단에 신청해 놓은 2억 원의 연구지원자금도 결정이 나지 않고 있다고 김 소장은 판단한다. 김 소장은 ‘185 프로젝트’를 중장기적으로 국가차원에서 지원해 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한국에 온 지 14년째 됐지만 여전히 적응이 어려운 점은 남한사람들의 ‘립 서비스’다.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검토해 보겠다” “언제 한번 보자” “밥 한번 먹자”는 흔한 인사가 진정으로 도와주려는 것인지 여전히 헷갈리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의 표현은 직설적인 반면 남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다.

                                                                               


  연구원들은 재정 형편이 어려운 실정이지만 각계의 도움이 있어 용기를 잃지 않는다. 양봉진 전 현대자원개발 사장은 연구소를 무료로 임대해 주고 있다. 서울시 중구청에서는 각종 공과금을 대납해 주고 있어 큰 힘이 된다. 김태식 씨에스아이엔테크 사장은 수천만 원의 연구기금을 지원했다. 김 소장은 “아직 빈손에 가깝지만 믿음을 갖고 고향 개발의 길을 열어나가자”고 연구원들을 독려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김 소장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연구소를 나오며 떠오른 성경 구절이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6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Subject--Building Knowledge Base for a ‘Miracle on the Taedong River’
Author/Position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s, Korea University
 
 The researchers at the North Korea Development Institute (NKDI) are preparing “gifts” for their hometowns that they have left behind in North Korea. They believe that they are paving the way to national unification through their research activities. They see their work as practical knowledge building as foundation for development by gathering and analyzing microeconomic data on North Korean regions.

 

 They have a solid dream. With their academic backgrounds and capabilities, these North Korean defectors believe they have the opportunities, resources, and energy needed to create a storehouse of knowledge to guide the economic reconstruction of their hometowns.

 

 A large sign greets visitors to the fourth-floor penthouse of a building on Chungmu-ro street in the Jung-gu district, central Seoul. This is home to the fledgling think tank named the North Korea Development Institute (NKDI). The sign’s message reads: “Research and development on North Korea is the best gift we can give to our hometowns we’ve left behind.” A blow-up photo of Cheonji, the crater lake at the top of Mt. Paektu, draws one’s eyes upon entering the office of the institute’s director, Kim Byung-wook. A Google map of Musan County, a coal mining town near the Tuman River along the North Korea-China border, hangs on the wall of an adjoining office. Musan is the hometown of Jeon Seung-chul, a North Korean defector, whose experience of adjusting to life in the South was made into a film, “The Journals of Musan,” in 2011.

 

Defector Intellectuals

 

 The NKDI was founded by a group of intellectuals who had defected from North Korea, in order to support the development of small and medium-sized cities in the North. Its founding was initiated by Kim Byung-wook, the first North Korean defector who has earned a doctoral degree in the South. The institute was registered with the Ministry of Strategy and Finance in December 2014, another first in the defector community, where most other organizations are registered with the Ministry of Unification. As befits a think tank, the NKDI boasts the most highly educated members among all defector groups.


  In late 2012, ten North Korean defectors met at Hanawon, the government-run settlement support center for North Korean refugees. They agreed to conduct research on development strategies for the North so that, upon unification, they could return to their hometowns and help their compatriots to enjoy the quality of life that they have come to experience in the South. The following year, they organized an academic club that consisted of defectors with master’s or doctoral degrees.


  They have a solid dream. With their academic backgrounds and capabilities, these North Korean defectors believe they have the opportunities, resources, and energy needed to create a storehouse of knowledge to guide the economic reconstruction of their hometowns. Just as the Korea Development Institute (KDI) played a key role in the making of the “Miracle on the Han River” in the 1960s and 70s, they intend to develop the NKDI as a think tank at the forefront of efforts to create a “Miracle on the Taedong River” in the North.


  “It’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defectors have so far been used merely as tools or resources for North Korean studies by South Korean academics. But it’s now necessary for us, defectors with more education, to take the initiative and conduct our own research,” Kim said, explaining his motivation. “We have the most accurate information on the North. We will put our heads together to make the NKDI a top-notch think tank as far as North Korean studies are concerned.”


