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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먹물들의 속물근성

나라 밖에서 중동 민주화 열풍과 역풍, 일본 대지진·원전 위기 소식으로 온 세상이 뒤덮여 있는 사이에 나라 안에선 속물적 외설사건들이 일일연속극처럼 대중의 관심을 이어가고 있다. 그것도 우리 사회의 최고엘리트 집단인 먹물들의 허위의식과 이중성이 발가벗겨진 속물근성이어서 수다와 가십을 드러내 놓고 즐기는 세태와 맞물려 간다.

상하이총영사관 스캔들, 장자연 자필편지논란, 신정아 자서전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포르노그래피다. 먹물들의 이상한 욕화가 스멀거린다.
린 헌트 미 펜실베니아대 역사학 교수는 포르노그래피를 정치적 무기라고 규정한다. 헌트는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외설성과 현대성의 기원>이란 저작에서 포르노그래피가 귀족집단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한 정치팸플릿이 하나의 장르로 정착돼 현재에 이르렀다고 분석하고 있다.

 

사람들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각기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곤 한다. 신정아 자서전을 두고는 명배우 리처드 위드미크의 브로드웨이 코미디와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러브스토리 소설 <키스 앤드 텔>(Kiss & Tell)의 전형을 연상하는 시선이 자못 많다.
유명 인물과 맺었던 밀월 관계를 언론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를 상징하는 ‘키스 앤드 텔’은 서구 사회에선 오래전에 상품화로 각광받을 정도다. 벌써부터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한 아류작품들이 쏟아지자 않을까 염려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신정아씨의 학력 위조와 자서전 출간은 본질적으로 동일선상의 행위로 볼 수도 있다. 가짜박사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과장됐거나 아예 사실과 다른 서술도 많을 것이라는 반응에서 감지된다. 학벌주의에 함몰되거나 거물들과 아는 사이가 자랑거리인 우리네 속물근성이 신정아씨의 돈줄이 되고 있는 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고 보면 신정아씨는 마침내 먹물들의 속물근성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셈이다. 대중은 미운 사람이 불행을 당하면 고소하게 여기는 ‘잘코사니’ 심정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우리 사회 엘리트 집단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복수극을 벌이려는 목적이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정아의 자서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단순히 책을 통한 폭로를 넘어서는 듯하다. 이 같은 형식성은 장자연 사건, 상하이스캔들도 흡사하다. 

                                                  


장자연 사건도 편지의 진위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권력을 빌미로 고질적인 성상납을 받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본질이다. 가짜 편지가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경찰의 수사발표에도 여전히 불신이 가라앉지 않고 있는 것은 수사결과에 대한 국민적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피해자는 있으나 가해자는 없는 희한한 사건이 장자연 사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상하이 스캔들은 공직 신분을 악용해 내연관계의 여성 이권브로커에게 불법적인 편의를 봐 준 게 사안의 고갱이 가운데 하나다. 상하이 스캔들은 기밀유출 여부나 외교문제를 떠나면 진실 논란은 여줄가리다. 공직기강과 도덕성 해이는 논란 여지가 거의 없어서다.

이들 세 사건의 또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엘리트집단이 공적 지위를 얼마나 사유화해 왔는지를 까발리는 것이다. 이는 진실 규명이나 개인의 부도덕성과는 별개의 차원이다.
특히 신정아씨의 경우 두남둘 여지는 없다. 이런 방식의 사적 폭로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배경 또한 요긴하다. 지식인과 엘리트계층의 속물적 근성은 곧잘 문화적 풍자의 안줏거리가 돼 왔다. 


그래서 작가 이외수의 속물론이 눈길을 잡는다. “속물근성은 인간의 품위를 가장 저급한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최악의 질병이다. 그놈의 속물근성이 인간을 개같이 보이도록 만들거나 벌레같이 보이도록 만든다. 속물근성은 가문과도 무관하고 학벌과도 무관하다.” 속물근성마저 정당화하고 미화함으로써 자기 변명하려는 지식인의 속물주의를 꼬집으며 가장 치열하게 고민했던 김수영 시인이 불현듯 떠오른다.
 

(내일신문 2011년 3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