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북한의 솔제니친’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반디’라는 필명을 가진 북한작가의 소설집 <고발>이 프랑스와 영어권 국가에서 호평을 이어간다. 그이 말고도 탈북한 시인 장진성, 소설가 김유경의 작품집이 그들만의 비극적인 체제의 실상과 체험에서 비롯된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해외에 소개되어 관심을 받고 있다. 그러나 해외의 뜨거운 반응과 달리 정작 남한에서는 이들 작품에 주목하는 이가 별로 없다. 무엇이 우리의 시선을 한쪽으로 돌려놓은 것일까.

 서방세계가 알고 있는 북한 문학은 대부분 3대를 이어온 김일성 일가의 독재체제를 찬양하고 우상화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실제로 북한 문학은 여전히 최고지도자의 통치이념에 따라 창작의 큰 그림이 그려지곤 한다. 새해 첫날 발표되는 지도자의 신년사가 해마다 문학의 방향과 작품 내용의 바탕이 된다.

 

찬양과 사회비판 사이 

 

 그렇다고 찬양 문학작품 일색이라고 생각하면 오판이다. 북한의 공인 문인 조직인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 분과에 소속돼 문예 활동을 하다가 1998년 탈북한 최진이 시인(58)의 다음 증언은 통념과 조금 다르다. “남한에서는 북한 작가들이 찬양 문학만 한다고 여기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북한이 독재 사회여서 겉으로는 체제 찬양적인 문학이 많아 보이지만 체제를 찬양하는 작가를 극단적인 아첨주의자이며 문학에 대한 기본개념이 없다고 여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들도 친한 사람끼리만 모여 있을 땐 이따금 체제에 대한 완곡한 불평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있다고 최진이 시인은 말한다. 김일성, 김정일 부자 찬양시를 지나치게 많이 쓴 한 작가가 동료들로부터 지청구를 들었다. “너는 짬만 나면 김일성 부자 욕을 해대더니 찬양시는 어찌 그리 많이 쓰느냐.” 그러자 그 작가는 “난 김일성 부자가 아니라 내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글을 썼다. 어쩔래” 하고 둘러댔다고 한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한번은 작가동맹의 찬양시를 보고 나서 “닭살이 돋는 것 같다”며 물리친 적이 있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북한 작가들은 문학 본연의 내적 자율성과 사회주의 체제유지를 전제로 한 사회비판이 조심스럽게 허용되면서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애정, 직업선택, 이혼, 도시와 농촌의 격차, 세대 이질성과 같은 다양한 문제에도 관심을 쏟게 됐다고 한다.


 남대현의 <청춘송가>(1987), 백남룡(白南龍)의 <벗>(1988)은 1990년대 후반 남한에도 소개됐을 정도로 탈이념적 소설이다. <청춘송가>는 청년 지식인, 과학자, 기술자들이 보여주는 젊은 시절의 가치 있는 삶을 형상화하면서 남녀 간 애정 윤리를 다룬 작품이다. 이혼 문제를 다뤄 북한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소설 <벗>은 2011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돼 해외 독자의 눈길을 끌었다. 북한 문학 작품이 유럽에서 출판되기는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 2004년 남한에서 출간됐던 또 다른 북한 소설인 홍석중(洪錫中)의 <황진이>는 2002년 당시 평양의 독서계를 석권한 인기 역사물이었다. 홍석중은 남북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았고 널리 읽힌 역사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洪命熹 1888~1968)의 손자이기도 하다.

 

세계가 반디의 <고발>에 주목한 까닭

 

  이와는 달리 북한에서 반체제 문학 작품을 내놓는 건 금기다.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작품이라면 북한 특유의 정치범 수용소 행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북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얼굴 없는 작가의 문제작이 최근 들어 남한과 서방세계에서 부쩍 주목 받기 시작했다. ‘반디’라는 필명을 쓰는 북한 작가의 단편소설집 <고발>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한국보다 프랑스와 영어권 국가들에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처음 붙여진 ‘북한의 솔제니친’이라는 별명 덕분에 유명세가 한층 더해졌다. 반디는 ‘어둠 속에서만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북한의 현실을 비추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가 자신이 붙인 필명이다.

  반디의 처지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이 처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자국의 정치체제에 반대하고, 국내 출간이 불가능해 외국으로 원고를 내보낸 입장이 똑같다. 지금은 지구상에서 사라진 소비에트 연방의 문학이 외부 세계에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은 솔제니친이 스탈린 독재체제의 만행을 고발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등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북한의 반체제 문학이 해외에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도 반디의 소설집 <고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발>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실린 일곱 편의 단편에는 북한 체제 아래 생활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핍진하게 묘사돼 있다. 각기 다른 소재와 사건들을 다루고 있지만, ‘김일성 시대에 대한 비판’이라는 큰 주제에 하나로 묶여 있다.


  첫머리에 놓인 ‘탈북기’는 몰래 피임약을 먹는 아내를 의심했던 한 남자가 대물림되는 출신성분제에 절망해 끝내 북한을 탈출할 결심을 하고 그 과정을 친구에게 알리는 편지 형식의 단편소설이다. ‘유령의 도시’는 거리의 김일성 초상화만 보면 경기(驚氣)를 일으키는 세 살배기 아이 때문에 창문에 커튼을 쳐놓았다가 ‘수령님 모독죄’로 평양에서 지방으로 쫓겨난 가족 이야기와 함께 병영국가의 실상이 담겼다. ‘지척만리’는 여행증 없이는 이동이 금지된 북한에서 몰래 기차를 타고 고향 초입까지 갔다가 검문소에서 막혀 노모의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한 아들의 애달픈 사연을 그렸다.


  마지막에 수록된 ‘빨간 버섯’은 공산당의 당사를 ‘독이 든 빨간 버섯’으로 규정하고 “저 독버섯을 뽑아버려라. 이 땅에서 아니, 지구 위에서 영원히”라고 절규하는 북한 기자를 등장시켜 김씨 정권 타도를 촉구한다. 일곱 편의 작품 순서는 탈북이라는 소극적 저항에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산실인 공산당사를 타도하자고 외치는 단계까지 작가의 면밀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솔제니친’

 

 이 소설집의 원고가 2013년 남한으로 전달되는 과정은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는 또 하나의 드라마였다. 반디의 친척 여동생이 탈북에 성공해 서울로 들어왔다. 몇 달 뒤 그가 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에게 원고 얘기를 꺼냈다. 도 대표는 북한을 방문하는 중국인 친구를 통해 ‘원고를 건네 달라’는 편지를 반디에게 전했다. 편지를 읽은 반디는 비밀장소에 감춰두었던 원고 뭉치를 꺼내 체제 선전용으로 제작, 배포된 <김일성 선집>, <김정일 노작> 같은 북한선전용 책자와 함께 싸 보냈다.


 원고지는 1960-1970년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질이 좋지 않았다. 오래전 쓰인 것을 보여주듯 갈색으로 바랜 원고지 위에 볼펜이 아닌 연필로 꾹꾹 눌러쓴 흔적이 역력했다고 한다. 작가는 원고의 제목을 ‘고발’이라고 스스로 정해서 써 놓았으며, 반디라는 가명도 본인이 정했다. 반디는 현재 북한에 거주하는 1950년생 남성이고,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라고 도희윤 대표는 증언한다. 그렇지만 이 증언에는 작가를 보호하려는 의향이 섞여 있을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도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2014년 5월 이 희귀한 작품집을 세상에 내놨다.


  사실 남한에서는 이 작품에 주목하는 이가 별로 없었다. 작가가 탈북민이 아니라 북한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원고 반출 과정만 무성한 화제를 낳았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반디가 가공의 인물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작품이 지닌 진정한 가치와 문학성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이처럼 냉담했던 한국 내 반응과 달리 2016년 프랑스어 번역판이 나오면서 해외 반응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어판 발문을 쓴 북한인권운동가 피에르 리굴로 프랑스사회역사연구소장이 작가 반디를 ‘북한의 솔제니친’이라고 표현하자, 외국 언론들이 한결같이 이를 인용하기에 이르렀다. 리굴로는 ‘작은 반딧불이지만 희망은 크다’는 의미의 제목을 붙인 발문을 썼다. 일간지 르피가로, 리베라시옹, 라디오방송 앵테르, 앵포, RFI, 잡지 마리안느 같은 매체들이 이 책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번역자 임영희(57) 씨는 “한국 소설을 오랫동안 번역했지만 <고발>만큼 지적인 희열을 느낀 적이 없었다”면서 “소설의 구성이 아주 훌륭하다”고 상찬했다.

 반디는 ‘어둠 속에서만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북한의 현실을 비추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가 자신이 붙인 필명이다. 반디의 처지는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처했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자국의 정치체제에 반대하고, 국내 출간이 불가능해 외국으로 원고를 내보낸 입장이 똑같다.


 <고발>은 2017년 3월을 전후해 미국과 영국,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독일, 스웨덴, 포르투갈 등 21개국에서 19개 언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한국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영어로 옮겨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영국 번역가 데버러 스미스(30)가 영어판 번역을 맡았다. 이 영어 번역본 은 영국 펜(PEN)이 선정하는 2016년 하반기 번역상 수상작으로 뽑혔다. 미국 뉴욕에서는 반디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만들기 위한 재미동포 모임이 결성되기도 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북한에 살고 있는 익명의 작가 반디가 쓴 반체제 이야기들은 베일에 싸인 독재 정권에서 나타난 매우 보기 드문 작품이다. 전 세계적인 문학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평을 내놓았다. 문학전문지 더밀리언즈는 <고발>을 ‘2017년 가장 기대되는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미국 서평지 퍼블리셔스 위클리는 “불가해한 북한의 삶을 다룬 매우 드문 작품”으로, 미국 온라인 서점 아마존은 “폐쇄된 일당 독재 사회를 생생하게 묘사한 매우 감동적이고 놀라운 픽션으로 휴머니즘에 대한 희망을 시험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영국판 출판사 서펜츠 테일 발행인 한나 웨스트랜드는 “권력 앞에서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는 솔제니친을 떠올리게 하고, 통렬한 풍자는 20세기 러시아 문학의 거장 미하일 불가코프를 연상하게 한다”고 평가한다. 김종회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기교적 측면에서는 한국 현대작가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북한에서 문학의 공식적 목표가 김일성 가계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기교만으로 수준을 판단할 수는 없다.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저항정신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방세계의 뜨거운 반응과 동시에 한국에서는 발간 3년 만에 출판사를 옮겨 재출간되었다. 새로운 표지와 더불어 작가의 최초 원고를 충실하게 살려 작품이 지닌 문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췄다. 개정판을 출간한 다산북스는 “3년 전 출간됐을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이다. 시장성도 충분할 것으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북한 문학작품은 저항정신에 비중을 두어야”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다른 탈북 문학인들의 작품도 국내보다 오히려 해외에서 더 주목 받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탈북시인 장진성은 북한 주민의 실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시집 <내 딸을 백 원에 팝니다>로 2012년 영국 옥스퍼드대 렉스 워너 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2014년 출간한 수필집 <경애하는 지도자에게>는 영국 도서판매 순위 10위에 오르기도 했다. 조선작가동맹 소속 작가로 평양에서 활동하다 2000년 탈북한 김유경이 2016년 출간한 장편소설 <인간모독소>는 프랑스 출판사 필립 피키에와 판권 계약을 맺었다. 탈북 문학인의 작품이 해외에서 조명 받는 것은 실제 경험에서 나오는 생생한 리얼리즘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 문학작품에 대해 남한에서 상대적으로 호응이 낮은 것은 호기심과 절박감의 정도 차이에서도 오는 듯하다. 한국인들은 북한과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데다 언론을 통해 북한의 비극적인 실상을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다루는 문학작품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기 어렵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이 북한의 핵무기 위협이나 한반도 전쟁 가능성을 높게 받아들이고 있을 때도 남한 주민들은 ‘위기의 만성화’로 말미암아 체감온도가 다르게 느껴지는 현상과 유사하다. 일부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북한 문학을 이념론, 나아가 ‘색깔론’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7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N. Korean Dissident Literature Sparks Global Interest

 

 Unlike defectors’ memoirs exposing the cruel reality in North Korea,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written by an author still living in the North is drawing attention for its vivid literary depiction of the little-known everyday circumstances of the lives of its population. Translated and published in many foreign languages, “The Accusation” by Bandi offers a rare glimpse of North Korean creative writing.
 In the eyes of the West, North Korean literature is not much more than a tool to praise and idolize the three generations of the Kim dynasty’s dictatorship. In fact, official North Korean literature is indeed based on the governing ideology of the supreme leader who sets out guidelines for the country’s writers in his annual New Year’s address.

 

Praise of the Regime and Criticism of Society

 

 However, it is wrong to think that North Korean literature is singularly about saccharine flattery of the regime. The poet Choi Jinyi, who defected to South Korea in 1998, wants to disabuse people of this common misconception; there certainly is more than meets the eye. She used to engage in literary activities as a member of the Poetry Subcommittee in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North] Korean Writers’ Union. She said, “Many people in the South tend to believe that North Korean authors only write works praising the regime. On the surface, there seem to be many literary works glorifying the regime; that’s because the North is an authoritarian society. But in fact, those who write such works are regarded as extreme sycophants, ignorant of the most basic concepts of literature.”

 

 When they are with trusted writer friends, at times even members of the union complain about the regime in a roundabout way, Choi said. One day, a writer who had written many poems eulogizing the regime’s founder, Kim Il-sung, and his son, Kim Jong-il, was criticized disapprovingly by his writer friends. They said, “Why are you writing so many poems in praise of the Kims, while often speaking ill of them in private?” He replied evasively, “I thought of my God, not the Kims, when I wrote the poems. So what?” It is said that the late leader Kim Jong-il once turned down a poem presented by the writers’ union after reading it, saying, “This gives me goosebumps.”


  North Korean writers pay attention to various issues such as love in everyday life, choice of careers, divorce, the gap between urban and rural areas, or generational diversity. They are cautiously allowed to make critical comments on society, provided they maintain the intrinsic autonomy of literature and the socialist system.

 

  Nam Dae-hyon’s “An Ode to Youth” (1987) and Paek Namryong’s “Friend” (1988) had no ideological undertones, so they were published in South Korea in the late 1990s. “An Ode to Youth” deals with the prevailing ethos of love, focusing on the worthy lives of young intellectuals, scientists, and engineers. “Friend,” a novel on divorce that had become a bestseller in the North, drew overseas readers’ attention after it was translated and published in French in 2011. The book was the first North Korean literary work ever to be published in Europe. “Hwang Jin-yi” by Hong Sok-jung, a historical North Korean novel published in the South in 2004, made a sensation in Pyongyang in 2002. Hong is a grandson of Hong Myong-hui (1888~1968; pen name Byokcho), the author of “Im Kkokjong,” a historical saga highly acclaimed and widely read in both Koreas.

 

The Pseudonymous Author Bandi

 

  Dissident literature is taboo in the North. Anyone who writes a literary work explicitly criticizing the regime faces the certainty of incarceration in a political prison camp.


  Under these circumstances, a work by a pseudonymous author who is known to be living in the North has recently attracted wide attention in many countries, including South Korea. “The Accusation: Forbidden Stories from Inside North Korea” is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by a North Korean author who uses the name Bandi (Firefly) as his pseudonym. His fame grew after he was dubbed “the North Korean Solzhenitsyn” by a French author. Bandi is a pseudonym the author gave himself, vowing to shed light on the reality in his destitute country, “just as a firefly shines only in a world of darkness.”


 Bandi is in a situation very similar to the fate faced by Aleksandr Solzhenitsyn (1918?2008), the 1970 Nobel laureate in literature, in the former Soviet Union. Just as Solzhenitsyn did, Bandi opposes the political system of his own country and smuggled out his manuscripts to the outside world because it is impossible for him to publish his works in his home country. It was only after two of Solzhenitsyn’s novels “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 and “The Gulag Archipelago” exposed atrocities of the Stalinist dictatorship that the literature of the Soviet Union began attracting widespread international attention. In the same vein, it was only after Bandi’s “The Accusation” was published that dissident literature in North Korea began entering the spotlight in the outside world.

  The seven short stories in this collection truthfully depict the harsh lives of people from various

walks of life, groaning under the North Korean political system. Each story has a different theme and plot, but all are written under a single umbrella theme: the indictment of the rule of Kim Il-sung.

  The first story, “Record of a Defection,” is an epistolary-style story about a man who grows suspicious of his wife who secretly takes birth control pills. He writes letters to his friend telling him of his frustration about the hereditary “caste system” and his decision to flee the country. “City of Specters” is a story about a family that was expelled from Pyongyang to a distant province “on blasphemy charges.” They had drawn the curtains shut at the window of their apartment because their three-year-old child had a seizure whenever he saw the portraits of Karl Marx and Kim Il-sung outside the window across the street. “So Close, Yet So Far” is a heartrending story about a son who fails to see his old mother at her deathbed. Although he manages to sneak into a train without a ticket, he is soon caught in a security check. In North Korea, nobody can travel anywhere without a travel pass.


 The last story is “The Red Mushroom.” Calling the Workers’ Party headquarters a “poisonous red mushroom,” a journalist calls for the overthrow of the Kim regime, crying out, “Pluck up that poisonous mushroom from this land ? no, from the Earth forever!” In a thematic sequence from the first story to the last, all seven stories in the collection reflect the tortuous progression of the author’s rebellion against the brutal regime ? from passive resistance by defection to calling for the overthrow of the Workers’ Party, the cradle of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North Korea’s Solzhenitsyn’

 

 The manuscripts of these stories were smuggled into South Korea in 2013, in painstaking secrecy worthy of an espionage operation. A female relative of Bandi’s fled the North and arrived in Seoul. Several months later, she told Do Hee-yoon, secretary general of the Citizens’ Coalition for Human Rights of Abductees and North Korean Refugees, about the manuscripts. By sending a letter to Bandi through a Chinese friend visiting the North, Do asked him to deliver his manuscripts. After reading the letter, Bandi took out the manuscripts from a secret hiding place where he had stored them. To dodge luggage inspections, he hid them among the regime’s propaganda materials such as “The Selected Works of Kim Il-sung” and other such literature.


   The coarse manuscript paper was in such a poor state that it looked as if it was from the 1960s or 70s. The yellowed paper showed the author must have pressed hard with a pencil when writing the stories a long time ago. The author himself had named the collection “The Accusation.” He had also created the pseudonym Bandi for himself. According to Do Hee-yoon, Bandi is a man born in 1950, who still lives in the North and is a member of the Korean Writers’ Union. There is speculation, though, that Do is hiding Bandi’s real identity to protect him. After many twists and turns, the stories were published in Seoul in May 2014.


  In South Korea, few people paid attention to Bandi’s work. They merely took interest in the fact that the author was not a defector but still lived in the North and in how the manuscripts were smuggled out. Some people even suspected that the author was a fictitious person. Hence, the genuine worth and literary value of the work remained unappreciated.


   In contrast to such a cold response in South Korea, foreign readers and critics began showing keen interest in the work when its French edition was published in 2016. Pierre Rigoulot, a French historian and North Korea human rights activist and the director of the Institute of Social History in Paris, called Bandi the “North Korean Solzhenitsyn.” In his foreword for the French edition of “The Accusation,” Rigoulot wrote, “It’s a small firefly, but its hope is big.” The book received substantial mass media coverage in France, by dailies like Le Figaro and Liberation, radio stations France Inter, France Info and RFI, and magazines like Marianne. “I’ve translated many Korean novels into French. But I’ve never felt more intellectually ecstatic than while translating the stories by Bandi. The plots are splendid,” said Lim Yeong-hee, translator of the French version.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written under a pseudonym and smuggled out of North Korea is on its way to becoming an international literary sensation,” Britain’s The Guardian has reported. “Dissident tales from pseudonymous author Bandi, still living in the country, are very rare fiction to emerge from the secretive dictatorship.”


  Publishers and human rights activists from various countries participate in a reading event of “The Accusation” at the Bridge of Freedom near Imjingak Pavilion south of the demilitarized zone in Paju, Gyeonggi Province on March 30, 2017.


  “The Accusation” has been translated into 19 languages and was published almost simultaneously in 21 countries, including Britain, Canada, Italy, Japan, Germany, Sweden, and the United States, in March of this year, as well as, most recently, in Portugal. Its English translation was done by Deborah Smith, a British translator who shared the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for Fiction in 2016 with Korean author Han Kang for her translation of Han’s novel “The Vegetarian.” Smith’s translation of “The Accusation” was among the 10 PEN Translates Autumn 2016 winners chosen by the English PEN. In New York, Korean-Americans organized a campaign to nominate Bandi for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A collection of short stories written under a pseudonym and smuggled out of North Korea is on its way to becoming an international literary sensation,” Britain’s The Guardian has reported with effusive praise. “Dissident tales from pseudonymous author Bandi, still living in the country, are very rare fiction to emerge from the secretive dictatorship.”


