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선정적 보도행태는 태생적 숙명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선정주의’(Sensationalism),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의 역사가 19세기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제로는 세계 최초의 신문으로 공인받는 17세기 초의 독일 ‘아비조’(Aviso)에서도 그 싹을 발견할 수 있다니 말이다.


 미국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언론상의 제정자가 본격적인 선정주의의 원조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퓰리처상을 만든 조지프 퓰리처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 퓰리처가 신문으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발상을 처음으로 해내고, 신문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흥미본위의 선정보도 경쟁을 벌여 오늘날의 언론 상업주의를 정착시켰다. 퓰리처의 선정주의는 언론 품위 손상, 미풍양속 파괴, 풍기문란 조장, 프라이버시 침해를 낳는 원흉이란 비난을 받으면서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이어온다.


 선정주의의 첫 먹잇감이 된 것은 지금도 가장 유효한 ‘범죄사건’이었다. 흔히 ‘페니 프레스’(Penny Press)로 불리는 1센트짜리 대중신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범죄사건을 보도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중생 살해·시신유기 사건 피의자인 이영학 씨 관련 보도는 선정주의 전통을 유감없이 이어가는 듯하다. ‘어금니 아빠 사건’이라는 독특한 작명부터 선정성과 과열 보도 양상이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과 18범인 그가 10년이 넘게 소시민 행세를 하고 선행표창까지 받으며 저질러 온 엽기적인 범행이 속속 드러나 언론의 목표물로서는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신문들은, 특히 인터넷신문은 사회문제나 공익적인 관심보다 ‘조회 수(클릭) 장사’에 한층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방송들은, 특히 종합편성채널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행세했다. 비전문가들이 주류를 이룬 시사토크 패널들은 자극적인 촌평을 쏟아냈다.

 

   ‘어금니 아빠의 행복’이라는 이영학 씨의 책 제목을 딴 ‘어금니 아빠’라는 표제부터 적절성과 거리가 멀었다. 상황 반전이 많았던 범행 분석은 추악성의 묘사에만 비중을 두는 경향이 짙었다. 성폭력 범행과도 연관돼 선정성은 극으로 치달았다. 경찰 수사 속보에서도 추정 보도가 많아 고인이 된 인물들에게 누를 끼칠 우려가 적지 않다.


 가수 김광석 씨의 딸 사망 사실과 부인 서해순 씨의 수상한 처신, 김광석 사망 재수사 논란으로 이어진 보도 역시 이성보다 감성에 치우치지 않았느냐는 비판적 시각이 적잖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 상영을 계기로 드러난 의혹투성이로 말미암아 요절한 고인에게 동정적인 여론이 폭증하고 부인 서해순 씨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 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류에 휩쓸려 일방적 주장을 근거로 한 부풀리기식 보도는 또 다른 선정주의였다. 영화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언론 보도도 부인 서해순 씨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의혹의 근거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으며, 당초 자살로 결론 내린 수사관과 부검 의사를 찾아가는 기초 취재도 없는 경우가 다수였다.

                                                                                      


 고 최진실 씨의 딸 최준희 양이 외할머니에게 폭행과 폭언을 당하고 있다며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렸던 사건도 한쪽 말만 믿고 기사를 썼던 선정주의 보도 사례의 하나다. 초기 보도에서 할머니의 반론권은 생략한 채 사건을 몰아갔다. 경찰 수사결과, 외할머니의 혐의가 없다는 쪽으로 끝났다. 14살인 최준희 양의 언행은 과거에도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드러났지만, 언론은 검증 없이 흥미위주 보도에만 급급했다.


 그런 점에서는 얼마 전 목격자의 말만 믿고 일방적인 기사를 내보냈다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240번 버스기사’ 논란 보도도 똑같다. 건대입구역 근처에서 어린아이가 내린 뒤 어머니가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버스가 출발했다는 온라인 글 보도로 버스기사와 어머니가 엉뚱한 비난과 욕설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버스기사와 어머니 입장을 당연히 확인하고 기사를 써야함에도 목격자의 감정적인 제보 글만 바탕 삼은 선정적인 보도로 죄 없는 사람을 곤경에 빠트렸다.


 ‘알 권리’를 빙자한 선정주의는 섹스, 범죄, 폭력, 추문(스캔들), 재앙 등과 관련된 기사에서 어렵잖게 나타난다. 이런 종류의 기사는 소재 자체 언급만으로도 흥미를 유발하는 대표적인 선정주의 상품이다. 실제로 2015년 말 한국언론진흥재단 설문조사 결과, 한국 언론이 선정성과 흥미위주의 보도를 한다는 수용자들의 부정적 인식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 같은 인식에 따라 언론인의 윤리의식을 높이기 위한 교육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89.2퍼센트에 이르렀다.


 지나친 상업주의가 낳은 선정주의 보도는 궁극적으로 독자의 외면을 받는 지름길이다. 미국 언론학자인 에드윈 에머리 미네소타대 교수는 선정주의를 ‘영혼 없는 저널리즘’이라고 규정했다.


 선정 보도는 자율 규제가 바람직하나, 현재와 같은 경쟁 상황에서는 정착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경쟁은 보도의 질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한다. 언론윤리는 어떤 윤리강령을 시행하든, 어떤 판단기준으로 규제하든 언론사와 언론인이 자기검열을 하지 않으면 실효성이 낮을 수 밖에 없다.

                                                        

                                           이 글은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소식지 2017년 1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새 한지에다 불과 몇 달 전 인쇄한 것처럼 보이는 저 두루마리 책이 1천 년 전의 것이라니. 서울대학교 인근에 있는 호림박물관에서 100권에 가까운 초조대장경 인출본(印出本·인쇄본)을 본 첫 느낌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게다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한데 모은 불교 경전 총서이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불교지식의 총람이라는 대장경의 1천 년 전 인출본이라는 점을 떠올리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격 때문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대부분 변색이나 훼손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경전이었다. 훼손된 인출본도 더러 있긴 하지만 그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온 보관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탓이다.

종이와 먹

 1천 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초조대장경 인출본이 지금까지도 마치 새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는 비밀은 뭘까, 그것부터 궁금해졌다. 한국에서 초조대장경 인출본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호림박물관의 박준영 큐레이터가 그 수수께끼의 일부를 풀어주었다. 결정적인 열쇠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고려 종이에 있었다.

 고려 종이는 닥나무에서 추출한 섬유질을 주재료로 삼아 100번 이상 두드려 만들었다고 한다. 전통제지기법인 ‘흘림뜨기’로 종이를 떠서 더 질기며, 다듬잇돌에 올려놓고 다듬어서 윤기가 나고 매끄러운 종이가 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려 종이는 섬유 사이의 공간이 밀착돼 마치 ‘코팅’을 한 것 같은 효과를 나타낸다. 고려 종이가 내구성이 뛰어나 1천년 세월이 지나도 색깔이 변하지 않고 만들 당시의 광택까지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이런 재질과 제작 방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려 종이는 중성을 띠고 있어서 공기와 빛에 노출되어도 오래 간다고 한다.

 ‘종이는 천 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는 옛말처럼 전통 한지의 우수성은 잘 알려져 왔다. 특히 고려의 종이는 자존심이 강한 중국에서도 최고의 종이로 평가 받았다고 한다. 중국 문헌에는 “고려의 닥종이는 빛깔이 희고 사랑스러워 백추지(百錘紙)라고 부른다. 고려 종이는 누에고치 솜으로 만들어져 능라비단같이 희고 질기기는 비단과 같은데 글자를 쓰면 먹물을 잘 빨아들여 소중히 여겨진다. 이는 중국에도 없는 귀한 물건이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중국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자 송나라 시대 최고의 시인 소동파(蘇東坡·1037~1101)도 고려 종이와 고려청자를 갖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초조대장경 대보적경 권59, 국보 제246호>

 최근 영구임대 형식으로 프랑스에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儀軌)는 수백 년이 지났어도 종이 상태나 화질 등 보존상태가 뛰어나 눈길을 끌었다. 외규장각 의궤 가운데 왕이 보는 ‘어람용(御覽用)’에 쓰인 종이는 ‘초주지(草注紙)’라는 고급 한지다. 고려 종이는 조선의 왕이 쓰던 이 초주지보다 더 뛰어난 종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초조대장경 인출본 종이의 전체적인 비밀은 초조대장경 복원 사업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남권희 경북대 문헌정보학과 교수팀이 밝혀냈다. 2010년 8~11월 남 교수와 고려대장경연구소(소장 종림 스님)가 공동으로 수행한 ‘초조대장경 종이 및 장정 분석을 위한 연구’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이 연구팀은 현존하는 초조대장경 인출본의 종이,축, 배접, 장정, 풀, 표지 등의 비밀을 캐냈다 현존 초조대장경의 크기, 두께, 색상, 종이를 뜨는 발의 형태, 종이의 도침(두드림)정도, 종이표면 등을 밀도조사와 섬유종류분석을 통해 알아냈다. ‘초조대장경 종이 및 장정분석 결과보고서’는 2011년 11월 이후 고려대장경연구소 홈페이지에 실릴 예정이다.


