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마을 대성동 이야기
‘자유의 마을’이라는 별칭을 지닌 대성동(臺城洞)은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 안의 유일한 민간인 거주지이다. 행정구역 명칭은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그러나 이곳은 지구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작은 마을이다. 대한민국 영토이지만 유엔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다.
마을 주민의 참정권이나 교육 받을 권리는 대한민국 법률에 따르지만 병역과 납세 의무는 면제된다. 마을 사람들은 외부로 드나들 때 유엔사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기라도 하면 출입이 더 엄격히 통제된다. 휴전 후 60여 년, ‘섬 아닌 섬’에서 고립되어 살아온 이곳 사람들이 마을 리모델링 사업으로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다.
7월 23일 대성동 마을에서 ‘통일맞이 첫 마을 대성동 프로젝트’ 관계기관 협약식이 열렸다. 주민, 정부, 기업, 민간단체, 국민이 손을 맞잡고 마을 리모델링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 대성동 마을 주택들은 1970년대 정부가 지어 준 뒤 거의 손을 대지 못한 채 살고 있어 노후화가 심하다. 외부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라 집을 수리하거나 인터넷을 연결하는 등 크고 작은 일에도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김동구(金東九 47) 이장은 “마을의 역사를 새로 쓰는 날이다. 주민의 숙원이 이루어지고, 자녀들에게도 더 나은 삶의 환경을 마련해 줄 수 있어 한없이 기쁘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대성동 마을은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을 마무리 짓는 정전협정을 체결할 당시 ‘남북 비무장지대에 민간인이 거주할 수 있는 마을을 각각 한 곳씩 둔다’는 규정에 따라 그해 8월 3일 북한 쪽 기정동(機井洞) 마을과 함께 생겨났다. ‘평화의 마을’로 불리는 기정동은 대성동 마을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1,800m 떨어진 군사분계선 바로 북쪽에 있다. 두 마을은 분단되기 전 ‘건넛마을’이었다. 기정동 마을은 북한군의 관할 아래 있지만, 유엔군의 통제는 받지 않는 게 대성동 마을과는 다르며 10여 년 전 탄생한 개성공단과는 불과 4킬로미터 거리이다. 대성동 마을회관 옥상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보면 북쪽 주민들의 움직이는 모습까지 또렷하게 보인다.
두 마을은 오랫동안 ‘국기 높이 달기’라는 체제 우월 경쟁을 해왔다. 휴전 직후인 1954년 말 기정동 마을에 30미터가 넘는 깃대가 세워졌다. 거기엔 대형 인공기(북한에서는 ‘공화국 국기’라고 부른다)가 걸렸다. 뿐만 아니라 국기 게양식과 하기식 때 국가를 연주하는 확성기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에 뒤질세라 대성동 마을에는 이듬해 그보다 18미터 더 높은 48미터짜리 깃대가 세워졌다. 2년 뒤 기정동에 80미터짜리 깃대가 섰고 그로부터 3년 후 대성동에는 높이 99.8미터의 깃대가 올라갔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국기 게양대다.
다시 4년 후 기정동에는 160미터짜리가 세워졌다. 북측은 이 깃대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자랑한다. 그곳에 게양된 인공기의 크기도 세계 최대인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 후 양쪽 게양대는 더 이상 높아지지 않았다. 김동구 이장은 “우리 측이 높이 경쟁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그만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양측 모두 국기 제작비와 관리비만 해도 연간 수천만 원이 든다. 두 개의 국기 게양대는 지금도 마주 보고 서 있다.
<대성동 마을 태극기>
62년의 슬픈 역사를 지닌 대성동 주민들은 숱한 애환을 안고 살아간다. 2015년 7월 현재 모두 49가구, 207명인 이곳 주민들은 모두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한다. 대개 한국전쟁 이전부터 살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들이다. 강릉 김씨 집성촌인 이곳은 1년에 8개월 이상 마을에 거주해야만 주민의 자격이 유지된다. 초등학교 이외의 교육기관이 없기 때문에 마을을 떠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이 기준에서 제외된다.
남성은 외지인과 결혼할 경우 배우자와 함께 계속 거주할 수 있지만, 여성이 외지인과 결혼하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전통에 따라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정한 규칙이다. 마을에서 범죄사건이 일어나더라도 한국 경찰이 들어가서 곧바로 체포할 수 없다. 유엔사가 범죄자를 마을에서 추방한 뒤 DMZ 밖에서 체포해야 한다. 마을 거주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DMZ를 관리하는 유엔사 규정과 유엔·주민이 합의한 민사예규에 근거한다.
