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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박근혜식 제론토크라시의 폐해

올 2월 말 신민당 대표를 지낸 이철승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이 94세로 타계하자 93세인 권이혁 전 보건사회부 장관이 그 뒤를 이었다. 그러자 역대 최고령 기관장 취임이 아니겠느냐는 뒷담화가 흘러 나왔다. 주목할 만한 자리는 아니지만, 뒷담화에는 장관만 세 번 지낸 후 거의 끊임없이 관변·민간 기관장을 역임해 온 권 이사장의 관운에 대한 부러움과 시새움도 섞여 있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김기춘 역대 최고령 대통령 비서실장을 배출한데다 다른 요직에도 그와 흡사한 70대 이상 고령 인사가 다수 기용됐던 터라 이래저래 노인정치나 노인지배체제를 의미하는 ‘제론토크라시’(gerontocracy)가 새삼 이목을 집중시켰다.

 

  임명 때 나이만 보더라도 이병호 국가정보원장 75세, 유흥수 주일 대사 77세, 이명재 대통령 민정특보 72세, 이인호 KBS 이사장 79세, 자니윤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가 79세였다. 이명박 정부 때 입각해 2대에 걸쳐 5년여 동안 온갖 악역을 자청해 원성이 자자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도 우리 나이로 70세다. 비공식 자문 그룹인 ‘7인회’ 역시 거의 80대 초반이거나 70대 후반이다. 역대 정권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 다반사처럼 나타났다.

                                                                             

                                              <5.18 기념식장에서 쫒겨나는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덩달아 정치권에서는 20대 총선을 계기로 여야를 막론하고 흘러간 물인줄 알았던 70대 노령층이 전성시대를 구가할 정도였다.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수장에 76세인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화려하게 재기하는가 하면, 주요 3당의 공천관리책임자에 모두 70대가 기용됐다. 60대 중·후반의 대선주자들마저 70대 인사들의 기세에 눌린다는 촌평까지 나왔다.


 여기에다 최근 69세인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교체되면서 74세의 이원종 전 지역발전위원장이 후임으로 중용되자 박근혜 대통령의 못 말리는 제론토크라시 근성이 시정의 단순한 화젯거리를 넘어섰다. 박 대통령이 후계자로 가장 선호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이미 72세다.


 박 대통령이 70대 인물을 주로 찾는 것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나타나는 제론토크라시의 단면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이념과 방식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나 다름없다.

 

  부친의 유신 독재시절에 익숙한 인물들이 동류의식을 느끼게 하고,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정답에 가깝다. 이들은 대개 대통령의 옳지 않은 생각이나 잘못된 판단에 진언하기보다 지시를 충직하게 실천에 옮기는 데 더 적절한 인물임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위를 벌이는 어버이연합>


 제론토크라시가 ‘나이든 사람’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geront’와 ‘정부’ ‘통치’를 의미하는 ‘cracy’의 합성어인 것에서 나타나듯이 오래 전부터 논란거리가 돼 왔다. 현대에 들어서도 옛 공산주의 국가, 신정(神政) 국가들이 제론토크라시의 비극적 결말을 불러왔다. 구 소련에서 1970년대 이후 공산당 서기국의 평균 연령이 70세를 웃돌았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제론토크라시는 엘리트 노령층의 지혜를 국가발전에 활용하는 장점보다 각종 부작용을 낳는 단점이 부각돼왔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노인정치가 사고의 유연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조직이 폐쇄적으로 변해 소통 마비현상까지 초래한 사례가 숱하다. 미래지향적인 젊은 층의 개방성과 충돌하고, 변화에 소극적이어서 사회발전의 저해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민주주의의 현저한 후퇴현상을 드러낸 게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의 제론토크라시는 안보 문제나 정부의 실책이 돌출할 때마다 격렬한 친정부 시위에 나서는 관변 노인 단체들이 늘어난 것이 또 다른 특징이자 부작용이다. 어버이연합을 비롯한 극우보수단체들의 해악은 권력기관의 비호 아래 자행됐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제론토크라시는 첨단 정보사회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미래 지향적이고 유연성·신속성·역동성이 강한 사회적 특성을 지닌 한국사회는 더욱 그렇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운영지표로 내건 창조·혁신과 제론토크라시는 상충요소가 훨씬 더 많다. 박 대통령의 1970, 80년대식 권위주의 정치가 비판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가 되더라도 캐나다, 영국 같은 선진국처럼 상대적으로 활력이 넘치는 리더십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정치가 절실하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