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톺아보기-칼럼

총선에 어른거리는 플라세보 정치

김학순 2024. 4. 6. 19:04

 미국 의사 엘리샤 퍼킨스는 1796년 환자의 아픈 부위를 몇분 동안 문지르기만 하면 통증이 완화하는 특수합금 막대(치료봉)를 개발했다. 퍼킨스는 전기효능을 지닌 이 막대로 어떤 병이든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만능 치료봉으로 미국 헌법 제정 이후 최초로 의료분야 특허를 따낸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도 이를 샀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퍼킨스는 어떤 원리로 치유가 되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의사협회의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당시 유행하던 천연두 치료에 도전했다. 스스로 천연두에 걸려 치료하는 방법을 썼다. 안타깝게도 그는 치료에 실패해 발병 한달 만에 세상을 떴다.


 퍼킨스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뒤 영국 의사 존 헤이가스가 가짜 치료봉으로 환자들이 치료되는 효험을 확인하러 나섰다. 그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뼈 점토 담배파이프 같은 것에 색깔만 칠한 가짜 치료봉으로 검증했다. 실험 결과 가짜 치료봉으로 치료받은 환자 대부분이 효험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위약(僞藥) 효과’로 불리는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는 이렇게 탄생한다.


 정치인들은 플라세보 효과를 알게 모르게 악용한다. 22대 총선 후보자 등록 결과를 보면 가짜약 같은 인물이 너무나 많다. 지역구와 비례대표 후보자 952명 가운데 전과기록을 제출한 후보는 32%인 305명에 이른다. 전과가 무려 11가지인 후보도 있다. 3~9건의 전과 기록을 지닌 후보는 수십명에 달한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법을 어겨 처벌을 받은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면 시민이 납득할 수 있을까.

                                                                                           


 국회의원직을 ‘사법 도피처’로 여기는 다수 후보는 정치를 희화화한다. 조국혁신당은 당선돼도 확정판결을 받으면 의원직을 상실할 수 있는 피고인 신분의 후보를 무려 4명이나 비례대표 당선권에 배치했다. 사법 리스크를 안은 인물 다수가 국회에 진출하는 것은 사법체계를 흔드는 심각한 일이다. 다른 정당의 지역구, 비례대표 후보들 가운데도 언행이나 재산 문제로 자격이 의심스러운 인물이 수두룩하다.


 국민의 4대 의무인 세금을 내지 않은 후보자도 12명이나 된다. 최근 5년간 세금 체납액이 기록된 이는 12%에 가까운 112명이다. 국민의 기본의무조차 다하지 않고 국민의 대표로 나서겠다는 것은 후안무치다.


 대통령과 주요 정당 대표들이 내놓은 선심 공약에는 플라세보 효과를 노리는 징후가 뚜렷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총선거를 앞두고 석달간 24번의 민생토론회에서 쏟아낸 350여건의 정책공약은 약물 과다처방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는 재정을 뒷받침할 수 없어 약효가 없는 가짜약에 가까운 게 숱하다.


 ‘관권선거 운동’ 논란까지 빚은 민생토론회에서 윤 대통령은 전체 대학생 200만명의 75%인 150만명에게 국가장학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애초 경제정책 방향과 거리가 멀다. 대통령은 올해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깎은 지 한달도 지나지 않아 내년 R&D 예산을 대폭 증액하겠다고 앞뒤가 맞지 않은 얘기를 했다. 청년 주거장학금처럼 예산이 추가로 얼마나 필요할지 알 수 없는 정책도 수두룩하다. 고양 용인 수원 창원의 특례시 권한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윤 대통령과는 반대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고양시 서울 편입을 공약해 엇박자를 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사실상 가짜약을 처방했다. 전국민에게 1인당 25만원의 ‘민생회복지원금’을 지역화폐 형태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필요 예산은 13조원 가량이다. 예산권이 없는 야당 대표가 줄 능력은 있나.


 플라세보 정치에는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대통령이 민생토론회를 열 때마다 언론은 앞다퉈 속보를 내보냈다. ‘622조 투자’ ‘10조 투입’ ‘2000억 투입’ 같은 엄청난 액수와 제목만 있는 속보가 뜬다. 국민은 윤석열정부가 자기 지역에 수십조원의 예산을 투입한다고 오해하기 쉽다. 대다수 언론은 이를 검증없이 보도한다.


 한국을 방문했던 토마스 마이어 독일 도르트문트대 교수는 언론이 ‘플라세보 정치’를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사례로 플라세보 정치를 꼬집었다. 레이건은 교육예산을 크게 줄여 비난받았다. 그랬던 그가 학교를 찾아가 교사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언론이 자주 보도했다. 이 때문에 레이건이 교육문제를 깊이 고심하는 정치인 이미지로 대중에게 다가갔다.


 플라세보 정치는 진짜약을 올바로 처방했는데도 환자가 의심하면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 ‘노세보 효과(nocebo effect)’로 바꿀지도 모른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노세보 효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국민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에 가짜가 판을 치는 현실이 참담하다. 그 옛날 공자도 식량(경제) 군사력(안보)보다 중요한 게 국민의 신뢰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