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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les of Two Koreas

유진벨재단의 이웃 사랑, 휴전선을 넘나들다

 남북한과 북미 관계가 아무리 얼어붙어도 스티븐 린튼 유진벨재단 회장과 대표단은 해마다 두 차례씩 어김없이 북한에 다녀온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5월에 이어 11월에도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가지고 의료진을 포함한 외국인 대표단들과 함께 방북했다. 심각한 상태인 북한 주민들의 결핵 치료가 어떤 정치적, 외교적 현안보다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적 지원은 남북 관계가 좋든 나쁘든 초정치적, 탈이념적이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비롯됐다.

 미국인이지만 마음은 언제나 한국인이어서 ‘인세반’이란 한국 이름을 쓰는 린튼 회장은 올해로 20년째 북한 결핵 퇴치 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 이유는 북한 보건성(保健省)이 “보건 문제 1위도 결핵, 2위도 결핵, 3위도 결핵”이라고 말했을 만큼 북한에 결핵 환자가 많기 때문이다.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한 뒤 대북 식량 지원 활동을 벌이던 린튼 회장이 결핵 퇴치에 전념하기로 방향을 튼 것은 북한 당국의 공식 요청을 받은 후부터다. 1997년 북한 보건성 최창식(Choe Chang-sik 崔昌植) 부부장이 “식량 대신 결핵 치료 지원을 해 달라”고 린튼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극심한 식량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하던 북한이 먼저 결핵 치료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동안 80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한 린튼 회장은 결핵 퇴치 작업만을 위해 50차례 이상 방북했으며,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비롯해 20년간 대북 의료 지원에 사용한 금액은 약 5,100만 달러(578억 원)에 달한다. 여기에는 이동 X선 검진 차량, X선 진단 기계, 현미경, 수술실 패키지 같은 것들이 망라됐다. 그런 적극적 의료 지원 사업으로 1997부터 2007년까지 25만 명 이상의 일반 결핵 환자가 치료됐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

 

  린튼 회장과 유진벨재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결핵 환자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다. 겨울철 날씨가 남쪽보다 추워서 그렇기도 하고, 가족들이 좁은 방에서 함께 생활하는 환경이 결핵 노출과 전염을 빠르게 하기 때문이다. 나이든 사람뿐만 아니라 갓 출산한 젊은 여성들이 결핵에 걸리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아이를 출산하면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핵에 잘 걸리고, 그러면 아기를 돌보기가 더욱 어렵게 되죠.”

 

 더욱이 일반 의약품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점점 많이 생겨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결핵약에 내성이 생겨 재발한 환자를 뜻한다. 북한은 해마다 새로운 다제내성 결핵 환자가 4,000~5,000명 규모로 발생한다. 다제내성 결핵균은 여러 종류의 치료 약제에 내성을 갖고 있어 치료하기가 쉽지 않다.

 

   일반 결핵 환자는 6∼8개월간 일반적 결핵약을 먹으면 완치율이 90%에 달하지만,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일반 결핵약보다 많게는 100배 이상 비싼 약을, 그것도 1년 6개월에서 2년 정도 장기 복용해야 치료가 가능하다. 완치율도 낮은 편이다. “일반 결핵 환자 1명을 치료하는 데 약 20달러가 소요되는 반면, 다제내성 결핵 환자 1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값을 포함한 치료비가 5,000달러 정도 듭니다.”

                                                                                      


