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02-28

김대중 새 대통령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닮은 점이 많다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허버트 후버와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미국의 31대 대통령이자 루스벨트의 바로 전임자인 후버는 「실패한 대통령」의 상징처럼 돼 있다. 그는 사상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경제를 임기 시작 7개월만에 파국으로 몰아넣어 세계역사상 가장 먼저 대통령제를 도입한 미국에서 무능지도자의 표본으로 낙인이 찍혔다. 그가 현직에서 물러날 때 미국의 경제사정은 거의 정지된 상태였다. 현재의 한국 경제사정보다 더 나빴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미국 역사가들은 후버를 가장 많은 박수를 받으며 등장했다가 비난 또한 가장 많이 받으며 퇴장한 대통령으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취임 초기 90%대의 인기를 유지했던 김 전 대통령이 퇴임 무렵 한자리 숫자의 지지율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후버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철저한 개혁을 강조하고 실천하려 했던 점도 김 전 대통령과 같다.

그렇지만 후버는 지미 카터와 더불어 퇴임후의 활동을 더 평가받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전직 대통령은 이래야 한다는 표본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그는 58세로 퇴임한 뒤 90세까지 장수하면서 무려 30년동안 전직 대통령으로 정력적인 활동을 펼쳐 현직때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말끔히 씻었다. 끔찍했던 임기를 마친 직후 한동안 스탠퍼드대학에 세운 후버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 정부에서 유럽인들의 기근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기아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봉사했다.

참담한 실패를 맛보고 단임으로 물러난 카터도 후버 못지않게 국민과 국제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여생을 바쁘게 보내고 있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손수 목수가 돼 길거리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는 불우한 이웃들에게 집을 지어 주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카터센터를 설립한 뒤 나름대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금까지 고난의 늪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 왔다. 두 미국 대통령의 명예회복 노력은 뼈저린 실패를 만회하려는 의지와 국민에 대한 속죄의식이 어우러져 나온 작품이 아닌가 싶다.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온 김 전 대통령은 현직때 부정적인 측면에서 후버와 유사한 처지였지만 전직대통령으로서의 그의 처신도 눈여겨 보는 게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여기에 카터까지 벤치마킹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김 전 대통령은 이제 정치에서 완전히 은퇴한 뒤 조용히 여생을 보내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소한의 명예회복이 뒤따라야 개인은 물론 나라를 위해서도 불행이 덜어질 것 같다.

그게 아니라도 김 전 대통령은 지난 93년 취임사에서 『가진 사람에게 고통을 주겠다』고 굳게 약속했다가 못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은 고통을 주고 떠나게 된 사실을 평생동안 잊어선 안되며 잊혀지지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민심이 어디로 흘러갈지 장담하기도 어렵다. 실업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경제파국의 여파가 훨씬 실감나게 와닿기 시작하면 국민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격앙될지도 모른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김 전 대통령이 소외되고 의식주를 해결하기조차 힘든 이들을 몸으로 부딪쳐가며 돕고 멍든 가슴들을 보듬어 준다면 분노하던 마음들이 차츰 녹아들 게 틀림없다. 굳이 힘든 일이 아니라도 좋다. 국민 가운데는 꼴도 보기 싫으니 차라리 초야에 묻혀 조용하게 살기나 하라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게다.

거리에 나서면 달걀세례나 돌팔매질하려는 시민들이 없으란 법이 없을 것이다. 그걸 두려워해선 안된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체면이나 위상을 따질 문제는 아닌 듯하다. 김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분의 전직 대통령들도 마찬가지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감옥까지 갔으면 됐지 뭘 더하란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나온다면 더 할 말이 없다. <논설위원>


Posted by 김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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