 남 교수는 “닥나무가 주원료인 한지는 특별한 외부영향이나 손상의 원인이 없는 한 2천 년은 너끈하게 유지되는 우수한 종이여서 지금으로서는 1천 년이란 시간의 비밀이 큰 의미가 없을 정도”라고 설명한다. 종이 못지않게 인쇄에 사용한 먹에도 빼놓을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나 옹이를 일컫는 ‘관솔’을 태워서 나오는 그을음을 모으고, 이것을 아교와 섞어 만든 ‘송연묵(松煙墨)’이 비밀의 핵심이다. 이렇게 만든 먹으로 인쇄하거나 쓴 글씨는 검은 빛이 바래지 않고 생생하게 1천 년을 넘어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배접

 이어 붙인 두루마리 책이 1천 년 동안 떨어지지 않고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비결은 탁월한 접착제에 덕분이다. 장(page)과 장을 이어 붙이는 ‘배접’에는 천연곡물인 밀을 3~10년씩 삭힌 것에다 약재를 섞어 만든 풀을 사용했다. 지금까지도 종이 사이가 들뜨지 않고 매끄러운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비법이 여기에 있다. 풀로 이어 붙인 연결 부분이 불과 2~3㎜ 밖에 안 되는데도 튼실하게 고착돼 있는 게 무척이나 신기해 보인다.

 초조대장경의 종이는 인출(인쇄) 시기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국내의 전본들은 대체로 두께가 두껍고 흰색을 띠고 있는 반면, 일본 난젠지(南禪寺) 등에 보존돼 있는 종이는 얇고 엷은 황색을 띠고 있으며 도침도 국내 전본들보다 잘된 상태라고 남 교수는 말한다. 한 종류의 종이를 이용한 인출본과 여러 종류의 지질을 같이 사용한 인출본이 혼재되어 있다.

                                                     

                                                   <대방광불 화엄경>    
소장 현황

 호림박물관에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국보급, 보물급 초조대장경이 소장되어 있다고 박준영 큐레이터는 귀띔한다. 국보급 판본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권2(국보 266호), 아비달마식신족론(阿毗達磨識身足論) 권12(국보 267호), 아비담비바사론(阿毗曇毗婆沙論) 권11(국보 268호), 불설최상근본대락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佛說最上根本大樂金剛不空三昧大敎王經) 권6(국보 269호)이 눈에 띈다. 호림박물관은 초조대장경 판각을 시작한 천 년을 기려 ‘1011~2011 천년의 기다림, 초조대장경’ 특별전을 서울 강남구 신사분관(5월18일~8월31일)과 관악구 신림분관(5월30일~10월31일)에서 열어 일반인들이 국보급 초조대장경도 관람할 수 있게 했다. 초조대장경은 다른 기관 전시에서 한두 점 선보인 적은 있으나 이번처럼 대규모로 전시하기는 처음이다. 국보급과 보물급 등은 제본의 양식과 보존 상태에 따라 3등급으로 구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호림박물관과 더불어 국내에서 초조대장경 소장본이 가장 많은 성암고서박물관은 유일한 초조본 판화(版畵)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 1권이 그것이다. 어제비장전 판화는 초조대장경에만 있는 희귀본이다. 어제비장전은 불교 교리의 깊은 뜻을 읊은 약 1천수의 게송(偈頌·五言詩)으로 된 일종의 불교시집이다. 판화는 모두 상운(祥雲)이 감싸고 있는 수려한 산수를 배경으로 불도(佛道)의 수행과 비법을 전수하는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산이나 바위 등의 지형, 구름과 강물, 각종 나무들의 다양한 모습, 건물, 인물 등의 요소들이 치밀한 각선으로 장엄하게 구사된 고려 초기의 뛰어난 불교 판화다. 이 판화는 초조대장경 개판 당시인 11세기 후기에 인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초기의 회화는 희귀한 실정이어서 고려 초기의 산수화와 불교 경판화의 변상도 양상을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보통 불교회화를 변상(變相)이라 하고, 이 변상을 찍을 수 있게 판각한 것을 불교판화라 한다.


 서울 광화문 사거리 인근에 자리한 한국 유일의 고서박물관인 성암고서박물관에는 고려시대에 각필(角筆)로 표시한 경전이 있어 값어치를 더욱 인정받는다. 각필이란 뾰족하고 단단한 매체로 경전의 본문 가운데 해석하는 순서나 뜻, 토 등을 부호로 눌러 표시한 것을 말한다.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고 빛을 경사진 각도로 비추거나 기기를 사용하여 판독한다. 성암고서박물관은 현재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지 않고 있다.


 국내의 초조대장경 인출본은 호림박물관과 성암고서박물관 각각 100권에 가까운 수량을 소장하고 있으며, 두 곳의 소장본이 전체의 83%를 차지한다. 이밖에 계명대도서관 5권, 국립중앙박물관 4권, 호암미술관 4권, 가천박물관 4권, 구인사 3권, 청주고인쇄박물관 3권, 연세대 도서관 3권, 서울역사박물관 2권, 영남대 2권, 팬아시아종이박물관 2권, 경기도박물관 1권, 명지대 박물관 1권, 삼성출판박물관 1권 등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 가운데는 최근 세상을 떠난, 인기 영어참고서 저자 송성문씨가 기증한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국보 271호)이 있다. 1992년 국보 지정 당시 전문가들이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대장경’이라며 흥분했던 경전이라고 한다. 초조대장경 인출본을 소장하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남 교수는 추정한다.


 초조대장경 인출본은 이처럼 국내에 약 300권이 현존하는 것으로 확인된 것과는 달리 일본에는 난젠지(南禪寺)와 쓰시마(對馬島) 역사민속자료관 등에 무려 2400여 권이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외본을 모두 합하면 2,700여 권인 셈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초조대장경 관람객>
 
 현재까지 조사가 진행된 국내 소장 초조대장경 중 국내에만 소장하고 있는 초조대장경은 78종 154권으로 확인되었다. 난젠지 소장본과 동일본은 50종 66권, 쓰시마 소장본과 동일본은 1종 8권이다. 국내에 보존된 초조대장경 가운데 일본 현존본들과 같은 경전, 같은 권차를 지닌 것이 약 70여권이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경전은 3본이다. 이는 초조본을 완성한 뒤 부분적으로든 일괄적으로든 3번 이상 찍었음을 의미한다. 또 같은 권차의 책이라도 일본본과 국내본을 비교하면 같은 면에서 서로 다른 판각 부분이 있는 20여종 발견된다고 전수조사에 참여했던 남 교수가 전했다. 이는 초조대장경을 완성한 뒤에도 부분적인 수정을 계속했거나 보관상의 문제로 다시 판각해 보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내용이 달라진 경우도 종종 발견된다고 한다.

인출 형태

 초조대장경 인출 형태를 보면 경판을 찍은 종이를 여러 장 길게 붙여 두루마리로 만든 권자본(卷子本) 형태로 제작되었다. 도서장정(圖書裝幀)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책이다. 현재 책의 수량단위 중 ‘권’(卷)이라는 것은 권자본에서 남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최초의 책 장정이 권자본이다. 인출본의 표지는 짙은 쪽빛(감색)으로 염색한 한지, 혹은 일반 한지를 사용하여 제작했다. 감지(紺紙·검은빛이 도는 짙은 남색으로 물들인 종이)를 사용한 경우에는 금으로, 한지를 사용한 경우에는 먹으로 경전의 이름을 적었다.
 초조대장경의 글씨체는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보다 더 명필이라고 박준영 큐레이터는 말한다. 이같은 초조대장경에서 ‘살아있는 천 년의 지혜’가 그윽하게 느껴진다. “대장경을 조성하는 것은 1천 년의 지혜를 모아 1천 년의 미래로 보내는 일”이라고 했던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 일본에 남아 있는 초조대장경 인쇄본

 현존 초조대장경 인출(인쇄)본이 한국보다 일본에 더 많이, 그것도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한국 국민으로서는 아쉽기 그지없다. 일본에는 교토의 난젠지(南禪寺)와 쓰시마(對馬島) 역사민속자료관 등에 무려 2400여 권이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보다 8배 이상 많은 셈이다.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인 가치도 높다.

 특히 난젠지 소장본은 전체 초조대장경의 3분의 1이 넘는 1800여 권에 이른다. 그것도 알려진 판본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 같은 시기에 동시 인출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남권희 교수는 말한다. 한국의 서울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만이 유일하게 난젠지본보다 이른 시기에 인쇄된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 송나라 때의 개보판대장경(開寶版大藏經·971~983)을 바탕으로 간행한 고려 초조본의 체제와 내용이 고려의 당시 상황은 물론 중국 송나라 판의 체계 연구나 복원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난젠지본은 내용면에서도 매우 값지다. 송나라판이 전 세계에서 10여 권밖에 보존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난젠지 소장본 중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7은 국내본과 더불어 각필(角筆)이 있는 중요한 경전이어서 한문의 경전 풀이, 한국어 연구 등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 <어제소요영>(御製逍遙詠) <어제불부>(御製佛賦)는 대형 판화를 수록하고 있는 희귀본이다. 전체 20권 가운데 1권이 결본이지만 약 100판의 웅장하면서도 정밀한 판화를 보여준다. 중국의 개보판 판화는 1권이 겨우 남아있는 실정이다. 

 
난젠지 소장 초조본의 종이는 한두 종류가 함께 쓰인 경우가 대부분이나, 여러 종류의 지질을 같이 사용한 경전도 더러 있다.


  난젠지본 초조대장경의 존재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이전에 알려졌다. 그렇지만 일본학자들에게도 제한적인 공개가 됐을 뿐 한국학자들이 조사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1960년대 이후 김두종 박사가 조사한 몇 권과 천혜봉 성균관대 교수가 조사한 몇 권이 제한적으로 처음 알려졌다.