 The Millions, an online literary magazine, picked “The Accusation” as one of the most anticipated books of 2017. Publishers Weekly, an American book review magazine, commented, “Bandi gives a rare glimpse of life in the ‘truly fathomless darkness’ of North Korea.” American online bookstore Amazon said, “‘The Accusation’ is a vivid depiction of life in a closed-off one-party state, and also a hopeful testament to the humanity and rich internal life that persists even in such inhumane conditions.”


 “[This] isn’t just a book with a good story behind it: it’s a collection of perfectly crafted novellas that, like Aleksandr Solzhenitsyn’s work [from the former Soviet Union], speak with authority and truthto- power directness,” Hannah Westland, of Serpent’s Tail, the British publisher of “The Accusation,” said to The Guardian. “Bandi’s absurdist approach to satire is reminiscent of Ionesco’s ‘Rhinoceros,’ and his biting wit . . . reminds you of that other great Russian literary dissident, Mikhail Bulgakov.”


  “Bandi is much different from contemporary South Korean writers from a technical point of view. We can’t simply determine his skill level, given that the official goal of North Korean literature is to show the greatness of the Kim family. But we should focus on his spirit of barehanded resistance to the regime,” said Kim Jong-hoi, a professor of Korean literature at Kyung Hee University in Seoul.
 Amid the high acclaim abroad, the Korean version of “The Accusation” has been republished by another publishing house three years after its debut in South Korea. With its new cover, the new edition focuses on the literary value of the book by remaining as faithful to the original manuscripts as possible. Dasan Books, the publisher of the new edition, said, “Readers will find the new edition very different from its previous edition of three years ago. We believe this one has good marketability.”


 It is worth noting that many literary works by North Korean defectors have also received more attention overseas than in South Korea. In 2012, poet Jang Jin-sung won the Rex Warner Literary Prize from Oxford University for his poetry collection “I Am Selling My Daughter for 100 Won,” which truthfully reveals the miserable lives of the North Korean people. “Dear Leader,” his collection of essays published in 2014, ranked 10th among the top selling books in Britain that year. Kim Yu-gyong signed a publishing contract with French publisher Editions Philippe Picquier for her novel, “Ingan Modokso” (Camp for Defiling Human Beings), whose original edition came out in 2016. She used to write stories in Pyongyang as a member of the Korean Writers’ Union. She escaped from the country in 2000.

 

Response by South Koreans

 

  By comparison, South Korean readers are less responsive to North Korean literature than foreign readers, probably because they are less curious about society and life in the North. Many South Koreans hardly feel freshly informed and touched by North Korean literature that depicts the tragic reality of everyday life in the North, because they live in a standoff within spitting distance of North Korea across the demilitarized zone. On the radio, on TV, and in newspapers, they listen to, watch, and read about the lives of their erstwhile compatriots every day.


 While Americans and Europeans take nuclear threats from the North or the possibility of war on the Korean peninsula very seriously, South Koreans have become somewhat jaded and benumbed by continual threats and crises. Consequently, many South Koreans tend to look at North Korean literature primarily from an ideological point of view, rather than appreciate the authors’ literary depiction of their real-life experiences.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김학순

 인터넷 신조어와 괴상한 줄임말이 범람해 그렇지 않아도 분단 이후 이질적으로 변화해 온 남북한 일상용어는 한 통계에 의하면 이미 40% 가깝게 그 차이가 벌어졌다. 남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외래어만 해도 탈북민들에게는 낯선 정도를 넘어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통일부가 2014년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40%가 넘는 응답자가 외래어로 인한 의사소통 문제를 남한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의 하나로 꼽았다. 남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탈북민이 컴퓨터를 고치기 위해 ‘컴퓨터 클리닝’이라고 쓰인 세탁소를 찾아갔다는 웃지 못할 사연도 있다.

 

  독특한 운영 방식

 

 탈북민들에게는 여기에 ‘영어 격차’라는 엄청난 고민이 더해진다. 영어를 배워 한 단계 도약하고 싶지만, 대부분 생계를 꾸려가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형편이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나타난 게 서울 마포구 독막로 180-8에 자리한 ‘북한이탈주민 글로벌교육센터’(TNKR Global Education Center)이다.

 

  약칭으로 쓰는 ‘TNKR’은 ‘Teach North Korean Refugees’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탈북민들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곳은 미국인 케이시 라티그(Casey Lartigue) 씨와 한국인 이은구(Lee Eun-koo) 씨가 의기투합해 2013년 3월 만든 비영리 민간단체다.

                                                                                            


 이들의 프로그램 운영 방식은 독특하다. 직접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배우려는 탈북민과 영어를 가르치고 싶은 원어민 자원봉사자를 연결해준다. 여러 수강생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가르치는 영어 학원과 달리 학생이 강사에게 1대 1 맞춤형으로 배운다. 교육 장소, 시간, 수업방식, 교재 결정은 학생 희망에 맞춰준다. 인연 맺은 강사가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바꿔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같은 시기에 여러 명의 강사에게 동시에 배우는 열혈 학생들도 적지 않다. 라티그 씨는 “강사들이 말하기를 잘 가르치는 사람, 문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 탈북민들에게 영감을 주는 데 뛰어난 사람 등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강사들에게 배우는 게 유리한 면이 많다”고 설명한다.


  학생들은 정기적으로 열리는 현장 면담(matching session)을 통해 강사를 고를 수 있다. 이런 만남의 날을 두는 것은 서로 신뢰를 쌓고 학습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다. 2016년 말까지 50여 차례 열렸다. 강사와 연결되기 전 대기자들은 TNKR 사무실에서 과도기적으로 배울 기회(in-house tutoring)를 갖는다.


 지금까지 이곳을 통해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고 있는 탈북인은 250여 명으로, 그 55% 가량이 학교에서 영어를 따라잡기 힘들거나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어서 이곳을 찾은 대학·또는 대학원생이며, 30%는 직장인, 나머지는 주부, 구직자 등이라고 한다

 

열의에 찬 학생들

 

  지금까지 이곳을 통해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고 있는 탈북민은 250여 명으로, 그 55% 가량이 학교에서 영어를 따라잡기 힘들거나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싶어서 이곳을 찾은 대학 또는 대학원생이며, 30%는 직장인, 나머지는 주부, 구직자 등이라고 한다. 라티그 씨는 “영어를 배워 더 나은 직업을 구하고, 자연스레 남한 생활에 더욱 잘 적응하고 싶어 하는 탈북민들이 TNKR의 문을 두드린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가르쳤거나 가르치고 있는 자원봉사자는 470여 명에 이른다. 취재하던 날 현재 현장 만남 대기자가 80여 명이나 된다고 했다. 이들 가운데 고아, 인신매매 피해 경험자, 25살 이하 지원자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고 했다. 이곳에서 영어를 배웠거나 배우는 탈북민들은 구직과 남한 생활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하나같이 입을 모은다.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수요자 중심 교육이어서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습니다.” 탈북민 학생들의 사후 의견을 꼼꼼하게 챙기는 이은구 공동대표의 얘기다.

                                                                                   


 라티그 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학생으로 박연미(Park Yeon-mi) 씨를 꼽는다. “TNKR를 열기 전 2012년 12월 박연미 씨를 처음 만났는데, 당시엔 영어를 그리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 뒤 2013년 말께 공식적으로 우리 프로그램에 참여했지요, 박연미 씨는 2014년 1월 리매칭 학생으로 참여해 8개월 동안 무려 18명의 선생님들과 1대 1로 만나 일주일에 40시간 가까이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는 영어를 배우려는 열의가 엄청나게 강했고, 우리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TNKR 홍보대사로도 활동한 박연미 씨는 지금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재학 중이다.


 30대 늦깎이 대학생인 양세리(Yang Che-rie) 씨는 “학교 수업시간에 영어로 제 의견을 말하는 데 큰 용기가 생겼다. 우리 탈북민들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제대로 배우면서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 기회를 제공해 남한 사회 적응을 도와주는 TNKR이 정말 고맙다”고 말한다.


  호주,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출신 강사들과 영어 공부를 한 30대 출판 편집인 엄영남(Eom Yeong-nam) 씨는 “영어실력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생긴 것 같다. 더 많은 북한이탈주민들이 TNKR에서 삶의 자신감을 얻으면 좋겠다”고 추천한다.


  자원봉사자들의 국적과 직업은 다양하다. 미국인이 가장 많고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영어권의 다른 나라 출신도 많다. 이들의 직업도 교수, 교사, 학원 영어 강사, 대학원생, 프리랜서 작가 등 각계에 걸쳐 있다. 이들에게는 최소한의 의무가 주어진다. 한번 참여하면 적어도 3개월 동안, 한 달에 두 번 이상, 한번에 90분 이상 가르쳐야 한다.


  자원봉사자들이 TNKR에 참여하는 까닭도 갖가지다. 크게 보면 세 부류로 나뉜다. 우선 북한과 북한사람을 알고 싶어서다. 두 번째는 이미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탈북민들을 가르치는 일도 해보고 싶어서 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는 탈북민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지는 않지만 가르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밖에 단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다거나, 영어 교사로서 어린아이들만을 가르치는 것이 따분해 성인들을 가르치고 싶어서 오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20대 미국인 매튜 맥가윈(Matthew McGawin) 씨는 “발음과 문법을 바로 잡아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다음 번 수업 때는 꼭 고쳐옵니다. 수업 때마다 실력이 느는 모습을 보면 더 열심히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요.”라며 뿌듯해 한다.


  6명의 탈북민에게 영어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영국인 라이언 가드너(Ryan Gardener) 씨는 이렇게 말한다. “TNKR의 가장 큰 장점은 탈북민들이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러 원어민 강사들을 스스로 선택해 영어와 더불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게다가 배우는 장소를 그때마다 달리 하는 것도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TNKR 프로그램에서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두 부문으로 나눠진다. ‘트랙 1’로 불리는 첫 단계는 영어와 친숙해지면서 기초영어, 문법, 어휘, 발음 등을 배우고, 스스로 공부하는 길을 찾는 단계다. 이 때 원어민 자원봉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외국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노하우도 자연스레 덤으로 얻도록 한다. 현재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단계를 거치고 있다.

 

  ‘트랙 2’는 공석에서 말하기(public speaking) 등 발표 능력을 익히고 키우는 단계다. 비즈니스에 활용하거나, 공공연설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특별프로그램이다. 이 단계에서는 글쓰기, 연설, 프리젠테이션 등을 배운다. 탈북민들이 무대와 영어에 대한 공포를 한꺼번에 해소할 수 있도록 영어 웅변대회도 정기적으로 연다. 한 해 두 차례, 2월과 8월에 대회를 열려고 노력하고 있다. TNKR은 필요에 따라 영어 외 언어도 가르친다. 이를테면 변호사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법률용어로 많이 쓰이는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다.

 

개인 후원금에 의존

 

 하버드대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90년대 연세대, 한양대 등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한 라티그 씨는 2010년 다시 찾은 한국에서 북한의 실상을 알고부터 탈북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2012년 3월, 30여 명의 탈북민들이 중국에서 강제 북송된 사건은 라티그 씨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강제 북송 반대 집회 현장에서 단식농성을 했던 박선영 자유선진당 국회의원이 탈북 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인 물망초학교를 세우려는 계획을 말씀하셔서 저도 국제협력이사로 참여했습니다. 저의 주요 역할은 물망초 학교에 영어 자원봉사 선생님들을 모집하는 것이었죠.”


 라티그 씨는 ‘물망초학교’에서 이은구 씨를 알게 되자 자신의 외국인 인맥과 이은구 씨의 탈북민 네트워크를 합해 뜻을 펴기로 했다. 그 동안 자신이 만났던 탈북민들이 하나같이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했고, 영어 실력이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한국 실정을 알기에, 이들에게 디딤돌을 놓아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은구 씨는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석사, 영국 셰필드대학교(University of Sheffield)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북한인권정보센터, 한국교육개발원 탈북청소년교육지원센터에서 연구원으로 10여 년간 일하다가 현재 한국자원봉사협의회에서 근무하면서 TNKR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처음에 사무실도 홈페이지도 없이 몇 명의 학생과 자원봉사자만으로 시작했던 이 프로그램은 이제 탈북민들 사이에 제법 널리 알려졌다.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TeachNorthKoreanRefugees), 트위터(TNKR@TeachNKRefugees), 홈페이지(www.teachnorthkoreanrefugees.org) 등 SNS를 통해 배우고 싶은 사람, 가르치고 싶은 사람들이 활발하게 소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재정문제다. 4년 가까이 이 일을 하면서 변변한 단독 사무실을 마련하기 어려워 이태원을 비롯해 서울의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현재의 사무공간도 예산에 걸맞은 곳을 찾다가 골목 안의 허름한 단독주택에 세 들어 마련한 것이다. 정식으로 TNKR 프로그램 운영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얻은, 사실상 첫 단독 사무실인 셈이다.

 TNKR 운영비는 오로지 개인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강사들 중에 자기 학생을 위한 교재를 스스로 구입하거나 개인 후원금을 내는 이도 많다. 학생들도 선생님들의 무료 자원봉사에 감동받아 적은 액수지만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라티그 씨와 이은구 씨의 자비도 들어간다. 두 사람은 “탈북민들의 열망이 눈에 밟혀 힘들어도 이 일을 도저히 그만 둘 수 없을 것 같다”며 강한 열의를 드러냈다.


  TALES OF TWO KOREAS

 

 Volunteers Help Bridge the Language Gap for Defectors 


  The TNKR Global Education Center is a private, nonprofit facility committed to helping North Korean defectors learn English. One-on-one lessons by native English-speaking volunteers help defectors gain a competitive edge and equal opportunities in South Korean society with its emphasis on English proficiency.

 

  Statistical data show that the language gap between the two Koreas has grown by nearly 40 percent since the national division in the mid-1940s. It has been widened further by a deluge in South Korea of online slang words and odd abbreviations. Many foreign words South Koreans use without a thought are very unfamiliar and bewildering to the defectors. In a 2014 survey by the Unification Ministry, 40 percent of respondents indicated that the plethora of unfamiliar foreign words in everyday use was one of the biggest difficulties defectors who settled in South Korea were experiencing. For example, a defector living in Seoul went to a laundry store displaying a sign, “Computer Cleaning” (meaning “computeraided cleaning”), to have his computer fixed.

 

Unique Operating System

 

 “English competency,” a hefty burden, has been added to the defectors’ list of difficulties. They want to advance in their studies and jobs by learning English. But most of them do not dare to even think of it because just surviving in their new home is a challenge. The TNKR Global Education Center helps them get over those hurdles through a highly personalized teaching system that many South Korean families would willingly pay premium fees for if they could. TNKR is the abbreviation of “Teach North Korean Refugees”; it’s a private, nonprofit organization that runs a facility (located at 180-8 Dokmak-ro, Mapo District, Seoul) that teaches North Korean defectors English for free. It was founded in March 2013 and is directed jointly by Casey Lartigue, an American, and Lee Eun-koo, a South Korean.

  TNKR has a unique program and system of operating as a language teaching organization. They do not teach students themselves, but connect defectors who want to learn English with native English-speaking volunteers who want to teach English. Unlike private cram schools that teach students in classrooms under a preset curriculum, TNKR arranges for students to learn English with teachers one-on-one. Where, when, how, and what to teach depend on the students’ wishes. If they want other teaching styles, students can ask for a change of teachers.

  Many students are so enthusiastic that they sign up with several teachers at once. It is very helpful for students to learn from multiple teachers because some are good at teaching spoken English, others at teaching grammar, and still others at giving inspiration to defectors, Lartigue said.
 Students can choose teachers at regular matching sessions that are aimed at building mutual trust and increasing efficiency in studying. About 50 such sessions had been held until late 2016. Those on a waiting list come for in-house tutoring sessions at the TNKR office before they are connected to teachers.

 Some 250 defectors have learned or are currently learning English at TNKR. About 55 percent of them are undergraduate or graduate students who want to catch up in school or study abroad.
 Some 30 percent are office workers, housewives, and job seekers. According to Lartigue, those defectors who want to learn English to find better jobs and adapt to a new life in South Korea more easily are knocking on the TNKR office’s door. Some 470 volunteers have taught or are teaching here.
 The day I visited the TNKR office, I heard that as many as 80 defectors were on the waiting list for matching sessions. Priority is given to orphans, formerly trafficked persons, and those under 25 years old. Those who have learned or are learning English at the center agree that the English education they have undergone here is very helpful to them in finding jobs and adapting to South Korean society.

  “It seems that students are satisfied with the English education here because it’s a customer-focused program that gives students a choice,” said Lee. She keeps a journal of feedback received from students.


   Though still early in its history, the track record of TNKR’s allvolunteer teaching program can be expected to be studded with many inspirational stories of students as well as teachers. The name Park Yeon-mi comes up as Lartigue speaks of their most unforgettable student. Park did not speak English well when he first met her in December 2012 before TNKR opened. Park then joined the TNKR program in late 2013. Beginning as a student of a re-matching program in January 2014, she studied hard for nearly 40 hours a week, learning from as many as 18 teachers, one-on-one for eight months. She had great enthusiasm for learning English and TNKR gave her a chance, Lartigue said.
 Once a promotional ambassador for TNKR, Park is now studying at Columbia University in the United States.


  Yang Che-rie, a student in her 30s, said, “Thank God, I now have the courage to express myself in English during classes at school. I’m really grateful to the TNKR for helping us defectors adapt to South Korean society by undergoing substantive English education in a new environment and having a chance to build a human network.”


 Some 250 defectors have learned or are currently learning English at the TNKR Global Education Center. About 55 percent of them are undergraduate or graduate students who want to catch up in school or study abroad. And 30 percent are office workers, housewives, and job seekers.

Students’ Enthusiasm

 

  Eom Yeong-nam, an editor and publisher in his 30s who learned English from teachers from Australia, Canada, the United States, and New Zealand, said, “I think I now have a useful tool: English proficiency. I hope more defectors will gain self-confidence at TNKR.”
Volunteers come from several countries and are working in various kinds of jobs. Americans top the list, followed by those from other English-speaking countries like Britain, Canada, Australia, and New Zealand. Their jobs in Korea range from university professor, schoolteacher, and cram school lecturer to graduate student and freelance writer. As TNKR volunteers they commit to perform the following duties as a minimum: they should teach for at least three months, more than twice a month, and more than 90 minutes per class.

 Students learn English in one-on-one sessions with native English-speaking volunteer teachers under the TNKR (Teach North Korean Refugees) program, a teaching approach that would be the envy of most families keen on English education of their children.

 Volunteers have various reasons why they are taking part in the TNKR program. The teachers fall into roughly three categories: those who want to understand North Korea and North Koreans; those who want to add their experience of teaching defectors to their resume of volunteer work; and those who simply enjoy teaching. Others are teaching English here to experience something new and still others want to teach adults for a change, as a break from teaching English to children.

  Matthew McGawin, an American teacher in his 20s, proudly said that most students spoke accurately after their pronunciation and grammar were corrected. He pledged to teach better whenever he saw his students’ English improve.


   Ryan Gardener is a British teacher who has taught English to six defectors. He notes that the strongest point of the TNKR program is its system that allows defectors to choose native English speakers from various countries to learn many things as well as the language. Furthermore, he said one of the important things is to let students learn English in different settings each time.
 The TNKR program consists of two parts to help students improve their English. Track 1, the first step, helps students become familiar with the English language through actual use while learning basic English skills, grammar, vocabulary, and pronunciation, and finding ways to study by themselves. In the process of communicating with native speakers, students will naturally learn how to overcome their fear of speaking English with foreigners. Currently, most students have reached this stage.


 Track 2 is the step at which students cultivate their ability to express themselves formally in English, including public speaking. It is a special program designed to improve their ability to do busi ness or give public speeches in English. At this stage, they learn how to write and give a speech or a presentation. English speech contests are also held regularly to help defectors overcome both stage fright and the fear of speaking in English in front of other people. The center tries to hold such contests twice a year, in February and August, if possible.


  Other languages are also taught at the center. For example, it teaches Latin, which is often used in legal terms, to those students who want to become lawyers.

 

  Private Donations

 

 After earning an MA in pedagogy from Harvard University, Lartigue taught English at Yonsei and Hanyang universities in the 1990s. When he revisited Korea in 2010, he learned about the dire reality in North Korea and began taking a deep interest in North Korean defectors. He was greatly shocked by the news about China’s repatriation of about 30 defectors to North Korea in March 2012. He helped recruit volunteers to join protests in front of the Chinese Embassy in Seoul. There, he met the legislator Park Sunyoung of the minor opposition Liberty Forward Party who had staged a hunger strike in front of the Chinese Embassy. He told her he wanted to get involved in helping North Korean refugees.


  At the time, Rep. Park brought up the idea of establishing Mulmangcho (Forget-Me-Not) School, an alternative school for young defectors. Lartigue joined her program as a volunteer board member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to help recruit English-speaking volunteer teachers for the school.