<북한 기정동 마을 인공기>
이 마을에서 생활하는 데는 숱한 제약이 따른다. 매일 밤 자정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이 금지된다. 매일 오후 7시부터 8시 사이에 집집마다 찾아온 군인들에게 인원점검을 받는다. 중무장한 1개 민정중대(civil administration company)가 24시간 마을을 지킨다. 논밭에 일하러 나갈 때도 2~3일 전 미리 유엔사에 보고해야 한다.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영농 활동을 할 때는 군인이 동행한다. 외부인의 마을 출입은 일주일 전에 신청을 한 후 신원 확인을 거쳐야 가능하다.
대중 교통수단은 하루 세 번 들어오는 버스 밖에 없다. 생활용품을 사려면 문산까지 나가야 하기 때문에 가구마다 자동차를 소유하게 됐다. 그것도 생활형편이 나아져서다. 마을이 생기고 나서 처음엔 마을 밖으로 외출할 수 있는 기회가 일주일에 단 한 번뿐이었다. 그래서 유엔군 트럭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마을에 들어와 생필품을 나눠주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1972년 마을버스를 기증해 버스 운행이 일주일에 세 번으로 늘었다. 1970년대 말부터 버스가 매일 한 번씩 다니다가 횟수가 늘어 지금은 하루 세 번 문산터미널까지 왕복한다. 대성동 주민들은 투표일에 모두 함께 마을 밖으로 외출한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 사람들의 투표율은 매번 거의 100%에 이른다. 투표권이 주어진 것도 1967년부터다. 초기 14년간은 참정권이 제한된 채 살아왔다.
교육시설은 유치원과 초등학교뿐이다. 전교생이 30명이지만, 이 가운데 대성동 아이들은 4명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문산·파주·일산 등지에서 다니는 외부 학생들이다. 학생 수가 적어서 1대 1 교육이 이뤄지는 데다 영어특성화학교로 지정돼 있어 해마다 외부 학생 신청자가 많다. 정원을 늘리지 않기 때문에 전학 희망자가 50여 명이나 밀려 있다고 한다. 2014년 11월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한 대성동초등학교는 도시 학교가 부럽지 않다. 인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소속 미군들이 일주일에 2~3번씩 방문해 영어를 직접 가르치면서 인기가 높아졌다. 졸업생들은 학군 제한을 받지 않고 원하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대성동 마을은 정부의 각종 특별지원으로 생활수준이 높은 편에 속한다. 가구당 평균 경작면적이 약 8만 2500㎡이어서 연간 평균소득은 6000만 원에 이른다. 웬만한 도시 중산층보다 높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토지 소유권을 가질 수 없고 경작권만 허용된다.
이 마을에 조그마한 일이나 변화가 생겨도 뉴스가 된다. 초등학교 졸업식은 어김없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지난 5월 15일 대성동초등학교 전교생이 정종섭 행정자치부장관의 초청으로 서울 정부종합청사를 방문했을 때 대다수 언론이 이를 보도했다. 2013년 6월 이곳에 처음 상수도가 공급됐을 때도 그랬다. 2012년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최신 영화관이 생겼을 때도 화제가 됐다. 1991년 독일 통일 직후 대성동초등학교 학생 7명이 베를린장벽을 견학했을 당시 한국인들에겐 애잔한 뉴스가 됐다.
2013년 8월2일에는 대성동마을 60주년을 맞아 마을회관에서 환갑잔치가 열렸다. 마을 환갑기념 축하 행사에는 경기도지사, 지역구 국회의원, 파주시장, 5개 참전국 대사관 관계자, 마을 민 등 300여 명이 참석했다.