  쓰시마 역사민속자료관 등에도 600권 정도의 소장본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소장본은 원래 쓰시마 인근 이끼섬(壹岐島)의 안코쿠지(安國寺)와 쓰시마의 조쇼지(長松寺)에 소장되어 있던 것이다. 안코쿠지는 14세기 전반까지 팔만대장경이 소장되어 있는 한국의 해인사(海印寺)와 같은 이름이었으나 후에 일본 전국과 2개 섬에 사찰과 탑을 세워 전란으로 죽은 영혼을 위로하고 국가의 평안을 빌기 위해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안코쿠지에 있었던 <대반야경>(大般若經) 중 초조대장경본이 219권이었으며, 그 중 6권에 고려국 김해부호장(府戶長) 겸 예원사(禮院使) 허진수( 許珍壽)가 정종 12년(1046년) 국가의 안녕과 어머니 수복(壽福),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경전을 찍어 봉안한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초조대장경의 확실한 인출기록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이때 허진수는 경상남도 김해 인근 서백사(西伯寺)라는 사찰 불복(佛腹) 2개에 초조대장경을 공양했다고 한다. 한국 학계에서는 불복 두 곳 중 한 곳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몽땅 약탈돼 일본으로 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쇼지 구장본(舊藏本)은 대장경의 내용 중 맨 앞에 위치하면서 전체를 대표하고, 분량이 가장 많아 ‘600반야’라고 불리는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난젠지 소장본 1800여권 중에는 <대반야경>이 1권도 포함되지 않아 일본으로 동시에 전래됐던 것이 여러 곳으로 나누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난젠지 소장본 중 뒷면에 김해부에서 작성된 문서의 일부가 기록된 것을 보면 같은 단위에서 분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안코쿠지본도 원래 일본 나가사키 부근에 있던 것이 옮겨진 것이다. 역사민속자료관이 관리하고 있는 대장경은 조쇼지와 안코쿠지가 각각 소장했던 것이다. 쓰시마역사민속자료관은 이 대장경이 고려 수도였던 개성의 동쪽 장단도호부에 있던 천화사(天和寺)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사와 신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천화사는 12세기 초 창건돼 15세기 무렵 없어진 사찰이다. 역사민속자료관 측은 대장경 오서(奧書 사본 등의 말미에 베낀 사람의 이름, 제작일자, 제작경위 등을 적은 글)에 천화사에서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개성의 사찰로 추정한다.


  안코쿠지본은1980년대에 도난당해 33권밖에 남아 있지 않고 도난당한 일부가 한국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2005년 쓰시마에 있던 대장경 일부가 국내로 반입돼 학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부적절한 방법으로 국내로 반입된 유물이 문화재 등록 과정에서 서지학자들에게 발견됐고, 일부는 문화재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 유물은 일본 문화청이 자국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어서 반환을 요구해 놓은 상태이다.


 (남권희 교수팀은 일본에 있는 인출본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겨울?여름 방학을 이용한 조사 때는 창문이 없는 방에서 냉난방장치도 없이 겨울에는 옷을 아무리 껴입어도 살 속으로 파고드는 오한을 견뎌내며 작업을 했다고 한다. 여름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덧버선, 마스크, 방진복 등을 착용해 눈만 내놓은 상태에서 일본의 습한 더위를 참고 한두 시간 마다 바깥공기를 마시는 작업을 5년 동안 계속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영문잡지 KOREANA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 Special Feature--Ancient Wisdom Preserved in Scrolls of Goryeo Mulberry Paper  Kim Hak-soon  
 
 I just could not believe that this scroll, which looked like it had been printed only recently on fresh Korean paper (hanji), was actually one thousand years old. I was filled with wonderment the moment I set eyes on the nearly 100 volumes of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s on display at the Horim Museum, near Seoul National University. My heart pounded with the realization that these were thousand-year-old prints from the Tripitaka Koreana, a comprehensive compendium of all the Buddhist scriptures and teachings of Sakyamuni Buddha as well as all concerned texts. Most of the prints are perfectly maintained, with no discoloration or distortion. There was an occasional flawed print but it was due to the fact that the preservation efforts required enormous caution.

Paper and Ink

 What piqued my curiosity was the mystery of how these prints were able to survive one thousand years in such pristine condition. Curator Park Jun-yeong of the Horim Museum, which houses the largest collection of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s in Korea, offered an answer to this riddle: the key is the paper of Goryeo, which was undoubtedly the world’s finest at the time.

 Goryeo paper was made from fibers of the paper mulberry tree, which were pounded over hundred times. Then the fibers would be immersed in a vat of liquid, and then a porous frame was repeatedly dipped into and out of this liquid until layer upon layer of fibers accumulated on the surface, which contributed to the paper’s durability. The sheets were then laid out on a fulling block and pounded thoroughly to produce a smooth, lustrous paper. The fibers adhered so tightly to each other that it seemed like the paper was coated with a special finish. The secret behind the paper’s incredible durability and its original color and sheen remaining intact lies in its special materials and production methods. In addition, Goryeo paper is pH neutral, so it can last for centuries, even when exposed to air and light.

  The superiority of traditional Korean paper has long been well known, as indicated by the old saying: “Paper lasts a thousand years, silk lasts five hundred years.” Goryeo paper in particular was widely recognized for being of the finest quality, even by the prideful Chinese. There is a Chinese reference that reads: “Goryeo mulberry paper is fair and lovely in color and is called ‘white beaten paper.’ Goryeo paper contains threads from silkworm cocoons and thus is glossy and durable like silk, and when it is used for calligraphy it takes the ink well and so is highly prized.” According to legend, Su Shi (1037-1101), one of the eight masters of Song and Tang and the foremost poet of the Song Dynasty, expressed his desire to possess Goryeo paper and Goryeo celadon.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or uigwe, which had been stored at the Outer Gyujanggak on Ganghwa Island, are remarkably well-preserved in terms of the outstanding condition of the paper and clarity of the content. The copy that was prepared for the king was produced on the highest quality paper available, but experts are confident in stating that Goryeo paper was superior to that of Joseon.

 The unique qualities of the paper used for making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s have been brought to light by the research team of Professor Nam Gwon-hui, of the Department of Library Information and Science at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Professor Nam and the Research Institute of the Tripitaka Koreana (directed by Venerable Jongnim) carried out a project, dubbed “Analysis of the Paper and Binding of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in the second half of 2010. They uncovered the secrets of the paper, rollers, backing paper, binding, adhesive, and covers of every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 in existence. The findings were based on detailed analyses of the size, thickness, and color of the paper, as well as the shape of frames used to make the paper, extent to which the paper was pounded, and density of the paper. The research results are scheduled to be posted on the institute’s website in November 2011.
“Korean paper made from the paper mulberry tree is perfectly capable of lasting for 2,000 years, barring external factors or causes of damage, so there is no real point in talking about the secret of how it lasted for 1,000 years,” says Professor Nam.
 
 No less important than the paper’s unique properties is the specially prepared ink. The ink was made by combining a kind of glue with the soot obtained by burning pine branches and knots with high resin content. Ink prepared in this way can maintain a vivid blackness, when used for printing or calligraphy, for over one thousand years.

Naturally Fermented Adhesive

  The ability of these scrolls to retain their original form for 1,000 years is related to the exceptional adhesive that was used in their preparation. The backing paper, which connects one page of the scroll to the next, was affixed with a glue made from natural wheat, which had been aged for up to ten years and then combined with medicinal herbs. Thanks to this meticulous process, the pages remain adhered to the backing and the scrolls have maintained their original shape for all these centuries. There is only two to three millimeters of overlap between the pages, so it is truly amazing that they have remained so firmly in place.
The paper used for making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s shows significant differences depending on the period when the printing was undertaken. Professor Nam says that the existing prints in Korea are mostly on thick sheets of white paper, while those housed at Japan’s Nanzen Temple and other places are on thin and yellowish paper.

Print Collections

 Curator Park Jun-young notes that Horim Museum keeps the largest collection of national treasure and treasure-level original Tripitaka Koreana volumes in Korea. Among these, the second volume of the Avatamsaka Sutra (Buddhavatamsaka Mahavaipulya Sutra, National Treasure No. 266), 12th volume the Discourse on Consciousness Body (Abhidharma Vijnaya-kaya Pada Sastra, National Treasure No. 267), and 11th volume of the Commentary on Higher Teaching (Abhidharma Vibhasa Sastra, National Treasure No. 268) are especially impressive.
 
  To commemorate the thousand-year anniversary of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Horim Museum staged a special exhibition entitled “1011-2011, Thousand-Year Wait: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at its Sinsa branch, in Gangnam-gu (May 18-August 31), and its Sillim branch, in Gwanak-gu (May 30-October 31), in Seoul, so that the general public could view the first edition prints. At this large-scale exhibition, the prints were grouped into various categories, such as national treasures and treasure-level relics, depending on the style of binding and condition of the prints.

 Meanwhile, the Sung Am Ancient Book Museum is well-known for its original Tripitaka Koreana woodblock prints of the Northern Song imperial commentary titled Yuzhi micangquan, the only such volume still in existence. The text itself is a kind of Buddhist poetry anthology, containing some 1,000 poems that praise the Buddha and delve into the profound meaning of his teachings. The prints depict figures teaching the principles of Buddhism against a background of graceful landscapes wreathed by auspicious clouds. These exceptional works from the early Goryeo period depict elaborately formed topographical features, such as mountains and rocks, flowing clouds and rivers, trees in all their varied forms, buildings, and people.

 The prints are presumed to have been made in the late 11th century, when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were carved. With extant paintings from the early Goryeo period being so rare, these prints are precious works of art that offer a glimpse of early Goryeo landscape paintings and sutra illustrations.

