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지도 않고 홀대하는 한국 보수
‘책 안 읽기 월드컵대회’가 있다면 한국은 해마다 금메달을 놓치지 않을 것 같다. 수년 전 국제여론조사기관 ‘NOP 월드’가 세계 30개국을 대상으로 한 ‘국민 1인 평균 주당 독서시간’ 조사에서 한국이 단연 최하위였다. 책 읽지 않는 국민의 비율이 매년 높아지는 추세를 보면 지금 조사해도 꼴찌를 벗어나기 어렵다.
문화체육관광부가 2년마다 실시하는 ‘국민 독서실태’ 조사 결과, 2021년 1년 동안 단 한권도 읽지 않은 성인이 53%에 이른다. 2019년에 비해 8.2%p나 늘어난 숫자다. 60대 이상 노년층에 한정하면 74.4%는 아예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보수 이념을 지녔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의 보수는 더 책을 읽지 않는다고 보수언론인이 한탄할 정도다. 출판 시장에서는 60대 이상과 2030 남성은 없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한국 보수는 일본이나 미국의 보수에 비해 책을 읽지 않는다. 일본은 진보보다 보수가 책을 더 많이 읽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국 보수의 지적 원천은 정치 유튜브와 태극기집회뿐이라는 자조까지 나온다. 그나마 특정 보수신문을 신봉한다. 그만큼 보수의 문화적·지적 자산이 박약하다 못해 황량하다고 일부 보수인사들은 자탄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일수록 선동·여론조작의 먹잇감이 되기 쉽다.
그러면서 서점 가판대를 점령한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는 좌파 필자 일색이라고 보수 인사들은 불만투성이다. 한국 보수우파의 논리력은 상대방을 빨갱이로 몰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다. 정신세계는 추억과 향수를 탐닉하며 1970, 1980년대에 머물러 있다. 독서의 퇴보는 4차산업혁명 사회에서 개인과 조직의 역량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국가경쟁력까지 훼손한다고 보수 성향의 경제연구기관들도 우려한다.
미국은 대통령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같은 이는 해마다 자기가 읽은 책을 공개하고 일독을 권하기도 했다. 영국은 모든 아이에게 책을 선물하는 ‘북스타트’ 운동을 펼친다. 아이들이 책과 친숙해지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핀란드는 책이 사람을 찾아가는 이동도서관 버스 ‘북 모빌’을 운행한다. 캐나다는 공공도서관 프로그램으로 독서활동을 촉진한다. 거의 모든 도서관에서 또래 아이들을 모아 책을 읽어주는 ‘이야기 시간’을 운영한다.
책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진 한국 대통령은 40년 전에 아버지가 사준 책 한권을 지금까지 우려먹는다. 윤석열정부는 책 홀대로 역사에 남을 듯하다. 문체부는 최근 ‘국민독서문화 증진지원’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항목 자체를 없애버렸다. ‘국민독서문화 증진 지원’이 지방자치단체·도서관·부처 등에서 시행하는 다른 사업들과 유사하거나 중복된다는 이유를 들이댄다.
한해 60억원 규모로 운용해온 ‘국민독서문화 증진지원’ 사업이 통째로 사라지자 시민사회는 ‘책은 읽지 말라는 정부’ ‘독서 진흥은 하지 않겠다는 정부’라는 딱지를 붙였다.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는 얼마 전 서울을 방문해 출판·독서 지원 예산이 줄었다는 한국을 걱정했다.
11억원가량의 ‘지역서점 활성화’ 관련 예산은 전액 삭감됐다. 지역서점 활성화 예산은 강사·작가 등을 초빙해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문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역서점이 안정적으로 지역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구실을 해왔다. ‘지역서점 활성화’는 현행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한국서점편람’에 따르면 서점이 하나도 없는 지방자치단체는 7곳, 서점 소멸 예정 지역은 29곳에 이른다.
책 예산 삭감에는 ‘이권 카르텔 척결’을 앞세워 민간 보조금을 없애겠다는 윤석열정부의 왜곡된 의지가 개입돼있다는 해석이 나돈다. 출판·문학 지원이 진보쪽에만 혜택이 돌아간다고 여기는 여권 내부의 분위기가 작용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책동네인 서울 마포구에서 출판 지원 축소 문제로 시끄러워진 것도 보수 구청장의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출판사들이 많이 모여 있는 마포구는 ‘한국의 출판특구’로 지정돼있다. 그런데 국민의힘 소속 박강수 구청장 취임 후 작은도서관 폐관 문제로 논란이 일었다. 도서관은 책만 빌려보는 곳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자 열린 안식처다.
충청 지역의 도서관들에는 특정 도서를 폐기하라는 보수진영의 압력 민원이 쇄도한다고 한다. 성평등 성교육 주제, 성소수자와 관련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게 이유다.
그 나라의 과거를 보려면 박물관에 가고, 현재를 보려면 시장에 가고, 미래를 보려면 도서관에 가라는 격언이 있다. 책을 읽지도 않고 홀대하는 대한민국 공동체의 씁쓸한 미래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