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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레인메이커

입력 : 2008-11-21 17:50:19수정 : 2008-11-21 17:50:25

백인들이 점령하기 전 북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서는 지독한 가뭄이 찾아오면 곡식을 가꾸고 목축을 하며 평화롭게 지내던 부족들은 손에 무기를 든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바닥을 드러내는 웅덩이와 샘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다. 가뭄에다 싸움으로 이중 고통을 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으면 어디선가 홀연히 단비를 내리게 하는 ‘레인메이커’가 나타난다. 레인메이커는 간절한 기도로 비를 내려 샘에 물을 가득 채운다. 다투던 부족들은 자연스레 무기를 놓고 화해하며 생업으로 돌아간다. 실제로는 비를 내리게 하는 주술사나 기우사(祈雨師)가 레인메이커다.

살인적인 가뭄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북부 칼라하리 사막 지역에는 조금 다른 레인메이커 얘기가 전해진다. 하는 일마다 사람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생기면 그를 레인메이커라고 부른다.

언제부턴가 백인 중심의 미국사회는 자선사업가나 기부자를 레인메이커라고 일컫게 됐다. 원주민을 학살하고 땅을 차지한 백인들이 원주민의 고귀한 정신을 받드는 것은 아이러니다. 요즘 들어 레인메이커는 보다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긴 하다. 조직에 매출 증대를 가져와 고액의 이익을 창출하는 사람이나 부유한 고객의 소송을 맡아 돈만을 좇는 변호사를 지칭하기도 한다.

미국 부자의 선행은 자기만족과 행복을 얻으려는 심리적 기제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부자들의 기부 선행에는 자기보호본능이 작용한다는 견해도 있다. 상속세 철폐를 거부하거나 기꺼이 세금 많이 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저소득층의 불만을 조금이나마 소화하려는 고도의 계산된 전략인 셈이다. 이를테면 널리 알려진 경주 최부자 집안의 자기절제 처세술이나 그 옛날 호남 부호들이 대문 밖에 볏단을 내놓아 가난한 이들이 부담 없이 가져가게 하는 지혜와 같은 것이다. 일종의 이기적 이타주의다.

한국의 레인메이커는 외려 단비가 필요한 김밥 할머니, 콩나물 할머니, 삯바느질 할머니, 폐품 할아버지들이 더 많다. 최근엔 연예인이나 체육인들의 기부선행이 늘어나자 악플로 시비를 거는 못난이들이 나타나긴 하지만. 말 많은 종합부동산세도 ‘레인메이커의 슬기’라는 거울에 비춰보면 어렵잖게 해답이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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