 The Sung Am Ancient Book Museum also houses sutras from the Goryeo period that have been marked with a stylus, which enhances the value of its collection. A stylus was made from a hard material, like ivory or wood, which would be carved to a point for marking the paper to indicate the order in which a sutra should be read, or to provide an explanation or commentary of the sutra. The marking can be difficult to see clearly with the naked eye, but it can be discerned when viewed from an angle or with special equipment.
The Horim Museum and Sung Am Ancient Book Museum each house nearly 100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s, accounting for 83 percent of all such prints in Korea. Additional volumes are at Keimyung University (5),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4), Ho-Am Art Museum (4), Gacheon Museum (4), Guin Temple (3), Cheongju Early Printing Museum (3), Yonsei University (3), Seoul Museum of History (2), Yeungnam University (2), Pan-Asia Paper Museum (2), Gyeonggi Provincial Museum (1), Myongji University Museum (1), and Samseong Museum of Publishing (1).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its copy of Acclamation of the Scriptural Teaching (Prakaranaryavaca Sastra, National Treasure No. 271) was donated by the late Song Seong-mun, the author of popular English study books. When this volume was designated a national treasure in 1992, experts were abuzz with excitement, calling it “the oldest Tripitaka Koreana print to retain its original form.” Professor Nam suspects that there are other people who might own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s but prefer to keep it a secret.
Today, some 300 volumes from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s are known to exist in Korea, but the number in Japan is about 2,400. Most of these volumes are housed at Nanzen Temple and Tsushima Folk History Museum. As such, the total number of existing volumes in Korea and abroad amounts to some 2,700.

  According to survey results thus far, there are 154 volumes (78 titles) from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s that exist only in Korea. There are 66 volumes (50 titles) at Nanzen Temple, and eight volumes of a single title at the Tsushima Folk History Museum. Among the prints in Korea, some 70 are from the same sutras and the same volumes as those in Japan. This includes one sutra with three copies, involving at least three printings, either in whole or in part, after the completion of the original set of woodblocks.

  Professor Nam notes that even in prints from the same volumes, some 20 differences have been found after comparing the Japanese and Korean versions. Even after completion of the Tripitaka Koreana woodblocks, the caretakers of the canon continued to make partial revisions to the texts or needed to replace woodblocks due to problems with their storage.
Scroll Volumes

 The Tripitaka Koreana prints were bound in scroll form by joining together a number of woodblock-printed sheets. This is the oldest known method of producing books, and indeed the first books in Korea were in scroll form. The covers of the prints were made of paper dyed in dark blue, though some were left uncolored. Gold ink was used to print the name of the sutra on the dark blue covers, while regular black ink was used for plain covers.

 Curator Park Jun-young says that the calligraphic style of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is of a higher quality than the second edition.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seems to exude a palpable “living wisdom of a thousand years.” Suddenly, I recall the words of National Preceptor Uicheon of Goryeo: “The creation of the Tripitaka Koreana is the gathering of the wisdom of one thousand years and sending it one thousand years into the future.”

■ Majority of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s Preserved in Japan   Kim Hak-soon  
 
 As a citizen of Korea, I could not be more disappointed with the fact that a large majority of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prints are held in Japan, rather than in Korea. It has been found that 2,400 or so Tripitaka prints are housed in Japan, mainly at Nanzen Temple in Kyoto and the Tsushima Folk History Museum. Not only is this amount eight times greater than the number in Korea, many are of a higher quality as well.
 
 Nanzen Temple is home to some 1,800 volumes, or more than one-half of all extant prints of the Tripitaka Koreana. Professor Nam Gwon-hui says that these volumes are presumed to have been printed from the earliest of the woodblocks, all around the same time. Only the Acclamation of the Scriptural Teaching (Prakaranaryavaca Sastra), at the Seoul Museum of History in Korea, has been confirmed to be older. The prints at Nanzenji are highly valued for their content as well.

  Since the structure and content of the original Goryeo Tripitaka Koreana are based on China’s Kaibao edition (971-983) published during the Northern Song Dynasty, the prints are a precious resource for research into the situation of Goryeo, and for efforts to reconstruct the Chinese version, of which only a handful of volumes still exist. The seventh volume of Discourse on the Stages of Concentration Practice (Yogacarabhumi Sastra), along with a version extant in Korea, is an especially important sutra that includes stylus notations, which makes it a key reference for the interpretation of classical Chinese sutras and research on historical Korean.

  In addition, Yuzhi micangquan, Yuzhi xiaoyao yong, and Yuzhi fofu are rare editions that contain large woodcut print works illustrating imperial poetic commentaries of Northern Song. Although one of the 20 original volumes has been lost, they feature some 100 elaborate woodcut prints with intricate details. Only one volume with woodcut prints remains from the Chinese version.

  The printed volumes of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at Nanzen Temple are mostly made with one or two types of paper, but some have papers of varying quality. Their existence had been known prior to the 1930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Korea. However, even for Japanese scholars, they were made available only on a limited basis, while Korean scholars had no opportunity to view the volumes. When Dr. Kim Du-jong and Professor Cheon Hye-bong of Sungkyunkwan University were able to study a few volumes in the 1960s, it marked the first-ever experience of the kind for Korean researchers.

  Some 600 volumes are also housed at the Tsushima Folk History Museum and other locations in Japan. These prints were originally stored at Ankoku Temple on the island of Iki, near Tsushima, and Josho Temple in Tsushima. Ankoku Temple once had the same name as Haein Temple in Korea, where the second edition of the Tripitaka Koreana is maintained, but changed its name in the first half of the 14th century, when Japan built temples and pagodas across the country to console the spirits of those who had died in war and to pray for the nation’s welfare. (The temple’s current name means “Temple of the Peaceful Nation.”)
Among the Maha Prajnaparamita Sutra at Ankoku Temple, 219 volumes are from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and of these, six contain notes indicating that they were printed and enshrined in pagodas in 1046 by Heo Jin-su, an official of Goryeo who served in Gimhae, as a plea for the peace of Korea, longevity of his mother, and repose of his departed father. This is the only definitive record of the printing of copies of the original Tripitaka Koreana. It is said that Heo offered the printed volumes to the Buddha at Seobaek Temple near Gimhae. Korean scholars believe that some of these volumes might have been looted by Japanese invaders and taken back to Japan.

  The prints at Josho Temple are from the very inception of the Tripitaka and thus represent the whole. Being the largest in content, they are called the “600 Prajnaparamita,” which are regarded as the most important sutras.

 Of the 1,800 or so volumes at Nanzen Temple, there is no copy of the Maha Prajnaparamita Sutra, so it is thought that these volumes may have been brought to Japan at the same time and later distributed to various locations. Since some of the Nanzenji volumes have documents prepared in Gimhae on their backside, it is also possible that they were all from the same lot. The volumes at Ankokuji were originally maintained near Nagasaki and thereafter taken to the temple. The Tripitaka volumes at the Tsushima Folk History Museum were originally held at Josho and Ankoku temples.

 It is believed these volumes were created at Cheonhwa Temple, located to the east of the Goryeo capital of Gaeseong, based on bibliographical information of the Tripitaka volumes, which indicates the temple where they were printed. According to records of “The History of Goryeo” (Goryeosa) and the “New Augmented Survey of the Geography of Korea” (Sinjeung dongguk yeoji seungnam), Cheonhwa Temple was founded in the early 12th century and existed until sometime in the 15th century.

 The Ankoku Temple prints were stolen in the 1980s, leaving a remainder of only 33 volumes. It is said that some of the stolen volumes were later discovered in Korea. In 2005, some of the Tripitaka prints that had been held in Tsushima were brought to Korea, which created quite a stir among the domestic academic circles. Relics brought back to Korea through improper means have been discovered by bibliographers during the process of registering the items as cultural properties. And some of these volumes had indeed been designated as cultural properties. However, because these relics had previously been registered as Japanese cultural properties, Japan is currently calling for their return.

 (Professor Nam Gwon-hui made note of the immense hardship that he and his team endured while conducting their study of the Tripitaka prints in Japan. The research was carried out during the summer and winter breaks in rooms without windows or any air conditioning or heating facilities. As such, in winter they had to endure biting cold that chilled them to the bone, no matter how many layers of clothing they wore. And in summer, wearing masks and protective clothing that left only their eyes exposed, they suffered greatly from the oppressive humidity, which required them to take frequent breaks. Still, they continued with their research for five years.)


Posted by 김학순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마르셀 푸루스트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이자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세종대왕격인 울루그베그의 유산이 무수히 남아 있다. 울루그베그와 세종대왕은 닮은 점이 숱하게 많다. 우선 두 제왕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것부터 닮은 꼴이다.

 울루그베그(1394~1449)는 세종대왕(1397~1450)이 그렇듯이 빼어난 학자적 군주였다. 정치보다 학문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울루그베그는 자신이 세운 메드레세(이슬람 국가의 고등교육기관)에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이다”라고 기록해 강력한 교육의지를 펼쳐보였다. 세종대왕 당시의 집현전과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울루그베그 메드레세>

 울루그베그는 정식으로 왕이 되기 전인 열다섯 살 때 이미 부왕(父王)인 샤 로흐의 명에 따라 사마르칸트 지방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스물여섯 살 때인 1420년 레기스탄 광장에 직접 메드레세를 세운 그는 이곳에서 손수 이슬람 신학, 수학, 철학, 천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의 한가운데 자리한 레기스탄 광장은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이다. 이 메드레세는 당대에 1백여명의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했던 중앙아시아의 최고 이슬람 신학교였다. 그의 메드레세에서는 학생들이 당대 최고 학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이슬람 신학과 세속 학문을 연마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사마르칸트를 문예부흥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궁전에는 세속적인 학문과 문화 발전을 위한 환경이 조성됐다.
                                                                               


 울루그베그는 무엇보다 천문학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1428년 큰 천문대를 세워 많은 관측기계를 정비하고, 여러 학자와 협력해 천체표를 만들었다. 울루그베그가 세운 천문관측소에서 그린  천체표는 17세기 영국 왕실의 천문학자들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천체표는 1500년대 유럽에 알려져 1665년에 인쇄됐다.
 이 원형 천문대는 육분의, 상한의, 해시계 등이 갖춰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천문대로 평가받는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혼천의(지구의), 해시계 같은 천문기기도 울루그베그 천문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우리나라 역사학들도 인정하고 있는 추세다. 이곳에서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12세기 동안 바뀌지 않았던 천문 상식들도 수정했다. 울루그베그는 이곳에서 관측한 것을 바탕으로 1437년 992개 별의 위치를 밝힌 <지디이 술타니>라는 당대 최고의 천문도를 발간했다. 1년이 365일 6시간 10분 8초라고 계산한 것은 오늘날의 관측 결과와 1분이 채 안 되는 오차를 보이는 높은 과학기술을 과시했다.
 울루그베그가 사망한 뒤 내분 때문에 천문대는 파괴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육분의를 지탱했던 지하 부분과 천문대의 기초뿐이다. 1908년 이를 발견한 러시아 고고학자는 울루그베그를 한없이 존경한 나머지 죽은 뒤 이 천문대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소원을 풀었다고 전문 가이드가 귀띔해 주었다.
 
