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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믿게 해야 믿는다

 국가정보원 ‘민간인 불법해킹 의혹’ 사건의 핵심은 신뢰의 문제다. 사건의 본질은 진실게임이지만, 실체를 규명하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경기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 우리 국민 10명 가운데 6명은 국정원의 불법해킹 의혹 해명을 믿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국정원장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이탈리아 보안업체의 해킹 프로그램 구입 사실을 시인했으나 민간 사찰용이 아닌 북한 공작원 감청용이라고 해명했다.


 진실규명 작업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우선 모든 게 오늘 오후 발표하는 국정원의 자체 조사 결과와 제출자료에 달려 있을 뿐 외부의 검증 수단이 현실적으로 마땅하지 않다.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오늘부터 시작되고, 검찰 수사도 초읽기에 들어갔지만 애초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이는 축구 경기와 흡사한 양상이라는 예단이 지배적이다. 소설가 박민규가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갈파했듯이 우리는 태생적으로 기울어야했던 국민인지도 모른다. “배가 왜 이렇게 기울었지? 의혹을 제기하면 종북이란 이름의 이단으로 몰려야 했다.”


 야당은 철저한 진상규명에 나서겠다고 벼르지만, 여당이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억지 공세라고 맞서고 있는데다 모든 환경이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검찰이 야당의 고발 때문에 수사에 착수하더라도 자신들보다 우위에 있는 당사자 국정원이나 청와대의 비위를 거스를 것으로 믿는 국민은 없다. 정치검찰이란 오명을 떨쳐버리지 못한 속성을 하루아침에 바꿀 리 만무하다는 것쯤은 이제 누구나 안다.

                                                                                                     


 호위무사를 자임하는 새누리당은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빨리 일어난다’고 한 김수영 시인의 시구절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앞장서서 진실을 파헤치고 인권을 보호해야 할 다수 언론은 소극적이거나 정보기관의 해킹을 문제 삼는 건 대한민국 밖에 없다는 투다. 사실과 다른 근거를 들이대거나 비본질적인 문제를 침소봉대하면서 딴죽을 걸기 일쑤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속담이 이럴 때 제격이다.


 시국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실상 수사지침을 내려온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사건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는 것도 진실규명작업에 도움이 되는 징조가 아니다. 10년 전 자신이 야당대표로 있을 때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박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 시절의 국정원 도청사건과 관련해 2005년 이렇게 신랄하게 비판했다.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국가 권력기관이 도청만을 일삼아 국민들이 너도나도 도청을 당하고 있지 않나 떨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국가기관이 나서서 우리의 자유·민주를 짓밟은 것이다.” “어떤 경우든 불법도청은 우리나라에서 사라지게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아직 실체적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적어도 객관적이고 철저한 조사와 의혹 해소를 당부해야 사리에 맞다.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할 정보기관이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한 까닭은 최근까지 국내정치개입 전과와 불법사례가 많아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2012~2013년에 선거·정치개입 사건을 저지르고, 2014년에는 간첩증거조작으로 신뢰를 잃었다. 자체 개혁을 추진했으나 아직 믿음을 주지 못했다.


 치열한 글로벌 경쟁과 남북대치상황을 감안하면 정보기관을 무력화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선진국의 수많은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하거나 민간인 사찰로 물의를 일으켰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해킹 장비를 구입하고 업무를 담당해 온 베테랑 직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일까지 벌어지고, ‘내국인을 감청하지 않았다’면서 입증 자료를 삭제한 것은 의혹을 키우기에 충분하다. 사후 처리과정에서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잇달아 뒷맛이 개운치 않다. ‘35개국 97개 기관이 이 프로그램을 구입했는데 우리나라처럼 시끄러운 나라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의 하나다.


 키프로스 정보기관장은 사찰용 해킹 프로그램을 해킹팀으로부터 구매한 사실이 드러나자 전격 사퇴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과 유럽연합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크고 작은 파장을 낳고 있음이 드러났다. 해외 언론들이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는다는 일부의 주장도 터무니없다. 평생 해외·북한관련 업무 담당만 해온 이병호 국정원장이기에 진실을 스스로 규명하고, 차근차근 국민의 신뢰를 쌓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