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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폴 포트의 투항 1997-06-20 캄보디아를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 「킬링 필드」를 맨먼저 떠올린다. 크메르 루주에 의해 적화된 1975년, 수천명의 시체들이 널브러진 살육장을 목도하고 붙잡혔다가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 디스 프란. 먼저 빠져나간 동료 뉴욕 타임스지 기자 시드니 센버그와 그가 재회의 기쁨으로 힘차게 포옹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존 레넌의 「생각하세요」는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킬링 필드」는 그곳에서 3년간 억류됐다가 탈출한 디스 프란이 쓴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데다 그의 역을 맡은 행 느고르도 캄보디아 억류생활끝에 탈출한 경험이 있어 영화의 생동감을 더해준다.「킬링 필드」의 악명높은 실제 주인공은 크메르 루주의 지도자 폴 포트인 것이나 다름없다. 월남 패망직.. 더보기
[여적] 국군 포로의 비극 1997-06-13 전쟁만큼 걸작을 낳는 문학적 소재도 드물게다. 최인훈을 우리 문단의 거목으로 평가받게 했던 「광장」 역시 6·25전쟁이 아니었으면 가능했을까 싶다. 주인공 이명준은 월북한 아버지때문에 시달림을 당하다 북으로 올라가 그곳 정치체제에 가담해 보지만 북의 「광장」, 남의 「밀실」 어디에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전쟁포로가 되어 제3국행을 택하지만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게 소설의 줄거리다. 이렇듯 전쟁과 포로는 바늘과 실에 비유될 만큼 숙명적인 관계다. 극적인 장면이라면 6년6개월동안 공산 베트남의 포로수용소에서 전기고문 등 엄청난 가혹행위를 당한 적이 있는 미 공군조종사 더글러스 피터슨이 베트남주재 미국대사로 부임한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바로 지난달 9일의 일이다.인류 .. 더보기
[여적] 미·일 방위협력지침 1997-06-10 주일미군의 유지이유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막는 명분으로 미국은 「병마개 이론」이란 걸 내세웠다. 미국이 병마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언제 또다시 병속에서 솟아 나올지 모른다는 논리가 미국민과 이웃나라들에 적잖은 설득력을 지녀왔다. 미국의 병마개 이론이 여전히 유효하지만 동아시아지역 국가들에는 이제 우려될 만큼 느슨해졌다. 소련과의 냉전을 구실로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묵인해 온 미국이 탈냉전이후 한층 병마개를 헐렁하게 만들었다.오는 9월 최종확정을 앞두고 엊그제 일본이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들에 사전 설명하는 친절(?)을 베푼 미·일 방위협력지침 중간보고서만 봐도 그렇다. 군사비를 줄여서 좋고 중국도 견제할 수 있어 꿩먹고 알까지 먹게 되는 카드로 생각하는 미국. .. 더보기
[여적] 코아비타시옹 1997-06-03 변화에 대한 인간심리는 언제나 양면성을 지닌다. 상당수의 산업심리학자들은 「인간성은 변화를 싫어한다」는 걸 통설로 내세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창조물 가운데 인간만큼 새 것을 좋아하는 동물은 없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프랑스 총선에서 좌파 연합이 집권 우파를 꺾고 승리를 거머쥔 것은 변화를 갈구하는 유권자 심리의 산물이다. 결국 제5공화국 들어 세번째의 코아비타시옹(좌우 동거 정부)이 불가피해졌다.지난 86년 우파의 총리로 입각해 집권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을 견제했던 시라크 대통령이 이번에는 형편이 뒤바뀌었다. 사회당소속 총리가 될 리오넬 조스팽 제1서기(당수)의 견제를 받게 된 것이다. 돌고 도는 역사의 아이러니로만 표현하기엔 부족한 느낌을 준다. 「변하면 변할수록 옛 .. 더보기
[여적] 영국 재상의 근검 1997-05-08 영국왕이었던 헨리 3세는 국민들의 근검절약을 위해 「검소령」이란 걸 내린 적이 있다. 이 검소령의 뼈대는 의상에 황금이나 보석을 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처음엔 왕의 말발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왕은 궁리끝에 「매춘부나 도둑놈은 이 법령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는 단서를 붙여 다시 공포했다. 그러자 다음 날부터 보석과 황금이 런던시민들의 치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얼마뒤 왕이 프랑스왕족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게 됐다. 영국법령을 알 리 없는 왕비는 갖가지 보석으로 몸단장을 하고 궁전에 나타났다. 헨리 3세는 자신이 공포한 법령을 설명했으나 왕비는 말을 듣지 않았다. 왕은 그 다음날 당장 검소령을 폐지하고 말았다. 왕비부터 법령을 지키지 않아 「매춘부」가 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그.. 더보기