   It was at Mulmangcho School that Casey Lartigue and Lee Eun-koo found each other in search of a practical way to help North Korean defectors. They readily agreed to work together towards their shared goal by using Lartigue’s network of English teachers and Lee’s network of defectors. The idea that took shape was to lay a stepping stone path for defectors by helping them acquire English language skills, an essential asset in South Korea’s job market as well as in society as a whole. For Lartigue, it was the natural thing to do: Each and every defector he had met asked him to teach them English and he knew that it would be difficult for them to find jobs in Korea unless they had a certain level of English proficiency.


  Lee obtained an MA in North Korean studies from the 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and another MA in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the University of Sheffield in England. She had worked as a researcher for about 10 years at the Database Center for North Korean Human Rights and at the Education Support Center for Young North Korean Defectors of the Korean Educational Development Institute, a government- funded education think tank. Concurrently working for Volunteering Korea, a civic group, she is a co-director of the TNKR program.


  The program started only with a handful of students and volunteers, without even an office or a website. It is now widely known among defectors. These days, students who want to learn English can have lively communications with aspirant volunteer teachers via Facebook (https://www. facebook.com/TeachNorthKoreanRefugees), Twitter (@ TeachNKRefugees), or through the TNKR website (www. teachnorthkoreanrefugees.org).


   The biggest difficulty is the effort’s limited finances. Over the past four years, TNKR has had to move to various places around Seoul, including Itaewon, because it was financially strapped. It has now rented a shabby house in a back alley which fits within the budget. This is, in fact, its first independent office since the TNKR program started.


   Office expenses are borne by donations alone. Many teachers buy books for their students on their own or give donations. Impressed by such dedicated outpouring of free volunteer services, some students, too, donate what little money they have. Lartigue and Lee are also contributing their own money. Their eyes sparkling, they both said that they can never give up, no matter how hard their job may be, because they know how eager the defectors are to keep learning.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Ahn Hong-beom Photographer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김학순

 새터민 청소년 그룹 홈 ‘가족’은 의지할 가족구성원이 없는 탈북 청소년들이 모여 사는 대안가정이다. 나이 마흔에 결혼도 잊은 채 10년째 이 가정의 엄마 노릇을 하고 있는 김태훈(金泰勳) 씨를 주위에서는 ‘총각엄마’라고 부른다. ‘미리 온 통일세대’ 아이들 열 명이 그와 함께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김태훈씨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 늦잠 자는 아이들을 깨워 먹이고 학교에 보내느라 눈코 뜰 사이가 없다. 아이들의 등교준비를 돕는 부산한 아침시간이 지나면 그는 날마다 집안 곳곳을 속속들이 청소하고, 빨래하는 걸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남자 11명이 한집에 모여 살기 때문에 ‘남자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세탁기 두 대를 날마다 돌립니다. 남자아이들이라서 그런지 빨래의 양도 유난스레 많습니다.” 그는 화장실 청소에 무엇보다 신경을 곤두세운다. 암모니아 냄새를 지우기 위해 변기를 치약으로 닦는 노하우까지 생각해 냈다.


  아이들은 그를 삼촌이라고 부른다. 아이들 중에 남한사회 부적응자가 많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우리 집 아이들 자랑을 좀 하고 싶습니다. 화가, 작가, 뮤지컬 배우, 전교 학생회장, 전국 봉사왕도 있지요. 대단하죠?” 그는 “학생회장 ‘엄마’가 된 덕분에 학부모회장으로 치맛바람도 일으켜 봤다”고 너스레를 떤다. 탈북 청소년이 일반학교에서 다른 후보들과 치열하게 겨뤄 전교회장에 선출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그 주인공 한진범은 회장이 된 뒤 더 책임감이 강한 아이가 되었고, 진범이의 이런 성과는 그를 새롭게 일깨웠다.

                                                                                           

 

 어쩌다 들어선 운명의 길

 

 그는 이렇게 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출판사에 다니던 그가 우연히 만난 탈북 소년과 며칠을 함께 지낸 게 운명의 길로 들어서는 시작이었다. 2006 년 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기관인 하나원에 봉사하러 갔다가 만난 한 퇴소예정자가 전해준 주소지인 서울시 양천구의 한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다. 어두컴컴한 집에 초등학교 4학년 남자 아이가 TV를 켜놓고 혼자 자고 있었다. 하나원에서 마련해준 이 임대아파트에 아이만 남겨 두고,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지방에 내려간 터였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먹을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가슴이 찡했다. 요리를 잘 하는 그는 장을 봐와서 밥을 지어 소년과 함께 먹었다. 소년은 묻지도 않은 자신의 고향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나서 하룻밤 함께 자고 가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했다.


 그는 다음 날도, 그 다음날도 그 집을 떠나지 못했다. 얼마 뒤 소년의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해 지방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는 소년과 함께 살기로 했다. 그 뒤 하나원을 통해 아이들을 하나 둘씩 더 받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뒷바라지하는 탈북 청소년 10명의 보금자리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 현재 서울시 성북구 북악산 자락 단독주택에 마련됐다.

 새 아이가 오면 그는 우선 땟국부터 벗긴다. 입고 온 옷과 소지품은 본인의 동의를 구하고 대부분 버린다. 그러고는 미용실에 데려가 머리손질을 해주고, 동대문시장에 가서 개성에 맞는 옷을 골라 사 입힌다. 학교에서 무난히 적응하려면 탈북자 티를 내지 않아야 하기에 아이들은 옷차림에 매우 민감하다.

                                                                                     
 아이들은 남한에 혈육이 아예 없거나, 북에서 함께 온 부모가 먹고 살기조차 바빠 손수 아이를 양육하기 힘들 때 이곳으로 보내진다. 대개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함경북도, 함경남도, 양강도 출신 아이들이다. 초등학교 3학년인 정주영은 할머니와 살다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여섯 살 때 탈북했다. 이 집 막내인 그는 부모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이곳에 와서야 난생 처음 교복을 입고, 바다를 보았으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성년이 다 되어가는 아이들이 산타할아버지를 기다리기도 한단다. 생일상도 처음 받아본다. 가족이 된 뒤 첫 생일엔 깜짝 파티를 열어준다. 새 식구가 늘어나기 직전엔 반드시 가족회의를 열어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일 때까지 설득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김태훈 씨는 그림에 소질을 보이는 아이들은 직접 지도하고 2년마다 가족 미술전시회를 연다. 2014년에는 “우리 이야기 들어보실래요?”라는 제목의 유화전을 열어 아이들이 글과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하게 해주었다.

 

 지속가능한 기반을 만들다

 

 10대 청소년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아놓은 사비를 털었지만 금세 한계에 부딪혔다. 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니고, 돈 걱정을 하던 끝에, 가정 해체로 보금자리를 잃은 어린이들의 사회적응을 높이기 위해 보육교사가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대안가정의 일종인 ‘그룹 홈’ 제도를 찾아냈다.

 

  이 지원 프로그램으로 정부, 민간단체, 복지재단, 기업체 사회공헌팀에게 후원을 신청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하여 2009년 그는 새터민청소년 그룹홈 ‘가족’의 대표라는 공식 이름을 얻었고, 여러 기관과 기업에 지역공모사업 형태로 지원을 요청해 재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이탈주민이라면 무조건 편견과 어두운 눈으로만 바라보는 사회분위기를 아이들과 함께 이겨나가는 일은 힘든 도전이다. 노총각과 여러 남자 아이들이 모여 사는 걸 마뜩찮게 여기는 이웃의 시선이 따가운 적도 많았다. 앵벌이들이 모여 산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경찰이 찾아와 현장조사를 하고 간 적도 있다.

 ‘북한에선 헐벗고 못 먹고 산다’는 부정적인 이야기에 짜증이 나거나 따돌림에 상처 받고 귀가한 아이들 마음을 도닥거리는 것도 그의 몫이다. “제 사투리가 심하니까 남한 친구들이 ‘빨갱이’라며 놀려댄 적이 많았죠. 저는 남한에 그런 말이 있는지 조차 몰랐는데 말입니다.” 김태훈씨의 오늘이 있게 만든 염하룡의 얘기다. 이곳에서 자라 부경대 간호학과에 진학한 이억철은 지금도 “북한에서 왔다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싫다”고 말한다.

 김씨에게는 부모의 엄청난 반대도 넘어서기 힘든 장애물이었다. 장남이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이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노총각으로 살아가는 걸 좋아할 부모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고 남는다. 초기 2년 동안 가족들과는 소식을 끊고 지냈을 정도다. “혹시 제 어머니가 찾아와 우리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라도 할까 봐 무척 걱정했지요.”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금은 든든한 원군으로 바뀌었다. 2013 년 설 때는 아이들을 손자로 받아들여 세배도 받고 차례도 함께 지내게 허락했다. 그 뒤부터 아이들과 함께 부모님 집을 자유롭게 왕래한다.

 무엇보다 다행은 아이들 대부분이 기죽지 않고 건실하게 성장해 가는 것이다. 첫 아이 하룡이는 전국중고생 자원봉사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한국 대표로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대회에 참가했고 이제 경북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는 어엿한 대학생이 됐다. 전교학생회장 노릇을 무사히 마치고 고3이 된 진범이는 올해 수시모집으로 광운대 생활체육학과에 합격한 상태다.

 “새터민 청소년들은 일반학교에 10명 입학해서 한두 명 졸업하는 것이 현실이에요. 대부분이 중퇴하여 검정고시를 보거나,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로 옮겨가지요. 일반학교에 잘 적응하고 성장해주는 우리 아이들이 그래서 더 대견해요.”


 그의 아이들 중에 남한사회 부적응자가 많을 것이라는 지레 짐작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우리 집 아이들 자랑을 좀 하고 싶습니다. 화가, 작가, 뮤지컬 배우, 전교 학생회장, 전국 봉사왕도 있지요. 대단하죠?”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그는 아이들에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마음도 길러주기 위해 태국 오지 아카 부족 마을에 함께 세 차례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재정 지원은 대부분 코스콤이 해줬다. 태국은 북한을 떠난 많은 아이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거쳐 오는 곳이기도 하다. 경북대 농업경제학과에 진학한 이진철은 “태국에 간다는 게 처음엔 두려웠다. 우리가 배를 8시간이나 타고 메콩강을 건너 그 곳을 거쳐왔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진철이는 고등학생이던2012년 지구마을살리기 국제자원봉사활동단에 참여해 아카 마을에 물탱크, 주차장, 도서관 터를 만드는 일에 힘을 보탰다. 어찌나 성심껏 일했는지 마을 어른 한 분이 자기 딸과 결혼해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2013 년 여름 다시 이 마을을 찾아가 외국인 자원봉사자 숙소인 클레이하우스를 짓는 일에 참여했다. 마을 담벼락에는 멋진 그림도 그렸다.


 “아이들을 철부지라고 생각했는데 힘든 일도 어려워하지 않고 잘 해냈어요. 게다가 단순히 봉사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들도 저도 모두 그 경험을 통해 정신적으로 부쩍 성장했다는 걸 느꼈죠.”

 그런 그에 대해 아이들은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아카 마을에서 보는 삼촌은 그 동안 한국에서 보아왔던 것보다 더 커 보였어요.” 아이들은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와서는 그 동안 잘 하지 않던 집안 대청소까지 했다.

 아이들은 강원도 원통 글라렛 수도원에서 천주교 신부님의 일손을 돕기도 한다. 가을걷이, 콩 타작, 경운기 몰기 같은 봉사활동 틈틈이 자연을 벗 삼아 노는 체험도 한다. 동해에서 바닷물놀이도 생전 처음 해봤다.


  그가 미술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아이들의 미술공부 지도만큼은 소양에 따라 더욱 알차게 해주고, 미술전시회에 각별히 신경을 쓴다. 2년마다 미술전시회도 연다. 준비 과정에서 의견 다툼도 있고 실수도 저지르지만 그 결과 얻어지는 공동 작업에 대한 자부심은 그들을 정신적으로 한 단계씩 성장시킨다.

 이 가족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뮤지컬 <우리도 가족일까?>, 아이들의 글과 삽화를 모은 문집 <밸이난다>(짜증난다는 뜻의 북한 말) 등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우리 가족>(감독 김도현)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돼 2013년 제5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초청작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김씨는 한 단계 도약을 준비 중이다. 사회적 기업 설립 계획이 그것이다. 북한 접경지역인 강원도 철원을 거점으로 북한이탈주민들의 자립을 돕는 한편, 지역경제를 살리는 내용의 사업을 설계하고 있다. 일단 5년을 준비 기간으로 잡고 차근차근 꿈을 실현해 나가려 한다. 사업에서 나온 수익의 3분의 1은 다른 그룹 홈들도 지원하는 방식으로 안정적인 운영을 모색할 계획이다.
“우리는 언젠가 독립하겠지만, 평생 같이 살아갈 가족이라고 생각한다”고 아이들은 모두 입을 모은다. ‘총각엄마’ 김태훈은 자신이 하는 일이 통일준비의 하나라고 여긴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6년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Bachelor Mom’ and His Kids Build a Future Together

 

 “Gajok” (Family) is a group home that serves as alternative family for 10 teenage North Korean defectors now living in Seoul without parents or any relatives to look after them. Kim Tae-hoon, a 40-year-old unmarried man who heads the home, has been single?handedly raising an unusual brood over the last 10 years. Neighbors call Kim “Bachelor Mom.”

 The boys of Kim Tae-hoon’s Gajok, an alternative family for parentless teen defectors from North Korea, enjoy a quiet weekend evening of stories and books around the table in the living room of their group home.

 Kim Tae-hoon is very busy every morning, getting up at 6 o’clock to prepare breakfast, wake up the kids, feed them, and send them off to school. After the hectic morning, he then cleans every corner of the house and does the laundry to eliminate the “odor” of the home’s 11 male occupants. This is his routine day in and day out.


 “I wash clothes in two washing machines every day. We have heaps of laundry because they’re boys,” he said. Among other things, he gives careful attention to cleaning the bathroom. He has even come up with an ingenious idea of cleaning the toilet with toothpaste to get rid of ammonia smell.

  The boys call him Uncle. The assumption that many of them must be misfits who have failed to adapt to South Korean society is nothing but prejudice, Kim says. “Let me boast of my kids. There’s a painter, a writer, a musical actor, a student council president, and the winner of Korea’s Best Volunteer Award. Aren’t they amazing?”


 Thanks to one of the boys becoming a student council president, Kim even had a chance to “flex some muscle” at the boy’s school as the president of the parents’ council, he chuckled. According to Kim, it was the first time that a teenage defector has ever become a student council president by winning a hotly contested election at a regular school. The hero, Han Jin-beom, has come to have a greater sense of responsibility since he became a student leader. This has, in turn, renewed Kim’s sense of mission.

 The Gajok under Kim’s devoted care was a beehive of activity as the boys prepared for a concert this past autumn to mark their 10th anniversary as a family. They gave a successful performance at the Arirang Cine Center in Seoul on November 18?20.

 

The Road Taken

 

  Kim never thought that he would be living this way. He came to his new calling by happenstance. In 2006, while working as a volunteer in a program to help recent defectors adjust to a new life in the South, he felt compelled to babysit a young defector boy he found home alone while the mother was away looking for a job. Kim was then dividing his time between a decent job at a publishing house and doing volunteer work at Hanawon, a facility run by the Unification Ministry where defectors undergo a resettlement program. One of the defectors informed him of her new address in Seoul. When he visited her apartment in Yangcheon District in western Seoul, he found a boy, a fourth grader, sleeping alone in darkness with the TV on. His mother had gone to another province to find a job, leaving the boy alone behind in this rented apartment provided by Hanawon.

  Kim opened the refrigerator and found nothing to eat inside. His heart ached. A good cook himself, he went to a nearby grocery store to shop for food. He cooked a meal, which he ate with the boy. Suddenly, the boy began talking about his hometown back in the North. Then, he asked Kim to stay for the night with him. Kim accepted the invitation gladly.

  Unable to leave the boy alone, Kim slept at the apartment a few more nights. Sometime later, the boy’s mother found a job in a distant province and had to stay near her workplace. Kim decided to live in the apartment with the boy. Eventually, he took charge of more and more parentless children that Hanawon sent to him. After moving around several rental units, he bought a house at the foot of Mt. Bugak in Seongbuk District, northern Seoul, which became a permanent shelter for a total of 10 teenage boys from the North.

 Whenever a new boy arrived, Kim made careful efforts to help ease the youngster’s adaptation into South Korean society. For his young wards, blending in was a particular concern. With the boy’s consent, Kim discarded most of his old clothing and the odds and ends in his pockets. He then took the boy to a barbershop and bought him new clothes at the Dongdaemun shopping mall. These children are very sensitive about their clothing and physical appearance because they don’t want to stick out and be marginalized as defectors at school.

 “Kim’s boys either have no relatives in South Korea or their parents are too busy eking out a living here to properly care for their children. Most of them are from remote areas in North Korea, including the provinces of North and South Hamgyong, and Ryanggang Province. Jeong Ju-yeong, a third grader who used to live with his grandmother, fled the North when he was six years old with the help of a missionary. The youngest boy in this house, he can’t remember his parents’ faces.

  Since arriving in Seoul, the boys got to experience many firsts, like wearing their first school uniform, seeing the sea for the first time, and celebrating their first Christmas. The older boys still expect Santa Claus to come to their home with presents. They had their own birthday parties here for the first time. Kim treats each new arrival with a surprise party to celebrate his first birthday as a new member of the family. Before accepting a new boy, Kim calls a “family meeting” to seek their agreement.

 A fine arts major in college, Kim tae-hoon is also art teacher to his boys, showcasing their works in an exhibition every two years to help them communicate with the world through their paintings and writings. In 2014, their exhibition of oil paintings was titled “Would You Listen to Our Story?”

 

Unusual Family, Overcoming Obstacles

 

  It is no easy task to feed and take care of teenage boys. Kim spent all his savings, but soon faced limits. He had to move frequently and worried about how to make ends meet, as the number of boys he had to care for swelled. Then he came to hear about group homes, a kind of alternative family service, in which a caregiver lives together with parentless children to help them adapt to society. And he realized that it would be possible to ask for financial support from the government, civic organizations, and welfare foundations, or appeal to corporations with social responsibility programs. In 2009, he officially became the head of a group home for teen defectors and was thus qualified to request financial aid from concerned agencies and businesses.

  Still, it is a daunting challenge for him, as well as his boys, to overcome the public’s prejudice and bigoted views toward defectors from North Korea.

 He often felt disapproving stares of neighbors who didn’t like seeing an unmarried man living with many young boys. One day, police officers came to his house to check on a rumor that he was living with child panhandlers.

 He also has to heal the wounded hearts of the boys who come home almost every day perturbed by hearing schoolmates talk disparagingly of North Koreans ? that they go around in rags, and go to bed hungry; or by being excluded from regular student activities.

  Yeom Ha-ryong, the boy who motivated Kim to take on this task in the first place, recalls, “I speak with a strong accent. So my South Korean friends used to make fun of me, calling me a ‘pinko.’ I didn’t know that such a word even exists in the South.” For Lee Eokcheol, who grew up in the family and is now a student in the Department of Nursing at Pukyong National University, the sense of not quite belonging still rankles: “I still hate it when people look at me with pity because I’m from the North.”


  For Kim, stern disapproval from his own parents loomed large over his decision to pursue an early altruistic impulse as his lifework. It’s quite understandable that his parents never liked the idea of their eldest son taking care of total strangers and remaining unmarried. He had to keep out of touch with them for the first two years. “At first, I was worried very much that my mom might come and say hurtful words to the boys,” he said.


  As it turned out, his mother and father are now his most stalwart supporters. On Lunar New Year’s Day in 2013, his parents received respectful traditional bows from the boys and allowed them to join a memorial rite for family ancestors, thus accepting them as their adopted grandsons. Since then, Kim and the boys have been visiting his parents’ home freely.
 

 Fortunately, most of the boys are growing up in good physical health, never getting demoralized. Ha-ryong won the grand prize in a national volunteer contest for secondary school students. And he went on to represent South Korea in a world volunteer contest held in Washington, D.C. He is now a student majoring in sociology a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After serving as student council president, Jin-beom, now a high school senior, has already been admitted to the Department of Sports Leadership at Kwangwoon University under its early admissions program this year.

  “Only one or two of every 10 teen defectors complete regular high school,” Kim notes. “Most others drop out, and then take the general equivalency diploma test or transfer to alternative schools for teen defectors. That’s why I’m so proud of my boys who have adapted well to regular schools and are growing up healthily.”
 

 “We all will leave home sometime in the future. But we believe we are a family who will remain close to each other all our lives.”

 

Nurturing Altruism, Building New Dreams

 

  Together with the boys, Kim traveled to an Akha hill tribe village in a remote region of Thailand three times to have them experience and cultivate a desire to help needy people. Their travels were funded mostly by Koscom, a securities information firm. Thailand is a transit country through which many young North Korean defectors pass before they reach South Korea. Lee Jin-cheol, who is now a freshman in the Department of Agricultural Economics a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looks back: “I was afraid at first when I visited Thailand again, because we had earlier traversed the country for eight hours across the Mekong River by boat when we were fleeing.”