울루그베그와 세종대왕은 매우 공교롭게도 건국 시조의 손자이자 네 번째 왕이라는 점도 똑같다. 울루그베그는 티무르 제국의 건국 시조인 아미르 티무르의 손자이며 세종대왕은 태조 이성계의 손자다. 아미르 티무르와 이성계 모두 전설적인 무인 출신의 군주라는 사실도 공통분모를 이룬다. 아미르 티무르가 전투 도중 다리를 크게 다쳐 절름발이로 불렸는데, 이성계도 다리에 화살을 맞는 큰 부상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울루그베그의 아버지 샤 로흐가 문무를 겸비했으며 티무르 제국의 내란을 평정하고 즉위했듯이 세종대왕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도 무예와 학문이 모두 뛰어났으며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은 뒤 즉위한 점도 흡사하다.
 울루그베그가 세종대왕과의 결정적 차이점이라면 한글과 같은 문자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 같은 것들이다.
                            


                                                                               


                                                                                       

  
                                                                                   


                                                                                   

                
                                                                               


                                                                                     


                                                                             


                                                                             


                                                                      


                                                                               


                                                                               


                                                                           


                                                                          


                                                                             


                                                                            


                                                                     


                                                                                   


                                                                         


                                                                                   


Posted by 김학순


“여행은 서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다.”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준다.”

 8월 하순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 중심국가 우즈베키스탄을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감동적인 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려인들의 삶이다. 쌍벽을 이루는 김병화(1905~1974)와 황만금(1921∼1997)은 고려인 1세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단순히 소련 정부가 수여하는 ‘노력영웅’ 칭호를 받아서만이 아니다. 두 사람은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러시아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 이후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피눈물을 극복하고 기적을 일궈낸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소련의 최고 훈장을 받고 ‘노력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김병화는 두 차례나 ‘노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당시 김병화 집단농장이나 황만금 집단농장은 소련이 자랑하는 콜호즈의 대표적인 목화·벼 재배 농장이어서 외국에서 농업 관련 귀빈이 오면 이들 농장을 가장 먼저 방문하게 했을 정도다. 두 농장은 소련 지역에서 가장 높은 수확량의 신화를 창조한 것은 물론 한때 세계 최고의 수확량을 기록하기도 했다고 한다. 황만금은 ‘노동영웅’ 칭호 외에도 세 번이나 레닌훈장, 10월 혁명훈장을 비롯한 노동 영예메달을 받았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공훈 목화 재배업자’란 칭호도 얻었다.

 김병화는 발전을 거듭하던 고려인의 ‘북극성’ 콜호즈가 다민족 콜로즈로 바뀌는 중대 변화를 맞았으나 여러 민족이 힘을 합쳐 농업·목축·건축·문화 등의 각 부문에서 놀라운 성과를 이뤄내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북극성’ 콜호즈를 최고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김병화는 우즈베키스탄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5~8기 대의원으로도 활동했다.

 황만금은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한 후 타슈켄트 남부의 얀기율의 목화공장 공급자로 노동활동을 시작했다. 타슈켄트 철도관리경영 책임자, ‘레닌의 길’ 콜호즈 지도자, 북치르칙 구역 당 관리자로 일하며, 지도자로서의 경험을 쌓아 나갔다. 1953년 타슈켄트 주 북치르칙 구역의 ‘폴리트오트젤’ 콜호즈를 맡으면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됐다. 황만금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집단농장이 번성하면서 소련 당국의 인정과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콜호즈의 지도자였던 황만금은 한편으로는 학업을 계속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고급 당학교 경제과를 졸업했다. 이를 바탕으로 콜호즈에서 더욱 체계적인 지도력을 발휘해 나갔다. 황만금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해 소련 당국은 그에게 내각위원회 국가상을 수여했다. 황만금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공화국에 억압의 바람이 불었던 이른바 ‘목화사업’ 기간에 아무런 근거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됐다. 3년 반 동안 재판도 없이 감옥에 갇혀 있다가 1991년 모든 기소가 기각되고, 이후 복권되는 불운을 겪었다.

 고려인들은 지금도 이 같은 두 사람의 영웅적인 행적을 잊지 못하고 추모한다. 타슈켄트시 백테미르 김병화 농장 한쪽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박물관과 흉상이 세워져 있다.
                                                          


                                                 <김병화 박물관>

 두 사람의 길은 처음엔 같았지만 나중엔 조금씩 달라졌다. 반 세대 정도의 차이 때문일까?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던 김병화는 끝까지 공동체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남았다. 그는 지금도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아버지’로 불린다. 김병화와는 달리 황만금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개혁·개방정책에 영향을 받아선지 새로운 삶에 눈을 떠 공동체 못지않게 개인의 미래도 생각하는 자본가로 변신했다.

 두 사람의 자녀교육관도 달랐다. 김병화는 자신의 사회주의 철학을 자식들의 인생에도 그대로 이입했다. 집단농장에서도 다른 농장원의 자식들과 똑같이 대우했다. 김병화의 자녀들은 소련 해체 후 하나 같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 잘 살지 못한다고 한다.

 반대로 황만금(黃萬金)은 이름처럼 자식들에게도 일찍부터 자본주의에 눈을 뜨게 했다. 황만금의 자녀들은 모두 백만장자로 컸다고 한다. 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가 된 우즈베키스탄에서 거대한 온실재배로 수십만~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재력가가 된 것이다. 황만금의 자녀 중에는 한국에 진출해 거부가 된 인물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바람직한 삶을 살았을까? 평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긴다.
                                                      

                                                   <김병화 흉상>

                                                          


                                                                                  


                                                                                      


                                                                         

                                                          <김병화 박물관 관장인 ‘장 태 에밀리아’ 할머니>

Posted by 김학순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심심풀이로 리처드 스텐걸의 <아부의 기술>(참솔)이란 책을 읽었다. 단순한 처세서나 자기계발서쯤으로 여긴 것과 달리 꽤 깊이가 있는 아부 문화사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수석 편집장을 지낸 저널리스트가 쓴 책이니 날탕은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던 터이다. 지은이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함께 <자유에의 먼 여정>이란 책도 썼기에 더욱 그랬다.
<아부의 기술>이란 번역판 제목은 낚싯줄에 가깝게 느껴진다. 원제가 <You‘re Too Kind : A Brief History of Flattery>이니 말이다. 구체적인 아부 지침까지 주니 전혀 근거 없는 과장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의 본류는 고대 이집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역사를 뒤지며 아부의 실체를 해부한 것이다. 

                                               


 
지은이는 아부를 ‘전략적인 칭찬, 즉 특별한 목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의 칭찬’이라고 정의한다. ‘아부만큼 효과가 뛰어난 최음제는 없다’고 굳게 믿은 헨리 키신저가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최상의 아부를 바친 게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다.
‘미인에게는 지성을 칭찬하고, 지성을 갖춘 여성에겐 미모를 칭찬하라’는 신조를 만든 카사노바는 전략적 칭찬의 모델이다. 가수 휘트니 휴스턴에겐 취미인 그림 솜씨가 좋다고 칭찬하고,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에겐 덩크슛을 칭찬하지 말고 ‘야구 실력도 뛰어나다’라고 슬쩍 치켜세우라는 충고도 마찬가지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은 식민지 시절 영국군의 상관에게 “저는 사령관 각하의 인격을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부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워싱턴은 곧바로 진급했다고 한다.

 
훗날 <아첨론: 원제 In Praise of Flattery>(이마고)이란 책을 쓴 윌리스 고스 리기어는 <아부의 기술>이 대단한 저작이라고 한껏 아부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간추린 ‘아부의 기술’을 참고하시길...... 
 

