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톺아보기-칼럼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잊지 못한다

김학순 2024. 8. 22. 22:50

 한일관계사에서 유명한 ‘구보타 망언’은 악랄했다. “일본의 조선 통치는 조선인에게 은혜를 베푼 면이 있다. 일본은 36년간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돼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한일협정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는 1953년 이 발언으로 협상 테이블을 엎어버렸다. 그 뒤 한일회담은 4년 반 동안 열리지 못했다. 한국을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구보타 같은 인식은 일본 우익 정치인들에게 여전히 잠재해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구보타의 발언은 요즘 한국의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닮았다. ‘일제가 다리를 놓아주고, 철도도 깔아주고, 공장도 세워주지 않았나’라는 친일 학자·정치인들과 같다. 일본은 자기네 이익을 위해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고 마음대로 개발했다. 대륙 진출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해 도로를 닦고 공장을 세웠다는 건 친일파가 아니라면 누구나 안다. 


 최근 한국 외교안보 사령탑에 오른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의 과거 발언도 이와 흡사하다. 그는 유튜브 방송에서 “대한제국이 존속했다고 해서 일제보다 행복했다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그는 “이완용이 비록 매국노였지만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는 망발도 서슴지 않았다. 5·16 군사정변과 12·12 군사반란을 옹호하기도 했다. 그런 인물이 얼마 전까지 국방장관이었고, 다시 외교안보 최고위직에 오른 건 부조리의 극치다. 

                                                                                             

  그와 짝을 맞춰 일하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광복절 직후 KBS 방송에 서 일본에 굴종적 저자세 언행을 보여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윤석열정부의 외교안보 실세로 불리는 그는 한일 과거사 문제에 관해 “중요한 건 일본의 마음”이라며 “마음이 없는 사람을 다그쳐서 억지로 사과를 받아낼 때 그것이 과연 진정한가”라고 말했다. 한국의 사과 요구가 억지고 일본의 마음에 없으면 사과를 받아내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들린다.


 김 차장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 일본 정부 입장을 세심하게 배려하면서 한국 피해자들 목소리는 묵살하는 언행으로 비난을 사기도 했다. 국제법상 반인도적 불법행위 피해자들이 오랜 법적 투쟁을 거쳐 권리를 획득했고, 가해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도 가해자인 일본 정부는 사실인정은커녕 이를 부인하고 사과도 배상도 거부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에 많은 걸 내주었으나 받은 것은 거의 없다.


 박진 전 외교부 장관은 일제 강제노역에 관한 굴욕적인 입장을 발표할 때 “물컵에 물이 절반 이상은 찼다”며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에 따라서 그 물컵은 더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이 물컵의 절반을 채웠지만 일본은 채우기는커녕 약속조차 하지 않는다. 일본 언론이 일본 정부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할 정도로 한국 처지는 딱해 보인다. 일본 언론은 한국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에서 과거사 언급이 없는 게 이례적이라고 보도한다.

                                                                                                           


 윤석열 정부는 조선인 1500여 명이 강제노동을 한 일본 니카타현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동의해 줬다. 김 차장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이 고개를 돌리고 필요한 말을 하지 않으면 엄중하게 따지고...”라고 했지만, 우리 노동자의 ‘강제성’ 누락에 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역사 왜곡의 뒤통수를 맞은 군함도(하시마섬)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 이어서 당한 굴욕이다.


 윤석열정부의 역사·역사교육 관련 기관 임원 가운데 최소 25개 자리를 뉴라이트나 극우 성향으로 평가받는 인사들이 차지한 것으로 드러났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앞장서 이명박·박근혜정부 때의 ‘역사 수정’ 움직임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우려가 그래서 나온다. 뉴라이트의 마지막 방점은 이달 말쯤 공개할 역사교과서 검정 결과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정권 때 추진하다 실패한 국정 역사교과서에 버금가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교육부가 깜짝 공개할 것이란 풍문이 솔솔 흘러나온다. 뉴라이트쪽에서 검정 신청을 한 역사교과서는 교육 일선에서 심각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게 분명하다. 

 

  광복절 계기 수업을 빌미로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 뉴라이트 성향의 친일 역사 영상을 전교생 700명에게 보여줘 이미 마각을 드러냈다. 일본 덕분에 후진적이었던 구한말의 위생 의료 식량 문제가 해결됐다는 주장이 담겼다. 사법제도가 정비되고, 한반도 주민은 개인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됐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 영상은 뉴라이트 역사관을 지닌 유튜버가 자기 계정에 올린 영상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높은 이상과 가치를 지닌 독립운동을 깎아내리고 친일파 명예회복에 치중할 미래가 훤히 보인다. 몰역사적인 굴종 외교는 국가의 정통성이 걸린 문제다.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잊지 못한다’는 아프리카 스와힐리족 속담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결코 잊지 못한다는 뜻이다. 나라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뉴라이트의 친일 역사·외교적 만행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