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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정권의 품격

 

 

 얼마 전 핀란드 방문 후 내놓은 정홍원 국무총리의 대국민 담화문은 여러 면에서 씁쓰레했다. 그 가운데 핀란드와 한국의 정치상황을 비교한 부분은 ‘적반하장’(賊反荷杖) ‘객반위주’(客反爲主) 같은 사자성어들을 떠올리게 한다.

 

    “핀란드 방문 기회에 핀란드 국회의장으로부터 여야 합동으로 미래위원회를 구성해 30년 후 국가 미래를 논의한다는 말을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 정 총리의 담화는 야당을 겨냥한 훈계로 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대목은 정 총리 자신을 포함해 정부와 새누리당에게 돌아가야 할 회초리다. 국가의 미래를 소홀히 한 채 30~40년 전으로 회귀하고 있는 건 바로 자신들이어서다.

                                                                                            

                                                                           <따루 살미넨>


 핀란드 출신 방송인이자 번역가인 따루 살미넨 씨의 촌철살인 한마디가 이를 잘 방증한다. ‘미녀들의 수다’란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눈길을 사로잡았던 따루는 최근 팟캐스트 ‘이슈 털어주는 남자’란 코너의 인터뷰에서 한국 정당의 이념지형을 흥미롭게 평가했다. 따루가 본 한국의 진보정당은 핀란드에서는 보수정당이다. “그럼, 새누리당은 어떠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런 정당은 없다”이다. 새누리당은 극우정당이란 의미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새누리당과 정부 고위 인사들의 행태를 보면 따루의 인식이 전혀 틀리지 않다. 박 대통령의 유럽순방을 수행한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의 페이스북 폭언은 안성맞춤의 본보기다. 재불 한인 100여명이 박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에 맞춰 국정원의 불법 대선개입 규탄 시위를 벌이자 김 의원은 국제적인 관심을 초래할 정도로 시위자들을 겁박했다.

 

   그는 “파리에서 시위한 사람들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다. 사법부로 하여금 시위에서 채증 사진 등 관련 증거를 법무부를 시켜 헌재에 제출하겠다”고 위협했다. 김 의원은 시위자들이 통합진보당원이라고 허위사실까지 퍼뜨렸다. 이 소식은 미국 최대의 웹커뮤니티 사이트 토픽스에 링크돼 국제사회로 퍼져나가고 있다. 검사 출신인 김 의원의 조폭 같은 극언은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과 민주주의에 도전하는 것임은 물론 나라의 격조를 떨어뜨리는 행위다.

                                                                                             

                                                                      <정홍원 국무총리>


 정홍원 총리가 국회 예결위에서 한국사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 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밝힌 것은 역사의 후퇴를 상징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한국사 교과서가 국정 교과서 체제로 전환된 것은 1970년대 박정희 유신 정권 때다. 2010년 어렵사리 검정 체제로 정상화한 걸 국정교과서로 되돌리려는 건 40년 전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 국가 가운데 국정교과서를 발행하는 곳은 거의 없다. 아직도 국정 교과서 제도를 채택 중인 나라는 북한, 베트남, 필리핀, 캄보디아 같은 몇몇 나라에 불과하다고 한다.


 

   국회를 우롱하며 오만방자한 극우발언으로 농단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 친일·독재자 이승만을 극단적으로 숭배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극렬 뉴라이트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 같은 인물들은 정권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의 하나다. 새누리당 정치인들도 너나없이 앞뒤를 가리지 않고 퇴행 경쟁을 일삼고 있다. ‘기춘 대원군’이란 별명이 붙은 대통령 비서실장과 노인단체 위주의 맞불시위 장면은 극우 성향을 배가시킨다. ‘일베’ 따위의 보수 놀이터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다. 마치 앙시앵레짐의 대대적인 역습을 보는 듯하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상황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미국 진보성향 지식인들의 성명이 나온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놈 촘스키 MIT 명예교수, 간디평화상 수상자 램지 클라크 박사가 포함된 대표적 지식인들이 박근혜 정부의 유신회귀를 우려하는 선언문 발표를 주도해 파장이 작지 않다.

   권위주의로 돌아간다는 비판이 나오면 박 대통령은 야당의 정치적 공세로만 치부한다. 게다가 보수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곤 정권의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60퍼센트에 육박하는 국민이 대통령을 지지하고, 새누리당이 1위 지지정당인데 무슨 헛소리냐고? 나치 시대의 히틀러도 독일 국민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박근혜 대통령이 그토록 싫어하는 일본의 극우 아베 정권도 최근 수년 사이에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고 그게 본받아야할 정권은 아니지 않은가?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