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재에서

가장 숭고한 복수… 용서

2009.11.20 17:36 

 
“내 아들을 죽인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요? 이해하라고요?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지 마세요. 그건 가장 사치스러운 충고이니까.” 전도연이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영화 <밀양>에 나오는 신애의 절규는 감정을 공유할 수는 있어도 아픔을 대신 짊어지긴 어렵다는 걸 실감나게 보여준다. 기독교의 회개와 용서를 다루고 있는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나 이를 각색한 <밀양>은 모두 우리가 용서하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귀감이다.

2006년 10월2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니켈마인스라는 작은 시골마을의 아미쉬 원룸 스쿨에 우유배달원이 침입해 수업 중이던 여학생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5명이 목숨을 잃고 5명은 중상을 입은 이 충격적인 사건은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놨다. ‘신이 자신을 버렸다’는 환상에 빠진 한 감리교도가 저지른 이 사건에서 진정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피붙이를 잃은 유족과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보여준 의연한 대처였다. 이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도 현장에서 자살한 범인의 가족을 찾아 위로하며 용서의 뜻을 전했다. 범인의 장례식 조문객 가운데 절반이 아미쉬여서 미국 사회가 더욱 놀랐다. 더구나 당시 9·11 테러사건을 보복으로 응답한 부시 행정부의 대처와 사뭇 비교되는 바람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형폐지 운동을 벌이고 있는 미국 변호사 레이첼 킹이 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서>(샨티)에서는 영화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나 미국 실화와 흡사한 전율을 받게 된다. 살인자를 용서하고 사형제 폐지에 앞장선 피해 유가족 10인의 감동적인 실화를 담고 있어서다. 보복과 증오 대신 용서와 사랑을 택한 이들의 진솔하고 절절한 고백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외경스럽다.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했다. 하나같이 살인범과 화해를 시도했고, 어떤 이는 살인범이 사형을 선고받지 않도록 변호까지 자청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성자 아니면 정신병자로 여기지만 실제론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저 엄청난 용기와 신념을 지닌 보통사람들일 뿐이다.

이들은 “사형제도 역시 복수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미국은 유엔인권협약에 조인했지만 비준하지 않았고, 서방사회에서 사형제도를 존속시키고 있는 유일한 국가”라는 비판과 함께.

지능지수 68의 제인스 버나드 캠벨에게 사랑하는 딸 수잔을 잃은 목사 아버지는 “생사 결정은 인간의 권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역설한다.

피자 배달원인 아들을 불량 청소년들의 총격으로 잃은 무슬림 아버지 아짐 카미사는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들 이름의 재단을 설립해 청소년범죄 예방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가해 청소년들을 교화해 이 활동에 참여시키는 장면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가해자를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들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파고든다.

아무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게다. 인간의 능력 가운데 가장 취약한 부분이 용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형으로는 폭력을 이길 수 없다. 정신의학자 토머스 사스도 이렇게 갈파했다. “멍청한 사람은 용서하지도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순진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어버린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그러고 보면 용서는 가장 숭고한 복수가 될 수 있다.

사실상 사형 폐지국인 우리나라도 명실상부하게 사형제 완전폐지를 통해 진정한 문명국의 대열에 합류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때마침 헌법재판관들이 사형제 폐지 헌법소원 결정을 앞두고 영화 <집행자>를 단체 관람할 예정이라는 풍문도 들려오니, 길조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