[여적] 충성 맹세 1997-04-25 『미아리의 공동묘지는 자연이 인간을 사멸하게 한 것이며, 동작동의 국군묘지는 인간의 역사, 말하자면 인간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은 흔적으로 남아있다. …자연이 일으키는 사건 그것의 책임은 신이 져야한다. 그러나 역사가 저질러놓은 이 현실의 모든 사고는 인간이 져야만 할 책임이다』. 이어령씨가 쓴 「통금시대의 문학」 가운데 한 대목이다.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크고 작은 전쟁이 꼬리를 물고있다. 나름대로 명분이 있지만 뜻없이 사람만 죽고 다친 것 또한 없지 않다. 1853년 터키와 러시아, 그리고 몇나라가 뒤엉켰던 크림전쟁이 그 본보기다. 전쟁은 2년5개월이나 계속됐지만 의미없는 살상만 되풀이 됐을 뿐이었다. 때문에 뒷날 적십자운동의 계기가 됐다거나, 톨스토이가 종군해 「세바스토폴이.. 더보기
[여적] 정치인의 거짓말 1997-04-16 19세기 중반 미국의 정치권은 뇌물스캔들에 휘말려 있었다. 이른바 크레디트 모빌리어스캔들이었다. 이 무렵 뇌물관행을 지켜보며 일기장속에서나 울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던 시민여론을 작품활동으로 정리한 사람가운데 하나가 마크 트웨인이었다. 그는 한 상원의원의 비서로 겨울회기동안 일하면서 의회의 부패상과 주역들의 언행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렇게해서 나온 소설이 「도금시대」였다.그가 찰스워너와 함께 쓴 「도금시대」는 크레디트 모빌리어회사가 주식으로 의회를 매수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스캔들로 상처를 입은 의원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뒷날 대통령이 돼 암살당한 제임스 가필드는 죽는 날까지 이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를 괴롭힌 돈은 현역의원시절 받은 329달러. 그는 조사위에 불려나가.. 더보기
[여적] 술과의 전쟁 1997-04-04 악마보다 더한 비난과 천사보다 결코 덜하지 않는 찬사를 함께 받는 것이 술이다. 동서양과 시대의 고금에 차별없이 호평과 악평이 극명하게 엇갈린다. 잉거솔이 「술은 범죄의 아비요, 더러운 것의 어미」라고 한것은 마치 「술은 번뇌의 아버지요, 더러운 것들의 어머니」라고한 팔만대장경의 기록을 보는것 같다. 「사람은 체면있는 신사로 술집에 들어갔다가 중죄인으로 술집에서 나온다」는 글롭스의 말이나 법화경에서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고 경계한 것도 맥이 통한다.의적이 처음으로 곡식으로 술을 빚어 바치자 우 임금이 마셔보고 술잔을 거꾸로 엎으면서 『후세에 반드시 이것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가 있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의적을 멀리하고 술을 없애라고 했다는.. 더보기
[여적]두 인간형 1997-04-01 분·초를 다툴만큼 빠르게 변해가는 요즘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심리학자들은 「파랑새 증후군 환자」라 부른다. 파랑새 증후군은 직장인들이 겪는 대표적인 노이로제 현상가운데 하나다. 감원, 명예퇴직, 인력 재배치, 축소경영 등 어딜가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좌우명을 앞세우는 요즘 세태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신경증세다. 이는 경제가 바닥을 헤매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지구적인 현상이기도 하다.이런 분위기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일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면서 다른 곳에 희망적인 일이 있을 거라는 환상에 잠긴다. 동화의 주인공인 남매처럼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파랑새」를 찾아 떠나보고 싶어한다. 심지어 해외에서 그런 파랑새를 찾으려는 명퇴 .. 더보기
[여적] 일본판 리스트 1997-03-27 언어철학의 거장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조차도 뇌물을 준 사실이 있다면 놀랄지 모른다. 독일이 1937년 비트겐슈타인의 조국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때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로 있었다. 당시 빈에 살고 있던 그의 여동생 2명이 나치의 「종족법」으로 재판을 받게 될 처지에 놓였다. 다급해진 그는 독일로 달려가 나치관리와 협상을 벌였다. 곡절 끝에 그는 독일 중앙은행에 돈을 예치하면 여동생들을 다치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스위스은행에 예치된 돈을 찾아 독일관리가 일러준 계좌로 송금, 여동생들이 무사하게 됐음은 물론이다.「공직자와의 뇌물거래는 필요악」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음직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영국의 대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비트겐슈타인과는 반대의 경우다. 뇌물을 받..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