 

▣ 아부의 기술: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구체적으로 칭찬하라. “정말 대단하십니다!”처럼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지 말라. “당신의 첫 번째 작품이 아주 마음에 들어요. 한국에서만 출시되었는데도 벌써 매진이라니, 아주 훌륭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라.
▲마음에 드는 부분을 애써 찾아라. 당신이 옷 고르는 일에 아주 까다로울지라도 잘된 부분을 열심히 찾아 솔직하게 칭찬하라. 그러면 그 옷이 더욱 마음에 들게 될 것이다.
▲칭찬과 동시에 부탁하지 말라. 칭찬하면서 동시에 부담을 주면, 칭찬받은 당사자는 무조건 조심스러워지는 법이다.
▲너무 멀리 나가지 않도록 체크해라. 지나치게 과한 아부는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아부 받는 사람의 욕망을 100% 충족시키고 나면, 당신의 바닥이 곧 드러나게 된다.
▲특별한 점을 칭찬하라. 항상 상찬의 말을 들으며 잘 나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특별한 점을 찾아서 칭찬하라. 스타 톰 행크스에게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무척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라. 대신 <댓 싱 유 두 That Thing You Do>의 첫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고 말하라.
▲충분히 칭찬 받은 사람에게 아부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더 잘 먹는다고 했다. 아부도 마찬가지다. 평소 아부를 많이 받아온 사람이라면 계속 아부를 받고 싶어 하는 법이다. 늘 새로운 내용으로 메뉴를 바꾸어가며 아부할 수 있다. 동전 한 닢도 들지 않는다.
▲당사자가 없는 곳에서 그를 치켜세워라. 이런 방식이라면, 당신이 목표로 삼는 그 사람은 당신이 아부한다고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그가 대단히 우수한 사람이라고 당신이 A에게 말한다면, A는 밖에 나와 그 사실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신이 환심을 사야 할 대상은 당신에게 자연스러운 호감을 갖게 된다.
▲‘최고야’ ‘엄청나군’ 등의 칭찬은 절대 하지 말라. ‘당신 최고야!’ ‘정말 대단해!’ 등의 표현은 자칫 공허하고 거짓으로 보일 확률이 높다.
▲비교는 결코 나쁘지 않다. 평소 높게 평가받는 인물보다 당신이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더욱 뛰어나다고 말하라. 그렇게 하면 상대방은 매우 만족해 할 것이다.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한 칭찬에는 현실감이 따르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비슷비슷한 사람을 가장 부러워하고 질투하듯이,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보다 더 우수한 점에 대하여 늘 칭찬받고 싶어 한다.
▲‘생각보다 훨씬 좋군요’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말라. 전에는 그 사람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식의 칭찬은 절대로 금물!
▲근거 없는 칭찬은 절대 금물. 친구가 감독한 영화가 형편없는데, 이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그 친구의 등을 슬쩍 치면서 “짜샤, 다시 한 번 해봐”라고 해보라. 입버릇처럼 “좋은데!”라고 말하면 오히려 그가 당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사람에게 같은 칭찬을 되풀이하지 말라. 같은 칭찬을 여럿에게 반복하면, 사람들은 당신의 칭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또 당신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아부나 늘어놓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보일 우려가 있다.
▲칭찬할 때 좋지 않은 면도 살짝 언급하라. 엄청나게 센 칭찬을 할 때는 약간의 비판도 가미하라. “1막에서는 연극이 약간 늘어지는 듯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 같아!”라고 말하라.
▲상대방이 솔직함을 요구하더라도 절대 솔직하게 답하지 말라. 이렇게 요구하는 사람은 사실 솔직함보다 칭찬을, 또 진실보다는 지원이나 지지를 바라고 있다. 따라서 아주 사소한 단점만 지적해도, 그는 이것을 혹독한 비난으로 받아들인다.
▲의견을 따르되 모든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지 말라.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상대방 의견에 동조하기’ 자세를 취할 때, 사소한 것까지 무조건 찬성하지 말라. 사소한 몇 가지에 대하여 반대 의견을 나타내면, 핵심에 대해서는 진심어린 동의를 하고 있다고 상대방이 믿게 된다.
▲미소를 지으며 칭찬하라. 그러면 당신이 보다 쿨하게 보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상대편은 당신이 아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의 거두게 된다.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면서 자신의 기쁨도 즐겨라.
▲처음에는 약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강하게 칭찬하라. 인간은 단기간에 자신을 좋아하게 된 사람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을 서서히 좋아하는 인물을 더욱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연구결과 밝혀졌다.
▲비밀을 말하라. 개인적인 무언가를 드러내라. 이 말은 곧 당신이 상대방을 좋아하고 신뢰하며, 또한 그가 이해력과 분별력이 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서로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기 바란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조언을 구하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법이다. “그린 씨, 저희 시카고 공장에서 이 제품을 생산하고 싶습니다. 현장 경험이 풍부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놀려 먹고 약을 올려라. 조롱하는 듯 한 칭찬이다. “이 미련한 사람아, 당신이 이 엄청난 거래를 성공시켰단 말이지!” 일반적으로 이것은 남성적인 기법이다.
▲가벼운 부탁을 하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보다 자신의 호의를 제공한 사람을 더욱 좋아하는 법이다. 그가 당신에게 친절을 베풀 기회를 만들라.
▲약점을 파악하고, 전혀 반대되는 자질을 칭찬하라. 지독한 구두쇠인 경우, 무척 관대하다고 칭찬하라. 잘난 체하는 여성에게는 대단히 겸손하다고 칭찬하라.
▲평소 칭찬과 친절을 저축하라. 상대방이 당신을 아부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 미리 칭찬과 호의를 예금하라. 나중에 그의 호의가 필요할 때, 저축한 계좌에서 그 보답을 찾아 쓸 수 있을 것이다.
▲사장이나 상무이사에게 ‘대단히 뛰어나다’고 칭찬하지 말라. 당신이 목표로 하는 인물과 당신의 신분 사이에 간격이 크면 클수록, 아부는 그만큼 더 세련되어야 한다.
▲아랫사람에게 ‘대단히 뛰어나다’ 라고 칭찬하라. 아래로 향하는 아부가 훨씬 더 쉽고 효과적인 법이다. 받는 사람은 더욱 크게 감사하고 의심을 적게 갖는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니까.

▣ 아부 받는 기술: 다양한 상황에서 적절하게

▲“아,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약간 비꼬면서 동시에 솔직한 심정을 표현하는 말이다. 한편으로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표리부동을 살짝 비난하는 것이다.
▲“이거, 완전히 비행기탄 기분이네.” 상대방의 친절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듯 호의적인 감정으로 답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음흉한 겸손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나, 완전히 감동 먹었어!” 이 말은 찬사에 상당히 기분 좋은 느낌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마음이 비단결 같다니까!” 이 말은 감사한 마음을 형식적이고 전통적이며 우아하게 잘 드러낸다. 동시에 자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약간 오만한 인상도 풍긴다.
▲“내 장례식장에서 그런 소리 들으면 여한이 없겠다” 칭찬의 내용을 인정하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쓸데없이 뭔소리야……” 이 표현은 어떻게 말하는가에 따라 뜻이 달라진다. 유머러스하게 반응하면 애교스러운 윙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심각하게 반응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침묵. 침묵도 어떤 방식으로 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전해진다. 바닷물이 비를 빨아들이듯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하게 미소를 지으면 아주 좋다. 진지한 표정으로 무겁게 침묵하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상대방을 아주 불편하게 만든다.
▲“말도 안 돼” 시치미를 뗄 때 사용하는 수법이다. 속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거나, 그것이 사실일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무시하되 당신이 아부 받았다는 사실은 알게 하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긋 웃거나 아는 체하는 표정만으로 가능하다.


Posted by 김학순

                                                   


 가수 조영남이 지난 22일 KBS 1TV ‘일본 대지진 피해 돕기 희망음악회’에서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개사한 노래를 부른 일이 네티즌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게 억울할까. 그가 이 시의 개사곡을 만든 것만으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다 때와 장소를 가릴 줄 모르는 분별력은 ‘개념 없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개념 없기로는 곡을 사전에 검토했을 KBS도 마찬가지다. 방송 직후부터 KBS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도대체 역사를 알고 하는 행동이냐”는 등의 비판 글이 잇달아 올라오고 있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할 듯하다. 그러자 KBS가 “이웃나라로서 대참사를 겪은 일본을 돕자는 좋은 취지에서 마련한 행사인데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안타깝다”는 입장만 밝혔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은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2년 형을 선고받은 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해방 6개월을 앞두고 옥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생체실험을 당하다 목숨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혹까지 제기됐을 정도다.

 조영남은 이미 ‘서시’를 원작과 다른 가사로 불렀다가 윤동주 시인의 육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로부터 공개석상에서 따끔한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지난해 가을 방송된 MBC TV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세시봉 특집’에서였다. 당시 윤형주는 “나도 (윤동주의) ‘서시’를 가사로 한 노래를 작곡하려 했지만, 고인의 유해를 수습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시도 음률이 있는 노래다. 네 하찮은 작곡 실력으로 원작을 훼손하지 마라’는 소리를 들었다”며 정색을 하고 일침을 놓았다. 

                                                   


 조영남이 일본과 관련해 생각 없는 언행과 처신을 보인 게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5년 4월 일본의 극우일간지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아래 전문 참조) 내용으로 물의를 일으켜 KBS 프로그램 MC에서 물러나야했다. 민감하기 짝이 없는 일본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지난 9월(2004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신사를 본 후 ‘속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다. 2005년 1월 펴낸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랜덤하우스 코리아)이라는 그의 저서 일본판 발간을 계기로 이뤄진 인터뷰였다. 그는 “보통의 신사와 다름없었다. 한국과 중국이 참배는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이기에 대단한 장소인가보다 하고 세뇌당해 있었다”며 일본 지도자들의 야스쿠니 참배를 대수롭지 않은 듯이 여겼다. 그는 “독도 문제와 교과서 문제로 뜨거운 한국에 비해 차분한 대응을 하는 일본을 보면 냉정하게 대응하기로는 일본 쪽이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그는 2004년 9월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문화인 초청프로그램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주최 측이 “어디에 가고 싶으냐”고 묻자 “야스쿠니 신사에 가고 싶다”고 대답해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조영남의 야스쿠니 ‘참배’는 산케이신문이 나중에 ‘방문’으로 정정 보도했으나 사안의 중대성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야스쿠니 신사는 2차 세계대전 전범들이 합사된 곳이어서 일본 총리나 각료가 참배하면 한국은 물론 중국 대만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자극해 외교문제로 비화하는 곳이다. ‘독도와 교과서 문제에 냉정히 대처하는 일본을 보면 일본 쪽이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는 발언 역시 약간의 지각만 있는 사람이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조영남의 ‘문제 발언’은 이번에도 그랬듯이 역사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불거지고 있을 무렵이어서 한층 거센 반발을 몰고 왔던 것이다. 반일 감정과 산케이신문의 극우 성향을 감안하면 인터뷰에 응한 것 자체부터 안일한 판단이었다.


