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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이야기

전태일과 경향신문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돌베개·전태일기념사업회)은 전태일과 경향신문 이야기를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어 이채롭다. 그것도 드라마나 영화로 치면 클라이맥스로 돋움 닫는 대목에서 하이라이트로  언급된다. 

오프라인(종이신문)의 한정된 지면 때문에 ‘서재에서’ 칼럼에 생략했던 부분에는 때로는 가슴 아프고, 때로는 감격적인 장면이 적지 않다. 그 시작은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1970년 11월13일 분신, 산화하기 바로 한 달여 전인 10월7일부터다.
 






경향신문사  신문 게시판 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방금 나온 석간신문 한 부를 사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으로 달렸다. ‘인간시장’(평화시장 노동자들은 그곳을 이렇게 슬픈 이름으로 불렀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동회(전태일이 만든 평화시장 종업원 친목회) 회원들은 바라던 기사가 난 것을 확인하자 환호성을 터뜨리며 모두 얼싸안았다. 
그날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표제와  ‘소녀 등 2만여 명 혹사’  ‘거의 직업병…. 노동청 뒤늦게 고발키로’ ‘근로조건 영점...평화시장 피복공장’이라는 부제 아래 실렸던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이 어린 여자들이 좁은 방에서 하루 최고 16시간 동안이나 고된 일을 하며 보잘것없는 보수에 직업병까지 얻고 있어 근로기준법을 무색케 하고 있다. 이들은 서울 시내 청계천 5~6가 사이에 있는 평화시장 내 각종 기성복 가공업에 종사하는 미싱사, 재단사, 조수 등 2만7천여 명으로 노동청은 7일 실태조사에 나서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업체는 전부 고발키로 했다. 노동청은 이밖에 5백 여 개나 되는 서울 시내 기성복 가공업소도  근로자의 실태를 조사키로 했다.

평화시장 내의 피복가공 공장은 4백여 개나 되는데, 이들 대부분의 작업장은 건평 2평 정도에 재봉틀 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작업장은 비좁다. 더구나 작업장은 1층을 아래위 둘로 나눠 천장의 높이가 겨우 1.6 정도 밖에 안 돼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인데 이와 같이 좁고 낮은 방에 작업을 위해 너무 밝은 조명을 해 이들 대부분은 밝은 햇빛 아래서는 눈을 똑바로 뜰 수 없다고 노동청에 진정까지 해왔다.

이들에 의하면 이런 환경 속에서 하루 13~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첫째·셋째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휴일에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 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조차 못할 형편이라는 것이다.

 
특히 13세 정도의 어린 소녀들이 대부분인 조수의 경우 이미 4~5년 전부터 받는 3천 원의 월급을 현재까지 그대로 받고 있다. 이밖에도 이들은 옷감에서 나는 먼지가 가득한 방안에서 하루 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 있어 성장기에 있는 소녀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처럼 근로조건이 나쁜 곳에서 일하는데도 감독관청인 노동청에서 매년 실시하는 건강진단은 대부분 한 번도 받은 일이 없으며, 지난 69년 가을 건강진단이 나왔으나 공장 측은 1개 공장 종업원 2~3명씩만 진단을 받게 한 후 모두가 받은 것처럼 했다는 것이다.’


지은이 조영래는 이 짤막한 몇 줄의 기사가 어째서 평화시장의 젊은 재단사들을 기쁨에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일까 하고 물음표를 던지며 감동적인 장면을 이어간다.


 
삼동회 회원들은 경향신문사로 달려가서 신문 300부를 샀다. 가진 돈이 없어서 우선 회원인 최종인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서 신문사 측에 담보로 맡겨놓고 신문 대금은 신문을 팔아서 갚기로 했다. 그렇게 산 신문 300부를 들고 그들은 다시 평화시장으로 달려갔다. 큰 모조지를 잘라서 그 위에다 붉은 글씨로 ‘평화시장 기사특보’라고 쓴 단장을 만들어 그것을 모두 어깨에다 두르고 시장 내 이 건물 저 건물을 쫒아 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돈을 받고 팔기도 하였고 어린 시다들에게는 무료로 주기도 하였다.

신문 한 장이면 그때 값으로 20원, 노동자들이 신문을 사서 보는 일이란 드물었는데 그날 신문 300부는 삽시간에 다 팔려버렸다.
어떤 노동자들은 신문을 나눠 주고 있는 삼동회 회원들을 보고 “수고가 많다”고 말하면서 100원씩 또는 200원씩을 신문 값으로 내기도 했는데 신문 한 장 값으로 1000원을 내놓은 노동자도 한 명 있었다.