 더욱 난감한 것은 고가의 약을 장기간 투약해야 되는 다제내성 결핵 환자는 치료 시기를 놓치면 치명적이란 데 있다. 다제내성 결핵이 흔히 ‘슈퍼결핵’으로 일컬어지는 광범위 약제내성 결핵으로 이어지면 치료가 더욱 어렵고 사망률도 높다. 다제내성 결핵 환자에 대한 치료가 중단되면 짧은 기간 안에 광범위 약제내성 결핵 환자로 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 지원은 최소한 6개월에 한 번씩 이어져야 한다. 한번 이런 환자로 등록되면 약 2년간 책임을 지고 치료해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 때문에 유진벨재단은 2007년부터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에 집중해 왔다. 그러는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다제내성 결핵 치료 프로그램 하나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수백 명의 북한 결핵 환자와 의료진들이 다제내성 결핵 환자를 치료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는 2008년 북한에서 다제내성 결핵 가능성이 높은 잠재적 환자들 19명의 가래 샘플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6개월 뒤 양성 반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다제내성 결핵 약제를 가지고 북한으로 갔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현재 1,500명 이상의 환자가 언제든지 치료받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지요. 우리는 이제 현장에서 바로 검사를 실시하고 즉시 치료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6개월마다 린튼 회장을 포함한 방북단 10여 명이 보통 3주간 북한에 머물며 결핵 퇴치 활동을 하지만 “충분한 활동을 위해선 기간이 짧다”고 한다. “21일간 12개 요양소를 다 찾아다니지요. 새 환자를 검사해 입원시키고, 기존 환자가 얼마나 호전됐는지 확인하고 약을 직접 전달합니다.”
                                                                       

 

 이런 살뜰한 관리 덕분에 “다제내성 환자 완치율이 76%에 달한다”고 린튼 회장은 설명했다. 세계 평균 완치율이 45%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다. 그래서 북한 주민 사이에선 “다제내성 결핵에 걸려도 유진벨 요양소에 가면 희망이 있다”는 말이 돌 정도다.

 의약품 및 의료 장비 지원과는 별개로 린튼 회장과 유진벨재단이 거둔 가장 큰 성과는 결핵 환자와 의료진에 대한 교육이다. 유진벨재단의 결핵 치료 프로그램을 통해 수천 명의 북한 주민들이 감염된 경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자세히 알게 됐다. 또한 북한 주민 치료를 돕다 보니 린튼 회장 스스로도 결핵에 관한 지식이 웬만한 전문가 수준에 이른 듯하다.

 

 우리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 
 

 린튼 회장 자신도 어린 시절 결핵을 두 번 앓았다고 한다. 그런 만큼 결핵 환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안다. 듣다 보니 린튼 가문은 결핵과 인연이 매우 깊다. 린튼 회장의 어머니 로이스 린튼(Lois Linton)은 1960년 전남 순천 일대에 큰 수해가 난 뒤 결핵이 만연하자, 순천기독결핵재활원을 설립해 30여 년간 결핵 퇴치 운동을 벌였다. 린튼 모자가 남북한에서 결핵 치료 활동을 전개한 특이한 이력과 인연을 만든 셈이다.

 린튼 회장은 의약품과 의료 장비에 대한 사용 결과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분배 투명성을 높이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유진벨재단은 한국 내 후원자와 재미 교포, 한국과 미국 정부 등의 후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현재 후원자의 85%가 한국인이고, 후원받는 북한 주민들은 남한 사람들이 지원해 준 것임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유진벨재단은 모든 지원 대상 의료 기관을 1년에 두 번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고, 사소한 물품이라도 반드시 후원자 이름을 밝힌다. 후원자들이 마련해 재단이 전달하는 결핵약 상자에는 ‘유진벨재단’이라는 글자가 없다. 그 대신 큼지막하게 후원자 이름이 적혀 있다. 린튼 회장은 “유진벨은 심부름하는 단체이고, 나는 심부름꾼에 불과하다”며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영웅시되는 것을 경계했다.
“우리는 택배 기사나 당나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운송하고 관리할 뿐이지 의료 활동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고, 직접 의료 활동을 하며, 혜택을 받는 것은 모두 한민족입니다. 한국인의 사랑이 좀처럼 북한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유진벨재단과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평양, 서울, 워싱턴에서 동시에 필요한 모든 협력을 얻어 내는 것”이라고 했다.


 “남북 간의 긴장 관계는 항상 대북 지원에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 일에 관심을 갖는 많은 후원자가 있어 걱정하지 않습니다. 남북한 간의 긴장감이 없었던 때를 기억하기 어려우니까요.”

 지난해에는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한 정세 변화로 방북 일정에 차질이 있었다. 한국 정부의 약품 반출 승인과 일정 혼란으로 다제내성 결핵 환자 치료 지원에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올해는 계획한 일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린튼 회장은 전했다.