  In 2012, while he was still in high school, Jin-cheol helped build a water tank, a parking lot, and the foundation for a public library building at the Akha village as a participant in a Global Village volunteer program. He worked so hard that one of the village elders asked him if he would marry his daughter. He revisited this village in summer 2013 and participated in building a clay house for foreign volunteers. The participants also painted an awesome mural on the village wall.
 

Kim spends quality time with his boys in their home’s wellappointed study. “I had thought of the boys merely as young kids. But they worked real hard there. Furthermore, what they did was not simply volunteer work. I felt that they, as well as I, had grown spiritually through the experience,” Kim said.

  On occasion, the boys travel to the rugged northeast near the border with North Korea to give a hand to Catholic priests and nuns of the Claretian Missionaries, which provide services for abandoned elderly, handicapped people, and children in Wontong, a needy rural community in Gangwon Province. After harvesting crops, threshing dry beans, and tilling the fields with tractors, they get to enjoy relaxing in the area’s natural surroundings. They even had a chance to take a dip in the East Sea, another first-time experience.
 

 take a dip in the East Sea, another first-time experience. A fine arts major in college, Kim is carefully nurturing the boys’ artistic sensibility by teaching them and helping develop their aptitudes, showcasing their works by holding art exhibitions every two years. Disagreements arise and mistakes are made during the preparations for exhibitions. But their pride in each other’s gifts and the joy from working together collaboratively shines through each time.
 

 The story of Kim and his boys has been shared with the world through a musical titled “Are We a Family, Too?” and “We’re Really Pissed Off,” a collection of the boys’ articles with their own illustrations. Their story has also been made into a documentary film titled “Our Family” (directed by Kim Do-hyun), which was screened at the Fifth DMZ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 in 2013.
 

  Kim is preparing to take a big leap: to establish a social enterprise. He is planning a project to revive a regional economy, while helping defectors stand on their own, based in Cheorwon, an area adjacent to the DMZ in Gangwon Province. He plans to set aside a third of the revenue from the project to support other group homes for young defectors.


 “We all will leave home sometime in the future. But we believe we are a family who will remain close to each other all our lives,” the boys said in unison. Kim Tae-hoon, their “Bachelor Mom,” believes that what he is doing now is part of preparations for the eventual unification of the Korean nation.

 

 Kim Hak-soon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김학순

 한국 디아스포라 문학의 외연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젊은 소설가의 작품 산실은 상상보다 옹색해 보인다. 작가 금희(본명 김금희)는 중국 길림(吉林)성 장춘(長春)시 장춘역 부근 중국동포(조선족) 집거구역의 오래된 작은 아파트에서 남편, 고1 아들, 초등학교 4학년 딸과 함께 살고 있다.

 

 탈북민 다룬 단편

 

  금희 작가는 단편 ‘옥화’를 <창작과비평> 2014년 봄호에 발표하면서 한국 독자들에게 처음 알려졌다. 이 작품은 이어 아시아출판사의 ‘K 픽션’ 시리즈의 하나로 한?영 대역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한국에 와서 일하는 중국 동포나 탈북민은 이제 한국 소설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소재이지만, 탈북 여성이 남한에 정착하기 이전의 이야기를 다뤄 기존의 서사와 차별화된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동포 작가의 목소리는 그 자체가 신선한 매력이어서 독자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이 소설집은 올해 제10회 백신애문학상을 받았다.

 

 ‘옥화’는 북한을 탈출한 여성이 인신매매로 중국 오지의 불구 남자에게 팔려가 고된 노동 끝에 갓난아이까지 버리고 한국으로 건너가는 과정을 지켜본 체험적 이야기다. 같은 소설집에 실린 중편 ‘노마드’에도 한국에 와서 일하는 중국동포 남성과 탈북 여성의 얘기가 펼쳐진다.

                                                                     

 

 하지만 금희 씨는 자신이 탈북민 이야기를 주로 다루는 작가로 비치는 게 부담스럽고 마뜩찮다. 탈북민이 나오는 것은 많은 작품 가운데 이 두 편에 불과한 데다, 그가 궁극적으로 천착하려는 것은 사회적 약자보다는 심리적 약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에서 탈북민 문제는 금기에 가까운 주제이다. 중국이 탈북민들의 1차 경유지여서 중국 동포 작가들에게 친근한 소재일 법하나 탈북민소재 소설은 한국어(조선어)로 쓰더라도 사실상 발표하기 어렵다.

 

 ‘옥화’는 애당초 연변 조선어 문학잡지 <도라지>의 요청으로 쓴 소설이었다. “청탁했던 잡지사에서 읽어보고 나서는 갑자기 민감한 소재라며 못 싣겠다고 하더군요. 정치적 내용이나 이데올로기가 담긴 얘기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안타까운 생각에 한국에서라면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하기도 해 <창작과비평>에 무턱대고 투고했지요.”

  한국 문단 진출은 금희에게 의미가 남다르다. “우선 문학 분위기가 중국보다 자유롭습니다. 중국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보다 훨씬 다양하고, 투명하게 쓰고 싶은 것을 다 쓸 수 있거든요.”

 

한국인 이주민 4세대

 

 증조부 때 중국으로 건너갔으니 이주민 4세대인 금희 작가는 2000년대 초반 2년여 동안 한국 생활을 경험한 적이 있다. 연길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잠시 교사로 일하다가 한국으로 왔다. 중국 동포들의 한국행이 한창 유행할 무렵이었다. 충남 청양, 대전, 대구 등지에서 중국어 강사, 모텔 청소, 식당 서빙 등의 일을 했다. 광적인 한일 월드컵축구 응원과 노무현 이회창의 대통령선거 대결이 인상적인 일로 강하게 남았다고 한다. 
                                                                  

 

 “같은 핏줄, 같은 민족이지만 살아온 배경이 많이 다르고, 기억도 한참 다르다는 것을 절절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써도 나는 조선족 작가구나, 한국 작가가 될 수 없구나 생각했어요.”

 

 두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계인의 고민은 자연스레 작품 속에 짙게 배어 나온다. 중국 소수민족으로 체감하는 정체성 갈등, 조선족 사회의 탈북민 문제, 한국 사회로의 노동이주 체험 등이 소설에서 핍진하게 그려진다. 표제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에서 주인공은 처음으로 장만해 이사 들어갈 아파트 실내를 구체적인 개념도 없이 막연히 ‘조선식’으로 꾸미겠다고 벼르는데, 이는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이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을 찾겠다는 주인공의 뿌리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다.

 

  ‘노마드’에서는 한국에서 노동자로 생활하며 한국 사람은 중국동포에게, 중국동포는 탈북민에게 불신을 갖는 차별의 악순환을 목도하는 조선족 박철이의 이야기가 처연하게 다가온다. “한 종족이되 이제는 도무지 한 무리에서 어울려 살아갈 수 없는 야생 이리와 셰퍼드처럼, 같은 액체지만 한 용기에 부어놓아도 도무지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이라는 표현이 강렬하다.

 

 2013년 중국에서 출간된 첫 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료녕민족출판사)>는 조선족 농촌공동체의 해체와 상실,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가족 제도의 모순, 물질주의로 인한 도덕과 윤리의 타락 등 중국의 개혁개방과 자본주의 도입 과정에서 요동치는 이야기들로 꾸려졌다. 조선족 농촌마을에서 나고 자란 금희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정치?경제적 격변기를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한국어로 소설 쓰기

 

 <슈뢰딩거의 상자>의 문법과 띄어쓰기 같은 것들은 한국에서 출간된 <세상에 없는 나의 집>과 확연히 다르다. 정치경제적으로 북한과 더 가까운 중국에서 북한 말에 가까운 조선족 언어로 교육을 받고 작품 활동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은 한국 독자를 의식하고 썼지만 그가 한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은 당연히 힘들었다. 어떤 것은 일부러 조선족이 쓰는 표현을 그대로 썼다. 그런 점이 외려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한국 독자들에게 낯선 표현들도 이야기 맥락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 있어서 이해를 방해하기는커녕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그는 한국 작품을 많이 읽고 한국식 표현도 많이 배우고 싶으나 한계가 많다고 고백한다. “서사는 중국이나 다른 나라 문학에서 배울 수 있지만 한국어 문장은 한국에서밖에 배울 수 없잖아요. 한국어로 글을 쓰는 만큼 세련되지는 못해도 한국 독자가 읽기에 거부감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좋은 한국어 문장을 많이 접하기 어렵지요. 인터넷을 뒤져서 정말 보고 싶은 작가의 작품을 대표적으로 뽑아서 볼 뿐이죠.”

 

 체험의 힘, 서사의 힘

 

  금희의 소설이 다루는 ‘디아스포라의 체험’은 최근 한국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국내의 평론가들과 독자들이 그에 주목하는 것은 체험을 정교화함으로써 실감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겨우 30대 후반에 접어들었지만 22살의 이른 나이에 결혼해 아내와 엄마, 며느리로서 동년배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곡이 심한 삶을 체험했다. 그 녹록치 않은 인생 경험에서 길어 올린 웅숭깊은 생각이 어우러져 작품마다 깊은 맛이 난다. 작가 스스로도 그 점에 동의한다.

 “아마 아이를 일찍 낳지 않았다면 등단을 빨리 할 수 있었겠지만 글의 깊이는 지금보다 떨어질 것 같습니다.”

 

 금희는 문학평론가들로부터 현실을 뚫고 나가는 박력 있는 서사와 섬세한 심리묘사가 탁월하다고 평가 받는다. 작가는 소설에서 서사의 중요성을 이렇게 역설했다.

 “서사는 소설을 끌어가는 힘이죠. 한국 소설은 중국과 달리 서사를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서정성, 분위기를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중국은 서사가 없으면 소설이 안 된다고 생각하죠. 저는 어릴 때부터 서사가 뛰어난 <삼국연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조선족 문단의 현실

 

 2007년 단편소설 ‘개불’로 <연변문학>에서 주관하는 윤동주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초기에 “어떤 소설을 쓸 것인가”가 아니라 “소설을 계속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중국 문단도, 한국 문단도 아닌 쇠락해가는 작은 ‘조선족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미래를 기약하기 힘들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중국 작가들은 원고료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참 창작해야 할 세대들이 생활고에 시달려서 문단을 떠나니까 공백이 생기고, 악순환이 이어지는 실정입니다. 자연히 중국 안에서 갖고 있던 조선족 문학의 명성도 많이 떨어진 상태죠. 몇 개 안 남은 문학잡지들도 운영이 너무 어렵습니다.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써 달라고 매달리는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소설 쓰기밖에 없다는 심경으로 쓰고 또 쓴다. “다양한 직업을 가져봤지만, 재미도 없고, 보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흔, 또는 쉰이 되었을 때도 조선족 문학이란 게 남아 있을지 걱정이에요. 제 세대가 조선족 작가로 한국어 소설을 쓰는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선족 200만 명 가운데 조선족 문단에 속한 작가는 어림잡아 10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중국 사회에서 조선족 사회는 문학적으로도 특수한 소수집단이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조선족을 제외한 다른 소수민족들은 모두 중국어로 소설을 쓴다. 티베트, 위구르, 몽골족 같은 경우 자기 문자와 언어가 있고 인구도 조선족보다 훨씬 많아도 모어(母語)로 창작하는 작가들이 이제 거의 없다.

 

 금희는 중국 문단에도 벽을 느꼈다고 한다. “줄곧 조선족 학교를 다녔으니 중국 작가들보다 중국어 구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소설이 중국 문단에 알려지려면 번역을 거쳐야 가능합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지요.”

 

 “조선족이라는 것도, 한국말을 한다는 것도 결국 제 껍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벗기고 나면 결국 금희라는 한 사람의 영혼만 남겠지요. 그래서 모든 걸 초월하는 보편적 정서를 다룬 소설을 써 보고 싶어요.”

 

 그가 작가가 된 데는 어린 시절의 독서량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평생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고 집에 책이 많아 동네도서관 역할을 했다. 500여 호에 이를 만큼 주위에서는 가장 큰 조선족 시골동네에서 책장에 전래동화가 가득한 집은 ‘금희네’뿐이었다. 금희는 친구들과 뛰어놀 초등학교 시절 아라비안나이트 같은 소설읽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꼽았다.

 

 그의 작품에 여러 번 등장하는 장춘시 계림로(桂林路)는 한국인 가게가 많기로 유명한 거리로, 서울의 홍대앞처럼 젊은이들에게, 특히 밤에 인기가 높다. 이 거리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이어진 작가의 이야기는 “보편적인 소재로 글을 써 여러 나라 독자들과 공감하는 꿈”으로 맺어졌다.

 

 “조선족이라는 것도, 한국말을 한다는 것도 결국 제 껍데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벗기고 나면 결국 금희라는 한 사람의 영혼만 남겠지요. 그래서 모든 걸 초월하는 보편적 정서를 다룬 소설을 써 보고 싶어요. 그게 참된 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죠.”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6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From the Periphery, Korean-Chinese Author Geum Hee Beholds Those on the Margins
 
 Geum Hee, who writes in Korean, is one of the novelists who energize the ethnic Korean literary scene in China. Late last year, her collection of short fiction “My Home Nowhere in the World,” which includes stories about the real-life conditions faced by North Korean defectors, was published in Seoul, marking her literary debut in South Korea.

 

  The writing space of a young author, who is credited with expanding “Korean diaspora literature,” is much humbler than one might imagine. Geum Hee (real name Kim Geumhee) lives in a tiny old apartment in the ethnic Korean neighborhood near Changchun Station, in Changchun, Jilin Province, northeast China, with her husband, teenage son, and young daughter.

 

 Short Stories about Defectors

 

 Geum Hee first became known to Korean readers with the publication of her short story “Ok-hwa” in the spring 2016 edition of The Quarterly Changbi [“Creation and Criticism”]. This work was also translated and published in a bilingual English-Korean edition of the Asia Publishers’ “K Fiction” series.

 

  Nowadays, it is not difficult to find in Korean literature stories about Korean-Chinese immigrants and North Korean defectors living and working in South Korea. But in telling the story of a North Korean woman before she arrives in the South, “Ok-hwa” is distinct from other narratives. The voice of a Korean-Chinese author has a fresh appeal that grabs readers’ attention, whatever the subject matter. The collection of short fiction which includes “Ok-hwa” earned the Baek Sin-ae Literature Prize earlier this year.


  “Ok-hwa” is an experiential story that describes how a woman who escapes from North Korea ends up being sold to a disabled man living in a remote area of China. After all kinds of hardship, the woman leaves behind her newborn baby and manages to make her way to South Korea. The novella “Nomad,” in the same collection, also tells the story of a North Korean woman and a Korean-Chinese man who come to the South for work.

 

  For Geum Hee, however, being known simply as an author who writes stories mainly about North Korean defectors is burdensome as well as disconcerting. This is because among the many works she has written, only the two mentioned above are about defectors, whereas what she ultimately seeks to delve into is not the situation of the socially underprivileged, but rather the plight of those who are psychologically vulnerable. Furthermore, in China, the issue of defectors from North Korea is taboo. Since China is most often the first port of call for those who flee North Korea, you would think that it might be a familiar subject for ethnic Korean authors in China, but even if they write in Korean, it is still a challenge to get a novel which deals with the subject published in China.


 “Ok-hwa” was originally written on commission by Doraji (Bellflower), a Korean-language literary magazine published in Yanbian. “At the magazine that had commissioned the work, after the editors read it they said all of a sudden that they couldn’t publish it because the story dealt with a sensitive subject,” said Geum Hee. “This was despite the fact that the story doesn’t contain any political content or ideology. I thought it was a shame that it would go unread, and I also wondered how it might be received in South Korea, so I stuck my neck out and submitted it to The Quarterly Changbi.”

 Breaking into the South Korean literary scene has quite a different meaning for Geum Hee. “First of all, the literary atmosphere is freer there than in China. There is much more diversity in the kinds of subjects you can write about, and when I want to I can write in a very candid way,” she says.

 

Fourth-Generation Korean Diaspora Migrant

 

  Geum Hee’s great-grandfather settled in China, making her a fourth-generation immigrant. After graduating from Yanji Normal School she worked as a schoolteacher for a while and then traveled to South Korea, where she stayed for two years. This was at a time when going to South Korea was all the rage among the ethnic Koreans in China. She worked various jobs, such as teaching Chinese, cleaning motel rooms, and waiting tables, in places such as Cheongyang County in South Chungcheong Province and the cities of Daejeon and Daegu. She says two things that made a deep impression on her from that time were the outpouring of fanatical energy during the 2002 FIFA World Cup jointly hosted by Korea and Japan, and the contest between Roh Moo-hyun and Lee Hoi-chang in the presidential election.


 “I felt very keenly then that although we may be descended from the same ancestors and are from the same ethnic group, the context of our lives is very different and our memories are completely different too. So I ended up thinking, however I might write I can only be a Korean-Chinese writer, I can never become a Korean writer.”

 

 Naturally, a sense of ambivalence as someone in the margins, who lives in two languages, is quite evident throughout her work. Things like identity conflicts incurred as part of an ethnic minority in China, the issue of North Korean defectors within Korean-Chinese society, and the experiences of labor migrants in South Korea, are all depicted vividly in her novels.

 

  In the title work “My Home Nowhere in the World,” the main character is preparing to move into her own apartment for the first time. She plans to decorate the interior of her new home in “Korean style,” a vague concept which has no particular form or shape. This is an expression of the main character’s desire to establish roots, not a person who is “neither this nor that,” but a true self. In “Nomad,” the story of Park Cheol-yi, a Korean-Chinese man who works as a laborer in South Korea and witnesses the intense distrust of Korean-Chinese people among Koreans, and of North Korean defectors among the Korean-Chinese, casts an extremely distressing shadow. This is summed up in a painful observation: “We may be of the same kind, the same species, but like wild wolves and German Shepherds, there is no way we can get along as one group any longer. Like oil and water, both liquids of a sort, but that cannot mix even if poured into the same container.”

 

 Geum Hee’s first collection of short fiction, “Schrodinger’s Box” was published by Liaoning National Publisher in China in 2013. Its stories chart the turbulence in the process of economic reform and introduction of capitalism to China, and examine the break-up and loss of a sense of community within the Korean-Chinese society, the failings of traditional family systems as seen from the perspective of women, and the breakdown of virtues and ethical principles brought about by materialism. As someone born and brought up in a Korean-Chinese farming village, Geum Hee herself is part of the generation that experienced firsthand the times of political and social upheaval in China, following its economic reforms.

 

 Writing Novels in Korean

 

  From grammar to word breaks, there are many noticeable differences between “Schrodinger’s Box” and “My Home Nowhere in the World,” which was published in South Korea. This is because Geum Hee was educated and writes her stories in the Korean of her Korean-Chinese hometown ? which is closer to the Korean used in North Korea ? and also because China has more in common with North Korea in political and economic terms. Although “My Home Nowhere in the World” was written with South Korean readers in mind, Geum Hee did find it difficult to smoothly manipulate the language. Some parts by design have been deliberately written employing expressions used by Korean-Chinese people. These aspects of her writing actually help it come across as fresh and textured. These expressions, unfamiliar to South Korean readers, meld naturally into the context of the stories so they do not hinder understanding; they instead inject authenticity and realism into her narratives.

 

  Although Geum Hee strives to read as many Korean books as possible in order to familiarize herself with South Korean expressions, she admits that there are limits. “I can learn the art of narrative from Chinese literature or novels from other countries, but I can learn about the construction of Korean sentences only from Korean writings,” she notes.

 

 “Because I’m writing in Korean, even if I can’t make my wording particularly artful, I think that at least I have to make sure that I write in a way that is not off-putting to Korean readers; that actually takes a lot of effort. But even so, from where I am it is difficult to immerse myself in well-written Korean sentences. All I can do is search through the Internet and pick out the most well-known works by the writers I really want to read and go through those.”

 

Strength of Experience, Power of Narrative

 

 The diaspora experience which Geum Hee’s works deal with is one of the major subjects currently being explored in Korean fiction as a whole. The reason that she is receiving so much attention from South Korean critics and readers is because of what she focuses on within this subject ? the elaboration of real-life experience, which makes her work much more vivid, and cuts close to the heart.

 

 As Geum Hee now approaches her late 30s, after getting married at the relatively young age of 22, as a wife, mother, and daughter- in-law, she has experienced life’s twists and turns far more than most of her contemporaries. The humaneness that has grown out of the experiences of that tough life imbues her works with depth and richness. Geum Hee, too, agrees on this point.

 “If I hadn’t had my children so early I probably would have been able to make my literary debut a little sooner, but I think my writing wouldn’t have been able to achieve the same depth as it has now.”

