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톺아보기-칼럼

민주주의 열차의 역주행

 

 5년 전 당시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박근혜 전 대표의 민주주의 철학 부재를 촌평할 때는 솔직히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김무성 대표는 “박근혜 전 대표가 출중하고 훌륭하지만 결정적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과 사고의 유연성 부족’을 들었다. 김 대표는 이 때문에 “훌륭한 대통령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욕이 소진해 버렸다”고 고백했다.


 그랬지만 나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갈망하는 독재자의 딸일지언정 시대정신까지 결정적으로 거스르는 정치지도자일까 싶은 생각이 앞섰다. 게다가 ‘친박 좌장’으로 불리던 김무성 대표가 이명박 정부시절 홀로서기를 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계산을 한 자락 깔고 한 발언일 것이라는 선입견에 무게가 실렸다.


 그처럼 안일한 생각이 심각한 우려로 바뀌고, 김 대표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실감하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부터였다. 요직에 군 간부 출신과 검찰 출신을 중용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앞날을 어렵잖게 예측할 수 있었다. 국정원 대선개입의혹 사건 대응조치의 하나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카드를 꺼내들어 종북몰이에 나선 것은 민주주의 후진기어를 본격적으로 작동한 일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지금까지 독재시대의 공안몰이 통치 잔재를 버리지 못한 것은 민주주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대표적인 메뉴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 공안 분야에서 일했거나 고문·조작·은폐 수사 등으로 물의를 빚은 인사들을 중용해 온 것은 명백한 민주주의 역행 사례다. 유신독재체제를 기획한 공안검사 출신의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막전막후에서 공작정치 구태를 사실상 재현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김기춘 실장 못지않은 공안통 검사답다. 공당의 대표와 전직 대통령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막무가내 매카시즘의 대표주자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사퇴시켜야 마땅하지만 그럴 리는 없을 게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정권에 우호적인 박한철 헌법재판소장은 이명박 정부에서 대검 공안부장을 지냈으며, 박상옥 대법관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수사검사였다. 정의와 인권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인 사법부조차 퇴보하고 있다. 공안몰이는 단순히 이념문제를 넘어서는 민주주의의 적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퇴행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단지 대통령 눈 밖에 났다는 한 가지 이유로 순식간에 교체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각종 국제기구 민주주의 지수에서도 한국의 민낯은 그대로 드러난다.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언론 자유 지수에서 한국은 2014년보다 세 계단이나 낮은 60위로 내려앉았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 39위였던 언론자유지수가 보수정권 이후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물증이다.

                                                                

  지난 5월 방한한 바실 페르난도 아시아인권위원회 위원장의 비판도 뼈아프다. “아시아에서 먼저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낸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점수는 100점 만점에 40점 수준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현 정부는 과거 군부독재 정권과 연관이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국가인권기구 간 국제조정위원회(ICC)로부터 등급심사 보류라는 치욕을 겪고 있다. 2001년 출범 이후 한동안 세계인권기구로부터 호평을 받아왔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대통령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에서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국정 역사교과서는 일부 독재국가에서나 사용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수십 년 퇴보시키는 행위라는 대다수 언론의 비판을 아랑곳하지 않는 게 현 정권이다. 날이 갈수록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악의 퇴보를 목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 얻은 민주주의인데, 이를 탄압하던 세력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지리멸렬한 야당의 허약성을 믿고 이 정권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있는 듯하다. 군사 쿠데타를 감행한 아버지를 이어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 쿠데타를 꾀하면 훗날 역사 법정에서 혹독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