그날 저녁의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군데군데에 노동자들이 몰려서서 신문 한 장을 두고 서로 어깨 너머로 읽으면서 웅성거렸다. 평화시장의 오랜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만 받아온 그들, 고층건물이 곳곳에 솟아 있는 수도 서울에 살면서도, 바로 창문만 열면 삼일고가도로(지금은 철거돼 청계천으로 복원됐다)를 호기롭게 달리는 자가용차의 화려한 행렬을 볼 수 있으면서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햇빛조차 주어지지 않는 먼지구덩이 속에서 온종일 꼿꼿이 앉아서 손발이 닳도록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왔던 그들, 굶주림과 질병과 멸시와 천대와 그러고서도 세상의 철저한 무관심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던 그들, 좋은 것은 모두 남들의 것, 더욱이 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바로 그들이, 바로 그 신문에 하찮은 쓰레기 인간들인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이라도 하듯 실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깊은 지층 속을 숨죽여 흘러가던 용암이 분출구를 만나 지맥(地脈)을 찢고 드디어 터져오르는 듯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통곡과 탄식과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도 인간인가 보다. 우리 문제도 신문에 날 때가 있나보다...”

이러한 자각이 노동자들의 잠자던 가슴을 뒤흔들며 평화시장 일대에 퍼져 나갔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각 작업장 비좁은 먼지구덩이 속의 화제는 모두 ‘평화시장의 기사특보’ 이야기였다. 많은 노동자들이 삼동회 회원들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협력하며 싸울 것을 다짐했다.


이어 저자 조영래는 곧바로 언론의 실상을 신랄하게 꼬집는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외국 여자가 리처드 버튼이라는 외국 남자와 몇 번 결혼하고 몇 번 이혼했는가를 사람들은 안다. 신문에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시장의 열세 살짜리 여공들이 하루 몇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가를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신문에 안 나기 때문이다. 재클린 오나시스라는 외국 여자가 승마를 하다가 발가락이 삐었다 한다면 사람들은 늦어도 바로 다음날까지는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신속 정확한’ 신문보도 덕분이다. 
그러나 강원도 어떤 탄광에서 갱도가 무너져 광부들이 매몰되어 죽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반드시 알지 못한다. 신문에 나지 않거나, 나더라도 거의 눈에 띄지 않을만한 구석자리에 작은 기사로 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신문이 것이다. 우리 사회가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에 비틀거린다면, 우리 사회의 신문 역시 강한 자, 부유한 자의 속성에 비틀거리고 있다.

 
10월 7일의 경향신문 보도가 있는 이래로 전태일의 지도력은 매우 강화되어 있었고, 친구들은 그의 주장을 예전보다 더 존중하게끔 되어 있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제의한 10·20데모 계획은 결행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데모할 때 외칠 구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일요일은 쉬게 하라!” “16시간 작업에 일당 100원이 웬 말이냐!” 등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신문 보도가 있던 날부터 평화시장 주식회사에서는 노동청에 진정을 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평화시장 노동자 문제가 신문 보도로까지 발전했을 때 전태일은 불의한 억압의 손길에 강요되었던 침묵은 반드시 깨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여기서 전태일은 자신의 죽음이 어떤 성과를 거두리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던 것 같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이 무렵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간간이 지나가는 말처럼 “나 하나 죽으면 뭔가 달라지겠지...”하고 말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근로기준법이 있어서 노동자들이 살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이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참상은 더욱더 숨겨지고 전태일의 가슴은 더욱 분노로 터졌다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우연히 들은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내용의 발견은 실로 그의 운명을 좌우한 중대사건의 하나였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향상시킴...을 목적으로”하는 법이라고 그 법 제1조에 못 박혀 있었다.

칼럼에서도 썼듯이 이 책의 지은이 조영래는 탁월한 인권변호사이자 사회개혁가였다. 
한동안 익명으로 남아 있던 저자의 이름을 처음 세상에 공개하고,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갔던 장기표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비유가 흥미롭다.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듯 조영래가 있었기에 전태일의 뜻을 더 힘 있게 펼칠 수 있었다.’ 

조영래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신신당부한 전태일의 뜻을 올곧게 실천하는 촉매가 된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큰 획을 그은 전태일 분신 40주년을 맞아 이 평전을 다시 읽고 그의 산화 정신을 되새기다가 언론의 사명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