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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전쟁과 소녀 2003-03-24 전쟁이 참혹과 잔인의 극치라면 소녀는 가냘픔과 순수의 대명사다. 극단(極端)의 대척점에 자리한 전쟁과 소녀가 어우러지면 어김없이 전 인류의 최루탄으로 변한다.주목받는 프랑스 작가 기용 게로의 소설 '어느 전쟁 영웅의 당연한 죽음'도 바로 전쟁과 소녀가 겹쳐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에 폭력성을 돋보이게 하는 수작으로 꼽힌다. 작가는 프랑스 병사에게 집안이 유린당한 베트남 소녀를 만나게 된 주인공이 그녀의 복수를 도와주는 줄거리를 설정해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고발한다. 현실세계에서는 문학이나 예술세계의 감동을 성큼 뛰어넘는다. 1999년 '코소보의 안네 프랑크'로 일컬어졌던 알바니아계 16세 소녀 아도나의 e메일 편지가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다. 아도나는 동갑내기인 미국 버클리 고교생 피네간.. 더보기
[여적] 빼앗긴 분수대 낭만 1998-03-27 시인 조병화(趙炳華)는 분수(噴水)를 이렇게 노래한다.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을 그대로 뿜어도/소용이 없다/차라리 따스한 입김을 다오/저녁 노을에/무지개 서는/섬세한 네 수줍은 모습을 보여라』. 그가 아니라도 분수는 세계 어느 나라 예술인들에게든 더없이 친근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에는 70년대 초반부터 「시가 있는 분수」를 만들어온 「분수동인」까지 생겨났다.실제로 분수대와 광장을 빼놓곤 도시를 생각할 수 없을 게다. 둘은 따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바늘과 실의 관계나 다름없다. 분수없는 도시는 영혼없는 인간과 같다고 비유한 사람도 있을 정도다. 서울의 명물 세종문화회관도 그 자체로서는 물론 분수대 광장때문에 직장인과 외국관광객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90년부터는 .. 더보기
[여적] 들러리 위원회 1998-02-17 미국만큼 위원회가 많은 나라도 드물다. 한동안 터무니없이 늘어나 골칫덩이가 될 정도였다. 그러자 위원회를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던 리처드 닉슨 전대통령도 하는 수 없이 크게 손질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방법으로 위원회 수를 줄일까 고민하던 닉슨은 구체적인 방책을 짜도록 한 참모에게 지시했다. 이 참모가 며칠 뒤 보고해온 방안이란 게 이랬다. 『위원회를 정리하기 위한 위원회를 새로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위원회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의 관행을 빗대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지어낸 것이려니 하겠지만 거짓말같은 사실이다. 위원회라면 일본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좋아한다. 「위원회 정치」라는 말까지 생겨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제도나 법안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하면 미국이나 일본 것을 .. 더보기
[여적] 한국형 FBI 1998-02-14 주요 선진국들은 국내와 해외 분야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이 거의 나누어져있다. 미국은 해외정보를 중앙정보국(CIA)이 맡고 국내업무는 연방수사국(FBI)이 관장한다. 영국은 MI6과 MI5, 프랑스는 DGSE와 DST, 독일은 BND와 Bfv가 각각 나라 밖과 안을 맡고 있다. 나라는 작지만 정보에 관한 한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이스라엘도 해외담당 모사드와 국내담당 샤바크로 분리, 운영된다. 한 정보기관이 국내외 분야를 독점하는 나라는 독재체제 아래 놓여있거나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세계적인 추세 탓인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이끌 새 정부도 미 FBI를 본떠 국내정보 전담기구를 새로 만드는 방안을 검토중이라는 소식이다. 이렇게 되면 안기부, 기무사, 검찰, 경찰에 흩어져있는 국내정.. 더보기
[여적] 인사 여론 떠보기 1998-02-09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됐을 당시 미국의 정치여론을 주도한 언론인은 월터 리프먼과 헨리 루이스 멘켄이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였던 두 사람의 필봉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워싱턴 정가의 희비가 사뭇 엇갈릴 정도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두사람은 루스벨트를 마구 깎아내렸다. 멘켄은 당원들이 전당대회에서 「가장 약한 후보」를 애써 골라 지명했다고 신랄하게 꼬집었다. 「여론」이라는 명저와 함께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리프먼은 한술 더 떴다. 그는 루스벨트가 대통령이란 중책을 맡기엔 주요자질을 단 한가지도 갖추지 못한 「상냥한 보이스카우트 단원」같다고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런 루스벨트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더보기