 

 Geum Hee has been lauded by literary critics for having a natural talent for creating energetic narratives that pierce through reality, and describing emotions in precise and careful detail. Geum Hee stresses the importance of narrative in fiction:

 

 “Narrative is the energy that drives a story. It seems to me that Korean novels place much less emphasis on narrative than do Chinese novels. It seems [in Korea] that lyricism and atmosphere are considered much more important. In China, if a work of fiction has no narrative structure, it is not considered a novel. From a young age I was infatuated with the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which has a wonderful narrative style.”

 

 Geum Hee began her writing career in 2007, winning the Yun Dong-ju New Writer’s Prize awarded by Yanbian Literature for her short story “Spoon Worm.” In the beginning it wasn’t the question “What kind of stories should I write?” that she had to worry about but rather, “Should I keep writing stories?” This was because of her concerns about how difficult it would be to map out a future for herself as a writer in the small and declining Korean-Chinese literary niche, which belongs neither to Chinese nor Korean literature.

 

 Shrinking Literary Landscape

 

 “Chinese writers can live on the money they make by writing. That’s impossible for us,” she says. “Right now those who should be in their most productive years of writing have to struggle with the hardships of life, and so they leave the literary sphere, and then there is a big gap in their careers and they are caught in a vicious circle. Quite naturally, the reputation that Korean-Chinese literature once had within China has also declined. Even for the few literary magazines that still remain, it is really hard to keep going.”

 

 Despite such circumstances, Geum Hee writes and keeps writing because she feels acutely that writing fiction is the only thing she can do. “I’ve had lots of different jobs but they weren’t interesting at all. I couldn’t find any satisfaction in them. But then I worry, when I turn 40, or 50, will something called Korean-Chinese literature still be in existence? I think my generation of Korean-Chinese writers will probably be the last to write their novels in Korean.”

 

 Although the Korean-Chinese population in the region numbers around two million, there are only around 100 writers in the literary community. In Chinese society, the Korean-Chinese represent a minority group in terms of literature as well. Among the 55 ethnic minority groups in China, all the others apart from the Korean- Chinese write fiction in Chinese. Even in the case of the Tibetans, Uighurs, and Mongolians in China, who have their own languages and writing systems, and far larger populations than the Korean-Chinese, there are almost no writers who create fiction in their native languages.

 

  Geum Hee describes how she came up against formidable obstacles in the Chinese literary arena. “Throughout my entire education I attended Korean schools so my writing ability in Chinese is of course inferior to that of Chinese writers. If my stories were to become known in the Chinese literary sphere they would, first of all, have to be translated into Chinese. In realistic terms, that wouldn’t be easy.”

 

 “I think being Korean-Chinese and speaking Korean are merely my outer layer. Peel them back, and all that is left would be the soul of one person ? a person called Geum Hee. That’s why I want to write novels that deal with universal sentiments that transcend everything else.”

 

 She says that it was the great range and number of books she read as a child that had the greatest influence on her becoming a writer. Her mother was an elementary school teacher throughout her working life and so their house was always full of books; to friends and neighbors it served as a local library. “Geum-hee’s Place” was the only one among 500 or so homes in the largest Korean-Chinese neighborhood in Changchun that had bookcases filled with traditional tales and story books. During her elementary school years, when all her friends were playing outside, Geum Hee would be absorbed in reading stories like “Arabian Nights.” Her favorite novel is Ernest Hemingway’s “The Old Man and the Sea.”

 

 Guilin Road in Changchun City, which features prominently in many of her works, is noted for its many Korean shops and restaurants and a bit like the Hongdae area in Seoul, it is popular with young people and particularly bustling at night. The conversation with Geum Hee over dinner at a restaurant on this road drew to a close thus: “What I dream about is writing on universal subjects and being able to connect emotionally with readers from many countries.”

 

  “I think being Korean-Chinese and speaking Korean are merely my outer layer. Peel them back, and all that is left would be the soul of one person ? a person called Geum Hee. That’s why I want to write novels that deal with universal sentiments that transcend everything else. It is also the path by which I can go in search of my own true identity.”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김학순

 “북한개발연구는 떠나온 고향에 드리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NK개발연구소.” 서울 중구 충무로의 4층짜리 덕성빌딩 맨 꼭대기에 자리한 북한개발연구소를 방문하면 이렇게 쓴 간판을 맨 먼저 마주한다. 김병욱 소장의 집무실에 들어서면 백두산 천지 사진이 첫눈에 들어온다. 바로 옆 연구실에는 두만강을 끼고 중국과 접경한 탄광도시인 함경북도 무산군의 구글 지도가 걸려 있다. 탈북민의 애환을 그린 영화 <무산일기>의 실제 모델 전승철의 고향인 바로 그 무산이다.

 

북한학 박사 부부

 

 북한개발연구소는 탈북 지식인들이 뜻을 모아 북한 중소도시 개발을 돕기 위해 설립한 학술연구단체다. 탈북민으로서는 남한에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병욱 소장이 주도해 만들어 2014년 12월 기획재정부 산하 사단법인으로 정식 등록됐다. 대부분의 탈북민 단체가 통일부에 등록돼 있는 것과 달리 북한개발연구소는 유일하게 기획재정부 소속이다. 연구단체여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탈북인 단체 가운데 평균 학력이 가장 높은 곳이기도 하다.


 2012년 말 탈북 지식인 10명이 하나원에 모였다. 탈북민의 남한 사회 정착 지원을 위해 정부가 운영하는 이곳에 모인 날, 이들은 북한 개발 전략을 연구해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남한처럼 살기 좋은 곳으로 발전시키자는 데 뜻을 같이 했다. 이듬해 탈북민 석-박사 학술동호회 모임을 만들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들의 꿈은 오달지다.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데 KDI(한국개발연구원)가 있었다면 ‘대동강의 기적’을 일으키는 데 NKDI가 앞장서겠다는 것이다. 초대 소장을 맡은 김병욱 박사(53)가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이끈 KDI를 본떠 이름을 지은 데도 이처럼 큰 포부가 담겼다. 김 소장은 “그 동안 탈북민들은 북한 연구의 자료나 도구로 활용돼온 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탈북 지식인들이 주체가 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북한에 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가진 우리가 머리를 맞대 NKDI를 북한 관련 최고 연구소로 키우겠다”고 웅지를 펼쳐 보인다.


 이 연구소에는 김 소장의 부인도 참여하고 있다. 부인 김영희 박사는 현재 한국산업은행 통일사업부 북한경제팀장으로 일하면서 이 연구소의 일을 병행한다. 이 부부는 2002년 8월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했다. 당 간부가 아니면 출세가 불가능한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김 소장은 평양기계대학을 나온 엘리트였으나 출신 성분이 좋지 않은 데다 친척들이 중국에 있다는 이유로 1990년대 초 평양에서 추방돼 평안남도 남포, 함경북도 청진 등을 전전해야 했다. 김 소장은 “나 자신의 출세는 둘째 치고 아이들의 삶이 더 걱정돼 탈북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들 부부는 탈북 후 남한에 정착한 다음 함께 공부해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동국대 북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북한학 연구로 국내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첫 탈북민 부부라는 기록을 세웠다.

                                                               

                                                         

‘185 프로젝트’

 

 박사 5명, 박사과정 12명, 석사과정 3명, 해서 모두 20명의 연구원으로 구성된 이 연구소는 여성이 13명으로 더 많다. 대부분 40대인 연구원들은 별도 직업을 지녔다. 대안학교 교감, 기간제 교사, 회사원 등으로 근무하면서 주말에 모여 연구 활동을 점검하고 의견을 나눈다. 전공 분야도 경제학, 군사학, 교육학, 사회학, 정치학, 문화예술 분야 등으로 다양하다. 상근자는 김 소장을 포함해 3명이며, 일본인 1명이 대외협력이사로 참여해 도와주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이 연구소는 북한 185개 지역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데 방점을 찍어놓고 있다. 북한에는 대도시의 구(區)에 해당하는 구역급 지역이 38곳, 군(郡)급 지역이 147곳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평양시 22곳, 신의주시 5곳, 개성공업지구 3곳, 함경북도 19곳, 함경남도 22곳, 평안북도 23곳, 평안남도 15곳, 강원도 16곳, 황해북도 15곳, 황해남도 19곳, 자강도 15곳, 양강도 11곳이다. 연구소에서는 이 185곳의 ‘미시지역’을 해당 시-도별로 맡아 연구할 12개의 지역개발 연구팀 결성을 올해 안에 마무리할 계획이다.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한 지역 격차를 줄이는 것이 긴요합니다. 이를 위해 북한의 중소도시 개발을 위한 기초 지리 정보를 쌓아갈 생각입니다. 185곳에 달하는 군 단위 이상 모든 중소도시의 공간 지리 정보를 구축하는 ‘185 프로젝트’가 1차 과제입니다. 이는 통일 전후로 북한의 개발 전략을 짜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것입니다. 이를테면 남한의 강원도 정선 탄광지대를 관광지로 만들었듯이 북한의 폐탄광 지역도 이런 식으로 개발할 수 있는 것이죠.” 김 소장은 필수 과제로 해당 지역 군 단위에 대한 기초자료조사를 꼽고 이같이 밝혔다. 지역 연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자료가 모두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 연구소 연구원들에게 고향 연구는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에 따른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로 인해 핍박 받는 휴전선 너머 동포들에게 해줄 수 있는, 남쪽나라에서의 삶의 전부를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김 소장은 이 말로 자신들의 취지를 널리 알리고 싶어 한다.

 

연구 업적과 계획

 

  이 연구소는 지난해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국토연구원과 공동으로 네 차례 세미나를 열어 당면 과제에 관한 기초를 다졌다. ‘북한 중소도시 개발에 필요한 기초자료 축성,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 중소도시 개발에 필요한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어떻게 할 것인가?’, ‘북한 중소도시 개발, 어떻게 할 것인가?’, ‘떠나온 고향, 민생 인프라 개발의 길을 묻다’가 그 세미나의 제목들이다.


 지금까지 7개 연구 성과물을 ‘내 고향 미래연구소 총서’로 출간하기도 했다. ‘제2의 평양, 화학공업 도시: 함흥시 투자이야기’(위영금 연구원·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박사과정), ‘한반도 물류 중심: 순천시(평안남도) 투자이야기’(홍성원 연구원·북한대학원대 박사과정), ‘동북아 철의 도시: 청진시 투자이야기’(김혁 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검은 보석의 땅: 은덕군 투자 이야기’(이혜란 연구원·성균관대 박사과정), ‘백두산 관광 활성화와 혜산시 개발’(엄현숙 연구원·북한대학원대 박사과정 수료), ‘온천 관광의 중심지 경성군 개발’(윤승비 연구원·경희대 박사과정), ‘개발 잠재력을 통해 본 해주시 비전’(곽명일 연구원·북한대학원대 박사과정 수료)이 그것이다.

                                                                              


 정부 부처나 민간단체의 의뢰로 작년에 ‘북한 건설기술 조사 분석’, ‘공간정보에 기초한 무산지역 민생인프라 개발전략’, ‘북한 동향분석’, ‘공간정보에 기초한 원산시 선교거점 구축’ 같은 연구 과제를 수행했고 올해 연구 과제도 정해졌다.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가 의뢰한 ‘북한 시장화 현황과 전망’을 비롯해 ‘광복 후 천주교 본당의 지형변화’, ‘북한지역 선교거점 연구’가 그것들이다. 자체 연구과제로는 ‘공간정보에 따른 혜산시 기초자료 축성’을 설정했다.


 2015년 말 현재 탈북민 출신 박사는 19명, 석사는 60명에 이른다. 김 소장은 이들이 북한 지역 연구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해 북한 인프라 구축과 관련된 연구의 구체성을 높이는 작업도 기획하고 있다. 여건이 호전되면 국제적인 북한 개발 프로그램도 적극 추진하고 싶어 한다.

 

극복해야 할 선입견들

 

  이 연구소는 올 들어 몇 가지 난관에 부딪쳤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발사에 따른 국제사회와 남한 자체의 잇단 대북 제재조치가 첫 번째다. 개성공단 폐쇄, 하산-라진 프로젝트 추진 보류를 비롯한 남북 협력 중단의 여파가 작지 않다. 북한 당국도 남북 간 모든 경제협력과 교류사업 합의가 무효라고 선언해 남북관계가 꽁꽁 얼어붙은 실정이다.

                                                                     

                                               <김병욱 북한개발연구소장>

  당장은 이러한 남북관계 냉각이 부정적인 영향을 낳을 수 있겠지만 이들은 결코 낙담하지는 않는다. 외려 이를 역량 축적의 기회로 삼겠다고 생각한다. ‘남북관계가 닫힐수록 연구소의 희소성이 큰 만큼’ 멀리 내다보고 연구 내공을 키워나갈 계획이다. 이에 따라 지난 3월 연구소의 올 1/4분기 정기 세미나로 ‘핵개발 유엔 제재 이후의 북한을 묻다’라는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열기도 했다.


 남한 정책 당국자와 오피니언 리더들의 인식도 극복해야 할 대상의 하나다. 통일이 되면 도시 인프라를 비롯한 북한의 모든 것을 완전히 뜯어 고쳐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그것이다. 탈북 연구자들이 북한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는데 그때의 기억을 살려 연구한다는 게 효용성이 있겠느냐는 편견도 그 가운데 하나다. 북한개발연구소가 실행하려는 연구자료 정도는 국가정보원에 다 있지 않겠느냐는 선입견도 마찬가지다. 거시정책을 연구하는 국토연구원과 차별화가 돼 있음에도 중복 연구를 하지 않느냐는 의구심도 산다.


  이 같은 복합적인 시각 때문에 한국연구재단에 신청해 놓은 2억 원의 연구지원자금도 결정이 나지 않고 있다고 김 소장은 판단한다. 김 소장은 ‘185 프로젝트’를 중장기적으로 국가차원에서 지원해 주기를 소망하고 있다. 한국에 온 지 14년째 됐지만 여전히 적응이 어려운 점은 남한사람들의 ‘립 서비스’다.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검토해 보겠다” “언제 한번 보자” “밥 한번 먹자”는 흔한 인사가 진정으로 도와주려는 것인지 여전히 헷갈리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의 표현은 직설적인 반면 남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다.

                                                                               


  연구원들은 재정 형편이 어려운 실정이지만 각계의 도움이 있어 용기를 잃지 않는다. 양봉진 전 현대자원개발 사장은 연구소를 무료로 임대해 주고 있다. 서울시 중구청에서는 각종 공과금을 대납해 주고 있어 큰 힘이 된다. 김태식 씨에스아이엔테크 사장은 수천만 원의 연구기금을 지원했다. 김 소장은 “아직 빈손에 가깝지만 믿음을 갖고 고향 개발의 길을 열어나가자”고 연구원들을 독려한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김 소장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연구소를 나오며 떠오른 성경 구절이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6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Subject--Building Knowledge Base for a ‘Miracle on the Taedong River’
Author/Position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s, Korea University
 
 The researchers at the North Korea Development Institute (NKDI) are preparing “gifts” for their hometowns that they have left behind in North Korea. They believe that they are paving the way to national unification through their research activities. They see their work as practical knowledge building as foundation for development by gathering and analyzing microeconomic data on North Korean regions.

 

 They have a solid dream. With their academic backgrounds and capabilities, these North Korean defectors believe they have the opportunities, resources, and energy needed to create a storehouse of knowledge to guide the economic reconstruction of their hometowns.

 

 A large sign greets visitors to the fourth-floor penthouse of a building on Chungmu-ro street in the Jung-gu district, central Seoul. This is home to the fledgling think tank named the North Korea Development Institute (NKDI). The sign’s message reads: “Research and development on North Korea is the best gift we can give to our hometowns we’ve left behind.” A blow-up photo of Cheonji, the crater lake at the top of Mt. Paektu, draws one’s eyes upon entering the office of the institute’s director, Kim Byung-wook. A Google map of Musan County, a coal mining town near the Tuman River along the North Korea-China border, hangs on the wall of an adjoining office. Musan is the hometown of Jeon Seung-chul, a North Korean defector, whose experience of adjusting to life in the South was made into a film, “The Journals of Musan,” in 2011.

 

Defector Intellectuals

 

 The NKDI was founded by a group of intellectuals who had defected from North Korea, in order to support the development of small and medium-sized cities in the North. Its founding was initiated by Kim Byung-wook, the first North Korean defector who has earned a doctoral degree in the South. The institute was registered with the Ministry of Strategy and Finance in December 2014, another first in the defector community, where most other organizations are registered with the Ministry of Unification. As befits a think tank, the NKDI boasts the most highly educated members among all defector groups.


  In late 2012, ten North Korean defectors met at Hanawon, the government-run settlement support center for North Korean refugees. They agreed to conduct research on development strategies for the North so that, upon unification, they could return to their hometowns and help their compatriots to enjoy the quality of life that they have come to experience in the South. The following year, they organized an academic club that consisted of defectors with master’s or doctoral degrees.


  They have a solid dream. With their academic backgrounds and capabilities, these North Korean defectors believe they have the opportunities, resources, and energy needed to create a storehouse of knowledge to guide the economic reconstruction of their hometowns. Just as the Korea Development Institute (KDI) played a key role in the making of the “Miracle on the Han River” in the 1960s and 70s, they intend to develop the NKDI as a think tank at the forefront of efforts to create a “Miracle on the Taedong River” in the North.


  “It’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defectors have so far been used merely as tools or resources for North Korean studies by South Korean academics. But it’s now necessary for us, defectors with more education, to take the initiative and conduct our own research,” Kim said, explaining his motivation. “We have the most accurate information on the North. We will put our heads together to make the NKDI a top-notch think tank as far as North Korean studies are concerned.”


  Kim’s wife, Kim Yeong-hee, is also a member of the NKDI research staff. She also serves as the chief North Korean economic studies researcher at the Korea Development Bank’s inter-Korean projects division. The Kims crossed the Tuman River with their two young children in August 2002. They had been marginalized by the hierarchical structure of North Korean society, where only the elite class can get ahead. Kim is a graduate of Pyongyang University of Mechanical Engineering, but he lived in Nampo, South Pyongan Province and Chongjin, North Hamgyong Province after being ousted from Pyongyang in the early 1990s, just because his family did not have an elite status and his relatives were known to live in China. “I decided to escape from the North for concerns about my children’s future rather than my own career,” Kim said.


  After settling down in Seoul, Kim and his wife both earned master’s degrees from the Graduate School of North Korean Studies at Kyungnam University and doctorates from Dongguk University’s Department of North Korean Studies. They were the first defector couple to receive PhDs on North Korean studies in South Korea.

 

‘Project 185’

 

 The NKDI is composed of 20 researchers--five with PhDs, 12 doctoral candidates, and three candidates for master’s degrees--13 of whom are women. Most of them are in their 40s and also have full-time or part-time jobs outside of the NKDI. They come to the institute on weekends for research activities or discussions, while also working as vice principals at alternative schools, teachers, or office workers. Their specialties range from economics and military studies to pedagogy, sociology, political science, and culture and arts. Only three of the staff, including Kim Byung-wook, work full time at the institute. Interestingly, a Japanese national lends support to the institute as an outside director.

 The NKDI is currently focusing on studying 185 “microregions,” which include 38 municipal districts and 147 counties throughout North Korea. It plans to launch 12 regional research teams, which will study the cities and provinces in these 185 regions, within this year.


 “It’s essential to narrow the regional gap between the two Koreas to achieve national unification,” Kim said. “To this end, we’re planning to gather basic geographic information that will be vital for the development of small and medium-sized cities in the North. For now, we will launch Project 185, a program to develop a spatial and geographic database for all of the 185 cities and counties. This database will provide vital fundamental data on which to work out development strategies for the North Korean regions before and after unification. For example, just as South Korea’s coal town of Jeongseon in Gangwon Province has been turned into a tourist destination, it’ll be possible to develop coal towns in the North in similar ways.”


 The gathering of basic data on North Korean cities and counties is an essential task, he says. Regional studies can be meaningful only when past, present, and future data about individual regions are available.


 “Our researchers aren’t doing research on their own hometowns simply out of academic curiosity,” Kim noted. “Our research is a means to show our persecuted compatriots living on the other side of the Demilitarized Zone what kind of life we are leading in South Korea. We also want the public to

know about what we are really doing.”

 

Achievements and Future Plans

 

 The NKDI has laid the foundation for the study of urgent issues by holding four seminars in cooperation with Kyungnam University’s Institute for Far Eastern Studies and the Korea Research Institute for Human Settlements (KRIHS) last year. The themes of the seminars were “Ways to gather fundamental data needed for the development of small and medium-sized cities in North Korea,” “Ways to build a database needed for the development of small and medium-sized cities in North Korea,” “Ways to develop small and medium-sized cities in North Korea,” and “How to promote infrastructure development for the residents in our hometowns.”

