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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겉으론 화려, 속으론 골병… 까칠한 ‘세계화의 맨얼굴’

입력 : 2010-10-01 21:51:35수정 : 2010-10-01 21:51:36

 

ㆍ40년 경력의 독일 암행기자 흑인·노숙자 삶의 고통 고발

ㆍ스타벅스 ·변호사의 이중성등 ‘멋진 신세계’ 허울도 벗겨내

▲ 언더커버 리포트…귄터 발라프 | 프로네시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독일 뵐리츠 정원의 유람선에서 고교 물리선생처럼 생긴 노신사가 한 흑인 관광객에게 다가갔다. “맥주 두 잔 주세요.” 흑인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맥주 두 잔 달라니까요”라며 채근했다. 그래도 흑인이 꿈쩍 않자 “서비스 안 해요? 노 서비스?”하며 재차 다그쳤다. 흑인은 웨이터 차림도 아니었고 맥주병 같은 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흑인은 서 있는 것도 아니었고, 노신사와 똑같이 좌석에 앉아 있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40여년 경력의 저명한 독일 암행기자 귄터 발라프가 흑인으로 위장 체험을 하면서 겪은 황당한 일이다. 노신사조차 흑인이라면 으레 웨이터일 것이라고 여긴 때문이다.

변장한 발라프가 한 귀금속 가게에 들러 스톱워치 손목시계가 있는지 물어봤다. 젊은 여점원은 처음엔 그런 시계가 없다고 부인했다. 그가 진열장에서 그 시계를 발견하고 점원에게 손짓하자 마지못해 보여줬다. 하지만 발라프가 시계를 들여다보려 하자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잠시 후 같은 취재팀의 백인 동료가 들어가 같은 시계를 보여 달라고 할 때 여점원은 “조금 전엔 식은땀이 났다”고 털어놨다.

독일의 암행 전문기자 귄터 발라프가 사업가로 변장한 모습. | 프로네시스 제공


발라프는 이처럼 흑인으로 변장한 채 집 구하기, 등산모임 참가, 캠핑장 예약하기, 주말농장 축제 참여, 축구경기 관람, 술집 출입 등을 하며 1년 동안 독일 사회의 인종차별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그의 흑인체험은 백인인 존 하워드 그리핀이 1959년 흑인으로 분장하고 한 달 동안 미국을 떠돌면서 체험한 뒤 쓴 <블랙 라이크 미>(살림)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의 위장 취재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번엔 노숙인으로 살아보기다. 그것도 며칠이나 몇 주 정도가 아니라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한겨울을 오롯이 나는 극한경험이다.

가장 강하게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은 30년 전에 헤어졌다가 공원 노숙장에서 극적으로 재회한 부자(父子)를 만난 것이다. 34세의 미샤는 네 살 때 가족이 흩어지는 바람에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는 정육점에서 힘든 노동을 하다 허리 디스크에 걸리게 됐다. 결국 그 때문에 직장을 잃고 거리에 나앉았다. 미샤는 3년 전 한 공원에 자리를 잡기 위해 미리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과 몇 시간 동안 대화를 하다 서로 알아보게 돼 울면서 부둥켜안았다. 그 후 두 사람은 소박한 검은색 커플반지를 끼고 여전히 함께 노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귄터 발라프가 흑인, 노숙인, 빵공장 노동자로 변장한 모습(왼쪽부터). | 프로네시스 제공


전화 사기(보이스피싱)에 가까운 콜센터 마케팅도 슬픈 체험이다. 넓은 사무실에는 ‘일하면서 배운다’라는 표어가 걸려 있다. 아무도 ‘사기를 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팀장은 이렇게 말한다. “귀를 쫑긋 세우세요. 성공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라고요. 성공하는 사람이 옳은 거예요.” 발라프는 독일에만 6000개가 넘는 콜센터를 ‘새로운 시대의 광산’이라고 부른다. 스트레스로 인한 발병률이 다른 분야에 비해 두 배나 높다. 대부분 신경쇠약이나 정신의학적 질병, 약물남용, 과로 등의 증상을 겪기 때문이다. 뻔뻔함, 속임수 등 점점 철면피가 되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두 달 이상 버텨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국가도 실적 경쟁과 고객 협박이 난무하는 콜센터에 사실상 공범자로 참여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각 지역에 있는 고용지원센터에서는 많은 실업자들을 콜센터로 안내하고 있다. 관청에서는 재원 지원까지 한다.

그는 대형 슈퍼마켓의 납품업체들이 납품단가 때문에 압박을 받고,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극도로 착취당하는 현장도 잠입 취재해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이끌어냈다. 발라프의 다양한 각종 체험기는 공무원과 정치인들을 움직였다.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시설과 업무여건 개선, 법률 개정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처럼 발라프가 선진복지국가인 독일에서 흑인, 노숙인, 하청 노동자, 이주민 등 소외계층이 받고 있는 고통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내부고발자의 생생한 제보를 바탕으로 엮은 ‘고객과 직원의 행복한 일터 스타벅스의 모순’ ‘거꾸로 달리는 독일 철도 민영화’ ‘노조 없는 세상 만들기에 앞장선 무서운 변호사들’도 주먹을 불끈 쥐게 만든다.

발라프는 선진복지사회의 어두운 내막을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에 비유한다. 세계화가 만들어낸, 겉으로는 화려하나 속으로는 골병이 들고 외로운 현대인의 모습이 소설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발라프는 40여년 전 이 일을 시작할 때 더욱 인간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으로 진보하는 걸 기대했지만 그에 대한 회의가 점점 커져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목숨을 건 잠행 취재정신은 보통사람은 물론 모든 언론인의 귀감이다. 독일 사회를 고발한 책이지만 한국에 그대로 대입해도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황현숙 옮김. 1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