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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

대기업에서 <논어> 열풍이 부는 진짜 이유



지난해 초반 이후 최근까지 대기업에서 <논어> 열풍이 불고 있는 건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몇 년 사이에 기업에서도 인문학 바람이 거센데다 동양 최고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논어>를 기업 임원들이 새삼 즐겨 읽는다고 이상할 건 없지만 유례 없는 현상이어서 눈길이 갈 수 밖에 없다. 

몇몇 대기업의 경우 전 사원이 <논어>를 읽고 토론했으며, 더욱 주목할 만한 일은 국내 최고 글로벌기업인 삼성 그룹의 수뇌부와 핵심간부들이 이 책으로 ‘열공’ 중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2년 6개월 만에 복원된 삼성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직원들이 <논어>를 읽는 것은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s)는 취지라고 한다. 하긴 조르주 클레망소 전 프랑스 총리 같은 지도자도 정국이 난마처럼 헝클어져 해법을 찾기 어려울 때면 홀로 골방에 틀어박혀 ‘그리스 고전’을 읽으며 ‘기본으로 돌아간다’고 했으니, 세대교체와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 삼성이 그럴 법도 하다.




삼성의 경우 창업주인 이병철 초대회장이 최고의 경영 바이블로 삼았던 책이 <논어>여서 이해는 간다. 이병철 회장은 이에 관해 <호암자전>(중앙M&B)에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가장 감명 받은 책 혹은 좌우에 두는 책을 들라면 서슴지 않고 <논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이다. 나의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만족한다. <논어>에는 내적 규범이 담겨 있다. 간결한 말 속에 사상과 체험이 응축되어 있어, 인간이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마음가짐을 알려 준다.”

한국기업 간부들이 수많은 고전 중에서 왜 갑자기 <논어>를 유행처럼 많이 찾는 걸까.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곰곰이 생각하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가 있긴 하다.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숭앙받는 시부사와 에이이치(1840~1931)의 책 <논어와 주판>(페이퍼로드)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무려 84년 전인 1927년 추세도 출판사가 시부사와의 강연내용을 편집해 첫 출간한 이후 일본에서 ‘비즈니스의 바이블’로 전해내려 온다. 

시부사와는 <논어>를 해석하면서 경제나 상업과 관련된 대목은 정통적인 관점과는 각도를 달리한다. 이를테면 송나라 주자학파의 영향을 받은 에도 시대 유학자들이 “부자는 인의도덕이 없기 때문에 어진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반드시 부귀의 염을 버려라”고 해석했던 부분을 시부사와는 “도리가 뒷받침되지 않은 부귀를 얻는 것보다 오히려 빈천한 편이 낫지만, 만약 올바른 도리를 다하고 얻은 부귀라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받아들인다. 시부사와는 ‘부귀와 도덕은 결코 모순관계가 아니어서 함께 추구할 수 있다’며 당시 부정적인 상인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꿔놓았던 것이다. 
옮긴이 노만수의 해제가 설명했듯이 ‘논어(도덕)와 주판(경제)’의 통일 즉 ‘도덕경제합일’이야말로 ‘진정한 논어’라는 게 시부사와의 생각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2006년 화제를 몰고 온 중국 CCTV 프로그램 <대국굴기>가
“한 손에는 논어, 한 손에는 주판을 든 시부사와의 유상(儒商)이야말로 일본을 굴기시킨 비결이고 중국 굴기의 출구는 <논어와 주판>에 있다”라고 극찬하는 바람에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게다가 세계 경영학의 비조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가 “기업의 목적이 부의 창출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여라는 것을 시부사와 에이이치에게 배웠다’고 고백해 전 세계적으로 한층 더 유명해졌다.

시부사와의 <논어> 해석과 실천이 더 큰 빛을 발하는 부분은 드러커가 상찬한 ‘사회적 기여’다. 

시부사와는 올바르게 번, 어마어마한 돈을 교육·의료·빈민구제 등의 공익·사회복지 사업으로 환원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가 되었다. 

이병철 회장이 <논어>를 늘 곁에 두었던 것도 시부사와의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이 회장이 고인이 된 터라 확인할 길은 없지만 맨주먹으로 최고의 삼성을 일궈내면서 일본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점을 미뤄보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시부사와는 제국호텔, 도쿄증권거래소, 기린맥주 등 500여 개의 기업 창립에 관여해 ‘일본 근대자본주의의 최고 영도자’ ‘일본 기업의 아버지’란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한국 재계에 <논어>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것은 2009년 11월 시부사와의 <논어와 주판>이 처음 번역돼 출간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시기적으로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에 앞서 <논어>만 수백 번 읽고 <논어경영학>(청림출판)이란 책까지 펴낸 민경조 코오롱건설 부회장 같은 마니아도 적지 않으나 그때까지 기업에서 열풍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일본에서 장기 베스트셀러인 <논어와 주판>의 한국어 번역판이 1년여 전에 처음 나온 것도 의아한 면이 없지 않다. 불과 보름 차이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판된 두 번역본(페이퍼로드의 <논어와 주판>과 사과나무의 <한손에는 논어를 한손에는 주판을>)이 지난해 여름 삼성경제연구소가 선정한 ‘CEO가 휴가 때 읽을 책 14선’에 포함되면서 관심도가 부쩍 높아졌다. 
특히 <한 손에는 논어를 한 손에는 주판을>의 경우 삼성경제연구소 추천도서에 선정된 뒤 그 전에 비해 몇 배의 판매량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경제연구소 추천도서는 ‘출판계의 마법사’로 일컬어질 만큼 위력이 지대하다. 출판사 경영자들은 삼성경제연구소가 특정 책의 판매량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문화권력 역할을 한다고 부러움 반 불만 반을 섞어 평가한다. 과거 MBC-TV 프로그램 ‘느낌표’의 위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문화관광부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등 권위를 지닌 다른 기관의 추천도서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게 한결같은 얘기다. 

이 연구소의 추천만 받으면 곧바로 책 표지의 홍보 띠지에 그 사실이 등장하는 게 이를 방증한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추천한 책 중에는 좋은 책도 있지만 대기업의 논리를 반영한 책들도 적지 않아 책 읽기의 다양성 측면에서 볼 때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기업인들의 <논어> 열풍은 이래저래 삼성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는 셈이다. 기업들의 이례적인 풍조이긴 해도 4대 성인의 한 분인 공자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 <논어>를 깊이 읽고 참뜻을 새겨서 나쁠 거야 없겠다. 
시부사와가 강조한 ‘도덕적 기업’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에 방점을 찍으려는 자기합리화의 방편이 아니길 기대할 따름이다. 때마침 ‘사회적 기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절에 너무나 당연한 ‘공자 같은 말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