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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책 이야기

세상을 바꾼 책 이야기(8)--<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중국의 첫 항공모함 ‘바랴크’가 오는 8월1일 인민해방군 창군기념일에 정식 취역한다. 6만7000톤급의 바랴크는 작전반경이 1000㎞에 달한다. 바랴크호는 황해는 물론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 서태평양 지역을 누빈다. 중국은 2020년까지 최대 5척의 항공모함을 포함해 400척의 함정을 보유할 것이라는 보도가 잇따른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이미 2006년 ‘중국의 대양해군’을 선언했다. 중국의 국가해양국도 2010년 ‘중국해양발전보고’에서 해양파워의 구축은 21세기 중국의 역사적 책무이며, 향후 10년은 이 임무를 실현하는 역사적 단계가 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인도는 지난 4월4일 러시아제 신형 핵잠수함 INS ‘차크라’를 진수해 핵잠수함을 운용하는 6번째 나라가 됐다. 기존의 해양 초강대국인 미국은 이에 대응해 태평양 함대의 전진배치와 강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리언 패네타 미국 국방장관은 2020년까지 해군력의 60%를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배치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일본 역시 중국의 급속한 해양력 팽창에 맞서 헬기 항공모함과 잠수함 건조 등으로 해군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국제정치의 격언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현상들이다. 이 격언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무역을 지배하고, 세계의 무역을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부를 지배하며, 마침내 세계 그 자체를 지배한다’고 했던 영국의 군인출신 탐험가 월터 롤리의 명언을 축약한 것이다.
                  

                                         

 

 이 격언을 누구보다 역설하며 미국을 오늘날의 초강대국으로 올려놓은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미 해군 제독과 해군대학교장을 역임한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1840~1914)이다. 그가 1890년에 출간한 명저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원제 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은 말 그대로 세계역사를 바꿔놓았다. 이 책은 해양 역사와 전략을 입체적이고 명쾌하게 추적해 오늘날 세계 어느 곳이라도 지켜낼 수 있는 미국 해양력을 건설한 이론적 바탕이 됐다. 일반인들에겐 그의 이름과 이 책이 다소 생소할지 모르지만 국제정치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이 책은 1660년부터 1783년까지 일어난 일곱 번의 전쟁과 30여 차례의 해전을 치밀하면서도 생생하게 분석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스페인 등 대서양 연안의 유럽 4대 해양강국과 독립전쟁 당시 미국의 해양사를 꼼꼼하게 해부했다. 마한은 특히 어떻게 ‘대영제국’이 건설됐는지를 되짚어 미국도 바다로 눈을 돌려 해양력을 새롭게 인식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프랑스가 영국에 결정적으로 뒤지기 시작하는 과정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본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다. “프랑스인들은 영국인과 네덜란드인들처럼 정열적으로 바다에 나서지 않았으며, 나간다하더라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프랑스인이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자연 조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프랑스 기후가 매우 쾌적했으며 또한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가 많았다는 점이었다. 반면에 영국은 자연으로부터 얻을 것이 거의 없었고, 제조업이 발달하기까지는 수출할만한 것도 변변치 않았다. 그처럼 많은 분야에서 부족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부지런한 국민성과 해양활동에 적합한 다른 조건들이 어울려 영국인은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

 

 무엇보다 ‘태양왕’이란 별명을 지닌 루이 14세가 허영과 오만으로 잘못된 해양 정책을 취한 것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루이 14세의 후반기는 해양력의 기반과 무역, 무역이 가져다주는 부의 약화가 해양력을 쇠퇴시킨다는 점을 명징하게 보여준다고 마한은 지적한다.

 당시 한 프랑스 해군장교의 촌평이 이를 증언한다. “해군이 보여주었던 경이감이나 위대한 업적들은 이미 잊혀져버렸다. 누구도 이제 더 이상 해군의 가치를 믿지 않았다. 그 대신 국민들과 훨씬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있던 육군이 국민의 호감과 동정을 받았다. 프랑스의 흥망성쇠가 라인 강 유역에 달려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널리 퍼졌으며, 해군에게 등을 돌린 반감은 영국을 강국으로, 우리나라를 약소국으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1672년 대륙확장노선을 선택했다. “프랑스 정부는 국민이 개인적인 노력으로 바다를 다시 차지하려고 애쓰던 바로 그 순간에 바다를 포기해 버렸다”는 말이 한층 아프게 다가온다.

 

  만약 1743년 이후 20년 동안 영국 함대 대신 프랑스 함대가 인도 반도 주변의 해안, 인도와 유럽 사이의 바다를 지배했더라면 역사가 달라졌으리라는 견해도 마찬가지다. 프랑스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해양력을 행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인도와 캐나다를 잃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나라와 달리 영국은 한동안 경쟁자가 없이 해군함정으로 대양의 통상로를 지배했다고 마한은 눈여겨봤다.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은 멀리 떨어지고 풍요로운 지방과 교역하는 어떤 나라도 통제할 수 있게 했다. 영국의 해양력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바로 직전에 형성되기 시작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동안에 완성됐다. 이때부터 영국군함은 세계적인 분쟁이 가능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확고하고 강력한 기지를 갖게 됐다고 한다.