  Kim’s wife, Kim Yeong-hee, is also a member of the NKDI research staff. She also serves as the chief North Korean economic studies researcher at the Korea Development Bank’s inter-Korean projects division. The Kims crossed the Tuman River with their two young children in August 2002. They had been marginalized by the hierarchical structure of North Korean society, where only the elite class can get ahead. Kim is a graduate of Pyongyang University of Mechanical Engineering, but he lived in Nampo, South Pyongan Province and Chongjin, North Hamgyong Province after being ousted from Pyongyang in the early 1990s, just because his family did not have an elite status and his relatives were known to live in China. “I decided to escape from the North for concerns about my children’s future rather than my own career,” Kim said.


  After settling down in Seoul, Kim and his wife both earned master’s degrees from the Graduate School of North Korean Studies at Kyungnam University and doctorates from Dongguk University’s Department of North Korean Studies. They were the first defector couple to receive PhDs on North Korean studies in South Korea.

 

‘Project 185’

 

 The NKDI is composed of 20 researchers--five with PhDs, 12 doctoral candidates, and three candidates for master’s degrees--13 of whom are women. Most of them are in their 40s and also have full-time or part-time jobs outside of the NKDI. They come to the institute on weekends for research activities or discussions, while also working as vice principals at alternative schools, teachers, or office workers. Their specialties range from economics and military studies to pedagogy, sociology, political science, and culture and arts. Only three of the staff, including Kim Byung-wook, work full time at the institute. Interestingly, a Japanese national lends support to the institute as an outside director.

 The NKDI is currently focusing on studying 185 “microregions,” which include 38 municipal districts and 147 counties throughout North Korea. It plans to launch 12 regional research teams, which will study the cities and provinces in these 185 regions, within this year.


 “It’s essential to narrow the regional gap between the two Koreas to achieve national unification,” Kim said. “To this end, we’re planning to gather basic geographic information that will be vital for the development of small and medium-sized cities in the North. For now, we will launch Project 185, a program to develop a spatial and geographic database for all of the 185 cities and counties. This database will provide vital fundamental data on which to work out development strategies for the North Korean regions before and after unification. For example, just as South Korea’s coal town of Jeongseon in Gangwon Province has been turned into a tourist destination, it’ll be possible to develop coal towns in the North in similar ways.”


 The gathering of basic data on North Korean cities and counties is an essential task, he says. Regional studies can be meaningful only when past, present, and future data about individual regions are available.


 “Our researchers aren’t doing research on their own hometowns simply out of academic curiosity,” Kim noted. “Our research is a means to show our persecuted compatriots living on the other side of the Demilitarized Zone what kind of life we are leading in South Korea. We also want the public to

know about what we are really doing.”

 

Achievements and Future Plans

 

 The NKDI has laid the foundation for the study of urgent issues by holding four seminars in cooperation with Kyungnam University’s Institute for Far Eastern Studies and the Korea Research Institute for Human Settlements (KRIHS) last year. The themes of the seminars were “Ways to gather fundamental data needed for the development of small and medium-sized cities in North Korea,” “Ways to build a database needed for the development of small and medium-sized cities in North Korea,” “Ways to develop small and medium-sized cities in North Korea,” and “How to promote infrastructure development for the residents in our hometowns.”

