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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월드컵 본선 4연속 진출

1997-10-20

 박찬호선수와 월드컵 축구대회 예선경기가 없었다면 올 한해를 어떻게 넘겼을까 한번쯤 자문해보지 않은 우리 국민은 없음직하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구석을 찾아봐도 실낱같은 희망조차 찾기 어려울 만큼 집단우울증에 시달려온 우리 국민에게 박찬호와 월드컵축구 대표팀은 구세주였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더구나 축구는 우리국민 전체의 자존심까지 걸린 스포츠다.월드컵 본선 4회 연속진출이라는 쾌거를 사실상 결정지은 우즈베키스탄과의 어웨이경기는 한국축구의 최대약점이었던 골 결정력 부재를 너무나 속시원하게 해소시켜 준 한판이기도 하다. 온 국민이 희열하는 모습을 보느라면 국민대통합의 청량제가 달리 없지 않나 싶다. 대리만족, 카타르시스 등 심리학에서 등장하는 효과들이 우리에겐 어쩌면 부수적인지도 모른다. 사실 월드컵 본선 4회 연속진출이라는 대과업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시아에서는 사상초유의 일이며 전세계적으로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독일, 잉글랜드 등 축구강국만이 디딜 수 있었던 고지다. 2002년 월드컵대회 개최국인 한국에게는 프랑스대회가 단순히 4년마다 열리는 세계축구 축제라는 차원을 넘는다.
 한국대표팀의 장쾌한 승리는 선수단, 축구협회, 국민적 성원의 합작품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차범근감독을 빼놓고 이 승리를 얘기하긴 어렵다. 그것도 컴퓨터를 이용한 과학적인 축구를 펼친 차감독의 공헌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한국축구는 무조건 「하면 된다」는 신념아래 정신력과 투지만 앞세워 왔던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말이다. 올해 초 그가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만 해도 지난해 아시아경기대회의 8강대열에서 탈락하는 참담한 상황의 한국축구를 과연 수렁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하는 반신반의가 적지 않았다. 명선수가 명지도자로 거듭나기 어렵다는 속설마저 있었다.
 이제 붉은 전사들과 우리 국민에겐 본선진출의 환희보다 「본선 1승, 16강 진출」이라는 더 큰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냄비체질로 표현되는 국민성으로 오를 수 있는 고지란 그곳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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