[여적] 주고 욕먹는 훈장 1998-02-07 산악인 안드레아스 헤크마이어는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을 세계 최초로 오른 뒤 나치정권이 주는 훈장 「산악운동의 영웅상」과 축하금 3백마르크를 받고 카 퍼레이드까지 벌였다. 이를 두고 세계 산악계에선 숭고한 산악정신을 나치정권에 팔아넘긴 행위라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헤크마이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치정권 또한 훈장을 주고 욕얻어 먹은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손꼽힌다.우리나라도 8,000m이상 고봉과 7,000m급 거벽을 정복한 산악인에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체육훈장을 준다. 1977년 고상돈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 8,848m의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뒤부터다. 이 훈장을 탄 사람만 이미 150명에 가깝다. 그러자 훈장을 마구 나눠주듯하는 처사를 마뜩찮아하는 산악인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훈장.. 더보기
[여적] 새 정부의 작명 1998-01-14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김정희였다. 그가 스스로 지은 예명이나 호는 무려 503개나 된다. 귀양살이의 서러움이 담긴 노구가 있는가 하면 취흥이 도도할 때 문득 떠올린 취옹, 공자를 생각하면서 붙인 동국유생도 있다.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단연 우리 귀에 익은 추사였다.비록 김정희가 아니라도 이름에 대한 애착은 누구나 강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름의 상징성을 너무 신비화하다 보면 「이름의 미신」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된다. 고대 로마인들이 이름 좋은 사람부터 전쟁터에 보낸 것도 미신 탓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무런 전공이 없던 스키피오를 일약 지휘관으로 발탁한 것은 단지 이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는 일화까지 전해지고 있다. 요즘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진영이 .. 더보기
[여적] 장애인과 정치 1997-11-12 3년전 뉴욕의 관광명소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장애인 차별 빌딩」으로 낙인찍혀 미국사회의 화젯거리가 된 적이 있다. 미국 장애인권익보호협회가 법무부에 고발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빌딩은 장애인 편의시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1931년에 완공돼 시빗거리가 되지 않을 법도 하다. 하지만 예외를 인정할 수 없다는 연방정부의 판정이 나와 막대한 예산을 들여 100층이 넘는 빌딩의 개수공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우리나라에서라면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 하기야 하버드대가 지난 9월 케네디 스쿨에 입학한 한국인 척추마비 학생을 위해 60년이 넘은 유서깊은 건물의 출입문을 뜯어고쳤다는 소식을 상기해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세계 중심국이 되겠다고 어쭙잖.. 더보기
[여적] 월드컵 본선 4연속 진출 1997-10-20 박찬호선수와 월드컵 축구대회 예선경기가 없었다면 올 한해를 어떻게 넘겼을까 한번쯤 자문해보지 않은 우리 국민은 없음직하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구석을 찾아봐도 실낱같은 희망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집단우울증에 시달려온 우리 국민에게 박찬호와 월드컵축구 대표팀은 구세주였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더구나 축구는 우리국민 전체의 자존심까지 걸린 스포츠다.월드컵 본선 4회 연속진출이라는 쾌거를 사실상 결정지은 우즈베키스탄과의 어웨이경기는 한국축구의 최대약점이었던 골 결정력 부재를 너무나 속시원하게 해소시켜 준 한판이기도 하다. 온 국민이 희열하는 모습을 보느라면 국민대통합의 청량제가 달리 없지 않나 싶다. 대리만족, 카타르시스 등 심리학에서 등장하는 효과들이 우리에겐 어쩌면 부수적인지도 모.. 더보기
[여적] 여중고생 흡연 1997-08-27 담배회사 사장의 손자가 금연운동을 벌인다면 믿어지지 않을 게다. 개발도상국에 대한 담배판촉 때문에 세계적으로 악명높은 미국에서 실제로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다. 미국에 담배를 유행시킨 주역이자 담배회사 「레이놀즈」로 억만장자가 된 리처드 레이놀즈의 손자 패트릭이 바로 그다. 그는 담배기업 손자답게 19살때부터 담배를 피웠다. 여자친구들에게 멋있게 보이려는 게 직접적인 동기였다.그러다 35살때 담배를 끊어 버렸다. 금연과 때를 같이해 그는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레이놀즈 주식을 깡그리 팔아치우고 담배광고금지법 제정을 주창하고 나섰다. 그의 금연운동 이유는 이렇다. 『사람들은 나 자신을 먹여 살린 회사의 손을 물어뜯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를 먹여 살린 손인 담배산업이 실은 수백만명을 죽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