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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

우즈베키스탄의 세종대왕, 울루그베그---실크로드 여행(2)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마르셀 푸루스트

 실크로드의 중심 도시이자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세종대왕격인 울루그베그의 유산이 무수히 남아 있다. 울루그베그와 세종대왕은 닮은 점이 숱하게 많다. 우선 두 제왕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던 것부터 닮은 꼴이다.

 울루그베그(1394~1449)는 세종대왕(1397~1450)이 그렇듯이 빼어난 학자적 군주였다. 정치보다 학문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울루그베그는 자신이 세운 메드레세(이슬람 국가의 고등교육기관)에 “학문을 연마하는 것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이다”라고 기록해 강력한 교육의지를 펼쳐보였다. 세종대왕 당시의 집현전과 비교할 수 있을 듯하다.                                                     

 

                                                                       <울루그베그 메드레세>

 울루그베그는 정식으로 왕이 되기 전인 열다섯 살 때 이미 부왕(父王)인 샤 로흐의 명에 따라 사마르칸트 지방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스물여섯 살 때인 1420년 레기스탄 광장에 직접 메드레세를 세운 그는 이곳에서 손수 이슬람 신학, 수학, 철학, 천문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의 한가운데 자리한 레기스탄 광장은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가장 상징적인 장소이다. 이 메드레세는 당대에 1백여명의 학생들이 기숙하며 공부했던 중앙아시아의 최고 이슬람 신학교였다. 그의 메드레세에서는 학생들이 당대 최고 학자들의 지도를 받으며 이슬람 신학과 세속 학문을 연마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사마르칸트를 문예부흥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궁전에는 세속적인 학문과 문화 발전을 위한 환경이 조성됐다.
                                                                               


 울루그베그는 무엇보다 천문학에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1428년 큰 천문대를 세워 많은 관측기계를 정비하고, 여러 학자와 협력해 천체표를 만들었다. 울루그베그가 세운 천문관측소에서 그린  천체표는 17세기 영국 왕실의 천문학자들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천체표는 1500년대 유럽에 알려져 1665년에 인쇄됐다.
 이 원형 천문대는 육분의, 상한의, 해시계 등이 갖춰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천문대로 평가받는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혼천의(지구의), 해시계 같은 천문기기도 울루그베그 천문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우리나라 역사학들도 인정하고 있는 추세다. 이곳에서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이래 12세기 동안 바뀌지 않았던 천문 상식들도 수정했다. 울루그베그는 이곳에서 관측한 것을 바탕으로 1437년 992개 별의 위치를 밝힌 <지디이 술타니>라는 당대 최고의 천문도를 발간했다. 1년이 365일 6시간 10분 8초라고 계산한 것은 오늘날의 관측 결과와 1분이 채 안 되는 오차를 보이는 높은 과학기술을 과시했다.
 울루그베그가 사망한 뒤 내분 때문에 천문대는 파괴되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육분의를 지탱했던 지하 부분과 천문대의 기초뿐이다. 1908년 이를 발견한 러시아 고고학자는 울루그베그를 한없이 존경한 나머지 죽은 뒤 이 천문대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소원을 풀었다고 전문 가이드가 귀띔해 주었다.
 
울루그베그와 세종대왕은 매우 공교롭게도 건국 시조의 손자이자 네 번째 왕이라는 점도 똑같다. 울루그베그는 티무르 제국의 건국 시조인 아미르 티무르의 손자이며 세종대왕은 태조 이성계의 손자다. 아미르 티무르와 이성계 모두 전설적인 무인 출신의 군주라는 사실도 공통분모를 이룬다. 아미르 티무르가 전투 도중 다리를 크게 다쳐 절름발이로 불렸는데, 이성계도 다리에 화살을 맞는 큰 부상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울루그베그의 아버지 샤 로흐가 문무를 겸비했으며 티무르 제국의 내란을 평정하고 즉위했듯이 세종대왕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도 무예와 학문이 모두 뛰어났으며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은 뒤 즉위한 점도 흡사하다.
 울루그베그가 세종대왕과의 결정적 차이점이라면 한글과 같은 문자를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 같은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