 Research results have been published in a series of seven volumes, titled “Research for the Future of Our Hometowns.” They are “Investment in Hamhung, a Second Pyongyang and a City of Chemical Industry” by Wi Yeong-geum, a doctoral student at the Graduate School of Politics and Policy, Kyonggi University; “Investment in Sunchon, South Pyongan Province as a Logistics Hub of the Korean Peninsula” by Hong Seong-won, a doctoral student at the 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Investment in Chongjin, a Hub of the Iron and Steel Industry in Northeast Asia” by Kim Hyeok, a doctoral candidate at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Investment in Undok County, a Land of Black Gold” by Lee Hye-ran, a doctoral student at Sungkyunkwan University; “Stimulating Tourism to Mt. Paektu and Development of Hyesan” by Eom Hyeon-suk, a researcher who has completed a doctoral course at the 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Development of Kyongsong County, a Hot Spring Tourism Hub” by Yun Seung-bi, a doctoral student at Kyung Hee University; and “A Vision for Haeju Seen through its Development Potential” by Kwak Myeong-il, a researcher who has completed a doctoral course at the University of North Korean Studies.


 The NKDI conducted research last year at the request of government agencies and private organizations under such themes as “Analysis of construction technologies in the North,” “Strategies for infrastructure development in Musan based on spatial information,” “Analysis of the current situation of the North,” and “Securing a beachhead for evangelization in Wonsan based on spatial information.” This year’s schedule is filled with various projects on subjects including “The present state and future of open markets in the North,” commissioned by the Presidential Committee for Unification Preparation, “Changes that occurred to the Catholic Church in the North after liberation,” and “Research on how to secure a beachhead for evangelization in the North.” In addition, the institute is also planning to gather basic data on Hyesan.


 As of late 2015, 19 North Korean defectors held doctoral degrees and another 60 had master’s degrees. Kim plans to add more substance to the institute’s research on the development of infrastructure in the North by encouraging these defector intellectuals to proactively engage in North Korea-related research. He also envisions international programs to support the development of the North, if things turn out well for the institute.

 

Hurdles to Overcome

 

 This year, the NKDI hit a few snags. First,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nd South Korea imposed sanctions on the North for its fourth nuclear test and long-range rocket launch. There have been huge repercussions from the suspension of inter-Korean cooperation projects, including the closing of the Kaesong Industrial Complex and halting of the Rajin?Khasan logistics project between the North and South Korea and Russia. Inter-Korean exchanges have been frozen, as the North Korean regime also declared all inter-Korean agreements on economic cooperation and exchange projects void.

 The stalled inter-Korean relations have created negative consequences for now, but the NKDI researchers are not demoralized. To the contrary, they regard the current situation as an opportunity for them to build up their own capabilities. They intend to strive for even higher standards, believing that the tense inter-Korean relations can make the knowledge accumulated by NKDI even more valuable in the future. To this end, the institute hosted an international symposium on the theme, “North Korea in the wake of the imposition of UN sanctions for its nuclear weapons development,” in March as its first-quarter seminar for this year.

 Biases and misunderstandings held by South Korean government officials and opinion leaders are huge hurdles that must be overcome. Typical misperceptions include that everything in the North, including its urban infrastructure, needs to be rebuilt after unification of the two Koreas; defector researchers are not qualified to conduct research on the North because they have been away from their homeland for many years; and the NKDI is only duplicating data already possessed by the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Furthermore, despite its clearly different areas of emphasis from the Korea Research Institute for Human Settlements, there are some who believe that the NKDI’s research projects overlap those of the KRIHS, a government-funded think tank that specializes in the study of macroeconomic policies.


  Kim believes that due to such widespread prejudices, no decision has yet been reached on the NKDI’s request to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for a research support fund of 200 million won. He now hopes that the government will provide medium and long-term support to Project 185.


 Although he has now lived in the South for 14 years, Kim still finds it difficult to determine whether South Koreans are merely paying lip service to his cause. He doesn’t know if they really intend to help him when they say, “Give me time to think what kind of help I can give you,” or “Let’s meet some time in the future,” or “Let’s have dinner together some day.” North Koreans, he points out, usually use straightforward expressions rather than communicate in a roundabout style as South Koreans often do.


 In spite of their persistent financial difficulties, NKDI researchers are gratified by the support they have received from various individuals. Yang Bong-jin, former president of Hyundai Energy and Resources, provides rent-free office space for their use. Seoul’s Jung-gu District Office is paying their utility bills. And Kim Tae-sik, president of CSIN Tech, has donated tens of millions of won to support their research. Kim Byung-wook lifts the spirits of the researchers by having everyone keep their focus on the big prize: “We’re now nearly empty­handed. But let’s pave the way for the development of our hometowns with unwavering determination.”


 “And though thy beginning was small, yet thy latter end should greatly increase” (Job 8:7). This hopeful verse from the Bible sprang to my mind as I was leaving Kim’s office.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김학순

  자유에 대한 열망으로, 또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 땅을 떠나 수많은 난관을 뚫고 남한으로 온 2만8000여 명에 달하는 탈북민들 가운데는 화가들도 더러 보인다. 탈북 화가들의 작품에는 떠나온 곳의 잔영(殘影)이 진하게 어른거린다.


 팝아티스트 선무 씨는 두 체제 사이에서 이데올로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화폭에 옮겼다. 그는 남한 생활 14년째를 맞지만, 아직도 적응이 쉽지 않다. ‘눈 감으면 북쪽, 눈 뜨면 남쪽’일 때가 많다.


 대표적인 탈북 화가들의 작품 중에는 얼핏 보면 북한 선전물로 오해하기 십상인 것도 적지 않다. 실제로 탈북 화가 ‘선무’(Sun Mu 線無·44) 씨는 그런 오해를 받아 경찰서에 가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2007년 서울 종로구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첫 번째 전시회 때였다. 느닷없이 한 경찰관이 갤러리에 들어섰다. “잠시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알고 보니 인근 주민과 관람객들이 “북한 찬양 일색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면서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2008년 부산 비엔날레에 참가했을 때는 김일성 초상화 때문에 작품이 철거되는 수모를 겪었다.

                                                                   

                                                     <탈북화가 선무 작품>


 또 다른 탈북화가 송벽(Song Byeok 46) 씨도 흡사한 경험을 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상가에 있는 화실에 걸린 그림에 김정일, 김정은 초상화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인근 어르신들이 신고해 국가정보원 직원이 다녀갔다. 이들은 이렇듯이 여전히 경계인(境界人)으로 살아가고 있다.

 

  압류된 통일 염원

 

  1998년 북한을 떠나 중국, 태국, 라오스 등 여러 동남아 국가를 거쳐 우여곡절 끝에 2002년 남한에 안착한 선무는 ‘탈북 화가 1호’로 불린다. 그러나 체제가 싫어 계획적으로 탈북한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에는 소년단으로 활동했으며, 미술대학을 3년 동안 다닌 것이 인연이 돼 군복무 중 선전물 담당 화가로 활동했다. 

 

  탈북은 우연히 이뤄졌다. 너무나 배가 고파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잠시 나와 온갖 일로 돈벌이를 하고 있던 도중에 북한 선거철이 다가왔다. 모든 인민이 참여해야만 하는 강제선거여서 행여 기권이라도 하면 정치범으로 몰려 수용소로 가야 하는데, 북·중 국경과 거리가 먼 고향 황해도까지 당장 돌아갈 방법이 막막해 아예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에서 접하게 된 남한 생활상에 마음이 흔들린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탈북화가 선무 작품>

 

 서울에 온 뒤 홍익대 미대에 입학해 대학원까지 마치고 전업 작가가 됐다. 휴전선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선무’라는 예명에는 ‘경계가 없다’는 포괄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그는 북한에 남아 있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피해를 줄까 봐 걱정돼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산다. 언제 어디를 가든 모자와 선글라스를 필수품으로 챙긴다.


 팝아티스트 선무의 작품을 관류하는 가장 큰 특징은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풍자다. 비판은 반어법으로 나타난다. <아디다스 입은 김정일>, <조선의 예수>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세상의 관심도 온통 북한에 대한 풍자와 역설에 초점이 맞춰지는 듯하다. 그는 그 동안 미국 뉴욕에서 두 번, 독일 베를린에서 두 번, 이스라엘 예루살렘, 노르웨이 오슬로, 호주 멜버른에서 각각 한 번씩 개인전을 열었다. 2016년에는 프랑스에서 그룹전을 열 계획이다. 서방 언론은 그에게 ‘얼굴 없는 화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탈북화가 선무 작품>

   

 2014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려던 개인전 실패 경험은 마냥 불안한 그의 신변과 남북한 대립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개관하는 날 중국 공안요원들이 전시관 입구를 봉쇄하여 개막식은 열리지 못했다. 대형 플래카드와 전시작품도 철거당했다. 그때 압류된 그림은 아직도 베이징에 남아 있다. 그는 붉은색, 흰색, 푸른색 등 북핵 문제 6자회담 참가국들의 국기에 포함된 색을 주제로 한 이 전시회에서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작품들을 선보일 계획이었다.

  당시 그는 다시 북한으로 송환되는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을 졸여야 했다. “아내와 두 딸을 두고 잡혀갈까 봐 정말 두려웠습니다.” 그는 지금 중국에서 처음 만난 중국동포 출신 아내와 행복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다큐멘터리 <나는 선무다>

 

 선무 작가의 최근 그림에는 남북한의 모습이나 사람, 풍물이 한 화폭에 나란히 등장하는 사례가 많다. 평화·화합·공존을 염원하는 그의 일관된 마음이 담겼다. 그의 작품은 사회주의 프로파간다 예술을 패러디한 팝아트가 많지만, 정치적 목적을 최대한 배제한 채 예술이 가진 보편성을 토대로 분단의 특수성과 북한의 현실을 바라보려 한다. 북한에서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됐던 게 가슴 아팠던 만큼 또 다른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선무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자본주의적 접근이 아닌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두 체제가 지닌 이데올로기의 혼란을 겪으면서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화폭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는 남한 생활 14년째를 맞지만, 아직도 적응이 쉽지 않다. ‘눈 감으면 북쪽, 눈 뜨면 남쪽’일 때가 많다.

 2015년 9월 제7회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나는 선무다’( I Am Sun Mu)>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를 한눈에 어림할 수 있게 해준다. 미국의 애덤 쇼버그(30) 감독이 그의 인생과 작품세계를 조명한 87분짜리 다큐멘터리 영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경계인인 그의 꿈은 늘 열린 세계로 향해 있다. “뉴욕에 갔을 때 이 세상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중동, 아프리카, 중남미, 유럽 여러 나라들이 존재한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삶에 대한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름처럼 그의 예술철학 역시 ‘경계 없음’에 방점이 찍혀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탈북화가 송벽 작품>

 

  북한 개방을 촉구하는 <벗어라>

 

 송벽 씨도 팝아티스트에 속하며 작품 내용이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과 풍자라는 점에서는 선무 화가와 공통점을 보인다. 공교롭게도 그의 고향도 선무와 같은 황해도다. 송벽이라는 이름 역시 예명이다. 그는 선무와 달리 얼굴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활동을 한다. 그는 “팝아트 식으로 재미있게 그리되 철학적 에세이를 해학적 표현으로 담는다”고 자신의 화풍을 설명한다.


 배우 마릴린 먼로가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바람에 날리는 스커트를 붙잡는 유명한 장면이 담긴 영화 <7년만의 외출> 포스터에서 얼굴만 김정일로 바꿔 북한사회를 감추려는 것을 패러디한 그림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 작품 제목 <벗어라>에는 북한의 개방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담겼다.


 그의 작품에는 비둘기와 나비도 자주 등장한다. “북한 인민들 마음 한구석에는 자유를 꿈꾸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비둘기와 나비가 많이 포함됐습니다.”

                                                                                          

                                                                  <작품을 그리는 송벽 화가>


 북한에서 7년 간 선전포스터를 그렸던 송벽이 탈북한 동기는 자유보다 배고픔에서 벗어나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2000년 8월 첫 탈북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함께 나섰던 아버지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두만강 급류에 휩쓸려 익사하고 자신은 경비대에 붙잡혔다.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을 하다 화가에게 생명 같은 오른손 검지 한마디를 잃었다. 그는 풀려난 뒤 2001년에 다시 탈출을 기도해 중국을 거쳐 2002년 남한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2005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2년 후 그는 막내 여동생을 탈북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2007년 공주사범대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홍익대 대학원에 진학해 동양화를 전공했다. 그러는 동안 생계를 위해 막일꾼으로 나서고 이삿짐센터에서도 일했다.

                                                                                         

                                                        <탈북화가 송벽과 작품 김정은>


 2011년 ‘영원한 탈출, 영원한 자유’라는 제목으로 서울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연데 이어, 지금까지 워싱턴과 애틀랜타 등 미국에서만 세 번 전시회를 열었다. 2012년 워싱턴에서 연 전시회는 로버트 킹 북한인권특사,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 같은 주요 인사들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CNN, BBC, NHK 등 해외의 주요 언론도 큰 관심을 드러냈다. 언론보도로 유명해진 그는 미국에서 여러 대학의 요청으로 강연도 했다.


 송 작가는 2015년 10월 독일 통일 25주년 축하 행사 기간에 <김정은과 마릴린 먼로> 등의 작품으로 프랑크푸르트 초대전을 개최했다. 2016년 9월에는 과거 동서독 국경 부근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도 잡혀 있다.


 그는 한국 미술이 충격적으로 다가와 한동안 큰 거부감을 가졌다. 추상화를 보고 ‘어떻게 저런 것이 작품이 될까’ ‘이상한 그림이 왜 저렇게 비싼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는 북한 전문 작가로 머물고 싶지는 않다. 북한 인민뿐 아니라 굶주림과 압제에 시달리는 전 세계인들에게 평화 희망을 주고 그들의 꿈을 키워주는 화가가 되고 싶다. 그의 화실 책상 앞에 써 붙여 놓은 ‘현실에 예속되지 말고 세상을 향한 도전, 꾸준히 멈추지 말고 지그시 한길을 가라’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독신으로 사는 그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이따금 밥을 먹는 시간도 잊어버린다.

                                                               

                                               <탈북화가 강진명과 호랑이 그림>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전시회

 

 탈북 화가 중 가장 연장자였던 강진명 작가는 병마의 불운에 울어야 했다. 1999년 북한을 탈출해 10년 만에 한국에 왔지만 이미 건강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였다. 그 역시 북한에서 선전화를 그리다가 중국 칭다오로 탈출해 조선족으로 위장한 뒤 한국인이 운영하는 액세서리 공장에서 일했다. 평양에서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인민무력부 현역 창작가와 대학 교원(교수)으로 활동하던 엘리트 화가였다.


 그는 2010년 2월 남북한의 자연을 담은 70여점의 그림으로 첫 개인전을 서울 인사동에서 열었으나, 그 다음 달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요즘으로선 젊은 57세였다. 그는 항암제 치료를 받으면서도 전시를 위해 밤낮으로 작품 활동에 매달렸다. 그는 “통일이 될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며 늘 안타까워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털어놓곤 했다. “제가 창작활동을 시작했던 1970~80년대에는 북한이 경제도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대우도 괜찮았고 살아가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자유가 없었어요. 예술가에게 창작의 자유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죠.”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던 전시회의 주제도 ‘꿈에 그리던 자유를 찾아’였다. <자유의 파도>라는 유화 작품은 그가 자유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절절함이 묻어났다.


 북의 보복이 두려워 한동안 본명 대신 ‘강호’라는 가명을 써야 했던 그는 남한에서 주로 남북한의 유명 산을 주제로 산수화를 그렸다. 그의 지론에는 국경 없는 남북에 대한 희원(希願)이 짙게 깔려 있다. “사상과 이념을 초월해 남북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분야는 문화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을 통해 남북이 공통점을 찾아 접근해 나간다면 평화통일의 그날을 좀 더 앞당길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6년 봄호에 실린 것입니다.

Defector Artists Dream of a Borderless Korea

 Kim Hak-soon /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More than 28,000 North Korean defectors have settled in the South after fleeing their home country in a quest for freedom or escape from hunger. Among them are not a few people who had studied art or worked as artists in the North. As the conflict between the two Koreas shows no signs of abating, they express through their work their personal memories of their hometowns and yearning for reunification.

 

  To fully understand Sun Mu’s works, one needs to get beyond simplistic interpretation. Although 14 years have passed since he first arrived in the South, he still finds it difficult to adapt to various aspects of his new homeland. Many a time, he still lives in the North in his dreams, only to awaken and find himself at a loss in his real-life circumstances in the South.

 

  At first glance, many of the works by defector artists from North Korea express overt propaganda messages, though the implications are never the same as would be the case if they were back in the North. In fact, Sun Mu, a painter in his mid-forties, had actually experienced the consequences of such a misinterpretation of his art. In 2007, he held the first exhibition of his artworks in South Korea at a gallery in Jongno District, central Seoul.

 

  One day, a police officer suddenly burst in and said, “Would you please come with me for some questioning?” He was then escorted to the police station. It turned out that local residents and gallery visitors had reported to the police that his exhibition included “paintings extolling North Korea” ? a criminal violation of the country’s national security law. During the Busan Biennale in 2008, his works on display were removed because they depicted the face of Kim Il-sung.


  Song Byeok, another defector artist from the North, has gone through a similar experience. His paintings, including works depicting Kim Jong-il and Kim Jong-un, were kept at his studio in a shopping mall in Gangnam, southern Seoul. Some elderly men who had seen these works complained to the authorities, which led to a visit by a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 agent.

 

No Lines, No Borders

 

  Sun Mu slipped out of North Korea in 1998 and arrived in South Korea in 2002, after roaming around China, Thailand, and Laos. He is known as the first North Korean defector artist in the South. Unlike others, he did not flee the North because he disliked the regime. When young, he was a member of the Korean Youth Corps.

 

   He attended an art college for three years and served as a propaganda artist in the army. He fled the North by happenstance. He was temporarily working odd jobs for a living in China, when an election day in the North approached. It is mandatory for all citizens in the North to participate in every election. Anyone who fails to vote can be condemned as a political offender and sent to a concentration camp.

 

  But he realized it would be impossible for him to return to his home in Hwanghae Province, a region far from the North Korea-China border, in time for the election. Then and there, he decided not to return to the North. In all likelihood, this idea might have been percolating in his mind; he had been impressed by the affluent lifestyle in the South, which he came to learn about in China.


After arriving in Seoul, he enrolled in the College of Fine Arts at Hongik University, where he went on to complete his graduate studies, and became a professional artist. He adopted the pseudonym Sun Mu (“No Line”) as an expression of his ardent hope that the border between the two Koreas would one day disappear. He never uses his real name or reveals his face in public for fear that his life here would cause harm to his family members in the North.


  Sun Mu’s works are characterized by incisive criticism of the North Korean leadership and system. Bright and deceptively cheerful in a kind of pop art style that incorporates elements of North Korean propaganda art, his paintings are implicitly ? and undoubtedly ? subversive, as exemplified by “Kim Jong-il in Adidas” and “A Jesus in North Korea.”


  His sardonic depictions of North Korean reality have caught the attention of international art communities, which has enabled him to stage several solo exhibitions abroad ? two in New York, two in Berlin, and one each in Jerusalem, Oslo, and Melbourne. He plans to participate in a group exhibition in France this year. Western media have introduced him as a “faceless artist,” taking note of his works lampooning the leaders he was raised to worship as gods.

 

‘I Am Sun Mu’


  In many of Sun Mu’s recent works, aspects of life in both Koreas, of people and things or events, are depicted side by side, as parallels. This reflects his fervent desire to help bring about peace, reconciliation, and coexistence. He takes a look at the peculiar circumstances of national division and the reality in the North through the lens of artistic inquiry, while keeping a distance from political propaganda. He doesn’t want to fall victim to ideology ever again, he says.


  To fully understand Sun Mu’s works, one needs to get beyond simplistic interpretation. This is because he expresses his personal experiences and emotions on canvas while suffering from ideological confusion between two political systems that are poles apart. Although 14 years have passed since he first arrived in the South, he still finds it difficult to adapt to various aspects of his new homeland. Many a time, he still lives in the North in his dreams, only to awaken and find himself at a loss in his real-life circumstances in the South.


  The documentary film “I Am Sun Mu,” which was shown as the opening work for the 7th DMZ International Documentary Film Festival, held in September 2015, offers a glimpse of the kind of person and artist that he is. The 87-minute documentary, produced by American filmmaker Adam Sjoberg, sheds light on his life and work, and what he wants to bring about through art.


  The film shows scenes from his aborted exhibition that had been scheduled to be held at a gallery in suburban Beijing in 2014. On the opening day, the Chinese police blocked people from entering the gallery. His artworks, together with a large ad banner, were removed and confiscated, and are still stranded in Beijing. He had intended to convey the Korean people’s desire for national reunification through works rendered mainly in red, white, and blue ? the colors of the national flags of the six member countries of the stalled negotiations for North Korea’s nuclear disarmament.


  “I wasn’t going to attend the opening anyway for security reasons. When my exhibition was called off, I was really afraid that I might be taken away, leaving my wife and two daughters behind,” he said.
In spite of many difficulties that he encounters as a marginal man, Sun Mu’s eyes are always looking out toward an open world. “When I visited New York for my exhibition, I realized that there are numerous different countries, including those in the Middle East, Africa, Latin America, and Europe, as well as the two Koreas, in the world. I want to create works about the lives of people in those lands,” he said.

