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화의 모체이자 세계를 호령했던 남유럽국가들이 어쩌다 천덕꾸러기 돼지(PIGS) 취급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연민의 정까지 느껴진다.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지중해권 국가들이 만성재정적자와 감당하기 힘든 국가채무, 높은 실업률로 말미암아 오래전부터 세계경제의 애물단지 수준을 넘어 ‘공공의 적’이 됐다. 2008년 7월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왜 돼지(PIGS)는 날지 못하나’라는 기사에서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낸 이후 미국의 투자기관과 언론을 필두로 세계는 이들 나라에 모멸의 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태풍의 눈에 자리한 이탈리아와 그리스가 상환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자 끝내 두 나라 모두 최고지도자가 사퇴하고 말았다. 세계 금융시장이 흔들리고 유로존 국가들이 연쇄부도사태를 맞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면서 버틸 재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지도부가 손오공의 여의주나 도깨비 방망이를 가진 것도 아니어서 온 세계가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 1000여 명에 이르는 경찰관, 소방대원, 해안경비대 등 제복 공무원들이
                                정부의 새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가운데 한 경찰관이 그리스 국기를 들고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복합적인 요인에 대한 다양한 진단과 처방전이 나오고 있지만 여기에도 제 논에 물 끌어대기 같은 현상이 빠지지 않는다. 예외 없이 이데올로기가 끼어든다. 지도자들의 부패와 무사안일, 포퓰리즘에다 국민의 무절제가 어우러졌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과다하게 돈을 꿔준 글로벌 금융기관의 탐욕을 지목하는 이도 있다. 과도한 복지를 탓하는 건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에 비하면 턱없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분명한 건 지도자와 국민 모두에게 귀책사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나 이탈리아의 국민들은 부패 정치인이나 추문 지도자에게 지나치게 관대하다. 독일 지멘스가 계약을 따내기 위해 그리스 정·관계에 수백억 원대의 뇌물을 뿌렸다가 들통이 난 2008년 8월 스캔들 하나만 봐도 그렇다. 그리스 의회가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혐의사실을 밝혀냈으나 단 한명의 정치인도 처벌 받지 않았다는 게 그 증거다.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하는 지하경제만 끌어내도 그리스의 채무불이행(디폴트)은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과장된 것만은 아닌 듯하다. 더 큰 문제는 경제개혁을 위한 긴축정책을 내놓자 일반 국민은 물론 공무원들까지 거부하며 파업에 나선 것이다. 오죽하면 외국 언론들이 그리스가 외환위기 때 허리띠를 졸라매며 금모으기운동을 펼친 한국을 본받아야한다고 일침을 놓았겠는가.
                                                                               

                              <이탈리아 집권 자유국민당의 지지자 수천명이 2010년 3월 20일 로마에서 성추문 등으로
                              수세에 몰려있던 당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지지하는 시위에 참가해 깃발을 흔들고 있다.>

 더 근원적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 특유의 지중해 문화와 기질이 떠오른다. 이는 자칫 지역편견으로 받아들일 소지가 있으나 다수의 학자들이 분석한 특성에 가깝다. 지중해를 면한 이들 남유럽국가의 국민은 공통적으로 정열과 낭만이 넘치는 데다 낙천적인 기질을 지녔다는 평을 듣는다. 때로는 다혈질이고 흥분을 잘한다는 견해도 곁들인다.

 이는 지리적 요인에 따른 기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인간의 몸은 기후에 대한 순화성을 지니고 있다. 기후는 인간의 몸과 마음 모두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기후가 사람의 체격, 체질, 체력을 바꾸고, 감각, 심리, 성격, 지능의 발달을 비롯한 정신활동을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북방민족이 대체로 어둡고 진중하면서도 대단한 인내력을 보여주는 반면 햇볕이 강한 곳에 사는 남방 민족은 밝고 명랑하며 여유롭다. 실제로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시에스타’라고 불리는 오후의 낮잠·휴식시간이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관습이다. 이같은 특질은 태평성대엔 두드러지지 않으나 위기 시엔 큰 단점으로 보인다.
                                                   

                      <2011년 9월 28일 포르투갈 경찰관들이 수도 리스본의 재무부 청사 밖에서 정부의 임금 동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런 남유럽 문화는 ‘지경학’(geoeconomics)과 맞닿는다. 따뜻한 기후와 풍요한 물산은 전통적으로 먹고사는 문제에 큰 걱정이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산업도 알프스 산맥 아래의 이탈리아 북부를 제외하면 고대 유적지와 풍부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한 관광산업과 서비스업이 주류를 이룬다.이 지역은 산업혁명 전까지 유럽의 중심지 역할을 했지만 산업 혁명 이후 중심지 역할을 북서부유럽에 빼앗겨 버렸다. 철학과 법치주의의 바탕이 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이성적 문화도 한층 감성화했다. 고대 그리스인과 현재의 그리스인은 인종학적으로도 다르다고 한다. 지금의 그리스인은 오히려 아랍계에 가깝다.
 

 느긋하고 낙천주의적인 남유럽과 엄격함과 절제를 숭상하는 북유럽의 뿌리 깊은 문화적 차이를 무시하고 두 지역을 하나로 묶는 경제통합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모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장이 대표주자다. 그린스펀은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남부와 북부 유럽을 하나의 경제권으로 통합하려는 시도 자체가 애초부터 무리였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그는 심지어 유럽의 경제 위기가 남유럽과 북유럽이 분리되기 전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시각을 드러냈을 정도다. 남유럽인들이 독일인처럼 행동하리라고 여기는 것은 오판이라는 것이다.  

 이들 나라의 최대 숙제는 대국민 설득을 통한 지도자의 위기관리 능력과 부패척결이다. 정치적 투명성을 높이는 과제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부채위기는 생산성의 문제로 귀결되기도 한다. 남유럽 위기의 가장 중심에 서 있는 그리스의 경우 성장동력이 될 수 있는 제조업의 흔적은 찾기 어려운 나라 가운데 하나다. 2008년 전 세계적인 위기 이후 관광산업의 매출이 급감하자 그리스의 경제가 급격히 추락한다.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경기 부양책을 실시하면서 그리스의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이다. 돼지라는 모욕적인 조어에 대한 반발이나 지청구는 외부의 상식적인 비판을 수용해 적폐를 혁파하고 중병을 치유한 이후의 일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분량을 늘려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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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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