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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자승자박의 정치

 그 옛날 영국 어느 마을의 빵장수에게 아침마다 버터를 공급해 주는 가난한 농부가 있었다. 빵장수는 어느 날 갑자기 납품되는 버터가 정량보다 적은 것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상하게 여긴 빵장수는 며칠 동안 납품되는 버터를 일일이 저울로 달아 보았다. 걱정했던 대로 버터는 한결같이 정량보다 모자랐다. 분통이 터진 빵장수는 버터를 납품하는 농부에게 변상하라는 소송을 냈다.


 재판을 진행하던 판사는 농부의 진술을 듣고 깜짝 놀랐다. 버터를 공급하던 농부가 집에 저울이 없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판사는 농부에게 어떻게 무게를 달았느냐고 따져 물었다. 농부는 빵장수가 만들어 놓은 1파운드짜리 빵의 무게에 맞추어서 버터를 잘라 납품했다고 답변했다. 빵장수가 줄인 빵의 무게에 맞추어 버터를 만들었으니 함량미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농부를 혼내주려던 빵장수는 자기 꾀에 넘어간 꼴이 되고 말았다.


 최근 들어 박근혜 정부는 이 빵장수와 흡사한 처사를 심심찮게 보여주고 있다. 교육부가 시·도교육청에 내년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편성하라고 압박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다. 정부가 무상보육에 대한 국가 책임을 교육청에 떠넘겨 지방교육재정을 파탄으로 내몰려고 하자 교육청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누리과정 예산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뿌린 씨앗이다. “아이 보육은 나라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낳기만 하세요.” 박 대통령은 2012년 대선 후보 시절 만 3~5세 어린이의 무상보육 공약을 철석같이 내걸었다. 대통령 당선인 시절에도 “보육과 같은 전국단위 사업은 중앙정부가 (재원을) 책임지는 게 맞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박근혜 정부가 지난날 보건복지부가 책임지던 누리과정 재정을 2015년부터 전액 교육부 소관의 지방교육교부금으로 지원하는 방안으로 바꾼 게 문제의 발단이 됐다. 교부금 규모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안이하게 대응한 교육부가 스스로 해결해야할 문제를 지방교육청에 떠넘기려는 것은 빵장수의 꾀나 다름없다. 


 경제살리기를 위해 노동 5법,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기업활력제고법 같은 경제관련 법안을 국회가 처리해주지 않으면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긴급 재정명령’ 발동까지 검토하겠다고 국회의장에게 엄포를 놓았다가 슬그머니 입을 닫은 것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 친박 지도부가 야당과 협상도 쉽지 않은데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직권상정을 거부하는,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묘수로 여겼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이 경제위기를 연일 경고하는 가운데 이 같은 상황 진단을 내놓은 것은 충성도를 과도하게 발휘하려다 꼬인 자가당착이다.


 하지만 이 카드가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 실패를 자공(自供)하는 것임을 뒤늦게 깨달은 듯하다. 긴급 재정명령 발동은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임을 상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수당의 힘으로만 법안 처리를 할 수 없도록 한 국회선진화법을 앞장서 통과시킨 당사자들이 이제 와서 법을 타박하는 것도 그렇다. 2012년 정의화 당시 국회부의장의 반대에도 직권상정 요건을 엄격히 제한한 국회선진화법 통과를 주도한 측이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친박 의원들이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의 낙마도 박근혜 정부의 자승자박이었다. 이명박 정권을 겨냥한, 정치성 짙은 부정부패와의 전쟁은 부메랑이 된 이후 슬며시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박 대통령의 독선과 아집으로 인한 자승자박의 정점이 될 게 분명하다.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시절인 2005년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은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2004년에도 똑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역사는 정말 역사학자들과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인들이 역사를 재단하려고 하면 다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될 리도 없고 나중에 항상 문제가 될 것이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정현 의원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박 대표의 발언은) 언제, 어느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일관성이 있다.”
 자승자박을 푸는 길은 결자해지가 정답이지만, 그래도 대부분 너무 늦을 뿐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