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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평등한 자유 속에 약자 위한 차등을

입력 : 2008-03-14 16:35:20수정 : 2008-03-14 16:35:57

사회 정의와 법질서의 관계는 평등과 자유의 관계만큼이나 논쟁적이다. 정의는 흔히 평등의 가치로 여겨진다. 해서 이념 논쟁을 즐기는 이들은 ‘진보·좌파=정의, 보수·우파=질서’라는 단순명쾌한 이분법적 잣대를 들이대곤 한다. 하지만 이항대립적 관계로만 인식하기엔 너무 복잡미묘하다. 정의와 질서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병행한다고 해야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때로는 충돌하고, 선후를 가려야 할 경우도 존재한다.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삼성 떡값’ 로비 대상자 발표를 둘러싸고 갈등국면이 조성되는 것도 정의가 먼저냐 질서가 우선이냐의 논란이 본질이다. 사회정의를 위해서는 거쳐야 할 아픔과 통과의례라고 적극 옹호하는 측과 사회질서의 파괴자로 매도하는 측이 자못 팽팽하다. 법의 3대 이념으로 불리는 정의, 법적 안정성, 합목적성 가운데 앞의 두 가지가 상충할 때가 있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정의가 극도로 우선하면 법적 안정성이 무너지고, 그런 상태에서는 정의가 실현될 수 없어 ‘정의의 극치는 부정의의 극치이다’라는 모순적인 듯한 논리도 생겨났다. 반면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베르 카뮈는 사회정의가 질서에 우선한다고 결연하게 선언했다. 정의와 질서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을 때 불의보다는 차라리 무질서를 택하겠다는 의지다.

기실 서로 생각하는 정의가 다르면 다양한 정의론이 혼재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땐 한평생 ‘정의란 무엇인가’란 화두만 들고 있었던 20세기 철학계의 큰나무 존 롤스(1921~2002)를 찾고 싶어진다. ‘단일 주제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지닐 만큼 ‘정의’라는 한 우물만 팠던 보기 드문 석학. 특유의 성실함으로 말미암아 1000명이 넘는 학생을 몰고 다니면서 ‘하버드의 성인’이란 또 다른 별칭을 얻었던 독보적인 지식인.

출간과 더불어 고전의 반열에 올라 ‘불후의 역작’이란 표현이 썩 잘 어울리는 롤스의 ‘정의론’(이학사)은 저자의 지행합일(知行合一)적인 삶까지 고스란히 묻어난다.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제3의 사회철학 모델을 창안한 공헌은 실로 지대하다. 그런 점에서는 자유주의적 이론체계 속에서 사회주의적 요구를 통합한 롤스의 ‘정의론’이 통일 이후의 한반도에서 요긴한 가치 규범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불현듯 든다.

그가 주창한 정의의 원칙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그 첫째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2 원칙의 핵심은 약자를 우대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허용해야 한다는 ‘차등의 원칙’이다. 정의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한 사회 내에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인 ‘최소의 수혜자’이어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제1원칙이 제2원칙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롤스의 정의론은 심지어 바둑을 두기 전에 돌을 가릴 때도 적용된다. ‘공정하면 정의롭다’는 원칙은 흑과 백을 잡을 확률을 똑같게 만든다. 연장자가 백돌을 한 움큼 잡고, 흑이 홀짝을 맞춰 결정하는 방식이 정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사회정의 쪽에 무게 중심이 있었다면 이명박 정부에서는 법질서 확립에 보다 비중을 두는 듯한 모습이 엿보인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의 저울이 기울면 불행의 씨앗은 싹트기 쉽다. 정의가 강자의 서사시나 승리자의 전리품쯤으로 왜곡되면 롤스를 흠모하는 마음이 분연히 일어난다.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가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어다”(구약성서 아모스 5장 24절)라고 외쳤듯, 정의 사회는 인류의 영원한 화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