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적(餘滴)

[여적]기밀 누설

입력 : 2008-01-11 18:34:40

모든 상황이 종료된 뒤 달빛이 교교한 밤이 찾아온다. 이오니아해에 떠있는 요트 위에서 제임스 본드는 본드 걸 멜리나의 가운을 벗기기 시작한다. 멜리나는 본드를 그윽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나지막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인다. “For Your Eyes Only, Darling!” 그리고 나서 두 남녀는 달빛이 은은한 바닷속에서 더없이 달콤한 수영을 만끽한다. 007시리즈 열두 번째 영화 ‘유어 아이스 온리’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 제목을 직역하면 ‘당신의 눈만을 위하여’다. 당신만 보라는 뜻이다. 본드에게 첫 임무가 주어진 기밀 서류에도 이와 똑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서류의 들머리나 봉투에 이렇게 쓰여 있으면 지정된 수신자가 직접 뜯어 혼자서만 보라는 의미다.

국가기밀은 그 은밀성만큼이나 황당한 일화도 적지 않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이따금 웃겼다는 얘기에 이런 것이 있다. “한 소련 사람이 ‘흐루시초프는 바보다. 흐루시초프는 바보다’ 하며 크렘린궁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는 즉각 체포돼 23년형을 받았다. 3년은 당 서기장을 모욕한 죄이고, 나머지 20년은 국가기밀 누설죄였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국가기밀 누설죄로 감옥에서 죽었다는 일화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옥사설은 일제(日帝)가 날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밀일수록 유출 유혹을 느끼게 마련인 게 인간 심리인가 보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 전날 김만복 국가정보원장이 평양을 방문해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나눈 대화 내용이 담긴 기밀문서가 언론에 유출된 것은 내부자의 고의성이 짙다고 한다.

기밀 누설에 대한 도덕적 정당성은 보통 네 가지의 경우에 인정된다. 어떤 사람에게 옳은 행위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도 옳은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도덕원리에 관해 일치하지 않는다. 개인들은 때때로 상충되는 도덕적 판단을 동등하게 정당화한다. 국가적 이기주의에 악용된다.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정보가 지나치게 통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국가기밀을 가장 소중하게 다뤄야 할 최고정보기관이 이를 소홀히 하는 것은 도덕적 해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들어 잇달아 과다 노출 논란을 빚어온 국정원이다.

'여적(餘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적]중앙은행 총재  (0) 2008.01.25
[여적]여류기사 9단  (0) 2008.01.18
[여적]흔적 지우기  (0) 2008.01.04
[여적]익명의 미학  (0) 2007.12.28
[여적] 따뜻한 시장경제  (0) 2007.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