 네덜란드를 풍전등화의 위험한 상황에서 구제했던 것도 바로 해양력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영국이나 프랑스 어느 한쪽보다 인구가 적은 네덜란드가 이 두 나라의 단독공격과 2년간 계속된 두 나라의 연합공격을 받고도 파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의 그 지위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고 마한은 찬탄한다. 마한은 그러나 네덜란드 정부의 정책은 해양력을 꾸준히 뒷받침해 주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한때 무적함대로 불리던 스페인이 지브롤터를 잃음으로써 지브롤터 해협에 대한 통제력을 빼앗겨 버렸고, 스페인의 지중해 함대와 대서양 함대도 합동작전을 쉽게 수행할 수 없게 됐다고 지은이는 애석해 한다. 이 책은 근대 세계사에서 힘깨나 쓰던 나라는 세계의 바다를 장악하고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했음을 증언한다.

 마한은 당시 미국도 바다로부터 등을 돌려왔다면서 멀리 있는 국가까지는 미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자국의 주요 출입로를 지켜줄 수 있는 해군을 건설하기 위해 정부가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 독립전쟁도 프랑스 해군의 원군이 없었더라면, 아메리카 식민지군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며 조지 워싱턴의 능력과 전문성도 무위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마한은 단언한다. 
                                                              

                        <지난 6월27일 서해상에서 한미일 연합훈련을 마친 미국 조지워싱턴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해 있다.>

 

   이 책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루스벨트는 이 책을 읽고 마한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난 2일간 저는 정말 바쁜 와중에서도 귀하의 책을 읽는 데 시간의 반을 소비했습니다...저는 쉬지 않고 읽었습니다...아주 훌륭하고 경탄할만한 책입니다. 만일 이 책이 해군의 고전이 되지 않는다면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루스벨트는 마한의 생각에 감탄하며 해군부 차관 때부터 해군력 증강에 온 힘을 쏟았다. 루스벨트는 세계 굴지의 경제력에 비해 형편없는 미국 해군력을 늘 개탄하며, 해양세력으로 거듭나야 번영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미국 해양력은 마한의 철학을 바탕으로 루스벨트가 초석을 다졌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 책은 당시 폐교 직전까지 몰렸던 미국 해군대학을 존속시키는 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 책은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큰 자극제가 됐다. 마한 역시 제국주의자에다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중동’(Middle East)이란 용어도 그가 만들어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은 미국보다 먼저 마한의 이론을 받아들여 세계적 해군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 마한의 생각에 따라 1898년부터 6년 동안 8척의 전함을 만들었으며, 1900년에는 엄청난 규모의 해군을 양성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나는 그의 저서를 읽는 것이 아니라 먹고 있다”고 그의 동료에게 썼다고 한다. 영국에서도 엄청난 반응이 나왔다. 찰스 베레스포드 대령은 1891년 1월 이런 글을 마한에게 보내왔다. “만일 저에게 힘이 있다면, 저는 귀하의 책을 영국 본토와 식민지의 모든 가정의 식탁에 놓아두도록 명령할 것입니다. 또한 저는 우리의 해양력이 웅대한 제국의 기초를 어떻게 닦아나갔는지 모든 국민에게 가르치도록 지시할 것입니다.” 독일 헤르베르트 로진스키는 마한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놓아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일본은 마한의 이론을 따랐던 대표적인 나라다. 아키야먀 사네유키와 사토 데츠타로 같은 국수주의자들이 마한의 철학을 적극 수용했다고 이 책의 번역자인 김주식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예비역 해군대령)이 밝혔다.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하는 계획을 수립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의 참모 아키야마 사네유키 중령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 마한에게 직접 배웠을 정도다. 이 책은 첫 출간과 거의 동시에 일본어로 번역돼 일본 군사·해군 교육기관의 교과서로 채택됐다. 오늘날 일본 해상자위대 간부학교에서도 마한의 이론에 관한 강의를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이 책이 한국 해군장교의 필독서가 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마한이 세상을 떠난 뒤 언론의 부음기사만 봐도 그의 위상이 한 눈에 드러난다. 프랑스 피가로는 “마한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를 생전에 수정했다...이 지극한 역사학자이자 전략의 대가가 새 시대의 도래를 마련했기 때문에 그가 만든 공식은 새로운 역사시대를 도입하는 입법의 기초였다”고 평가했다. 영국, 일본, 이탈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의 주요 신문들도 이와 비슷한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이 글은 월간 신동아 2012년7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