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되는 임기 말 무더기 졸속 입법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얼마나 일을 하지 않는지는 ‘일하는 국회법’이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너무나 오랫동안 ‘노는 국회’라는 욕을 먹다가 스스로 ‘일하는 국회법’까지 만들어 놓았다. 불과 3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일하는 국회법’은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일하는 국회법’은 상임위가 매달 2회 이상 전체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17개 상임위원회 가운데 14개 상임위 소속 25개 법안심사소위원회는 매달 3회 이상 법안심사소위를 열어야 한다. 21대 국회에서 이를 준수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어겨도 처벌받는 규정이 없으니 있으나 마나 하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속담이 있는 나라여서인지 이따금 ‘국회의원 무노동 무임금법’을 발의하는 웃지못할 희극 같은 일도 벌어진다. 그걸 통과시키리라고 믿는 바보는 물론 없다.
21대 국회의원들은 다음 달 29일 임기 만료를 앞두고 또 일하는 척할 태세가 엿보인다. 그게 더 걱정인 것은 수백 개의 법안을 무더기로 통과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일신문 4월 19일자 보도) 지난 20대 국회도 총선 이후 마지막 임시국회에서 무려 553가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허송세월하다가 입법 성과를 남겼다는 흔적이 필요해서일 게다. 과거 사례를 보면 자신이 발의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여야 의원들 간의 짬짜미가 벌어지고 부실 심사·과잉 입법 개연성도 많다.
그렇지 않아도 법안 심사 시간이 법안 하나당 평균 5분여에 불과하고, 상임위 전체회의가 448가지 법안을 57분 만에 처리한 적도 있다. 총선을 앞두고 헌정사상 최다인 여야 261명이 공동 발의해 일사천리로 통과된 ‘달빛철도특별법’은 예비 타당성 조사 없이 9조원 가까운 혈세가 투입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
이러니 의원들의 입법 활동이 졸속 아니냐는 손가락질이 나올 수밖에 없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24일 기준으로 21대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 건수는 모두 2만6820건이다. 이는 국회의원 한 명이 연평균 법안 20건을 발의한 꼴이다. 미국 일본 독일 같은 주요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급증세다.
이처럼 국회의원들이 대표 법안 건수에 매달리는 데는 공천 심사에서 점수를 따기 위한 목적이 크다. 국회의원 평가를 앞두고 질보다는 양에 치중해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개수 채우기를 위한 법안 발의가 흔하다고 의원 보좌관들은 털어놓는다. 이 때문에 용어만 약간 바꿔 재발의하는, 이른바 ‘양치기’ 법안들이 숱하다.
‘지불’을 ‘지급’으로 바꾸자는 법안을 발의한 의원이 있는가 하면, ‘지방’을 ‘지역’으로 바꾸는 법안을 무려 6개로 나눠서 발의한 의원도 있다. 의정활동 평가 기준을 법안 발의 건수로 정한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난다.
졸속·부실 입법으로 헌법재판소에서 위헌결정을 받는 사례도 늘어나는 추세다.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일명 ‘윤창호법’이다. 음주 운전자를 가중처벌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윤창호법’은 여론에 휩쓸린 입법 사례로 꼽힌다. 지난해 위헌결정을 받은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은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게 이유다.
과잉 입법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주요국처럼 ‘입법영향분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주요 선진국들은 입법영향분석을 시행해 입법 품질을 높이고 있다. 영국은 의원 발의안과 정부안 모두 입법영향분석을 실행한다.
독일은 입법영향분석에 준하는 의견서를 제출해야 한다. 프랑스의 경우, 상·하원의장의 요청에 따라 최고행정법원이 의견을 제출하도록 했다. 미국은 법안 제출 때 비용편익분석을 첨부하는 것이 일반화돼 있다. 여기에다 상·하 양원 합의 전에 입법영향분석 보고서를 첨부해야 한다. 일본은 입법영향분석제도를 도입하고 있지 않으나, 의원의 법안발의 전 당내 심사를 의무화했다.
한국에서는 입법영향분석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법안이 11년째 계류 중이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 22일 ‘입법영향분석’ 영문 보고서를 발간해 개발도상국 의회에 전달하겠다는 계획과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법이 많을수록 정의는 줄어든다”고 한 고대 로마시대 키케로의 말은 오늘날 선진국에서도 여전히 통용된다. 무더기 졸속 입법은 국회의 직권남용이나 다름없다. 국회가 모든 국가기관 가운데 변함없는 신뢰도 꼴찌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