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소민족 망명정부의 비애를 김광균 시인처럼 처연하게 은유한 이는 일찍이 없었다. 김광균은 추일서정’(秋日抒情)에서 낙엽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에 비견했지만, 패망한 나라의 화폐가 쓸모없이 나뒹구는 신세임을 비감하게 보여준다. 영토와 국민은 강대국에게 앗기고 허울뿐인 주권만 지닌 망명정부의 애상은 떠올리기만 해도 지끈거린다.

 

 폴란드는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1939년 프랑스 파리에 망명정부를 세운다. 프랑스마저 독일에 항복한 뒤 폴란드 망명정부는 영국 런던으로 옮겨간다. 이 망명정부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폴란드 본토에 소련의 꼭두각시 정부가 수립되자 1990년까지 존속했다. 노동운동가 레흐 바웬사를 중심으로 한, 정통성 있는 민주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폴란드 망명정부는 막을 내렸다. 폴란드 헌법은 온갖 수모 속에 끈질긴 독립투쟁을 벌인 망명정부의 정통성만 인정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줄곧 폄훼됐던 망명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기념일이 오는 13일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98주년을 맞는다. 박근혜 시대의 종언과 더불어 청산해야할 숙제 가운데 하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치 훼손과 건국절 제정 움직임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건국절 제정이 국민적 저항을 받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사실상 부인하는 국정 역사교과서를 밀어붙였다. 1948대한민국 정부수립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는 작업이 그것이었다. 그게 독립운동의 역사와 가치를 격하하고 보수 기득권층의 친일 흔적을 희석하려는 계략이라는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1948년 건국의 부당성은 손으로 꼽기 부족할 정도로 많다. 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승계를 명시한 헌법 전문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영토조항에 위배된다. 고귀한 독립운동의 흔적은 윤색되고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십상이다.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 거사를 앞두고 대한민국 14426에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치른 일과 같은 독립운동 근거는 사라지고 만다. 한 나라에 개천절과 건국절이라는 두 개의 개국일이 존재하는 희한한 일도 생긴다. 문화재 반환을 비롯한 미청산 과제를 일본에 요구할 역사적 자격을 잃어버린다. 남북통일의 역사적·법적 자격을 포기하는 꼴이다.

 

 이승만 정부의 첫 관보와 첫 역사교과서까지도 1919년을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해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 부정된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 이미 대한민국이 건국됐음을 일왕(일본 천황)에게 통보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식문서도 최근 공개된 바 있다. 이처럼 보수우익의 우상인 이승만과 박정희도 그대로 사용했던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용어를 뉴라이트라는 집단이 나와 혼란에 빠뜨렸고, 보수집권세력이 부화뇌동하기에 이르렀다.

                                                                                   

 보수우익진영의 주장은 1919413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지 대한민국 국가가 성립한 날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토, 국민, 주권, 전 세계적인 인정 같은 네 가지 요건이 충족돼야만 정식 국가로서 인정이 된다는 게 이들의 지론이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폴란드의 망명정부나 샤를 드골의 프랑스 망명정부도 정부를 참칭하는 독립운동단체에 불과하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보수진영이 그토록 숭배하는 미국도 주권국가라고 국제사회에 선포한 177674일만 독립기념일로 삼는다. 미국은 영국 식민지 신분으로 국가, 영토, 주권 가운데 아무 것도 갖추지 못했던 상태가 독립선언 후 13년이나 지속됐다. 그럼에도 미국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정식 취임한 1789430일을 건국일로 지정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혼란의 근본 원인은 해방 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데 있음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보수우익진영은 당초 건국’ 70주년이 되는 2018815일에 건국절을 지정하는 걸 목표로 세웠다.

 독립운동의 역사와 가치를 훼손하면서 끊임없이 ‘1948년 건국절에 매달리는 보수우익의 만행은 박근혜 시대의 종말과 함께 끝나야 한다. 오는 510일 취임할 새 대통령은 2년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망명정부이며 헌법을 지닌 공화국 정치체로 역사에 기술돼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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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