 조영남의 글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하는 모습을 보며 그네들이 나에게 되묻는 것도 같다.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다. 너희들은 이순신을 섬기지 않느냐.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나 도조 히데키를 위한 제사를 지낸다. 너희들이 안중근, 윤봉길에게 제사를 지내는 건 우리가 상관 안 한다.’ 이 경우 내 쪽에서 즉각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 “일본 신사 참배를 시비함으로써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기보다는 우리 힘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우리의 반일 감정은 병적으로 느껴진다. 반일이 친미를 불렀다. 일본이라는 큰 나라, 좋은 나라를 옆에 두고 친미로 일관해온 60년 삶이 억울하다”

 이래도 그의 평소 주장대로 ‘광대가 한 짓’ 쯤으로 치부하고 내버려둬야 하는 걸까.

■ 조영남의 산케이신문 인터뷰(2005년4월24일자)기사 전문

 독도 문제와 교과서 문제로 반일감정이 강한 한국에서 올해 1월 <맞아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을 출판한 한국의 국민적 가수, 조영남씨(61). 한국에서의 역풍은 거셌지만 “세상 일에 대한 견해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고 지금도 ‘친일’을 굽히지 않는다. 저서가 일본에서 번역되면서 방일한 조씨가 ‘일본에 대한 생각’과 ‘이후의 한일관계’에 대해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친일’하게 된 것은 아니다. 직업상 몇 번이나 방일한 적이 있는 조씨는 일본의 인상을 “풍족하다. 사람이 많다. 이 정도로 큰 나라인데도, 꽤 질서가 잡혀 있다”고 말한다. 아시아의 이웃나라지만 한국과는 다른 풍토, 사람, 문화 등에 흥미를 가졌다.
 3년 전에 한·일이 공동개최한 월드컵. 한국이 4강에 진출하자 많은 일본인이 한국을 열심히 응원해 주었다. 이 감동으로 ‘지일파’를 선언, 다음해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 방일. 국회 연설하는 장면을 한국에서 TV로 보고 있던 조씨는 “의사당에서 18번이나 박수가 나왔다. 한국이었다면 외국의 원수가 국회연설을 해도 처음과 마지막에 박수치는 정도일 텐데. 한국인으로서 기뻤다”며 ‘친일선언’을 했다.
 ‘지일파’ ‘친일파’로서 한국의 유력지 ‘중앙일보’에서 칼럼을 연재하고 있던 작년 9월,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문화인 초청 프로그램으로 방일. 어디 가고 싶은 장소가 있는지 물었다. 조씨는 생각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무대… 아니야, 이 때 생각난 것이 야스쿠니신사였다”고 한다. “아니 야스쿠니라뇨…” 교류기금의 담당자는 말을 잃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조씨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속았다고 생각했다. 보통의 신사와 다름없었다. 참배는 안 된다고 한국과 중국이 목청 높여 외치고 있어서 대단한 장소인가 보다 하고 세뇌당해 있었다”고 조씨는 웃는다
 참배를 마친 조씨는 “그들(일본인)은 자신들의 조상이 아무리 잔인한 일을 했다고 해도 조상이니까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것이고, 우리들은 범죄자 취급할 수밖에 없어서 합사와 참배는 안 된다고 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골은 메워지지 않아도, 조씨는 그 한가운데 서서 응시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친일선언’을 해도 당연히 일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독도 문제와 교과서 문제로 뜨거운 한국에 비해, 차분한 대응을 하는 일본을 보면, “냉정하게 대응하기로는 일본 쪽이 한수 위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게다가 “하나의 사물을 보더라도 지배한 측과 지배당한 측이 상대방의 입장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눈에 띈다. 피해를 입은 쪽은 작은 일로도 ‘으악’ 하게 되겠죠”라고 일본 측에도 이해를 구하고 있다.
 이후의 한·일 양국에 필요한 일은 “서로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상대의 기분을 이해하면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아무런 진전도 없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것조차 막혀 있는 것이 오늘의 한일관계가 아닐까.
 ‘관계개선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하고 생각한 것이 ‘친일’ 책 출판의 이유일 것이다.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 일역(랜덤하우스 고단샤)본은 1500엔으로 간행중.


Posted by 김학순



지난해 초반 이후 최근까지 대기업에서 <논어> 열풍이 불고 있는 건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사이에 기업에서도 인문학 바람이 거센데다 동양 최고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논어>를 기업 임원들이 새삼 즐겨 읽는다고 이상할 건 없지만 유례 없는 현상이어서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몇몇 대기업의 경우 전 사원이 <논어>를 읽고 토론했으며, 더욱 주목할 만한 일은 국내 최고 글로벌기업인 삼성 그룹의 수뇌부와 핵심간부들이 이 책으로 ‘열공’ 중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2년 6개월 만에 복원된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직원들이 <논어>를 읽는 것은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s)는 취지라고 한다. 하긴 조르주 클레망소 전 프랑스 총리 같은 지도자도 정국이 난마처럼 헝클어져 해법을 찾기 어려울 때면 홀로 골방에 틀어박혀 ‘그리스 고전’을 읽으며 ‘기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세대교체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삼성이 그럴 법도 하다.




삼성의 경우 창업주인 이병철 초대회장이 최고의 경영 바이블로 삼았던 책이 <논어>여서 이해는 간다. 이병철 회장은 이에 관해 <호암자전>(중앙M&B)에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가장 감명 받은 책 혹은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서슴지 않고 <논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 <논어>에는 내적 규범이 담겨 있다. 간결한 말 속에 사상과 체험이 응축되어 있어, 인간이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마음가짐을 알려 준다.”

한국기업 간부들이 수많은 고전 중에서 왜 갑자기 <논어>를 유행처럼 많이 찾는 걸까.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가 있긴 하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숭앙받는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의 책 <논어와 주판>(페이퍼로드)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무려 84년 전인 1927년 추세도 출판사가 시부사와의 강연내용을 편집해 첫 출간한 이후 일본에서 ‘비즈니스의 바이블’로 전해내려 온다. 

시부사와는 <논어>를 해석하면서 경제나 상업과 관련된 대목은 정통적인 관점과는 각도를 달리한다. 이를테면 송나라 주자학파의 영향을 받은 에도 시대 유학자들이 “부자는 인의도덕이 없기 때문에 어진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반드시 부귀의 염을 버려라”고 해석했던 부분을 시부사와는 “도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부귀를 얻는 것보다 오히려 빈천한 편이 낫지만, 만약 올바른 도리를 다하고 얻은 부귀라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받아들인다. 시부사와는 ‘부귀와 도덕은 결코 모순관계가 아니어서 함께 추구할 수 있다’며 당시 부정적인 상인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옮긴이 노만수의 해제가 설명했듯이 ‘논어(도덕)와 주판(경제)’의 통일 즉 ‘도덕경제합일’이야말로 ‘진정한 논어’라는 게 시부사와의 생각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2006년 화제를 몰고 온 중국 CCTV 프로그램 <대국굴기>가
“한 손에는 논어, 한 손에는 주판을 든 시부사와의 유상(儒商)이야말로 일본을 굴기시킨 비결이고 중국 굴기의 출구는 <논어와 주판>에 있다”라고 극찬하는 바람에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게다가 세계 경영학의 비조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기업의 목적이 부의 창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여라는 것을 시부사와 에이이치에게 배웠다’고 고백해 전 세계적으로 한층 더 유명해졌다.

시부사와의 <논어> 해석과 실천이 더 큰 빛을 발하는 부분은 드러커가 상찬한 ‘사회적 기여’다. 

시부사와는 올바르게 번, 어마어마한 돈을 교육·의료·빈민구제 등의 공익·사회복지 사업으로 환원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가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논어>를 늘 곁에 두었던 것도 시부사와의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이 회장이 고인이 된 터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맨주먹으로 최고의 삼성을 일궈내면서 일본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점을 미뤄보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시부사와는 제국호텔, 도쿄증권거래소, 기린맥주 등 500여 개의 기업 창립에 관여해 ‘일본 근대자본주의의 최고 영도자’ ‘일본 기업의 아버지’란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한국 재계에 <논어>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은 2009년 11월 시부사와의 <논어와 주판>이 처음 번역돼 출간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시기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논어>만 수백 번 읽고 <논어경영학>(청림출판)이란 책까지 펴낸 민경조 코오롱건설 부회장 같은 마니아도 적지 않으나 그때까지 기업에서 열풍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본에서 장기 베스트셀러인 <논어와 주판>의 한국어 번역판이 1년여 전에 처음 나온 것도 의아한 면이 없지 않다. 불과 보름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판된 두 번역본(페이퍼로드의 <논어와 주판>과 사과나무의 <한손에는 논어를 한손에는 주판을>)이 지난해 여름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CEO가 휴가 때 읽을 책 14선’에 포함되면서 관심도가 부쩍 높아졌다. 
특히 <한 손에는 논어를 한 손에는 주판을>의 경우 삼성경제연구소 추천도서에 선정된 뒤 그 전에 비해 몇 배의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경제연구소 추천도서는 ‘출판계의 마법사’로 일컬어질 만큼 위력이 지대하다. 출판사 경영자들은 삼성경제연구소가 특정 책의 판매량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문화권력 역할을 한다고 부러움 반 불만 반을 섞어 평가한다. 과거 MBC-TV 프로그램 ‘느낌표’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문화관광부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등 권위를 지닌 다른 기관의 추천도서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게 한결같은 얘기다. 