 

‘Take Off Your Clothes’


  Song Byeok is another artist whose works satirize the North Korean regime. Like Sun Mu, Song hails from Hwanghae Province. He also uses an alias. But unlike Sun Mu, Song engages openly in public activities, making his face relatively well known.


  One of Song’s best-known works is a parody of Kim Jong-il, whose face is superimposed on Marilyn Monroe’s body to replicate the iconic image of her standing over a subway vent, holding down her billowing skirt, in a scene from the 1955 American film “The Seven Year Itch.” Song titled his work “Take Off Your Clothes,” as a message to urge the North to open up.


  Pigeons and butterflies often appear in Song’s works, symbolizing the “dreams for freedom hidden deep in the hearts of the North Korean people,” as he explains.


  Song painted propaganda posters in North Korea for seven years before fleeing the country to escape from its widespread famine. His first attempt to escape ended in failure in August 2000, when his father drowned in the swift currents of the Tumen River, swollen by heavy rains. Song was apprehended by a border guard. He was sent to a concentration camp, where he lost the tip of the forefinger on his right hand, a vital asset for an artist. After his release, he made another attempt in 2001. He arrived in South Korea via China in 2002. He heard the news of his mother’s death in 2005. Two years later, he succeeded in helping his youngest sister escape the North.


  After graduating from the Arts Education Department of Gongju National University in 2007, he enrolled in the graduate school of Hongik University, where he studied Oriental painting. He took on odd jobs for a living, once working for a moving company.


  In 2011, he held his first solo exhibition, entitled “Everlasting Escape, Everlasting Freedom,” in Insa-dong, Seoul. He has presented three exhibitions in the United States. His exhibition in Washington, D.C. in 2012 was attended by a number of famous figures, such as Robert King, the U.S. special envoy for North Korean human rights issues, and Kathleen Stephens, former U.S. ambassador to Seoul. The exhibition was covered by major global media networks, like CNN, BBC, and NHK. He has been invited to deliver lectures at various universities across the United States.


  Song also held an invitational exhibition in Frankfurt in October 2015, during an event to celebrate the 25th anniversary of German reunification, where “Kim Jong-un and Marilyn Monroe” attracted media attention, among his other works. He plans to present another exhibition near the former East-West German border in September this year.


  Song says he doesn’t merely want to be known as an artist specializing in North Korean themes. He hopes his art can help people around the world, including those in North Korea, who are suffering from hunger and oppression, to hold onto their dreams of peace and happiness. A handwritten note on his studio desk tells of his vision: “Don’t subjugate yourself to reality; don’t stop making challenges but go your own way, patiently and persistently.”

 

 Common Ground through the Arts


  Kang Jin-myung, the oldest among the North Korean artists who have settled in the South, was already in poor health when he arrived in Seoul 10 years after he fled the North in 1999. He had long painted propaganda posters for the North Korean regime. After escaping to Qingdao, he worked at an accessory plant operated by a South Korean businessman, by passing himself off as a Korean-Chinese. He was an accomplished artist who had graduated from an art college in Pyongyang and worked as an artist at the Ministry of the People’s Armed Forces, and was a professor as well.


  Kang held his first solo exhibition in Insa-dong, Seoul, in February 2010, featuring some 70 artworks that depicted natural landscapes of the two Koreas. But he died of liver cancer the following month, at the age of 57. He had worked hard day and night to prepare for the exhibition, while undergoing treatment for cancer. He often lamented, “I want to dedicate myself to art until our nation is reunified, but my body is too weak to hold out.”


  “Back in the North,” he said, “the economy was good during the 1970s and 80s when I began my career as an artist. I received a handsome pay and life wasn’t so tough. But there was no freedom. For an artist, having no creative freedom was tremendously painful.”


  The theme of his first and last exhibition was “In Search of the Freedom I Dreamed Of.” His oil painting “Waves of Freedom” testifies to how desperately he craved freedom. He lived under an alias, Kang Ho, for quite a while to avoid retaliation by the North.


  Kang’s words reflect his profound desire to see a reunified Korea: “Culture and arts are where the two Koreas can become one, transcending ideologies. I believe we can achieve peaceful reunification a bit earlier if both sides try to approach each other by finding a common ground in the arts.”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김학순

 

 힘겨운 탈북 과정을 거쳐 남한으로 왔으나 제도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다시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탈북 청소년들, 그들의 사회 부적응은 단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커다란 숙제이다. 정서적 안정과 사회적응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을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려는 대안학교들의 노력이 돋보인다.

 

 북한 이탈 청소년들을 위한 남한 유일의 정규 학교인 한겨레중고등학교. 이 학교의 영어 시간은 마치 국어 수업 같다. 학생들이 선생님의 한국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몇 번씩 다시 묻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북한에서 쓰던 말과 남한 말이 서로 달라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한다.


 이를테면 남한의 ‘볶음밥’은 북한에서는 ‘기름밥’이다. ‘양계장’은 ‘닭공장’, ‘주차장’은 ‘차마당’, ‘문장’은 ‘글토막’이어서 처음 들으면 무슨 뜻인지 선뜻 알기 어렵다. 아예 의미가 다른 말도 있다. 남한의 ‘오징어’를 북한에서는 ‘낙지’라고 하고 남한의 ‘낙지’를 ‘서해낙지’라고 한다. 북한 출신 학생들은 ‘원피스’를 ‘나리옷’, ‘X-레이’를 ‘뢴트켄’이라고 한다. 남한이 영어를 제1 외국어로 배우고 한자어가 많은 것과 달리, 북한은 지난날 제1 외국어였던 러시아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데다 외래어도 순우리말로 만들어 쓰기 때문이다.

                                                                          

 

 힘겨운 언어의 장벽, 그리고 정서적 불안정

                 

 현재 남한과 북한은 무려 30퍼센트 가량 다른 낱말을 사용한다고 곽종문(郭鐘文) 교장은 설명한다. 그래서 학교 자료실 벽에는 남북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되는 낱말을 표로 만들어 붙여 놓았다. 남북 언어 차이를 완화하는 방안으로 교내방송을 통한 표준어 교육, 우리말 겨루기 대회, 아침 30분 독서운동을 실시한다.


  이 학교에서 언어 소통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는 학생들의 심리치료와 정서적 안정이다. 목숨을 건 탈북 과정에서 겪은 온갖 고난과 아픔은 쉽게 치유하기 힘든 숙제다. 2013년 탈북해 한국에 온 지 6개월도 채 안된 정광민(鄭光民 19)은 부모님과 함께 탈북하다 부모님만 잡혀서 교도소에 갔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부모님 생각에 눈물 흘린다. 그나마 2009년 한국에 먼저 온 누나가 이따금 보내 주는 간식거리를 친구들과 나누어 먹는 것이 큰 즐거움이다.


  김경미(金京美) 마음수업 교사는 ‘참 나를 찾아서’라는 명상·심리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이 안정감을 찾도록 돕는다. 그는 학생들에게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김용배(金容培) 교사는 “학생들이 고민을 많이 안고 산다”면서 “그들이 고립되고 외로운 존재만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시키려 노력한다”고 말한다. 모든 교사가 심리치료 과정을 이수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학생들이 빠른 시간 안에 심리적 안정감을 찾으려면 최고의 존중과 배려를 해야 한다고 신호래(申虎來) 교감은 설명한다.

                                                                      

                                                 <한겨레중고등학교 전경>

 

 한겨레중고교, 탈북 청소년을 위한 남한 유일의 정규학교

 

  경기도 안성시에 자리한 한겨레중고교는 북한 이탈 청소년들이 탈북 과정에서 받은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고 남한 사회 적응력을 키울 목적으로 원불교재단이 2006년 설립했다. 이 학교의 교육과정 편제는 일반학교와 다르다. 1단계로 심리·정서적 안정찾기, 기본 학습태도 형성하기, 정규학교 체계에 익숙하기, 남한사회 적응력 향상하기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 부분에 진전이 있으면, 국어·영어·수학 등 기초학습력 향상, 사회·과학·음악·미술·체육 과목을 통한 사회문화 적응력 키우기에 들어간다.


 이 학교 교과과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방과후 직업교육이다. 제과·제빵 기술, 조리 실습, 피부 미용, 네일아트, 메이크업, 지게차·굴착기 등 중장비, 바리스타, 컴퓨터 등 모두 15가지 분야의 교육을 통해 1인 1자격증을 얻도록 한다. 2014년엔 102명이 지게차 자격증을 취득했다.

 

  직업교육을 위해 모든 교사들이 전공과목 이외에 두세 개씩 자격증을 땄다. 도덕 교사가 지게차 운전, 영어 선생님이 바리스타 기술을 전수한다. 취업이 불확실한 4년제 대학 진학보다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취업하거나, 취업에 유리한 전문대 진학을 권장한다.

                                                                                        


  이 학교에서는 학년이나 학급 개념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외부 봉사활동과 체험학습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남한 사회에 적응해 가도록 노력한다. 외부 자원봉사자들의 수업, 함께 어울리는 프로그램도 학생들의 사회 적응에 큰 도움이 된다.

 

  지휘자 금난새의 음악 지도, 작가 안도현(安度眩)의 글쓰기 프로그램은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학생들의 방과 후 학생자치활동도 매우 활발하다. 외부활동 가운데 분단 현장과 독도 방문, 산업 현장 견학, 직업 체험, 문화 체험, 국토사랑 프로그램 같은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한겨레학교는 중·고등학교이지만 사실상 13~24세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초등학교 과정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교육하고, 정규학교로 전학시키는 디딤돌학교(전환기학교) 역할을 한다. 200여 명에 달하는 전교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학생의 20퍼센트는 부모가 없으며, 양친이 있는 학생은 13퍼센트에 불과하다. 어머니만 있는 경우도 흔하다.


 “좋은 기숙사와 교사들의 정성어린 지도가 있어 부모들이 안심한다”고 곽종원 교장이 귀띔한다. 학교시설도 일반중고교 못지않게 뛰어나다. 한 방에 3~4명이 살면서 학교식당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제외하고는 세탁과 청소 등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한다.


  한겨레중고등학교보다 훨씬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탈북청소년을 교육하는 비정규 대안학교도 적지 않다. 공식 통계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대안학교 7곳, 방과후 기숙형 학교 26군데가 있다. 금강학교나 우리들학교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금강학교 음악수업>

 

 북한 이탈 선생님들이 이끄는 금강학교

 

  서울 구로구에 자리한 금강학교는 탈북자인 주명화(朱明花) 교장이 운영하는 기숙형 대안 초등학교다. 주 교장은 북한에서 중등학교 문학교사로 일하다 2008년 남한에 왔다. 2013년에 문을 연 금강학교는 교사들이 모두 북한 출신 여성이다. 전교생이 34명이며 전국에 흩어져 일하는 탈북 부모, 주로 어머니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맡아 키운다. 초등학생 20명과 중학생 5명, 대안학교 학생 9명인데 편모 가정 학생이 80퍼센트에 이른다.


  이 학교 역시 아이들의 남한 사회 적응을 위한 심리치료에 큰 비중을 둔다. 색채심리프로그램을 통해 심리적 불안감을 치유하고 사회적응력 향상과 자존감 회복을 돕는다.


  학생들은 초등학교 과정을 배우지만, 즐겁게 서로 어울리는 프로그램이 많다. 하나음악재단이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같은 악기를 제공하고 강사까지 파견해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 덕분에 올 여름에는 합창단이 ‘나라사랑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주 교장은 “실험실이 없는 것을 제외하면 아쉬운 대로 모든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컴퓨터실은 구로구청이 설치해 주었다.


  주 교장은 “사명감을 가진 탈북 교사들이 힘든 여건 속에서도 어린이들을 하루속히 남한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은퇴한 초등학교 교사, 대학 한국어학당에 다니는 원어민 영어교사 등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주고 있다. 삼성꿈나무장학재단과 영주양행도 대표적인 후원기관이다. 주 교장은 “각계의 도움으로 이어가고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이라고 애로사항을 털어놓았다. 연간 예산이라야 1억 5천여만 원이 고작이다.

                                                                 

                                            <금강학교 후원자들과 주명화 교장(가운데)>

탈북청년 대안학교, 우리들학교

 

  서울 관악구에 있는 우리들학교는 다른 곳과는 차별된 탈북청년 대안학교다. 우리들학교는 초중고교 과정을 모두 가르치지만, 스무 살이 넘은 청년들이 주를 이룬다. 금강학교 학생 일부도 받아 낮 동안 교육하고 밤에는 돌려보낸다. 대학 시절부터 18년째 탈북자 지원 활동을 하는 30대 후반의 윤동주(尹東柱) 교장이 2010년 설립했다. 윤 교장은 북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세 들어 있던 건물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현재 26명의 학생이 자그마한 건물 4층에 자리잡은 교실들에서 공부한다. 학교라지만 8~12개의 책상이 놓인 작은 교실 몇 개가 전부다. 얼마 전 스물여덟 살 청년이 초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들은 각자 수준에 맞게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합격 후에는 정규 상급학교로 진학한다. 2013년 3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지난해 4명, 올해는 12명이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평생 애프터서비스 개념으로 교육한다.


  정규 수업은 오전 9시에 시작해 오후 3시 30분에 마치지만, 오후 6시까지 예체능과 자율학습을 진행한다. 40~50대 상근직 교사 5명, 포항공대 출신, 독일 유학파, 은퇴한 70대 교사 등 30여 명의 자원봉사 교사들이 강한 사명감으로 학생들을 교육한다.


  학교에서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점심, 저녁식사를 제공한다. 그런 한편 학생들에게는 봉사활동을 의무화한다.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소록도 한센인 마을 방문 봉사도 한다. 2년째 음악회와 미술전시회를 겸한 투원(To-one) 페스티벌을 여는 것은 남북 학생들이 하나가 되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2016년이면 한겨레중고등학교가 설립된 지 10주년을 맞는다. 개교할 당시 학교 설립에 극력 반대하던 인근 주민들도 이젠 협조적으로 변했다. 졸업생들은 학교를 고향집처럼 생각한다. 졸업생들이 훗날 남북한 통일 인력이 되도록 육성하는 것도 학교의 목표 가운데 하나다. 설립 초부터 한겨레중고등학교를 이끌어 온 곽종문 교장은 “통일 후에도 언어 통일과 사회통합이 가장 어려운 과제가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5년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First, Speak the Same Language Alternative Schools Help Young Defectors Adapt to New Home 
  Kim Hak-soon /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Young North Korean defectors who arrive in South Korea after an arduous journey hope to enjoy their new-found freedom. However, many of them are forced to live in a world of their own, unable to adapt to the unfamiliar environment in the South. Their failure to adjust to South Korean society is not simply their own problem, but a serious matter that all of society should help to address. Under these circumstances, alternative schools make efforts to help these youngsters develop a stable emotional outlook and adapt to their new home.


 The curriculum at this school is different from that of regular schools. Above all, many classes are focused on helping students to develop psychological and emotional stability, fit into the South Korean educational system, and improve their ability to adapt to their new life.

 

 Hangyeore High School is the only regular secondary school for adolescent North Korean defectors in South Korea. Korean language classes at this school are much like foreign language classes. Students often cannot understand their teachers’ Korean properly, so they ask the same questions again and again. Many students complain that they have difficulty understanding lessons because North and South Koreans use different words for the same things in many cases.


 For example, South Koreans call fried rice “bokkeumbap”; it is “gireumbap” (oiled rice) in North Korea. The South Korean word for chicken farm is “yanggyejang” but to a North Korean, it is “dakgongjang” (chicken factory). In South Korea, a parking lot is “juchajang;” but North Koreans say “chamadang” (car yard). Instead of the South Korean word “munjang” (sentence), North Koreans use “geultomak” (group of words). People from one side find it difficult to understand the other side’s words. They may speak the same language, but their vocabularies have diverged. Russian used to be the first foreign language for North Korean students and North Koreans seldom adopt foreign words as they are, but use Korean equivalents. South Korean students learn English as their first foreign language and are familiar with many Chinese words.

 

Language Barrier, Emotional Instability

 

 Currently, about 30 percent of words used by people on either side of the divided peninsula are quite unfamiliar to the other side, says Hangyeore principal Kwak Jong-moon. For this reason, each classroom displays a chart of major Korean words that are used differently by each side. In an effort to narrow the language gap, Hangyeore offers a standard South Korean language instruction program through its broadcast system, and conducts a 30-minute reading time every morning as well as Hangeul contests.


  No less important to the school is to provide the students with psychological support so that they can acquire emotional stability. It is difficult for the young defectors to overcome the suffering and hardship that they experienced during their escape from the North at the risk of their lives. Chung Kwang-min, a 19-year-old student who fled the North in 2013, has been in South Korea for about six months. He escaped with his parents, but they were both caught by North Korean border guards and sent to prison. Whenever he is alone, the boy sheds tears thinking of his parents. The only joy he has is to share the snacks that he gets from his older sister with his friends. His sister arrived in the South in 2009.


 Kim Kyung-mi, a meditation teacher, helps the students to develop emotional stability through meditation and psychotherapy programs under the theme “In Search of the Real Me.” She advises the students: “Value yourselves above anything else.” “Students have a lot of worries,” another teacher, Kim Yong-bae, says. “I’m trying to help them understand that they’re not quite as isolated and lonely as they think.” For this reason, all teachers receive training in psychological therapies. To help the students gain psychological stability as quickly as possible, it is important to respect them and care for them to the utmost extent, Shin Ho-rae, vice principal of Hangyeore, pointed out.

Hangyeore: The Only Regular School for Adolescent Defectors

 

 Hangyeore High School, located in Anseong, Gyeonggi Province, was established by the Won Buddhism Foundation in 2006 to help adolescent North Korean defectors overcome the emotional hardships they had suffered in the process of escaping from the North and adapt to South Korean society. The curriculum at this school is different from that of regular schools. Above all, many classes are focused on helping students to develop psychological and emotional stability, fit into the South Korean educational system, and improve their ability to adapt to their new life. As they progress in these classes, the students receive instruction to improve their Korean proficiency, along with English and math skills, and socio-cultural adaptability through social studies, science, music, arts, and physical education.


  In particular, this school offers a wide array of after-school vocational training courses that can lead to license qualification in 15 vocational fields, including baking, cooking, skin care, nail art, makeup, operation of heavy equipment (like forklift and backhoe), barista, and computer servicing. In 2014, a total of 102 students qualified for forklift operator licenses. Teachers themselves have undergone vocational training in addition to the regular subject that they teach; all teachers hold two or three professional licenses or certificates. An ethics teacher gives forklift training and an English teacher conducts barista courses. The students are encouraged to find jobs or enter a two- or three-year junior college after graduation, rather than pursuing degrees at four-year universities that might not lead to guaranteed employment.


  Classroom instruction and academic progression are not very important at this school. The students are trained to adapt naturally to South Korean society through their participation in volunteer and hands-on activities. Classes by volunteer teachers are also of great help to them. For example, workshops and lessons given by the renowned conductor Keum Nan-sae and the well-known poet Ahn Do-hyun were highly appreciated. Students also engage in after-school club activities with much enthusiasm. Through a variety of out-of-school activities, such as visits to the demilitarized zone, the easternmost islets of Dokdo, and factories, as well as hands-on work experiences, cultural immersion, reforestation and cross-country walking programs, students are exposed to diverse aspects of South Korean society, culture, and everyday life.
Hangyeore offers middle and high school programs. But in fact, it serves as a stepping-stone school that offers primary to secondary school programs for young North Korean defectors, aged 13 to 24, so that they can transfer to regular schools. All of the 200 or so students live at the school dormitory. About 20 percent of them have no parents and only 13 percent have both parents. Many have only their mother.


“Parents feel assured because of the good dorm and good guidance by teachers,” Kwak Jong-moon, the Hangyeore principal, said. The school’s facilities are as good as those at regular schools. Three to four students share a room and do their own laundry and cleaning; meals are provided by the school cafeteria.
Most students at other alternative schools for young defectors are in much less comfortable circumstances than those at Hangyeore. There is no way to know precisely how many such schools there are due to a lack of official statistics. However, it is known that there are at least seven alternative schools and 26 boarding schools, including Kumkang School and Wooridul School.

 

Kumkang: A School Where Defectors Teach

 

 Kumkang School in Guro District, southwestern Seoul, is an alternative elementary boarding school operated by Ju Myong-hwa, the principal, who is herself a defector. Ju arrived in South Korea in 2008. In the North she had worked as a literature teacher at a secondary school. All teachers at Kumkang School, which opened in 2013, are women from the North. It cares for 34 students who are entrusted by their parents, their mothers in particular, who are working across the country. The enrollment currently includes 20 in primary school, five in middle school, and nine in alternative school programs. Eighty percent of the students have only a single parent, their mothers.

  This school also focuses on offering psychological support programs to enable the students to adapt to South Korean society. It helps them heal their psychological wounds, improve their social adaptability, and restore their self-esteem through “color psychology” programs.


