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정선의 ‘진경산수화’ 실제 경치와 닮지 않았다

입력 : 2010-06-04 17:47:33수정 : 2010-06-05 01:11:15

ㆍ김홍도 ‘카메라 옵스쿠라’와 달리 실제 경치에 ‘선경’ 의미 부여 과장
ㆍ조선후기 지도의 회화풍에 큰 영향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이태호 | 생각의나무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성긴 숲 사이로 둥근 달이 소슬하게 떠 있다. 그 옆으로 개울물이 졸졸거리며 외려 적막감을 더해준다. 달밤이 주는 정취를 독특하게 담아낸 단원 김홍도의 ‘소림명월도’(疏林明月圖)는 시리도록 은은하다.

김홍도와 쌍벽을 이루는 겸재 정선의 금강산 비경 ‘금강전도’(金剛全圖)와 비 온 뒤의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역시 ‘진경산수화’의 진면목을 뽐낸다.

이렇듯 진경산수화는 성리학의 굴레와 중국풍의 관념 산수에서 벗어나 우리 땅의 현실미를 추구해 한국회화사의 꽃으로 불린다.

미술사가인 이태호 명지대 교수의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생각의나무)는 30여년간 발품을 팔아 진경산수화와 실제 절경을 비교하며 남다른 관점을 던져준다. 그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가 세계미술사를 장식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평가한다. 서양 현대미술의 아버지라는 폴 세잔의 풍경화와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저울질하기도 한다. 특히 정선의 금강산 전경도는 뚜렷한 선례를 찾을 수 없는 독창성을 지녔다고 여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와 송석원 길에서 찍은 인왕산 실경. ‘인왕제색도’는 75세 노인이 그렸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개가 넘치는 겸재의 대표작이다. ‘인왕제색도’는 겸재의 작품 중 실경과 가장 닮은 그림으로 꼽히지만, 이조차 실제 사진과 비교하면 좌우를 상당히 단축했음을 알 수 있다. | 생각의나무 제공


우리 산천을 직접 발로 밟고 눈으로 보기 전에는 산수화를 그리지 않았던 정선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진경산수화는 ‘인왕제색도’를 제외하면 실경과 닮지 않았다는 점을 눈 밝은 지은이가 밝혀낸다. 이는 정선이 ‘참된 경치’라는 뜻의 ‘진경’(眞景)에 신선경이나 이상향이라는 ‘선경’(仙境)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실경을 과장하는 변형방식의 ‘박연폭도’(朴淵瀑圖)도 흡사하지만 또 다른 특색을 드러낸다.

일일이 현장을 확인한 결과, 지은이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두 가지 유형으로 파악한다. 실경을 닮게 그리려 사생에 충실한 작가군과 정선처럼 변형을 모색한 작가들로 뚜렷이 구분하고 있다.

정선과 달리 현재 심사정, 진재 김윤겸,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 등은 실경 현장을 닮게 그리려 애쓴 화가들이다. 서양화법에 익숙했다는 김홍도의 진경 작품 속 현장에 실제로 서 보면 마치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라고 한다. 김홍도의 진가는 ‘소림명월도’처럼 평범한 일상의 풍경으로까지 소재를 확대했다는 데 있다.

일반인들에게 낯익지 않은 김윤겸, 지우재 정수영, 설탄 한시각, 동회 신익성의 작품 세계도 별도의 장을 배정해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금강산 작가가 겸재 정선이라면, 20세기에는 ‘기억’과 ‘감격’으로 금강산에 몰두했던 소정 변관식을 내세운다. 변관식마저 금강산을 그리지 않았거나 아예 그가 없었다면 분단사 50년 가운데 금강산은 남쪽 문화사에서 자취조차 찾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

김홍도의 ‘소림명월도’. 전경에 몇 그루의 잡목을 배치하고 그 사이로 들어온 보름달을 그렸다.


저자는 조선 후기의 회화식 지도가 정선이 완성한 진경산수화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발달했다고 해석한다. 조선시대 지도의 꽃이자 한국 고지도사의 위대한 결실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가 회화적 느낌을 주는 것은 김정호가 고안한 산맥의 흐름과 주요 산 표현 때문이다. 김정호의 도식화 방식은 다른 나라 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조선지도의 독창성이라고 자리매김한다.

선조의 부마인 문인화가 신익성이 1640년쯤 그린 두물머리의 ‘백운루도’(白雲樓圖)가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첫 실경 그림이라 추정한 것도 지은이가 처음이다. 고려시대 이녕이 그렸다는 ‘예성강도’(禮成江圖) 등이 기록에 전해지지만 현존하는 작품이 아직 알려진 게 없다.

앞서 나온 지은이의 책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를 즐긴 독자라면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유홍준의 <나의 우리문화유산 답사기>를 연상케 하는 발품 수작이지만 그와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진경산수화 150점과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을 나란히 실어 둘을 견주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림 이야기를 그림처럼 유려하게 터치한 글맛도 소담스럽다. 3만원