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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허수아비춤’은 계속된다

 새누리당이 두 달 전쯤 경제민주화를 ‘국민과의 약속’에 명시하고 재벌개혁 의지를 내비쳤을 때 ‘허수아비춤’을 다시 떠올렸다. 조정래의 소설 ‘허수아비춤’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2010년 가을에 나온 소설이지만 지금 이 땅의 재벌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준다. 재벌을 둘러싼 비리와 구조적 모순, 정경유착, 권언유착 같은 나신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작가는 무소불위의 경제 권력을 신랄하게 고발하며 경제민주화를 화두로 내건다.


 “이 작품을 쓰는 내내 우울했다.(중략) 우리는 세계를 향하여 ‘정치민주화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룩해 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경제에도 ‘민주화’가 필요하다. 이 땅의 모든 기업들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투명경영을 하고, 그에 따른 세금을 양심적으로 내고, 그리하여 소비자로서 줄기차게 기업들을 키워 온 우리 모두에게 그 혜택이 고루 퍼지고, 또한 튼튼한 복지사회가 구축되어 우리나라가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경제민주화다.”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의 작가 조정래는 진보 성향의 작가지만 반기업주의자가 아니다. 그가 보수적이고 군 출신인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을 ‘한국의 간디’ ‘한국경제의 아버지’로 칭송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박태준이야말로 진정한 기업인이자 청렴 공직자의 표상이라는 이유에서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정책쇄신분과 간사격인 권영진 의원은 새 정강정책인 ‘국민과의 약속’을 이렇게 설명했다. “재벌의 과도한 탐욕이 시장질서를 무너뜨리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영역까지 침해하고 생존권을 박탈하면 공정한 시장이 될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재벌 대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담아내려는 것이다.” 경제민주화 전도사로 불리는 김종인 새누리당 비대위원이 배수진을 친 끝에 관철했다는 후일담이 들렸지만, 친재벌 정당이 다급하긴 했나보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선지 조정래는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강조한 걸 보고 정치권이 정신을 차린 신호로 받아들였다.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이 되었다는 걸 실감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거기가 한계였다. 19대 국회의원 총선후보 공천 결과는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공약이 겉과 속이 다름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성장과 대기업 중심의 ‘MB노믹스’ 산파역을 맡았던 이만우 고려대 교수가 비대위의 반대에도 당선권 비례대표로 들어온 게 대표적이다. 지역구 후보 공천에서도 마찬가지다. 보수적 시장론자인 이한구·나성린·유일호 의원에다 같은 성향의 김태기 단국대 교수, 이종훈 전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등이 새로 영입됐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김종인 위원이 설 땅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경제민주화를 실천할 인물이 공천되지 않았음은 물론 외려 감세론자나 재벌옹호론자만 공천된 탓이다.

 비판이 쏟아지자, 박근혜 위원장은 “경제민주화는 이번에 바꾼 새누리당의 정강·정책의 핵심적 가치의 하나로 확실히 실천해 나갈 것이며 지역에 출마하시는 분들 중에서도 자본주의 4.0에 대해 확실한 소신과 실천 의지를 가진 분들이 있다”고 해명했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둔사에 불과하다. 너무 왼쪽으로 가고 있다는 보수우파진영의 원성이 터져 나오자 후퇴의 물증을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새누리당 19대 총선 후보 가운데 경제민주화를 상징하거나 추진할 인사는 이제 사실상 없는 상태다. 시나리오는 써놨지만, 막상 영화에 걸맞은 배우가 아무도 없는 것과 같다.

 조정래도 이미 비관적인 미래를 예감한 듯하다. “이런 소설을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을 소망하면서 이번 소설을 썼다. 그러나 이런 소설이 완전히 필요 없게 될 세상은 오지 않을 것임도 잘 알고 있다.” 김종인 위원이 사퇴를 선언한 바로 다음날, 라면 값 담합으로 서민 호주머니에서 9년간 1조원을 털어간 라면 기업들이 우리들의 속을 또 한 번 뒤집어 놓았다. ‘허수아비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징후다.

                                                                                         이 글은 내일신문에 실린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