이곳은 판문점 인근에 자리 잡고 있어서 외국의 주요 인사들이 휴전선 일대를 방문할 때마다 각별한 관심을 갖는 지역이기도 하다. 1993년 3월 통일 위업을 이룩한 헬무트 콜 독일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판문점과 대성동 마을을 둘러보고 감회에 젖었다. 2010년 7월 판문점을 방문한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은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와 대성동의 태극기를 가리키며 “지금도 양측이 깃발을 더 높이 달려고 애를 쓰고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곳 주민들은 남북 간 갈등이 높아질 때면 더욱 숨을 죽이고 산다. 2012년 10월에는 탈북자 단체의 대북선전 풍선 날리기를 핑계로 북한이 ‘임진각 군사적 타격’을 위협하는 바람에 마을의 모든 주민이 잠시 벙커 신세를 졌다. 1997년 도토리를 줍던 마을 주민이 북한군에게 끌려갔다가 5일 만에 풀려난 적도 있다. 1975년에도 마을 부근에서 북한군 2명이 농부를 강제로 납치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이곳에 살고 있다는 김경래(金慶來 79) 씨는 “1960년대에 마을 주민 한 사람이 북한군에 의해 사살됐는데 어찌나 끔찍했던지, 그때는 정말 떠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성동 마을 최고령 주민 박필선 씨(왼쪽)와 김경례 씨>
이 마을에서 태어난 최고령 주민 박필선(82) 씨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 옆 마을 기정동에 친형님을 두고도 60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 박 씨는 “왕래를 못 하니까 큰형님이 기정동에 아직도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다”면서 “늘 지척인 옆 마을에 산다고 생각하고 지낸다”고 말했다. 박 씨는 “통일이 돼서 집도 논도 없이 빈손으로 이 마을을 떠나게 된다 하더라도 나의 가장 큰 소망은 통일이다. 살아서 통일되는 것을 꼭 보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곳 주민들은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다. ‘자유의 마을’이란 별칭 외에 ‘통일맞이 첫 마을’로 명명되는 것도 이런 소원이 담겼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이면 기정동 주민 초청 윷놀이대회, 노래자랑대회가 열릴 날을 고대한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5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
Daeseong-dong: An ‘Inland Island’ Looks to the Future
Kim Hak-soon / Journalist;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Daeseong-dong, also known as “Freedom Village,” is the only civilian residential area within the South Korean half of the Demilitarized Zone, a strip of no man’s land that bisects the Korean Peninsula. The village is under the administrative jurisdiction of Josan-ri, in the township of Gunnae-myeon, Paju, Gyeonggi Province. But in fact, this tiny village, which lies alongside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established by the 1953 armistice that halted the Korean War, is under the control of the United Nations Command that oversees the truce. The villagers of Daeseong-dong have lived in an “inland island” for over 60 years since the armistice; today, they are full of fresh hope for the future as their village begins to undergo long-needed renovation and development.
On July 23 this year, a ceremony was held to launch a renovation project for Daeseong-dong, which is also known to Koreans as “The First Village that Would Witness Unification.” Village residents, central and local government officials, business executives, and representatives of civic groups participated in the ceremony signifying joint efforts to revitalize the village. The houses in the village are in disrepair, as they have not been properly maintained since they were built by the government in the 1970s. This is because the villagers need the government’s approval for almost anything, including repairing houses and connecting to the Internet. Access by outsiders to the village is strictly regulated. Kim Dong-koo, 47, the village chief, said with emotion at the ceremony, “Today, we’re going to write a new chapter in the history of our village. I’m very glad that we can attain our long-cherished desires and provide a better living environment for our children.”
Across the Border, Two Villages Face Each Other
The Korean War came to a halt when the Armistice Agreement was signed on July 27, 1953. The armistice allows each side to maintain a village within the DMZ where civilians can reside. Daeseong-dong was so designated, along with Kijong-dong on the North Korean side, on August 3 the same year. Kijong-dong, called “Peace Village,” lies just north of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which is only 1.8 kilometers away from Daeseong-dong. The two villages used to be adjacent to each other before they were separated. Kijong-dong is under North Korean military control, not the UNC’s supervision. This village lies a mere 4 kilometers from the Kaesong Industrial Complex, an inter-Korean economic cooperation project that began a decade ago. If you look through a telescope installed on the rooftop of the Daeseong-dong community center, you can clearly see North Koreans going about their business in Kijong-dong.
The two villages have long competed against each other over which side can raise its national flag higher. In late 1954, a flagpole over 30 meters (about 100 feet) tall was erected at Kijong-dong, flying a large North Korean flag. At the same time, the sounds of the North’s national anthem blared boisterously from loudspeakers whenever the flag was raised and lowered every day. To counter this, Daeseong-dong built a 48-meter-tall flagpole the next year. Two years later, an 80-meter-high flagpole went up at Kijong-dong; three years later, a 99.8-meter flagpole, the tallest of its kind in South Korea, rose up in Daeseong-dong. Four years later, the North again countered with a gigantic flagpole in Kijong-dong, which at 160 meters is the tallest in the world, according to North Korea’s boastful claim. Of course, the flag flying on this flagpole was the world’s largest as well. The South has not attempted to continue this one-upmanship of flagpoles and flags.
“I understand that our side gave up because such a competition was senseless,” Kim, the village chief, said, seemingly unperturbed. It costs each side tens of millions of won a year to produce and maintain the flags alone. The two flagpoles still stand opposite each other.
Living under Uncommon Conditions
For the past 62 years, Daeseong-dong villagers have taken life in stride amidst their trying circumstances. As of July 2015, a total of 207 persons in 49 households live in the village, most of them engaged in farming for their livelihoods. A great majority of them have been residents there since before the Korean War, or their descendants. Many belong to the Kim clan hailing from Gangneung.
