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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한국적인 것의 결정체 도자기 “현대 도예가 나아갈 길은 500년 전 조선 도공의 길을 배우고 찾아가는 것이다.” 20세기 최고 도예가였던 영국의 버나드 리치(1887~1979)가 세계 최고의 명문 도자학교로 불리는 미국 앨프레드 도자학교 강연에서 던진 한마디다. 도예가 나아갈 길은 조선시대 ‘분청자(粉靑瓷)’가 이미 다 제시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가 뉴욕대 특강에선 이런 말도 했다고 전해진다. “도자기를 아예 모르는 사람은 중국, 일본, 조선 순서로 좋다고 평한다. 조금 아는 사람은 중국, 조선, 일본 순이라고 한다. 도자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조선, 중국, 일본 순이라고 말한다.” 그는 동양 도자기의 특색을 ‘한국은 선이고 중국은 색채이며 일본은 모양’이라고 규정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국으로 돌아가 라는 책을 펴낼 만큼 한국.. 더보기
비극의 의미가 웅숭깊은 이유 비극과 희극을 가장 쉽게 구분한 사람은 영국 낭만파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이 아닐까 싶다. 죽음으로 끝나면 비극이고 결혼으로 끝나면 희극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 공식에 맞춰보면 중세 유럽 최고의 연애담 가 대표적인 비극이고,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명작 오페라로 탄생한 은 희극이겠다. 넓게 보면 비극은 죽음·파멸·진정성, 희극은 환희·결혼·축제·번식·재생 같은 것과 연관된다. 비극과 희극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 ‘비극적인 결점’이 그것이다. 주인공이 그걸 극복하면 희극이 되고, 극복하지 못하면 비극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은 비극적인 결점을 극복하지 못해 비극으로 분류된다. 더 중요한 차이는 작품에서 주인공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처리방식에 따라 나타난다. 비극은 갈등의 해결책이 없을 때 일.. 더보기
4대 성인이 인류에 던진 ‘4색 빛’ 세계 4대 성인을 꼽자면 약간의 논란이 따른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까지는 이론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서양에서는 당연히 소크라테스에게 나머지 한 자리가 돌아가야 한다는 견해가 대세다. 여기에 가장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는 게 이슬람권이다.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마호메트)가 4대 성인의 반열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무함마드가 빠지는 건 이슬람을 견제해온 서구의 영향 때문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없지 않다. 무함마드를 4대 성인에 포함할 수 없다는 이들은 몇 가지 이유를 댄다. 그가 포교를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부잣집 과부를 만나 경제적으로 비교적 풍족하게 살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무함마드가 4대 종교인 이슬람교의 창시자이긴 하지만 온전히 성인다운 삶을 살았다고 보긴 어렵다는 근거가 여.. 더보기
옛 그림 감상은 옛 사람 마음으로 미술사학자 오주석을 한마디로 일컫자면 ‘옛 그림을 그윽하고 향기롭게 읽어주는 사람’쯤 되겠다. 그 는 조선시대 그림을 맛깔나게 읽어주는 인물로 첫손가락에 꼽아도 손색이 없다. 그림을 감상할 때 단순히 ‘보기’보다 그림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는 선인들의 가르침을 대중에게 전도하는 데 길지 않은 평생을 바친 공력이 지대하다. 그는 우리네 옛 그림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다가 5년 전 하늘의 뜻을 채 알기도 전인 마흔 아홉에 속절없이 하늘나라로 가버려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의 저작은 그림의 문외한조차 즐겁고도 쉽게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친화력이 강하다. 글은 하나같이 깔끔하게 정제되어 군더더기 한 점 없어 보인다. 대중적이면서도 그림만큼이나 은근한 맛과 훈향, 기품이 풍겨 나오는 문장이다. 마.. 더보기
대권 표심은 복지국가를 향하는데 국가 차원의 복지정책을 사상 최초로 도입한 사람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 독일 총리였던 건 역설이다. 지주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철혈 재상으로 불릴 만큼 카리스마가 강하고 보수 성향인 비스마르크가 좌파·개혁 성향의 입법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세계사적으로도 뜻 깊은 공적 사회보험을 역사상 처음 발의하고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1881년 발의한 산재보험 입법안에 관해 ‘무산계급의 요구와 이익에 봉사하는 공적 보험제도 수립이 곧 인륜과 기독교의 의무이자 국가를 수호하는 정치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정책이 완성될 무렵 자기 이름으로 이뤄낸 위대한 복지제도를 ‘의회와 관료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고 스스로 혹평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가 발생했지만 말이다. 당시 진보적인 사회민주당은 비스마르크.. 더보기