 한 번 방북할 때마다 가져가는 치료약은 6개월 분량이다. 그런데 다음 방북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북한의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게 된다. 이 때문에 린튼 회장은 한국 정부에게 대북 인도적 지원 단체에 대한 면허 제도 같은 것을 도입해 주길 희망한다. 건수별로 물자 반출을 승인하지 말고, 정기적으로 방북하는 검증된 민간 단체는 일정 기간 동안 별도의 승인 없이 물품 반출 승인이나 방북 일정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하면 좋겠다고 한다. 
                                                                        

 “우리는 택배 기사나 당나귀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운송하고 관리할 뿐이지 의료 활동에 필요한 돈을 기부하고, 직접 의료 활동을 하며, 혜택을 받는 것은 모두 한민족입니다. 한국인의 사랑이 좀처럼 북한으로 전달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유진벨재단과 제가 나섰을 뿐입니다.”

 

 린튼 가문의 대를 잇는 한국 사랑

 

  린튼 회장이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7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였다. 그 뒤 1992~1994년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의 통역 겸 고문으로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컬럼비아대학교 교수였던 그는 외증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1995년 유진벨재단을 설립하고, 북한 식량 지원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대북 지원 활동에 나섰다.

 유진 벨은 구한말인 1895년 한국 땅을 밟아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와 봉사 활동을 시작한 미국 선교사였다. 린튼 회장의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은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럿 벨(Charlotte Bell Linton)과 결혼한 뒤 역시 전라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윌리엄 린튼은 일제 강점기 전주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와 함께 추방당했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을 찾아 지금의 한남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 시위 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3·1운동을 미국 사회에 알리기도 했다. 린튼 회장은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1950년에 태어났지만, 선교사인 아버지 휴 린튼(Hugh Linton)을 따라 한국에 와 전남 순천에서 자랐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컬럼비아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남북한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컬럼비아대 교수 겸 동아시아연구소 한국연구센터 부소장을 지냈다. 그는 학자에서 대북 지원 활동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기독교인으로서 저는 개인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지 않습니다. 관건은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1995년 북한 식량난이 본격화하면서 북한 당국이 국제 사회에 공식적으로 지원 요청을 했을 때야말로 ‘이웃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의 동생 존 린튼(John Linton)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장으로 활동하며 초창기에 형의 대북 의료 지원 사업을 도왔다. 린튼 회장은 한국 땅에 첫 발을 디딘 유진 벨 목사 이후 4대에 걸친 한국 사랑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대학 교수라면 은퇴할 나이겠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한 북한 결핵 환자 돕기 활동을 지속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또한 “후원자들과 북한 의료진의 희생 정신이 없으면 이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 글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발간하는 KOREANA 2017년 겨울호에 실린 것입니다. 

 TALES OF TWO KOREAS--Eugene Bell Foundation’s Love of Neighbors across the DMZ


 Kim Hak-soon Journalist and Visiting Professor,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 Korea University

 

 Inter-Korean relations interspersed with tension and confrontation have moved to another precarious level in the wake of North Korea’s recent nuclear weapons and missile tests. Despite these circumstances, a civic group has consistently delivered humanitarian aid to the North. It is the Eugene Bell Foundation, established in 1995 by Stephen Linton, a great-grandson of American missionary Eugene Bell, to mark the centennial of his arrival in Korea.

 

  Stephen Linton and his team visit North Korea twice each year no matter how tense the inter-Korean relations or Pyongyang-Washington ties are. This year is no exception. They visited the North in May and November, along with foreign donors and medical staff, carrying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his is because treating the severe forms of tuberculosis (TB) that many North Koreans are suffering from is more urgent than any political or diplomatic issue. Regardless of whether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re good or bad, the foundation never wavers in its belief that humanitarian aid should be “apolitical and non-ideological.”

 Linton, a Korean at heart who likes using his Korean name “In Se-ban,” has taken the lead in the efforts to beat TB in the North for 20 years. After launching the Eugene Bell Foundation in 1995, Linton first delivered food aid to the North, but then turned his attention to fighting TB there after receiving an official request by the Pyongyang authorities. In 1997, North Korea’s then vice minister of public health, Choe Chang-sik, sent a letter to Linton, asking for “assistance for TB treatment instead of food aid,” although the country was experiencing severe food shortages at the time.

