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톺아보기-칼럼

대통령이 두려움을 대하는 자세

김학순 2026. 10. 17. 09:56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영웅들이 두려움을 어떻게 마주하는지 잘 보여준다. 영웅들은 신적인 힘을 지녔으나 죽음과 실패 앞에서는 너무나 인간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필멸성을 깨닫고 이를 명예와 분노로 정면 돌파한다.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싸우면 젊은 나이에 죽을 운명임을 안다. 하지만 불멸의 명예를 얻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기꺼이 감수한다.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이후 그의 두려움은 분노로 바뀐다.


 트로이의 왕자이자 트로이군 최고의 영웅인 헥토르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며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가족과 조국에 대한 의무감으로 이를 통제한다. 그는 아킬레우스와의 결투 직전 압도적인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트로이 성벽을 세 바퀴나 돌며 도망친다. 그러나 아내 안드로마케와 아들, 트로이 시민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공포를 누르고 돌아서서 아킬레우스의 칼날을 맞이한다.


 트로이 전쟁의 계기를 만든 트로이 왕자 파리스는 명예보다 자기 안전과 생존을 우선순위에 두고 두려움에 굴복한다. 그는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와의 1대1 결투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도망치려 한다. 여신 아프로디테가 안개로 그를 감싸 성안의 침실로 데려가자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난 것에 안도하며 전장을 외면한다.


 미케네의 왕이자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 느끼는 두려움은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같은 전사들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는 결이 다르다. 그의 두려움은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가 실추되거나 총사령관으로서의 지배력을 잃는 데서 비롯된다. 아가멤논은 연합군에서 가장 지위가 높지만 가장 강한 전사는 아킬레우스라는 점을 늘 의식하며 불안해한다.

                                                                                         

 그리스 진영에 역병이 돌자 예언자 칼카스는 아가멤논이 전리품으로 얻은 여인 크리세이스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가멤논은 마지못해 응하면서도 자기 권위가 깎이는 것을 두려워해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강탈한다. 힘에서 밀리는 지도자가 통제권을 잃을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을 권력남용으로 표출한 대표적인 사례다.


 오디세우스가 두려움을 대하는 태도는 철저한 실리주의와 이성적 통제다. 그는 명예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는 아킬레우스나 공포에 사로잡혀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아가멤논과 사뭇 다르다.


 오디세우스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냉철하게 계산하고 다스리는 노련한 정치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오디세우스에게 두려움이나 체면은 ‘전쟁의 승리와 안전한 귀환’이라는 목적을 위해 언제든 접어둘 수 있는 도구에 불과하다. 일반적인 영웅들이라면 모욕감과 두려움 때문에 거부했을 일이지만 오디세우스는 실익이 있다면 개인의 두려움과 자존심을 완벽하게 억누르고 행동한다.


 이재명 대통령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퇴임 후 사법 리스크’일 것이다. 이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30%대로 추락한 데는 이 문제를 둘러싼 국민적 불신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대통령은 윤석열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기소여서 억울하다고 호소해왔다. 그걸 고려하더라도 사법 리스크 문제가 가라앉지 않는 데는 이 대통령과 민주당의 책임이 크다.

                                                                                       

  이 대통령은 그동안 공소 취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대통령이 더불어민주당에 특검의 공소취소권 조항을 빼 달라고 당부했으나 단서가 붙었다. “악의적 수사 조작이 의심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특검을 통해 진상을 규명하는 게 맞다.” 민주당이 특검 후보를 추천한다. 이를 이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게 공소 취소 특검과 뭐가 다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이가 많다.

                                                                                     
 민주당은 공소취소의원모임을 만들어 스스로 논란을 불러왔다. 중요한 법무부 장관 인선이 꼬인 것도 사법 리스크를 생각하다 보니 생긴 일이다. 검찰총장(공소청장) 대행의 ‘공소취소’ 관련 발언도 마찬가지다. “진상조사단에서 진상조사가 진행 중이어서 그 결과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정치 역정을 보면 이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정치적으로 살아남는 일이었다. 그동안 이 대통령은 생존을 위협하는 두려움을 돌파하기 위해 누구도 믿지 않는 길을 택했다.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국민의 신뢰를 잃는 일이다. 의구심을 신뢰로 되돌릴 돌파구를 마련하는 게 급선무다. 공소취소와 퇴임 후 재판 재개 논란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 그 출발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존경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영웅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용기란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