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가 여행을 하다 허름한 호텔에 묵을 수밖에 없게 됐다. 그것도 빈 방이 없어 다른 사람과 같은 방을 써야 했다. 밤이 깊어졌으나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다른 침대의 길손도 잠이 오지 않는지 잠자리에서 일어나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그 손님이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 신사는 얼른 일어나 여비가 든 지갑과 귀중품이 든 가방을 들고 물품보관소를 찾아갔다. 잠든 사이에 옆 침대 손님이 자기 귀중품을 훔쳐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게다. 그 때 호텔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같은 방에 계신 다른 분도 조금 전 귀중품을 맡기고 가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의심이 이럴진대 70여 년 동안 적대관계로 지낸 사이라면 오죽할까 싶기도 하다. 북한과 미국이 사상 첫 정상회담 날짜와 장소까지 확정하고도 취소 소동을 벌인 것은 극도의 불신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어서다. 회담 취소를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정대로 다음달 12일 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밝혔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을 숨기기 어렵다.

                                                                                   


 “그럼 그렇지, 그 버릇 어딜 가겠어.” 북한이 지난 16일 남북 고위급 회담을 몇 시간 앞두고 맥스선더 한미연합 공중훈련을 빌미삼아 돌연 무기연기하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현장 취재를 둘러싸고 막판까지 남측 기자들의 애를 태우는 일이 벌어지자 보수진영에서 터져 나온 일성이었다.

 

  북한은 핵실험장 폐기 행사에 전문가를 초청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아 신의가 반감됐다. 일련의 돌출 행동은 북한이 올 들어 남북관계에서 지난날과 달리 신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임해 남측 여론의 호평을 이끌어내고 신뢰를 쌓아가던 참에 나온 것이어서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지난 주말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한 달 만에 전격적으로 다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상호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해 다행스럽다. 6월 1일 남북고위급 회담 재개에 이어 군사당국자회담, 적십자회담을 잇달아 열어 ‘4·27 판문점 선언’을 실천하면서 생채기를 치유하는 과제가 중요해졌다.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과 최선희 외무성 미국 담당부상이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원색적으로 비난한 것도 북한이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기에 충분했다. 중요한 협상을 앞두고 상대방을 막말로 비난하는 사례는 북한의 등록상표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서 북미 실무접촉을 약속해 놓고 북한 측이 나타나지 않은데다 연락조차 끊은 것도 신뢰 궤도이탈이었다. 이 같은 복합적인 사건은 트럼프 대통령의 되치기 협상 기술에 말려드는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 트럼프가 북한의 주특기인 벼랑끝 전술로 회담의 주도권을 빼앗아 온 것이다.


 4·27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궁극적인 목표는 정상국가 지도자 이미지 부각이었다. 국제사회의 정상적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를 전 세계에 과시하려 했던 북한의 신의·성실 훼손은 짧은 기간이나마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에 대한 진정성까지 의심받는 자충수나 다름없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트럼프의 현란한 협상 기술도 한판승을 올린 것처럼 보이지만, 신뢰성에 의문을 남긴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엇보다 동맹국인 한국에게 엄청난 무례를 범했다. 자신의 초청으로 열린 한미정상회담 직후 문재인 대통령의 뒤통수를 친 것은 협상의 기술을 감안하더라도 신뢰를 잃는 처신이었다. 앞으로 다른 동맹국들도 트럼프의 말을 끝까지 믿어야할지 섣불리 단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5·26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도 만만찮음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토로했다고 한다. 북한은 미국이 원하는 완전한 비핵화’ 의지가 확실하지만, 미국이 적대 관계를 종식하고 체제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것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걱정이 그것이다.


 한번 믿음을 잃으면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 법이다. 스위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헨리 프레데릭 아미엘은 “신뢰는 유리거울 같은 것이다. 한번 금이 가면 원래대로 하나가 될 수는 없다”고 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한다고 해도 높은 수준의 신뢰가 한꺼번에 구축되기는 어렵다. 북·미와 한국의 앞길에는 크고 작은 돌부리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신뢰는 진정성에서 나온다’는 말을 기억해야 한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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