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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동고동락

입력 : 2009-08-21 17:49:31수정 : 2009-08-21 17:49:32

독보적인 선승(禪僧) 가운데 한 분이었던 만공 스님의 입적 일화는 특기할 만하다. 그는 거울 앞에서 ‘이 사람 만공, 자네와 나는 70여년을 동고동락(同苦同樂)했는데 오늘이 마지막일세. 그동안 욕봤네’하고선 눈을 감았다고 한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함께 나눈다는 동고동락은 바늘과 실의 관계다. 말의 탄생 설화부터 그렇다. 옛적에 동고와 동락이란 사람이 얼마나 친하고 살갑게 지내는지 주위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무척 많이 샀다. 동고와 동락은 같이 살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뒤부터 둘이 떨어지지 않고 같이 지내는 걸 보고 사람들은 동고와 동락 같다고 했다.

영화감독 박찬욱의 가훈은 ‘아니면 말고’라고 한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으면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최근에 추가된 가훈 ‘산 사람이라도 살자!’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 알듯말듯한 가훈에 대해 박찬욱은 이렇게 덧붙인다. ‘동고동락’ 가운데 ‘동락’은 해도 ‘동고’는 하지 말자는 뜻이다.

‘동고동락’ 중에서 ‘동락’을 떼버린 인물로는 중국 명나라 초대 황제 주원장이 단연 손꼽힌다. 원나라 왕조를 몽골로 몰아내고 한족 왕조를 회복시킨 주원장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측근들 대부분을 숙청해 버렸다. 이때 목숨을 잃은 개국공신이 2만명에 달한다. 참혹한 비극을 감행했던 까닭은 아들에게 확고한 황제의 지휘권을 물려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큰 아들이 급사하는 바람에 손자에게 황위를 물려주게 됐고 황위 계승자가 어려 숙청작업은 더욱 가혹해졌다. 주원장이 만년에 고독하게 살았던 것도 동락을 몰랐기 때문이다. 부하들과 끝까지 동고동락을 했으며 소득을 기여도에 따라 철저하게 나누었던 알렉산더나 칭기즈칸은 차원이 달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 “그 분은 동고는 돼도, 동락은 하기 어려운 분”이라는 위트 있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87년 대선 직전의 일이었다고 추억한 이낙연 민주당 의원의 전언이다. ‘3김시대’는 마감했지만, 50년 넘게 한국 현대사를 풍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가 진정으로 화해하며 동고와 더불어 동락도 나눈다면 사자성어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신세는 면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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