  The students mainly study primary school subjects, but also participate in a variety of after-class programs. The Hana Music Foundation has donated musical instruments like violins, cellos, and pianos, and even dispatches teachers. As a result, the school’s chorus gave a concert, with a love-of-country theme, this past summer. Ju said, “We offer as many kinds of education experiences as possible, except that we don’t have a science lab.” The school’s computer room has been provided by the Guro District Office.


  The school is being helped by many volunteers, including retired elementary school teachers and native English speakers. Samsung Dream Scholarship Foundation and Young’s Corporation are among the school’s key supporters. “We’re making do with our supporters’ help. But the biggest problem is money after all,” Ju said. The school’s annual budget amounts to a mere 150 million won.

 

Wooridul: An Alternative School for Young Defectors

 

 Wooridul School in Gwanak District, also in southwestern Seoul, is another alternative school for young defectors. It provides primary and secondary school courses, but most of its students are aged over 20. The school also receives some students from Kumkang School, who study here during the day then return to their boarding school in the evening. Wooridul was founded in 2010 by its principal Yoon Dong-joo, a man in his late 30s who has supported defectors for 18 years since he was still in college. The school was once evicted from a building for teaching young children from the North.


  A total of 26 students are currently studying in classrooms on the fourth floor of a small building. The school is so small that it has only a few classrooms, each with only eight to 12 desks. Sometime ago, the school graduated a 28-year-old man from its primary school program. All of the students prepare for equivalency courses. After passing the equivalency tests, they go to higher-level regular schools. The school produced three graduates in 2013, four in 2014, and 12 early this year. Even after graduation, this school continues to offer life-long “after-graduation” education.


  Regular classes begin at 9 o’clock in the morning and end at 3:30 in the afternoon. But the students learn arts and physical education and study by themselves until 6 o’clock in the evening. About 30 volunteers are teaching the students; they include five permanent teachers who are in their 40s and 50s, a graduate of Pohang University of Science and Technology, a man who has studied in Germany, and a retired teacher in his 70s.


  The school offers free lunch and dinner for needy students. In return, the students make it their duty to participate in volunteer activities. This gives them firsthand exposure to a variety of social and cultural issues and public causes. These include a campaign to help African children, and visits to the village for Hansen’s disease patients on Sorok Island. They have been staging “To-One Festival,” a combination of a music concert and an art exhibition, for two years now, in order to create an opportunity for students of North and South Korea to get together.

 

Preparing for National Reunification

 

 Next year will mark the 10th year of operations of Hangyeore High School. Residents in nearby areas, who were once vehemently opposed to the school, have since become quite supportive. Its graduates consider their alma mater their home. One of the school’s goals is to train students to work for national unification in the future. Kwak Jong-moon, Hangyeore’s principal who has managed the school since its founding, observes: “It seems that achieving unity of language and social integration will be the hardest tasks even after national reunification.”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김학순

 ‘자유의 마을’이라는 별칭을 지닌 대성동(臺城洞)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 안의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이다. 행정구역 명칭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그러나 이곳은 지구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작은 마을이다. 대한민국 영토이지만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마을 주민의 참정권이나 교육 받을 권리는 대한민국 법률에 따르지만 병역과 납세 의무는 면제된다. 마을 사람들은 외부로 드나들 때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기라도 하면 출입이 더 엄격히 통제된다. 휴전 후 60여 년, ‘섬 아닌 섬’에서 고립되어 살아온 이곳 사람들이 마을 리모델링 사업으로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다.

 

 7월 23일 대성동 마을에서 ‘통일맞이 첫 마을 대성동 프로젝트’ 관계기관 협약식이 열렸다. 주민, 정부, 기업, 민간단체, 국민이 손을 맞잡고 마을 리모델링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 대성동 마을 주택들은 1970년대 정부가 지어 준 뒤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채 살고 있어 노후화가 심하다.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라 집을 수리하거나 인터넷을 연결하는 등 크고 작은 일에도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김동구(金東九 47) 이장은 “마을의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이다. 주민의 숙원이 이루어지고, 자녀들에게도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마련해 줄 수 있어 한없이 기쁘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대성동 마을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을 마무리 짓는 정전협정을 체결할 당시 ‘남북 비무장지대에 민간인이 거주할 수 있는 마을을 각각 한 곳씩 둔다’는 규정에 따라 그해 8월 3일 북한 쪽 기정동(機井洞) 마을과 함께 생겨났다. ‘평화의 마을’로 불리는 기정동은 대성동 마을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1,800m 떨어진 군사분계선 바로 북쪽에 있다. 두 마을은 분단되기 전 ‘건넛마을’이었다. 기정동 마을은 북한군의 관할 아래 있지만, 유엔군의 통제는 받지 않는 게 대성동 마을과는 다르며 10여 년 전 탄생한 개성공단과는 불과 4킬로미터 거리이다. 대성동 마을회관 옥상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보면 북쪽 주민들의 움직이는 모습까지 또렷하게 보인다.

 

 두 마을은 오랫동안 ‘국기 높이 달기’라는 체제 우월 경쟁을 해왔다. 휴전 직후인 1954년 말 기정동 마을에 30미터가 넘는 깃대가 세워졌다. 거기엔 대형 인공기(북한에서는 ‘공화국 국기’라고 부른다)가 걸렸다. 뿐만 아니라 국기 게양식과 하기식 때 국가를 연주하는 확성기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에 뒤질세라 대성동 마을에는 이듬해 그보다 18미터 더 높은 48미터짜리 깃대가 세워졌다. 2년 뒤 기정동에 80미터짜리 깃대가 섰고 그로부터 3년 후 대성동에는 높이 99.8미터의 깃대가 올라갔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국기 게양대다.

 

  다시 4년 후 기정동에는 160미터짜리가 세워졌다. 북측은 이 깃대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자랑한다. 그곳에 게양된 인공기의 크기도 세계 최대인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후 양쪽 게양대는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김동구 이장은 “우리 측이 높이 경쟁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그만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양측 모두 국기 제작비와 관리비만 해도 연간 수천만 원이 든다. 두 개의 국기 게양대는 지금도 마주 보고 서 있다.

                                                                                              

                                                                          <대성동 마을 태극기>

 

 62년의 슬픈 역사를 지닌 대성동 주민들은 숱한 애환을 안고 살아간다. 2015년 7월 현재 모두 49가구, 207명인 이곳 주민들은 모두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한다. 대개 한국전쟁 이전부터 살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들이다. 강릉 김씨 집성촌인 이곳은 1년에 8개월 이상 마을에 거주해야만 주민의 자격이 유지된다. 초등학교 이외의 교육기관이 없기 때문에 마을을 떠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이 기준에서 제외된다.

 

   남성은 외지인과 결혼할 경우 배우자와 함께 계속 거주할 수 있지만, 여성이 외지인과 결혼하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전통에 따라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정한 규칙이다. 마을에서 범죄사건이 일어나더라도 한국 경찰이 들어가서 곧바로 체포할 수 없다. 유엔사가 범죄자를 마을에서 추방한 뒤 DMZ 밖에서 체포해야 한다. 마을 거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DMZ를 관리하는 유엔사 규정과 유엔·주민이 합의한 민사예규에 근거한다.

                                                                                                            

                                                                     <북한 기정동 마을 인공기>

 

 이 마을에서 생활하는 데는 숱한 제약이 따른다. 매일 밤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이 금지된다. 매일 오후 7시부터 8시 사이에 집집마다 찾아온 군인들에게 인원점검을 받는다. 중무장한 1개 민정중대(civil administration company)가 24시간 마을을 지킨다. 논밭에 일하러 나갈 때도 2~3일 전 미리 유엔사에 보고해야 한다.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영농 활동을 할 때는 군인이 동행한다. 외부인의 마을 출입은 일주일 전에 신청을 한 후 신원 확인을 거쳐야 가능하다.

 

 대중 교통수단은 하루 세 번 들어오는 버스 밖에 없다. 생활용품을 사려면 문산까지 나가야 하기 때문에 가구마다 자동차를 소유하게 됐다. 그것도 생활형편이 나아져서다. 마을이 생기고 나서 처음엔 마을 밖으로 외출할 수 있는 기회가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이었다. 그래서 유엔군 트럭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들어와 생필품을 나눠주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1972년 마을버스를 기증해 버스 운행이 일주일에 세 번으로 늘었다. 1970년대 말부터 버스가 매일 한 번씩 다니다가 횟수가 늘어 지금은 하루 세 번 문산터미널까지 왕복한다. 대성동 주민들은 투표일에 모두 함께 마을 밖으로 외출한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 사람들의 투표율은 매번 거의 100%에 이른다. 투표권이 주어진 것도 1967년부터다. 초기 14년간은 참정권이 제한된 채 살아왔다.

                                                                                                  

 

 교육시설은 유치원과 초등학교뿐이다. 전교생이 30명이지만, 이 가운데 대성동 아이들은 4명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문산·파주·일산 등지에서 다니는 외부 학생들이다. 학생 수가 적어서 1대 1 교육이 이뤄지는 데다 영어특성화학교로 지정돼 있어 해마다 외부 학생 신청자가 많다. 정원을 늘리지 않기 때문에 전학 희망자가 50여 명이나 밀려 있다고 한다. 2014년 11월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한 대성동초등학교는 도시 학교가 부럽지 않다. 인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소속 미군들이 일주일에 2~3번씩 방문해 영어를 직접 가르치면서 인기가 높아졌다. 졸업생들은 학군 제한을 받지 않고 원하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대성동 마을은 정부의 각종 특별지원으로 생활수준이 높은 편에 속한다. 가구당 평균 경작면적이 약 8만 2500㎡이어서 연간 평균소득은 6000만 원에 이른다. 웬만한 도시 중산층보다 높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토지 소유권을 가질 수 없고 경작권만 허용된다.

 

 이 마을에 조그마한 일이나 변화가 생겨도 뉴스가 된다. 초등학교 졸업식은 어김없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지난 5월 15일 대성동초등학교 전교생이 정종섭 행정자치부장관의 초청으로 서울 정부종합청사를 방문했을 때 대다수 언론이 이를 보도했다. 2013년 6월 이곳에 처음 상수도가 공급됐을 때도 그랬다. 2012년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최신 영화관이 생겼을 때도 화제가 됐다. 1991년 독일 통일 직후 대성동초등학교 학생 7명이 베를린장벽을 견학했을 당시 한국인들에겐 애잔한 뉴스가 됐다.

                                                                                         

 

 2013년 8월2일에는 대성동마을 60주년을 맞아 마을회관에서 환갑잔치가 열렸다. 마을 환갑기념 축하 행사에는 경기도지사, 지역구 국회의원, 파주시장, 5개 참전국 대사관 관계자, 마을 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곳은 판문점 인근에 자리 잡고 있어서 외국의 주요 인사들이 휴전선 일대를 방문할 때마다 각별한 관심을 갖는 지역이기도 하다. 1993년 3월 통일 위업을 이룩한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판문점과 대성동 마을을 둘러보고 감회에 젖었다. 2010년 7월 판문점을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와 대성동의 태극기를 가리키며 “지금도 양측이 깃발을 더 높이 달려고 애를 쓰고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곳 주민들은 남북 간 갈등이 높아질 때면 더욱 숨을 죽이고 산다. 2012년 10월에는 탈북자 단체의 대북선전 풍선 날리기를 핑계로 북한이 ‘임진각 군사적 타격’을 위협하는 바람에 마을의 모든 주민이 잠시 벙커 신세를 졌다. 1997년 도토리를 줍던 마을 주민이 북한군에게 끌려갔다가 5일 만에 풀려난 적도 있다. 1975년에도 마을 부근에서 북한군 2명이 농부를 강제로 납치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다는 김경래(金慶來 79) 씨는 “1960년대에 마을 주민 한 사람이 북한군에 의해 사살됐는데 어찌나 끔찍했던지, 그때는 정말 떠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성동 마을 최고령 주민 박필선 씨(왼쪽)와 김경례 씨>

 이 마을에서 태어난 최고령 주민 박필선(82) 씨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옆 마을 기정동에 친형님을 두고도 60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 박 씨는 “왕래를 못 하니까 큰형님이 기정동에 아직도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늘 지척인 옆 마을에 산다고 생각하고 지낸다”고 말했다. 박 씨는 “통일이 돼서 집도 논도 없이 빈손으로 이 마을을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나의 가장 큰 소망은 통일이다. 살아서 통일되는 것을 꼭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곳 주민들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다. ‘자유의 마을’이란 별칭 외에 ‘통일맞이 첫 마을’로 명명되는 것도 이런 소원이 담겼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이면 기정동 주민 초청 윷놀이대회, 노래자랑대회가 열릴 날을 고대한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5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Daeseong-dong: An ‘Inland Island’ Looks to the Future
Kim Hak-soon /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Daeseong-dong, also known as “Freedom Village,” is the only civilian residential area within the South Korean half of the Demilitarized Zone, a strip of no man’s land that bisects the Korean Peninsula. The village is under the administrative jurisdiction of Josan-ri, in the township of Gunnae-myeon, Paju, Gyeonggi Province. But in fact, this tiny village, which lies alongside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established by the 1953 armistice that halted the Korean War, is under the control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that oversees the truce. The villagers of Daeseong-dong have lived in an “inland island” for over 60 years since the armistice; today, they are full of fresh hope for the future as their village begins to undergo long-needed renovation and development.

 

 On July 23 this year, a ceremony was held to launch a renovation project for Daeseong-dong, which is also known to Koreans as “The First Village that Would Witness Unification.” Village residents, central and local government officials, business executives, and representatives of civic groups participated in the ceremony signifying joint efforts to revitalize the village. The houses in the village are in disrepair, as they have not been properly maintained since they were built by the government in the 1970s. This is because the villagers need the government’s approval for almost anything, including repairing houses and connecting to the Internet. Access by outsiders to the village is strictly regulated. Kim Dong-koo, 47, the village chief, said with emotion at the ceremony, “Today, we’re going to write a new chapter in the history of our village. I’m very glad that we can attain our long-cherished desires and provide a better living environment for our children.”

 

 Across the Border, Two Villages Face Each Other

 

 The Korean War came to a halt when the Armistice Agreement was signed on July 27, 1953. The armistice allows each side to maintain a village within the DMZ where civilians can reside. Daeseong-dong was so designated, along with Kijong-dong on the North Korean side, on August 3 the same year. Kijong-dong, called “Peace Village,” lies just north of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which is only 1.8 kilometers away from Daeseong-dong. The two villages used to be adjacent to each other before they were separated. Kijong-dong is under North Korean military control, not the UNC’s supervision. This village lies a mere 4 kilometers from the Kaesong Industrial Complex, an inter-Korean economic cooperation project that began a decade ago. If you look through a telescope installed on the rooftop of the Daeseong-dong community center, you can clearly see North Koreans going about their business in Kijong-dong.

 

 The two villages have long competed against each other over which side can raise its national flag higher. In late 1954, a flagpole over 30 meters (about 100 feet) tall was erected at Kijong-dong, flying a large North Korean flag. At the same time, the sounds of the North’s national anthem blared boisterously from loudspeakers whenever the flag was raised and lowered every day. To counter this, Daeseong-dong built a 48-meter-tall flagpole the next year. Two years later, an 80-meter-high flagpole went up at Kijong-dong; three years later, a 99.8-meter flagpole, the tallest of its kind in South Korea, rose up in Daeseong-dong. Four years later, the North again countered with a gigantic flagpole in Kijong-dong, which at 160 meters is the tallest in the world, according to North Korea’s boastful claim. Of course, the flag flying on this flagpole was the world’s largest as well. The South has not attempted to continue this one-upmanship of flagpoles and flags.

 

 “I understand that our side gave up because such a competition was senseless,” Kim, the village chief, said, seemingly unperturbed. It costs each side tens of millions of won a year to produce and maintain the flags alone. The two flagpoles still stand opposite each other.

 

 Living under Uncommon Conditions

 

 For the past 62 years, Daeseong-dong villagers have taken life in stride amidst their trying circumstances. As of July 2015, a total of 207 persons in 49 households live in the village, most of them engaged in farming for their livelihoods. A great majority of them have been residents there since before the Korean War, or their descendants. Many belong to the Kim clan hailing from Gangneung.

 

 Only those who live in the village for more than eight months each year qualify for permanent resident status, which entitles them to exemption from mandatory military service and tax obligations, among other privileges. Because the village only has a kindergarten and elementary school, village children are allowed to enroll at secondary schools without regard for the regular residency requirements. Men who marry women from other regions can maintain their residence in the village. But women residents who marry outsiders cannot continue to live in the village. This is a rule set by the villagers themselves in keeping with traditional practices. If a crime occurs in the village, Korean police cannot simply enter to make an arrest. The police need to wait until the UNC removes the suspect from the village, and then make an arrest outside the DMZ. Detailed rules about living in the village are based on regulations enforced by the UNC, which oversees the DMZ, and rules established jointly by the UNC and villagers.

 

 There are a number of restrictions imposed on the residents of Daeseong-dong, which includes a midnight-to-5:00 a.m. curfew. Soldiers take a roll call of each household from 7:00 to 8:00 p.m. every evening. A heavily armed civil administration unit protects the village around the clock. The villagers must obtain approval from the UNC to travel outside their village. Each farmer needs to report to the UNC two to three days in advance before going out to tend the fields. When they work in areas near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they are accompanied by soldiers. Outsiders who wish to visit the village must apply for approval for a visit one week ahead of the desired date and must undergo an identification check.

 

 The only public transportation is a bus service that runs between the village and Munsan Bus Terminal three times a day. Because they have to travel all the way to Munsan, outside the DMZ, to buy daily necessities, each village household now owns a car. But this was only possible after their living conditions improved. At first, villagers could travel outside the village only once a week; UNC trucks used to arrive here each week to distribute supplies. From the late 1970s, the bus service increased to once a day. All villagers still travel to the polling station together for each public election; so voter turnout approaches 100 percent every time. But the villagers had to wait until 1967 to be granted suffrage.

 

 Education of Village Children

 

 The only educational institutions at Daeseong-dong are a kindergarten and an elementary school. The elementary school has 30 students, only four of whom are village children. The other students are from outside areas, such as Munsan, Paju, and Ilsan. With a small number of students, a 1 to 1 teacher-student ratio, and an English-for-specific-purposes curriculum, the school attracts children from outside the village. About 50 children from other areas are currently on a waiting list for enrollment.

 

 Daeseong-dong Elementary School students have no reason to envy children in the cities any longer, thanks to the installation of super-speed Internet access in November 2014. The school has become even more popular, with U.S. soldiers assigned to the Joint Security Area in the nearby truce village of Panmunjom visiting the village to teach English two to three times a week. Graduates are exempt from the nationwide school district system and can apply to any middle school across the country.

 

 The villagers of Daeseong-dong enjoy a relatively high standard of living thanks to various perks and subsidies from the state. With the average arable area per household amounting to 82,500 square meters, each household’s yearly income averages about 60 million won, higher than that for urban dwellers. But the villagers cannot own the land; they are only allowed to cultivate it.

 

 Because of its special circumstances, the smallest event or slightest change in the village assumes significance as a news story. The graduation ceremony of the village’s elementary school regularly attracts the media’s attention. The village made headlines for being connected to the piped water supply in 2013; gaining free access to the Internet in 2012; opening a state-of-the-art cinema; and sending seven elementary school students for a visit to the site of the Berlin Wall in 1991, right after Germany’s unification.

 

 Whenever tensions heighten between the two Koreas, the villagers of Daeseong-dong hold their breath. All villagers had to stay inside a bunker briefly in October 2012 when the North Korean regime threatened to launch a strike on South Korea in response to a defector group’s release of propaganda balloons into the North. In 1997, a resident out gathering acorns was captured by a North Korean soldier, but released five days later. Earlier, in 1975, a farmer was abducted by two North Korean soldiers near the village. Kim Kyung-lae, 79, a resident who has lived in the village since before the Korean War, said, “In the 1960s, a villager was shot to death by a North Korean soldier. I felt so terrified that I really wanted to leave.”

 

 So Near Yet So Far

 

 Park Pil-sun, 82, the oldest resident who was born in the village, has not seen his eldest brother for over 60 years. His brother used to live in Kijong-dong, a once adjacent village within walking distance. “Since I can’t travel to that village now, I have no idea whether he’s even still alive or not,” Park said. “But I always think as if he were living nearby.” Close to tears, he added, “My biggest desire is to see national unification, even if I would have to leave this village with nothing but the clothes on my back. I really wish to see the nation reunited while I’m still alive.”

 

 Perhaps more ardently and desperately than anyone else, Daeseong-dong villagers want to see the peaceful unification of their divided nation. Every year, on the fifteenth of the first lunar month, a traditional feast day, the villagers renew their hopes for the day when they can invite residents of Kijong-dong in the North, their longtime neighbors just across the way, to come celebrate with them, play a game of yut, and belt out their beloved “Arirang” in a singing contest.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김학순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