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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자본주의는 사탄의 맷돌 ‘자기조정 시장’은 없다”

입력 : 2009-07-10 17:46:02수정 : 2009-07-10 22:59:28

ㆍ국가가 개입…진정한 경제는 인간의 ‘자유’에 토대 둬야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 | 길

진정으로 바른 생각은 위기를 맞아서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요즘 들어 새삼 주목받는 비주류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그렇다.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기존 시장경제에 대한 회의가 피어오르자 많은 이들이 오랫동안 서가에서 먼지만 잔뜩 머금고 있던 폴라니의 노작을 다시 꺼내들기 시작했다.

폴라니의 대표작이 1991년 <거대한 변환>(원제 The Great Transformation)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뒤 곧 절판됐으나 개정판이나 새로운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던 것도 수요가 많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영문판 해제를 쓴 프레드 블록의 말대로 냉전기간 자본주의 옹호자와 소련식 사회주의 옹호자들 사이에 지극히 양극화된 논쟁에서 폴라니의 복잡하고도 섬세한 논리가 설 자리를 찾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거대한 전환>은 어느덧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존 메이나드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법·입법·자유>와 <노예의 길>에 버금가는 역작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칼 폴라니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묘사하기 위해 차용한 '사탄의 맷돌(satanic mill)'이란 용어는 윌리엄 블레이크가 시 '저 옛날 그분들의 발자취가'에서 쓴 표현이다. 사탄의 맷돌은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장착해 1769년에 세운 '알비온 밀가루 공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공장은 블레이크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이 공장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제분업자들이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1791년 전소됐다. 당시 화재를 묘사한 그림 중에는 불길을 공장 위에 올라앉은 악마로 그린 것도 있었다고 한다. 사진은 돈과 기계에 얽매인 현대사회를 풍자한 찰리 채플린 감독·주연의 1936년 영화 <모던 타임스>의 장면들.


폴라니는 이 책에서 ‘자기조정 시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유토피아’라고 일축한다. 그런 제도는 잠시도 존재할 수 없으며, 만에 하나 실현될 경우라도 사회를 이루는 인간과 자연은 아예 씨를 말려버리게 돼 있다는 것이다. ‘자기조정 시장’은 오로지 시장가격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경제다. 그는 애덤 스미스가 언급한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원시시대부터 존재했다는 가설에도 반기를 든다. 폴라니는 스미스가 <국부론>을 쓴 1776년을 자본주의의 원년으로 보지 않는다. 1834년의 스피넘랜드법(빈민구제법)의 폐지에 따라 인민들이 먹고 살 길은 임금노동으로만 가능하게 되고 노동시장의 형성과 함께 ‘자기조정 시장’이 완성돼 현재의 자본주의가 도래했다고 여긴다.

그는 목가적인 공동체를 해체하고 만 시장경제를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빌려 ‘사탄의 맷돌’이라고 흥미롭게 표현한다. ‘사탄의 맷돌’은 산업혁명이 인간을 통째로 갈아서 바닥 모를 퇴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는 공포의 상징이다. 폴라니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시장 스스로 자유시장 영역을 만들지 않았으며 국가가 시장을 구축해왔다고 주장한다. 물론 국가의 개입이 해결책은 아니다. 국가, 정부, 시장이 아닌 ‘사회’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게 폴라니의 핵심사상 가운데 하나다. ‘사회’에는 생활협동조합, 노동조합,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집단이 포함된다.

그의 또 다른 핵심 사상은 노동·토지·화폐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 토지, 화폐는 인위적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 재화뿐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도 교환하는 시장이 존재한다. 그렇더라도 이를 시장에서 ‘자유방임’으로 거래하면 곧바로 재앙이 시작된다는 게 폴라니의 견해다. 노동, 토지, 화폐를 상품으로 묘사하는 것은 전적으로 허구임에도 현실에서 이들이 거래되는 시장은 허구의 도움을 얻어 조직된다. 그는 진정한 경제가 인간의 ‘자유’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65년 전인 1944년 초판이 나온 <거대한 전환>이 지금 조명을 받는 이유는 좌우의 이념에서 벗어나 치밀한 비판적 접근을 거쳐 독특한 해법을 펼쳐 보였기 때문이다. 폴라니는 하이에크나 마르크스를 모두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경제 현상분석을 통해 세기가 바뀐 오늘날에도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위력을 발휘한다. 케인스주의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도 들리는 가운데서 폴라니가 시장경제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완벽한 대안을 제시했다기보다 새로운 길을 찾는 논의의 실마리를 던진 것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듯하다.

옮긴이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꼼꼼한 번역과 세밀한 주석, 친절한 해제가 책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추가된 해설만 100쪽이 넘는다. 홍 위원은 국내 최고의 폴라니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3만8000원


▲ 칼 폴라니는 누군가

평생을 인간의 고통 근원에 대해 고민
시장 만능주의에 맞선 비주류 경제학자


헝가리 출신 유대계 경제학자인 칼 폴라니(1886~1964)는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그리 널리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다. 그의 경제이론은 애덤 스미스에서 출발해 알프레드 마셜에 이르러 체계적인 틀을 갖춘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체계화된 사회주의 경제학과도 차별성을 지니고 있어서다. 그렇지만 경제 자체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간과하기 힘들다. 시장, 상품을 비롯해 경제학적 개념의 기원과 인간의 ‘살림살이’로서 경제활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타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선택을 중시했다. 그가 평생 고민했던 것은 인간이 당하고 있는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였다. 그 고통은 경제적 궁핍만이 아니었다. 그의 이론은 경제 민주주의 운동의 기반이 됐다.

빈의 저명한 경제주간지 <오스트리아 대중경제>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부터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그의 수제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도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시장 만능주의에 맞섰다. 그후 나치의 위험을 피해 영국으로 건너가 옥스퍼드대와 런던대에서 강의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교수 자리를 얻었으나 아내 일로나 두크즈네카의 공산주의 전력 때문에 입국 비자를 얻지 못해 캐나다에 살면서 ‘방문교수’로 활동했다.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한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그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공정, 호혜에 대한 폴라니의 생각은 월러스틴의 ‘세계체제이론’과 스티글리츠의 ‘공정무역’ 개념에 접목됐다. 국내에 번역된 주요 저작으로는 <거대한 전환> 외에 <초기제국에 있어서의 교역과 시장>(민음사), <사람의 살림살이>(풀빛)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