Only those who live in the village for more than eight months each year qualify for permanent resident status, which entitles them to exemption from mandatory military service and tax obligations, among other privileges. Because the village only has a kindergarten and elementary school, village children are allowed to enroll at secondary schools without regard for the regular residency requirements. Men who marry women from other regions can maintain their residence in the village. But women residents who marry outsiders cannot continue to live in the village. This is a rule set by the villagers themselves in keeping with traditional practices. If a crime occurs in the village, Korean police cannot simply enter to make an arrest. The police need to wait until the UNC removes the suspect from the village, and then make an arrest outside the DMZ. Detailed rules about living in the village are based on regulations enforced by the UNC, which oversees the DMZ, and rules established jointly by the UNC and villagers.
There are a number of restrictions imposed on the residents of Daeseong-dong, which includes a midnight-to-5:00 a.m. curfew. Soldiers take a roll call of each household from 7:00 to 8:00 p.m. every evening. A heavily armed civil administration unit protects the village around the clock. The villagers must obtain approval from the UNC to travel outside their village. Each farmer needs to report to the UNC two to three days in advance before going out to tend the fields. When they work in areas near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 they are accompanied by soldiers. Outsiders who wish to visit the village must apply for approval for a visit one week ahead of the desired date and must undergo an identification check.
The only public transportation is a bus service that runs between the village and Munsan Bus Terminal three times a day. Because they have to travel all the way to Munsan, outside the DMZ, to buy daily necessities, each village household now owns a car. But this was only possible after their living conditions improved. At first, villagers could travel outside the village only once a week; UNC trucks used to arrive here each week to distribute supplies. From the late 1970s, the bus service increased to once a day. All villagers still travel to the polling station together for each public election; so voter turnout approaches 100 percent every time. But the villagers had to wait until 1967 to be granted suffrage.
Education of Village Children
The only educational institutions at Daeseong-dong are a kindergarten and an elementary school. The elementary school has 30 students, only four of whom are village children. The other students are from outside areas, such as Munsan, Paju, and Ilsan. With a small number of students, a 1 to 1 teacher-student ratio, and an English-for-specific-purposes curriculum, the school attracts children from outside the village. About 50 children from other areas are currently on a waiting list for enrollment.
Daeseong-dong Elementary School students have no reason to envy children in the cities any longer, thanks to the installation of super-speed Internet access in November 2014. The school has become even more popular, with U.S. soldiers assigned to the Joint Security Area in the nearby truce village of Panmunjom visiting the village to teach English two to three times a week. Graduates are exempt from the nationwide school district system and can apply to any middle school across the country.
The villagers of Daeseong-dong enjoy a relatively high standard of living thanks to various perks and subsidies from the state. With the average arable area per household amounting to 82,500 square meters, each household’s yearly income averages about 60 million won, higher than that for urban dwellers. But the villagers cannot own the land; they are only allowed to cultivate it.
Because of its special circumstances, the smallest event or slightest change in the village assumes significance as a news story. The graduation ceremony of the village’s elementary school regularly attracts the media’s attention. The village made headlines for being connected to the piped water supply in 2013; gaining free access to the Internet in 2012; opening a state-of-the-art cinema; and sending seven elementary school students for a visit to the site of the Berlin Wall in 1991, right after Germany’s unification.
Whenever tensions heighten between the two Koreas, the villagers of Daeseong-dong hold their breath. All villagers had to stay inside a bunker briefly in October 2012 when the North Korean regime threatened to launch a strike on South Korea in response to a defector group’s release of propaganda balloons into the North. In 1997, a resident out gathering acorns was captured by a North Korean soldier, but released five days later. Earlier, in 1975, a farmer was abducted by two North Korean soldiers near the village. Kim Kyung-lae, 79, a resident who has lived in the village since before the Korean War, said, “In the 1960s, a villager was shot to death by a North Korean soldier. I felt so terrified that I really wanted to leave.”
So Near Yet So Far
Park Pil-sun, 82, the oldest resident who was born in the village, has not seen his eldest brother for over 60 years. His brother used to live in Kijong-dong, a once adjacent village within walking distance. “Since I can’t travel to that village now, I have no idea whether he’s even still alive or not,” Park said. “But I always think as if he were living nearby.” Close to tears, he added, “My biggest desire is to see national unification, even if I would have to leave this village with nothing but the clothes on my back. I really wish to see the nation reunited while I’m still alive.”
Perhaps more ardently and desperately than anyone else, Daeseong-dong villagers want to see the peaceful unification of their divided nation. Every year, on the fifteenth of the first lunar month, a traditional feast day, the villagers renew their hopes for the day when they can invite residents of Kijong-dong in the North, their longtime neighbors just across the way, to come celebrate with them, play a game of yut, and belt out their beloved “Arirang” in a singing cont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