중국제국의 재건과 ‘역사 망각’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가 신성로마제국을 두고 퍼부은 독설에 가까운 촌철살인의 풍자다.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에게 멸망하기까지 시나브로 국력이 쇠잔하고 분열이 이어지면서 17세기부터는 껍데기만 남은 제국이었다. 중국이 초강대국도 아니고 선진국도 아니며 제국은 더욱 아니라는 엄살 섞인 항변을 들고 나올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볼테르의 명언이다. 현대 중국의 설계자 덩샤오핑이 ‘도광양회’(드러내지 않고 실력을 기른다)를 당부할 때만해도 그런 이중성은 납득할 만했다. 하지만 ‘화평굴기’(평화롭게 우뚝 선다)를 부르짖는 지금의 중국이라면 사뭇 달라진다. 중국은 동양 최초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한 진시황 이래 2132년 동안 제국으로 호령한 화려무비한 전력이.. 더보기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걸어서 세계를 일주했다는 프랑스 생물학자 이브 파칼레의 걷기예찬은 문학이자 철학이기도 하다. “걷기, 그 속에는 인생이 들어 있고, 깨달음이 들어 있으며, 신과 조우할 수 있는 기회가 들어 있다. 걷기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현자의 지혜가 번득이고 그의 눈은 시적 통찰력으로 빛난다.” 그는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빌려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도 남겼다. 그는 이란 책에 ‘인간의 지성이 걸음에서 잉태됐다’고 썼다. 하긴 석가모니, 예수, 무함마드(마호메트) 같은 성인들도 생전에 가장 부지런히 걷는 사람이었다. 예수는 고독하게 홀로 걸으며 신과 대화하고, 제자들과 함께 걸으면서 가르침을 전했다. 석가모니도 평생을 걸었다. 전해지는 법어의 절.. 더보기
좋은 전쟁도 나쁜 평화도 없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이자 자유주의자의 한 사람인 이사야 벌린은 레프 톨스토이의 걸작 를 독특한 시각으로 접근한다. 벌린은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이해하지 않고선 를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설명하기 위해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고대 그리스 우화를 빌려온다.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큰 것 하나를 알고 있다.” 희랍 시인 아르킬로코스의 말이다. 벌린이 쓴 는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 고슴도치형 인간은 모든 일을 하나의 핵심적 비전으로 조망하려는 비전형이다. 본질적인 것을 보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는 스타일이다. 고슴도치가 몸을 동그랗게 말아 가시뭉치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여우형 인간은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복잡한 면면들을 두.. 더보기
월드컵과 축구의 정치학 축구소설이 아니면서도 이처럼 풍성하고 격조 높은 축구지식을 담은 소설이 있는지 들어본 적이 없다. 박현욱의 논쟁적 장편소설 말이다.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가 소설의 주제지만 축구로 시작해 축구로 끝난다. 제목부터 발칙한 는 축구라면 질색하는 사람들조차 축구의 마력에 푹 빠지게 하지 않을까 싶다. 축구와 연애, 결혼, 인생의 공통점을 고비마다 절묘하게 연결고리 짓는 작가의 전개방식이 놀랍다. 책의 들머리를 장식하는, ‘인생 그 자체가 축구장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영국 시인 월터 스콧의 말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작가는 축구의 정치·사회학을 종종 유명인사들의 말로 대변한다. 작가 조지 오웰이 축구를 일컬어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했다면, 토털 사커의 창시자이자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 더보기
‘천안함’에는 없는 설득의 리더십 리더십에 대한 정의는 리더와 연구자의 숫자만큼이나 많다고 한다. 리더십에 관한 방법론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리더십에 관한 책이 세상에 넘쳐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리더십=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정의는 갈수록 복잡다단하고 온갖 갈등으로 가득한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인식의 차이를 줄이는 게 리더의 핵심 역량임을 강조한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일화 한 토막. 자녀와 제대로 된 대화가 한 번도 없었던 아버지가 있었다. 우연히 아버지 역할에 관한 책을 읽고 느낀 게 많았던 그는 그날 저녁 아들을 식탁에 불러 앉혔다. “야, 우리 이제부터 대화하자!” 당혹한 아들은 어쩔 줄 몰랐다. 한참동안 기다리던 아버지는 참다못해 한마디를 던졌다. “너, 요즘 몇 등 하냐?” 아버지는 인식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미스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