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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정동칼럼> 진퇴의 미학

1997-06-21

정치인은 이따금 배우에 비견되곤 한다. 양쪽 모두 연기를 필요로 하는 데다 인기를 먹고 사는 공통점을 지닌 속성 때문일 게다. 퇴장이 멋져야 명배우로 갈채를 얻듯 정치인도 끝맺음이 산뜻해야 평가받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지 오래다.

우리네 선인들은 안분과 더불어 「시중」을 공직 윤리와 처신의 기준으로 삼아 왔다. 시중은 나가야 할 때 나가고 물러가야 할 때 물러감을 일컫는다. 사실 나가는 것보다 물러날 때를 가리는 게 사뭇 어렵다. 오죽했으면 시경에까지 「시작을 잘못하는 사람은 없어도 끝맺음을 잘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경종을 울려 놨을까. 수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이 법언을 익히 들어오면서도 막상 자신에게 현실로 닥치면 여간해서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모양이다. 정치란 마약과 같아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끊기 어렵다고들 한다. 더구나 공적깨나 있고 성망마저 있다면 자리에서 떠나기란 더욱 힘들다. 상큼한 퇴진을 그토록 상찬하는 것은 그만큼 희소가치가 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 현대사에는 물러날 때를 잘못 잡아 참담한 비극을 맛보아야 했던 실례가 즐비하다. 대한민국의 국부가 되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논란 속에 재평가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그 첫 손가락에 꼽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역사의 비애다. 이 대통령은 오랜 미국 망명생활을 통해 민주주의를 체득했으면서도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재선으로 만족한 뒤 주위의 강권을 물리치고 마운트 버논의 옛집으로 돌아간 용기를 머리 속에서 지워버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박 대통령은 「나 아니면 안된다」는 아집을 떨쳐 버리지 못해 충격적인 최후를 맞아야 했다.

한국 정치의 비운은 권력무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모한 대권욕이 여전히 계속되는 데 있다. 야당의 두 총재가 이 대열에서 빠지지 않고 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여당에서는 아예 「잘못된 출발」부터 너무 많다.

우리 정치사가 진퇴에 실패한 정치인들로 점철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가뭄에 콩나듯 하지만 정구영같은 신선한 지도자를 예로 들어도 좋을 듯하다. 생애의 대부분을 변호사로 일했던 그가 65세의 나이에 정계로 나가던 때의 선택을 두고 평가는 엇갈린다. 그가 한껏 돋보이고 길이 기억될 수 있는 것은 물러섬이다. 쿠데타를 한 박정희를 도와 공화당 초대 총재를 지냈지만 3선개헌 반대가 먹혀들지 않자 미련없이 정계퇴진의 단안을 내렸다.

세계사에서 가장 인상깊고 극적인 퇴장이라면 아무래도 프랑스의 영웅적 지도자 드골을 빼놓을 수 없다. 총선에서 예상밖의 승리를 거머쥔 여세를 몰아 「지방자치제도와 상원의 개혁」을 위해 국민투표를 강행, 패배하자 아낌없이 귀거래사를 부르고 말았다. 『이로써 프랑스 역사의 한 장이 끝났다』는 명언을 남긴 채 콜롱베의 고향마을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그가 명배우란 별명까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엊그제 있은 신한국당 이홍구 고문의 대권포기 선언은 「물러섬의 미학」이 뭔지를 보여준 드문 용단이라 할 만하다. 그의 「나섬」에는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겠지만 때를 앎으로써 적어도 비난의 화살만은 면하게 됐다. 합종연횡이니 권력나눠먹기니 해 흙탕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보다야 사뭇 다른 세평을 낳고 있는 게 확연하다. 게다가 그가 현실정치에서 느낀 한계는 잔잔한 파문을 낳으면서 정치판을 다소나마 바꿀 수 있는 전기를 만들어 줬다. 진퇴를 칼로 물베기하듯 하는 우리 정치풍토에 경종을 울린 것만으로도 그의 역할은 빛난다.

진퇴문제를 놓고 애면글면하는 졸장부들이야 어디 정치판뿐인가. 우리 주위의 크고 작은 조직에서도 알량한 권력과 일신의 영달 때문에 물러남의 때를 놓치는 사례가 허다하다. 그들은 대개 통한과 회오의 눈물을 흘린 뒤에야 때늦음을 깨닫는다. 진퇴의 미학은 배움이 아니라 행동의 몫이라는 상식같은 진리가 요즘 부쩍 마음에 와 닿는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