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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

선정주의는 필요악이 아니다

  ‘언론의 선정적 보도행태는 태생적 숙명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선정주의’(Sensationalism),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의 역사가 19세기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제로는 세계 최초의 신문으로 공인받는 17세기 초의 독일 ‘아비조’(Aviso)에서도 그 싹을 발견할 수 있다니 말이다.


 미국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언론상의 제정자가 본격적인 선정주의의 원조라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퓰리처상을 만든 조지프 퓰리처는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란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그런 퓰리처가 신문으로 장사를 할 수 있다는 발상을 처음으로 해내고, 신문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와 흥미본위의 선정보도 경쟁을 벌여 오늘날의 언론 상업주의를 정착시켰다. 퓰리처의 선정주의는 언론 품위 손상, 미풍양속 파괴, 풍기문란 조장, 프라이버시 침해를 낳는 원흉이란 비난을 받으면서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이어온다.


 선정주의의 첫 먹잇감이 된 것은 지금도 가장 유효한 ‘범죄사건’이었다. 흔히 ‘페니 프레스’(Penny Press)로 불리는 1센트짜리 대중신문이 나오기 전까지는 범죄사건을 보도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중생 살해·시신유기 사건 피의자인 이영학 씨 관련 보도는 선정주의 전통을 유감없이 이어가는 듯하다. ‘어금니 아빠 사건’이라는 독특한 작명부터 선정성과 과열 보도 양상이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과 18범인 그가 10년이 넘게 소시민 행세를 하고 선행표창까지 받으며 저질러 온 엽기적인 범행이 속속 드러나 언론의 목표물로서는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신문들은, 특히 인터넷신문은 사회문제나 공익적인 관심보다 ‘조회 수(클릭) 장사’에 한층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방송들은, 특히 종합편성채널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행세했다. 비전문가들이 주류를 이룬 시사토크 패널들은 자극적인 촌평을 쏟아냈다.

 

   ‘어금니 아빠의 행복’이라는 이영학 씨의 책 제목을 딴 ‘어금니 아빠’라는 표제부터 적절성과 거리가 멀었다. 상황 반전이 많았던 범행 분석은 추악성의 묘사에만 비중을 두는 경향이 짙었다. 성폭력 범행과도 연관돼 선정성은 극으로 치달았다. 경찰 수사 속보에서도 추정 보도가 많아 고인이 된 인물들에게 누를 끼칠 우려가 적지 않다.


 가수 김광석 씨의 딸 사망 사실과 부인 서해순 씨의 수상한 처신, 김광석 사망 재수사 논란으로 이어진 보도 역시 이성보다 감성에 치우치지 않았느냐는 비판적 시각이 적잖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 상영을 계기로 드러난 의혹투성이로 말미암아 요절한 고인에게 동정적인 여론이 폭증하고 부인 서해순 씨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 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류에 휩쓸려 일방적 주장을 근거로 한 부풀리기식 보도는 또 다른 선정주의였다. 영화는 더 말할 것도 없고, 언론 보도도 부인 서해순 씨가 남편을 살해했다는 의혹의 근거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으며, 당초 자살로 결론 내린 수사관과 부검 의사를 찾아가는 기초 취재도 없는 경우가 다수였다.

                                                                                      


 고 최진실 씨의 딸 최준희 양이 외할머니에게 폭행과 폭언을 당하고 있다며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렸던 사건도 한쪽 말만 믿고 기사를 썼던 선정주의 보도 사례의 하나다. 초기 보도에서 할머니의 반론권은 생략한 채 사건을 몰아갔다. 경찰 수사결과, 외할머니의 혐의가 없다는 쪽으로 끝났다. 14살인 최준희 양의 언행은 과거에도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드러났지만, 언론은 검증 없이 흥미위주 보도에만 급급했다.


 그런 점에서는 얼마 전 목격자의 말만 믿고 일방적인 기사를 내보냈다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240번 버스기사’ 논란 보도도 똑같다. 건대입구역 근처에서 어린아이가 내린 뒤 어머니가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버스가 출발했다는 온라인 글 보도로 버스기사와 어머니가 엉뚱한 비난과 욕설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버스기사와 어머니 입장을 당연히 확인하고 기사를 써야함에도 목격자의 감정적인 제보 글만 바탕 삼은 선정적인 보도로 죄 없는 사람을 곤경에 빠트렸다.


 ‘알 권리’를 빙자한 선정주의는 섹스, 범죄, 폭력, 추문(스캔들), 재앙 등과 관련된 기사에서 어렵잖게 나타난다. 이런 종류의 기사는 소재 자체 언급만으로도 흥미를 유발하는 대표적인 선정주의 상품이다. 실제로 2015년 말 한국언론진흥재단 설문조사 결과, 한국 언론이 선정성과 흥미위주의 보도를 한다는 수용자들의 부정적 인식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 같은 인식에 따라 언론인의 윤리의식을 높이기 위한 교육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89.2퍼센트에 이르렀다.


 지나친 상업주의가 낳은 선정주의 보도는 궁극적으로 독자의 외면을 받는 지름길이다. 미국 언론학자인 에드윈 에머리 미네소타대 교수는 선정주의를 ‘영혼 없는 저널리즘’이라고 규정했다.


 선정 보도는 자율 규제가 바람직하나, 현재와 같은 경쟁 상황에서는 정착하기 쉽지 않은 것 같다. 경쟁은 보도의 질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한다. 언론윤리는 어떤 윤리강령을 시행하든, 어떤 판단기준으로 규제하든 언론사와 언론인이 자기검열을 하지 않으면 실효성이 낮을 수 밖에 없다.

                                                        

                                           이 글은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소식지 2017년 11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