 Research results have been published in a series of seven volumes, titled “Research for the Future of Our Hometowns.” They are “Investment in Hamhung, a Second Pyongyang and a City of Chemical Industry” by Wi Yeong-geum, a doctoral student at the Graduate School of Politics and Policy, Kyonggi University; “Investment in Sunchon, South Pyongan Province as a Logistics Hub of the Korean Peninsula” by Hong Seong-won, a doctoral student at the 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Investment in Chongjin, a Hub of the Iron and Steel Industry in Northeast Asia” by Kim Hyeok, a doctoral candidate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Investment in Undok County, a Land of Black Gold” by Lee Hye-ran, a doctoral student at Sungkyunkwan University; “Stimulating Tourism to Mt. Paektu and Development of Hyesan” by Eom Hyeon-suk, a researcher who has completed a doctoral course at the 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Development of Kyongsong County, a Hot Spring Tourism Hub” by Yun Seung-bi, a doctoral student at Kyung Hee University; and “A Vision for Haeju Seen through its Development Potential” by Kwak Myeong-il, a researcher who has completed a doctoral course at the 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The NKDI conducted research last year at the request of government agencies and private organizations under such themes as “Analysis of construction technologies in the North,” “Strategies for infrastructure development in Musan based on spatial information,” “Analysis of the current situation of the North,” and “Securing a beachhead for evangelization in Wonsan based on spatial information.” This year’s schedule is filled with various projects on subjects including “The present state and future of open markets in the North,” commissioned by the Presidential Committee for Unification Preparation, “Changes that occurred to the Catholic Church in the North after liberation,” and “Research on how to secure a beachhead for evangelization in the North.” In addition, the institute is also planning to gather basic data on Hyesan.


 As of late 2015, 19 North Korean defectors held doctoral degrees and another 60 had master’s degrees. Kim plans to add more substance to the institute’s research on the development of infrastructure in the North by encouraging these defector intellectuals to proactively engage in North Korea-related research. He also envisions international programs to support the development of the North, if things turn out well for the institute.

 

Hurdles to Overcome

 

 This year, the NKDI hit a few snags. First,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nd South Korea imposed sanctions on the North for its fourth nuclear test and long-range rocket launch. There have been huge repercussions from the suspension of inter-Korean cooperation projects, including the closing of the Kaesong Industrial Complex and halting of the Rajin?Khasan logistics project between the North and South Korea and Russia. Inter-Korean exchanges have been frozen, as the North Korean regime also declared all inter-Korean agreements on economic cooperation and exchange projects void.

 The stalled inter-Korean relations have created negative consequences for now, but the NKDI researchers are not demoralized. To the contrary, they regard the current situation as an opportunity for them to build up their own capabilities. They intend to strive for even higher standards, believing that the tense inter-Korean relations can make the knowledge accumulated by NKDI even more valuable in the future. To this end, the institute hosted an international symposium on the theme, “North Korea in the wake of the imposition of UN sanctions for its nuclear weapons development,” in March as its first-quarter seminar for this year.

 Biases and misunderstandings held by South Korean government officials and opinion leaders are huge hurdles that must be overcome. Typical misperceptions include that everything in the North, including its urban infrastructure, needs to be rebuilt after unification of the two Koreas; defector researchers are not qualified to conduct research on the North because they have been away from their homeland for many years; and the NKDI is only duplicating data already possessed by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Furthermore, despite its clearly different areas of emphasis from the Korea Research Institute for Human Settlements, there are some who believe that the NKDI’s research projects overlap those of the KRIHS, a government-funded think tank that specializes in the study of macroeconomic policies.


  Kim believes that due to such widespread prejudices, no decision has yet been reached on the NKDI’s request to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for a research support fund of 200 million won. He now hopes that the government will provide medium and long-term support to Project 185.


 Although he has now lived in the South for 14 years, Kim still finds it difficult to determine whether South Koreans are merely paying lip service to his cause. He doesn’t know if they really intend to help him when they say, “Give me time to think what kind of help I can give you,” or “Let’s meet some time in the future,” or “Let’s have dinner together some day.” North Koreans, he points out, usually use straightforward expressions rather than communicate in a roundabout style as South Koreans often do.


 In spite of their persistent financial difficulties, NKDI researchers are gratified by the support they have received from various individuals. Yang Bong-jin, former president of Hyundai Energy and Resources, provides rent-free office space for their use. Seoul’s Jung-gu District Office is paying their utility bills. And Kim Tae-sik, president of CSIN Tech, has donated tens of millions of won to support their research. Kim Byung-wook lifts the spirits of the researchers by having everyone keep their focus on the big prize: “We’re now nearly empty­handed. But let’s pave the way for the development of our hometowns with unwavering determination.”


 “And though thy beginning was small, yet thy latter end should greatly increase” (Job 8:7). This hopeful verse from the Bible sprang to my mind as I was leaving Kim’s office.

 

 


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