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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분신 40년, 되돌아보는 ‘인간 선언’




당대의 고전 반열에 오른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돌베개·전태일기념사업회)은 ‘노동운동의 불꽃’ 전태일과 경향신문 이야기를 매우 극적으로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시작은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1970년 11월13일 분신자살하기 바로 한 달여 전인 10월7일의 일이다.
서울 소공동 경향신문 본사 앞에서 가슴을 조이며 기다리던 전태일은 방금 나온 석간신문 한 부를 사들고 미친 듯이 평화시장으로 달렸다. ‘인간시장’(평화시장 노동자들은 그곳을 이렇게 슬픈 이름으로 불렀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동회(전태일이 만든 평화시장 종업원 친목회) 회원들은 바라던 기사가 난 것을 확인하자 환호성을 터뜨리며 모두 얼싸안았다.
그날 경향신문에는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큰 제목과 ‘소녀 등 2만여명 혹사’ ‘근로조건 영점…평화시장 피복공장’이라는 부제의 기사가 사회면 머리에 실렸다. 지은이 조영래는 몇 줄의 기사가 어째서 평화시장의 젊은 재단사들을 기쁨에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일까 하는 물음표를 던지며 당시 상황을 벅찬 가슴으로 전한다.
삼동회 회원들은 경향신문사로 달려가서 신문 300부를 샀다. 가진 돈이 없어서 우선 회원인 최종인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풀어서 신문사 측에 담보로 맡겨놓고 신문 대금은 신문을 팔아서 갚기로 했다. 그렇게 산 신문 300부를 들고 그들은 다시 평화시장으로 달려갔다. 큰 모조지를 잘라서 붉은 글씨로 ‘평화시장 기사특보’라고 쓴 단장을 만들어 어깨에다 두르고 시장 내 이 건물 저 건물을 쫓아다니며 신문을 돌렸다. 삽시간에 다 팔린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부에 20원 하는 신문 값으로 1000원을 내놓은 노동자도 있었다.





신문이 높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바로 그 신문에 하찮은 쓰레기 인간들인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이 고발이라도 하듯 실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깊은 지층 속을 숨 죽여 흘러가던 용암이 분출구를 만나 지맥을 찢고 드디어 터져 오르는 듯 오랫동안 쌓이고 쌓였던 통곡과 탄식과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고 저자는 표현했다.
“우리도 인간인가 보다. 우리 문제도 신문에 날 때가 있나 보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신문 역시 강한 자, 부유한 자의 속성에 비틀거리고 있음을 고발하는 대목에서는 폐부가 찔린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평화시장 노동자 문제가 신문 보도로까지 발전했을 때 전태일은 불의한 억압의 손길에 강요되었던 침묵은 반드시 깨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여기서 전태일은 자신의 죽음이 어떤 성과를 거두리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던 것 같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지은이는 탁월한 인권변호사이자 사회개혁가였다. 한동안 익명으로 남아 있던 저자의 이름을 처음 세상에 공개하고,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갔던 장기표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비유가 흥미롭다.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듯 조영래가 있었기에 전태일의 뜻을 더 힘 있게 펼칠 수 있었다.’ 조영래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신신당부한 전태일의 뜻을 올곧게 실천하는 촉매가 된 것이다.
<전태일 평전>에서는 단순한 투사의 얼굴이 아니라 정으로 뭉쳐진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거대한 획을 그은 전태일 분신과 그 40주년을 맞는 지금, 이 평전은 그의 산화 정신을 새삼 찾아보게 한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이 죽어가면서 남긴 말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복음으로 전해오고 있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의 죽음을 ‘인간 선언’이라 부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