  Linton has visited the North more than 80 times, and over 50 times for TB treatment alone. His foundation has so far delivered some US$51 million (roughly 57.8 billion won) worth of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o the North. The medical equipment included mobile X-ray vans, diagnostic X-ray machines, microscopes and surgical instruments. More than 250,000 patients were treated from 1997 to 2007, thanks to the foundation’s active medical support.

 

Treating MDR-TB Patients

 

  The situation is still not good despite the consistent efforts by Linton and the Eugene Bell Foundation, because Korean winters are cold, particularly in the North, and it is easy for its residents to contract TB as North Korean families often live together in small spaces. Young women who have just given birth and elderly people are especially prone to the disease.
 “Women’s immune system weakens after childbirth and so they get susceptible to TB, and it becomes more difficult for them to take care of their babies,” Linton says.

  Moreover, the situation is increasingly worsening due to the growing number of patients with multidrug-resistant tuberculosis (MDR-TB) that cannot be cured with ordinary medication because its germs are resistant to various types of drugs. Some 4,000 to 5,000 fresh cases of MDR-TB occur in the North each year. The treatment success rate for ordinary forms of TB reaches 90 percent, if patients take medicines regularly for six to eight months. Medicines for MDR-TB are up to 100 times more expensive than drugs for ordinary TB, and the patients have to take such expensive medicines for a year and a half to two years. Besides, the treatment success rate is lower.


“It needs some 5,000 dollars, including medicine expenses, to treat an MDR-TB patient, while a mere 20 dollars is needed to treat an ordinary TB patient,” Linton says.

  What is more embarrassing is that any lapse in the timing of taking the medication can be critical for MDR-TB patients. It will grow even more difficult to treat the patients and their fatality rate will rise if MDR-TB develops into the so-called “super extensively drug-resistant TB.” MDR-TB patients can develop this more dangerous type of TB in a short period of time if their treatment stops. Therefore, aid materials for the treatment of MDR-TB patients should be delivered at least once every six months.
 

 For this reason, the Eugene Bell Foundation has focused on treating MDR-TB patients in the North since 2007. In this process, it has run one of the world’s largest MDR-TB treatment programs and given hundreds of North Korean doctors and TB patients a chance to learn how to treat the illness.

 “In 2008, we began collecting phlegm samples of 19 patients with a potential risk of MDR-TB in North Korea. Six months later, we went back to the North to treat those who had tested positive, carrying the necessary medicines,” Linton says. “This program has developed to the extent that it’s possible to treat more than 1,500 patients at any time. We now can immediately conduct tests and begin treatment on the spot.”

 A team of about 10 people, including Linton, stays in the North for about three weeks on every visit. But Linton says three weeks is not long enough to carry out substantial activities. “We visit all of the 12 sanatoriums during those 21 days. We test and accept new patients to the facilities. And we check to see if patients show improvement and give them medicines.”

 Thanks to careful management, Linton says, the treatment success rate for MDR-TB patients has increased to 76 percent. It is a remarkable achievement, compared with the world’s average treatment success rate of the disease still hovering at 45 percent. These days, there is a saying among North Koreans that “there is hope even for MDR-TB patients if they just go to a Eugene Bell sanatorium.”

  Aside from the delivery of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the greatest achievement Linton and his foundation have accomplished in the North is the education of TB patients and medical personnel. Through the foundation’s TB treatment program, thousands of North Korean residents have learned what to do and what not to do when they are infected with TB bacteria. Linton himself seems to have become a TB expert in the course of helping treat North Korean patients.

 

‘We’re Mere Errand Runners’

 

 Linton fell ill with TB twice himself when he was a child, so he knows well how much pain the patients experience. Come to think of it, the Linton family had something to do with TB treatment all along. Stephen Linton’s mother, Lois Linton, founded the Soonchun Christian Tuberculosis Rehabilitation Center in 1960 when the Suncheon area in South Jeolla Province was hit by a flood and TB was running rampant. She fought the disease there for about 30 years.

  Linton meticulously checks to see how the medicines and medical equipment delivered to the North are used and spares no effort to enhance transparency in the distribution of aid supplies. The Eugene Bell Foundation is run with donations from South Korean and American donors as well as assistance from the South Korean and U.S. governments. Currently, 85 percent of donors are South Koreans, and North Korean beneficiaries are reportedly well aware that most donations come from them.
 