이 연구소의 추천만 받으면 곧바로 책 표지의 홍보 띠지에 그 사실이 등장하는 게 이를 방증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추천한 책 중에는 좋은 책도 있지만 대기업의 논리를 반영한 책들도 적지 않아 책 읽기의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기업인들의 <논어> 열풍은 이래저래 삼성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셈이다. 기업들의 이례적인 풍조이긴 해도 4대 성인의 한 분인 공자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 <논어>를 깊이 읽고 참뜻을 새겨서 나쁠 거야 없겠다. 
시부사와가 강조한 ‘도덕적 기업’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에 방점을 찍으려는 자기합리화의 방편이 아니길 기대할 따름이다. 때마침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절에 너무나 당연한 ‘공자 같은 말씀’인가?                                                                       


Posted by 김학순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돌베개·전태일기념사업회)은 전태일과 경향신문 이야기를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이채롭다. 그것도 드라마나 영화로 치면 클라이맥스로 돋움 닫는 대목에서 하이라이트로  언급된다. 

오프라인(종이신문)의 한정된 지면 때문에 ‘서재에서’ 칼럼에 생략했던 부분에는 때로는 가슴 아프고, 때로는 감격적인 장면이 적지 않다. 그 시작은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1970년 11월13일 분신, 산화하기 바로 한 달여 전인 10월7일부터다.
 






경향신문사  신문 게시판 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방금 나온 석간신문 한 부를 사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으로 달렸다. ‘인간시장’(평화시장 노동자들은 그곳을 이렇게 슬픈 이름으로 불렀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동회(전태일이 만든 평화시장 종업원 친목회) 회원들은 바라던 기사가 난 것을 확인하자 환호성을 터뜨리며 모두 얼싸안았다. 
그날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표제와  ‘소녀 등 2만여 명 혹사’  ‘거의 직업병…. 노동청 뒤늦게 고발키로’ ‘근로조건 영점...평화시장 피복공장’이라는 부제 아래 실렸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이 어린 여자들이 좁은 방에서 하루 최고 16시간 동안이나 고된 일을 하며 보잘것없는 보수에 직업병까지 얻고 있어 근로기준법을 무색케 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 시내 청계천 5~6가 사이에 있는 평화시장 내 각종 기성복 가공업에 종사하는 미싱사, 재단사, 조수 등 2만7천여 명으로 노동청은 7일 실태조사에 나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업체는 전부 고발키로 했다. 노동청은 이밖에 5백 여 개나 되는 서울 시내 기성복 가공업소도  근로자의 실태를 조사키로 했다.

평화시장 내의 피복가공 공장은 4백여 개나 되는데, 이들 대부분의 작업장은 건평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작업장은 비좁다. 더구나 작업장은 1층을 아래위 둘로 나눠 천장의 높이가 겨우 1.6 정도 밖에 안 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인데 이와 같이 좁고 낮은 방에 작업을 위해 너무 밝은 조명을 해 이들 대부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다고 노동청에 진정까지 해왔다.

이들에 의하면 이런 환경 속에서 하루 13~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첫째·셋째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휴일에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 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조차 못할 형편이라는 것이다.

 
특히 13세 정도의 어린 소녀들이 대부분인 조수의 경우 이미 4~5년 전부터 받는 3천 원의 월급을 현재까지 그대로 받고 있다. 이밖에도 이들은 옷감에서 나는 먼지가 가득한 방안에서 하루 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있어 성장기에 있는 소녀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근로조건이 나쁜 곳에서 일하는데도 감독관청인 노동청에서 매년 실시하는 건강진단은 대부분 한 번도 받은 일이 없으며, 지난 69년 가을 건강진단이 나왔으나 공장 측은 1개 공장 종업원 2~3명씩만 진단을 받게 한 후 모두가 받은 것처럼 했다는 것이다.’


지은이 조영래는 이 짤막한 몇 줄의 기사가 어째서 평화시장의 젊은 재단사들을 기쁨에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일까 하고 물음표를 던지며 감동적인 장면을 이어간다.


 
삼동회 회원들은 경향신문사로 달려가서 신문 300부를 샀다. 가진 돈이 없어서 우선 회원인 최종인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서 신문사 측에 담보로 맡겨놓고 신문 대금은 신문을 팔아서 갚기로 했다. 그렇게 산 신문 300부를 들고 그들은 다시 평화시장으로 달려갔다. 큰 모조지를 잘라서 그 위에다 붉은 글씨로 ‘평화시장 기사특보’라고 쓴 단장을 만들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다 두르고 시장 내 이 건물 저 건물을 쫒아 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돈을 받고 팔기도 하였고 어린 시다들에게는 무료로 주기도 하였다.

신문 한 장이면 그때 값으로 20원, 노동자들이 신문을 사서 보는 일이란 드물었는데 그날 신문 300부는 삽시간에 다 팔려버렸다.
어떤 노동자들은 신문을 나눠 주고 있는 삼동회 회원들을 보고 “수고가 많다”고 말하면서 100원씩 또는 200원씩을 신문 값으로 내기도 했는데 신문 한 장 값으로 1000원을 내놓은 노동자도 한 명 있었다.

그날 저녁의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군데군데에 노동자들이 몰려서서 신문 한 장을 두고 서로 어깨 너머로 읽으면서 웅성거렸다. 평화시장의 오랜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만 받아온 그들, 고층건물이 곳곳에 솟아 있는 수도 서울에 살면서도, 바로 창문만 열면 삼일고가도로(지금은 철거돼 청계천으로 복원됐다)를 호기롭게 달리는 자가용차의 화려한 행렬을 볼 수 있으면서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햇빛조차 주어지지 않는 먼지구덩이 속에서 온종일 꼿꼿이 앉아서 손발이 닳도록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던 그들, 굶주림과 질병과 멸시와 천대와 그러고서도 세상의 철저한 무관심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던 그들, 좋은 것은 모두 남들의 것, 더욱이 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바로 그들이, 바로 그 신문에 하찮은 쓰레기 인간들인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이라도 하듯 실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깊은 지층 속을 숨죽여 흘러가던 용암이 분출구를 만나 지맥(地脈)을 찢고 드디어 터져오르는 듯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통곡과 탄식과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도 인간인가 보다. 우리 문제도 신문에 날 때가 있나보다...”

이러한 자각이 노동자들의 잠자던 가슴을 뒤흔들며 평화시장 일대에 퍼져 나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각 작업장 비좁은 먼지구덩이 속의 화제는 모두 ‘평화시장의 기사특보’ 이야기였다. 많은 노동자들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협력하며 싸울 것을 다짐했다.


이어 저자 조영래는 곧바로 언론의 실상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외국 여자가 리처드 버튼이라는 외국 남자와 몇 번 결혼하고 몇 번 이혼했는가를 사람들은 안다. 신문에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시장의 열세 살짜리 여공들이 하루 몇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가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신문에 안 나기 때문이다. 재클린 오나시스라는 외국 여자가 승마를 하다가 발가락이 삐었다 한다면 사람들은 늦어도 바로 다음날까지는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신속 정확한’ 신문보도 덕분이다. 
그러나 강원도 어떤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광부들이 매몰되어 죽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반드시 알지 못한다. 신문에 나지 않거나, 나더라도 거의 눈에 띄지 않을만한 구석자리에 작은 기사로 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신문이 것이다. 우리 사회가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에 비틀거린다면, 우리 사회의 신문 역시 강한 자, 부유한 자의 속성에 비틀거리고 있다.

 
10월 7일의 경향신문 보도가 있는 이래로 전태일의 지도력은 매우 강화되어 있었고, 친구들은 그의 주장을 예전보다 더 존중하게끔 되어 있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제의한 10·20데모 계획은 결행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데모할 때 외칠 구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16시간 작업에 일당 100원이 웬 말이냐!” 등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신문 보도가 있던 날부터 평화시장 주식회사에서는 노동청에 진정을 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화시장 노동자 문제가 신문 보도로까지 발전했을 때 전태일은 불의한 억압의 손길에 강요되었던 침묵은 반드시 깨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여기서 전태일은 자신의 죽음이 어떤 성과를 거두리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던 것 같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이 무렵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간간이 지나가는 말처럼 “나 하나 죽으면 뭔가 달라지겠지...”하고 말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근로기준법이 있어서 노동자들이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이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참상은 더욱더 숨겨지고 전태일의 가슴은 더욱 분노로 터졌다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우연히 들은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내용의 발견은 실로 그의 운명을 좌우한 중대사건의 하나였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향상시킴...을 목적으로”하는 법이라고 그 법 제1조에 못 박혀 있었다.

칼럼에서도 썼듯이 이 책의 지은이 조영래는 탁월한 인권변호사이자 사회개혁가였다. 
한동안 익명으로 남아 있던 저자의 이름을 처음 세상에 공개하고,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갔던 장기표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비유가 흥미롭다.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듯 조영래가 있었기에 전태일의 뜻을 더 힘 있게 펼칠 수 있었다.’ 

조영래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신신당부한 전태일의 뜻을 올곧게 실천하는 촉매가 된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큰 획을 그은 전태일 분신 40주년을 맞아 이 평전을 다시 읽고 그의 산화 정신을 되새기다가 언론의 사명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Posted by 김학순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