 The foundation makes it a rule to identify donors on all items it delivers on every visit to all target hospitals and facilities. There is no indication of the “Eugene Bell Foundation” but instead, the donors’ names are emblazoned on every medicine box the foundation delivers. Linton warns against the foundation and himself being made heroes. He keeps saying that the Eugene Bell Foundation is an “errand agency” and he is “nothing but an errand runner.”
 

 “We’re just playing the role of a delivery man or a donkey,” he says. “We’re only delivering and managing medicines and equipment. It is the Korean people who donate money for medical activities, give medical services, and benefit from these activities. My foundation and I have come forward, just because of the situation where it’s not easy for South Koreans to deliver their love to their compatriots across the border.”

 Then he adds, “The most difficult part of this job is to get all the necessary cooperation from Pyongyang, Seoul and Washington at the same time. Tense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lways affect our efforts. But we aren’t worried because there are many donors who care about what we are doing. And it’s hard to remember when there wasn’t any tension.”

  In 2016, his travel schedule was interrupted once after a nuclear test by the North, causing a setback in the treatment of MDR-TB patients, due to the suspension of the South Korean government’s approval. But Linton says that in 2017 everything has proceeded smoothly according to schedule.
 

 He delivers just six months’ worth of medication each time.
 Therefore, an interruption in his travel schedule means that MDR-TB patients in the North fail to receive timely treatment. This is why Linton hopes that the South Korean government will introduce a license system for aid groups and simplify the approval process for all aid groups regularly visiting the North.
 “The most difficult part of this job is to get all the necessary cooperation from Pyongyang, Seoul and Washington at the same time. Tense relations between the two Koreas always affect our efforts.”

Love of Korea over Generations

 

Linton first visited North Korea in 1979 when the World Table Tennis Championships were held in Pyongyang. From 1992 to 1994, he met then North Korean president Kim Il-sung three times as an interpreter and advisor for American pastor Billy Graham. In 1995, while a professor at Columbia University, Linton established the Eugene Bell Foundation to commemorate the centennial of the start of Eugene Bell’s missionary activities in Korea and immediately began delivering food aid for North Korean residents.

 Eugene Bell, his great-grandfather on his mother’s side, arrived in Korea in 1895 toward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He began missionary activities and volunteer work in the Jeolla area. William Linton, his grandfather, also did missionary work in Jeolla after marrying Charlotte Bell, a daughter of Eugene Bell. In 1919,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William Linton, who was principal of the Jeonju Shinheung High School, supported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in Gunsan, North Jeolla Province, and informed Americans of it. He eventually saw his school closed and was deported from Korea for having refused to pay respects at a Shinto shrine. After Korea was liberated, he returned and founded a college that has since grown into Hannam University in Daejeon.

  Born in Philadelphia, Pennsylvania, in the U.S. in 1950, Stephen Linton came to Korea with his missionary father, Hugh Linton, and grew up in Suncheon. He obtained a bachelor’s degree in philosophy from Yonsei University and a Ph.D. for a comparative study of North and South Korea from Columbia University. Later, he served as a professor and deputy director of the East Asian Institute’s Center for Korean Research at Columbia University.

 Asked why he turned from a scholar into a civic activist, Linton says, “As a Christian, I don’t believe that individual persons can change the world. I believe that the key is to put the love of neighbors into practice.”

 He keenly felt the need for the “love of neighbors” in 1995 when the North Korean authorities made a formal request for assistance to the international community as its food shortage came to a head. At the initial stage, his younger brother, John Linton, who is currently director of the International Health Care Center at Yonsei University’s Severance Hospital, helped give medical assistance to the North.

  Regarding his family’s love of Korea over four generations, Linton simply notes, “We’ve done what we should have done as believers of God.”

  But he seems firmly resolved when he says, “I would have retired by now if I had been a university professor. But I will continue to help treat TB patients in North Korea as long as I see the necessity.” Then he goes on to express his gratitude to all donors, as well as the medical staff in the North, saying, “Without their admirable spirit of sacrifice, this job would have been impossi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